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여수의 한 중학교 수능시험장.
긴장한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 있으며 영어듣기평가가 시작되고, 학생들은 집중해서 듣기 시작한다.
수능시험이 모두 끝나고, 웃거나 울거나 한숨을 쉬거나 각가지 표정을 한 학생들이 우루루 교문을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정수는 기사에게 짐을 맡긴 후 먼저 보내고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나서야 설희가 힘없이 걸어 나온다.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정수는 얼굴을 보려고 하지만 설희는 바닥만 쳐다본다.
“혹시 시험 잘 못 본 거야.”
“...”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걷기만 한다. 정수도 말없이 뒤따라 걷는다.
“따라오지 마. 오늘은 기분별로야.”
정수는 조금 떨어져 걷는다.
“저기 오늘도 시간 안 돼. 수능 때문에 오랫동안 못 봤잖아.”
정수는 머뭇거리며 작은 소리로 이야기 한다.
“오늘은 기분이 별로야.”
“그... 그래. 그렇구나. 시간 안 되는 거야. 그래도 몇 달 전에 약속했잖아. 수능 끝나면 같이 있기로.”
“싫어. 오늘은 그냥 집에 갈래. 나중에 보자.”
“그... 그래도. 오랫동안 못 봤잖아.”
“싫다고. 집에 간다고.”
설희는 소리치고, 뒤 돌아서 걷기 시작한다. 정수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 뒤 돌아서 힘없이 걸어간다. 설희는 살짝 뒤 돌아 본다. 어깨가 축 늘어져 걷는 정수를 본다.
“으이구. 바보 멍청이.”
설희는 정수에게 달려간다.
“내가 예전에 말했지. 자신감 좀 가지라고. 무슨 남자가 이러냐. 이러니까 내가 널 좋아할 수도 없고, 싫어할 수도 없다.”
설희는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한다. 정수는 깜짝 놀란다.
“싫다는 말 했다고 정말 그렇게 가냐. 내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죽는 건 조금... 그리고 네가 싫다고 했잖아. 이제 괜찮은 거야.”
“그럼 괜찮지.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았어. 장난 좀 쳐보려 했는데. 고걸 못 받아 치냐. 아직도 날 모르냐. 그렇게 봤으면서 넌 아직도 멀었어. 그리고 내가 수능 따위한테 지겠냐. 지난번보다 잘 봤다고, 너한테는 안 되지만.”
설희는 살짝 째려본다.
“미안해.”
“네가 뭐가 미안해. 다 네 실력인데.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한번만 더 하면 정말 그냥 간다.”
어깨동무를 풀고 뒤돌아 가려고 한다.
“알겠어. 미안... 아니 안 할게.”
설희는 어깨동무를 하려다 팔짱을 낀다.
“나 그동안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았다고. 어디부터 갈까. 배고픈데 일단 먹으러 가자.”
“그래. 알겠어. 뭐 먹을 거야.”
“음... 피자 먹으러 가자.”
설희와 정수는 피자도 먹고, 백화점에 가서 옷도 사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저녁 10시 설희의 집 근처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다.
“넌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의 경영학과 가는 거 맞지. 너 그 정도 실력은 되잖아. 게다가 집도 잘 살고. 아주 탄탄대로구나.”
설희는 발로 모래를 치면서 약간 부러운 눈빛으로 정수를 쳐다본다.
“아니야. 아직 확실치 않아. 전국에 얼마나 공부 잘하는 애들이 많은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냥 알았다고 하는 거야. 너 그 정도 실력은 되잖아. 나한테까지 겸손할 필요 없어.”
“아니 정말 난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러는 넌 어떻게 할 거야. 나하고 같이 서울로 안 갈래?”
“글세. 너랑 같이 안 가더라도 서울로 대학은 가고 싶은데. 난 좀 어렵지 않을까 싶어. 성적 나오는 거 봐서 결정하려고 꼭 내가 가고 싶은 과가 있어서.”
“신문방송학과 말하는 거 맞지. 왜 그렇게 기자가 되고 싶은 거야.”
“나도 이유는 모르겠어. 티브이를 보면 정의를 위해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서 올바른 기사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멋있어 보였어. 아니 마치 내가 할 일이 저거라고 느꼈어. 난 꼭 훌륭한 기자가 되고 말거야.”
일어서서 기자의 포즈를 취하다가 다시 앉는다.
“그래. 넌 꼭 훌륭한 기자가 될 거야. 내가 도와줄게. 그리고 같이 올라가면 좋을 텐데.”
정수는 조심스럽게 설희의 손을 잡는다.
“뭐야. 어딜 말도 없이 손을 잡아.”
정수가 손을 빼내려 하지만 설희가 손을 꼭 잡는다.
“내가 오늘은 봐준다. 수능도 끝났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거 안 사줘도 시간 낼게. 수능도 끝났잖아. 다음부터 자꾸 사주려고 그러면 정말 안 만나 줄 거야.”
바닥에 놓인 쇼핑백을 바라본다.
“알겠어. 미안.”
“또. 그런다. 하지 말라니까.”
“...”
“그런데 넌 나 어디가 그렇게 좋아.”
정수는 우물쭈물 한다.
“뭐야. 나 싫어하는 구나.”
설희가 손을 빼자 정수는 당황한다.
“아니야. 아니야. 너무 많아서 어떤 것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싶어서. 널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 볼 수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그래.”
“됐네요. 됐어. 이미 늦었어. 그리고 오늘은 이만 들어갈래. 어머니 식당일 마치고 돌아오실 시간 다 됐어. 내가 조금만 늦어도 걱정하신다고.”
“그... 그래.”
정수는 벤치에서 먼저 일어선다.
“넌 항상 내가 들어간다고 하면 행동이 빨라지더라.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설희도 일어선다.
“그럼 잘 가.”
정수는 가볍게 손을 흔든 후 쑥스러운 듯 뒤돌아 천천히 걷는다. 설희도 뒤돌아 가려다 정수에게 다가가 뒤에서 안는다. 정수는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한다.
“나도 내가 싫은 건 아닌데. 지금은 내가 힘들어서 널 바라 볼 여유가 없어. 내가 좀 막대하고 함부로 행동해도 조금만 더 기다려줘.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그리고 지금 내가 이러는 건 수능 때문이야. 딴 생각하면 안 돼.”
설희는 잠시 안겨 있더니 인사도 없이 휙 하고 돌아서서 가버린다.
정수는 설희가 갔어도 얼어붙은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기다릴 수 있어. 아니 난 널 지킬 거야. 왠지 모르지만 그래야 할 거 같아. 아니 그러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