분실 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고선경
그녀는 젖은 우산을 터는 사이 할머니가 되었다
어느 날에는 현실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였다
그의 원룸 냉장고에는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그는 그 사실을 대체로 잊고 지낸다
그녀는 자신이 늙어 버렸음을 매 순간 느낀다
현실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건 짐작일 뿐이고
올겨울 딸기는 달지 않고 시큼했다
젖은 손으로 딸기를 집어 먹는 그녀를 그가 빤히 바라보았다
내 입술 쪼글쪼글하지요?
그녀는 새하얀 손수건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려 닦았다
그 순간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고 태어나기도 전에 할머니를 여읜 자신이 그간 이를 어떻게 잊고 살았는지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손수건은 몇 년째 그녀의 이곳저곳을 닦는 데 쓰이고 있지만 여전히 새하얗다
그의 원룸에서 맞는 몇 번째 겨울 아침일까?
그녀는 상쾌한 기분으로 혼자 밖을 나선다 경쾌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종종걸음 같다
서점에 가면 여기저기서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 육아 현실 공감 현실 내 집 마련
그녀는 왠지 가슴이 활짝 펴진다
그때 문득 그가 있는 원룸 냉장고에서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툭하고 떨어진다
—계간 《시결》 202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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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경 / 1997년 안양 출생.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