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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르카 7 -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안익태선생 집을 찾다!
2018년 5월 14일 팔마 데 마요르카 Palma de Mallorca 에서 열차로 소예르 Soller 와 소예르
항구 를 보고 버스로 발데모사 Valldemossa 마을에 도착해 카르투하 수도원 을 찾아
1838년에 여기 수도원에 방을 얻어 함께 지냈던.... 쇼팽과 조르주 상드 의 자취를 찾아봅니다.
그러고는 카르투하 수도원을 나와 기념품숍과 카페에 레스토랑이 늘어선 상가 거리며 마을의
오래된 집들을 구경하고는 정류소에서 3시 50분에 210번 버스 를 타고 40분만에
팔마 데 마요르카 Palma de Mallorca 버스 터미널 지하에 도착해서는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스페인 광장 Pl d'Espana 에서 시티 투어 버스 City Tour Bus 에 올라 운전 기사에게서
18 € 하는 1일권(24시간용) 승차권을 구입하는데 버스는 시계방향으로
달려서 해안에서 우회전을 해서는 대성당 까떼드랄 Catedral de Mallorca 을 지납니다.
대성당 까떼드랄 바로 이웃한 건물이 참 오래되어 보이는데.... 이슬람 지배 시대의
영주 성관 을 14세기에 마요르카 왕들이 개조하여 왕궁으로 사용했다는
알무다이나 궁전 Palacio Real Almudaina 으로 저기 궁전은 내일 보기로 합니다.
그러고는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부두인데 보트와 요트 가 수도없이 긴 숲을 이루고 정박해
있는데..... 가도가도 끝이 없으니 그 수를 짐작하기 조차 어려운 엄청난 숫자 입니다.
다시 오른쪽으로 눈을 끄는게 있으니.... 이른바 풍차 인데 네델란드에서 풍차는
바닷물을 퍼내기 위해 사용되었다지만 여기 마요르카에서는 비가
자주 오지 않으니........ 주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다시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여전히 끊임없이 이어지는 "요트의 숲" 은 사람을 질리게
하는데........ 버스는 우회전을 해서는 골목으로 들어가 두어번 회전을 합니다.
그러자 나타나는 성벽 안에 들어선 저 고풍스러운 건축물들 이라니....
버스가 서고 일부 승객이 내려서 성문으로 들어가는데
여긴 바로 8번째 정류소인 스페인 마을 Pueblo Espanyol 인가 봅니다.
시티 투어 버스는 민속촌인 스페인 마을을 출발해서는 이번에는 구불
구불 언덕을 올라가서는 거의 산 정상 에 이르러 서는데,
여기 웅장하고 견고해 보이는 "성채 벨베르성" 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벨베르성 은 하이메1세(카탈루냐어로는 지우메 1세) 의 아들로 발레아레스 제도를 통치한
하이메 2세의 별궁 이니 13세기에 지어진 성으로 600년 전에 축조된 성채 라는 사실이
믿기지않을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는데 18세기부터 19세기초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전망’이란 뜻을 가진 벨베르에서 대성당 내부를 비치고 있는 빛 을 감상하면
스테인트 글라스 창문을 통해서 내려쬐는 빛의 찬란함 은 스페인 본토에 있는 대성당
들의 장엄함과는 완벽하게 차이를 보이며 옥상에서 팔마 시내 가 내려다 보인다고 합니다.
다시 출발한 시티 투어버스는 언덕을 내려가서는 평지에 시가지로 접어들어 나고야 라는
일본 요리집 이 보이기로 우린 안익태 선생의 집 Career P'eaktai AHN 을 찾아
가야 하니 1층으로 내려가 버스 기사에게 Hotel Valparaiso 앞에 세워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기사는 난처한 듯.... 오늘은 그쪽으로 둘러가지 않고, 코스를
생략하고는 도중에서 버스를 돌린다기에 다음
정류소인 10 번째 Pl Gomia 에서 내려서 정류소 노선도 를 살펴보니...
여기서는 안익태 선생 집 근처로 가는 버스는 없는데다가 거리도 기본 요금
정도인지라 택시 를 잡아 타고는 안익태 선색 집을 찾아갑니다.
택시를 타고는 기사에게 한국에서 부터 준비해서 인쇄해 온 종이 쪽지를 건넵니다.
Career P'eaktai AHN : Carrer de Josep Costa Ferrer 4, Palma
종이쪽지 주소 를 확인한 기사는 택시를 몰아 조금 달리다가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가서는
다음 구역에 서기로 기본 요금 을 주고는 내리니 여긴 그냥 조용한 주택가 입니다.
아니 왼쪽인 바닷가 쪽에는 Bellver International College 라는 흰색 대학 건물
이 한동 보이는데.... 언덕이라 여긴 후문 이고 반대편인 아래쪽의 큰
도로변에 대학 정문이 있는데 규모로 보아하니 그냥 학원 정도 규모인가 봅니다?
골목 중간쯤에 오른쪽 주택에서 “안익태선생 유택” 이라는 동판을 발견하는데...... 우편함에는
LEONOR AHN TALAVERA +0034 655 212 ahn.leonor@gmail.com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좌우로 단독 주택인 가정집이 있고 그 사이에 좁은 골목 이 있으니 골목 입구 에
대문 을 세운 것 같은데..... 대문으로 들어가 골목길을
10여미터 걸어 들어가면 제법 넓은 2층 집이 바로 안익태 선생 집 인가 봅니다?
우리 부부는 이역만리 외국 땅에서 선생의 가족을 만나게 되는지라..... 반가운 마음에
초인종 을 여러번 연거푸 눌렀는데도 집에 사람이 없는건지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여행기에는 한 사람은 여길 방문해 안익태 선생의 딸과 대화 를 나누었다는데,
또 다른 사람들은 문이 잠긴지라.... 오늘 우리 처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 (1906∼1965년) 선생은 2차대전중 독일을 떠나 스페인으로 넘어와
스페인 여성과 결혼 하였으며 1946년에는 여기 마요르카의 교향악단 초대
지휘자로 초빙되어 이 섬으로 들어와 마요르카 문화예술계에 큰 공헌 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 사후 25년만인 1990년 주택이 팔릴 위기 에 처하자 ‘인터불고 창업자’로 스페인교포
권영호 회장은 25만 달러를 주고 집을 매입해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 했으니....
2016년 12월 안익태 기념관 이 되었다는데, 호안 미로 뮤지엄 근처 (입구는 다름) 입니다.
안익태 거리 CAREER D'EAK TAI AHN 가 생겼으며 기념관은“세째 딸 레오노르 안”이 운영
하고 있으니 1층은 악보와 사진, 기록물등 안익태 선생의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이고
2층은 주택 으로 사용한다는데... 레오노르 안의 아들이 “미구엘 익태 안” 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던 1960~1990년 까지는“저작권등 지적재산권”개념 자체가 없었으니
외국 음반 은 물론이고 대학가에서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책을 한권 사와서는 무단으로
인쇄해 팔고 대학교재로 썼으니 이른바 해적질(도둑질) 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1996년 12월에 선진국 모임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에 가입하게 되면서 이제는
저작권등 지적재산권 을 보호하지 않을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애국가 니
개인이 부르는건 상관없지만 관청, 학교, 회사나 단체에서 공식행사 를 할 때가 문제입니다.
곧 애국가의 저작권 은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익태 선생의 유족인
스페인 여인 로리타 안과 그 딸들 에게 있으니, 계약을 맺고 애국가를 부를때 마다
저작권료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우리는 무단으로 사용했으니... 이는 도둑질 에 해당합니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는 무지의 소치 인지 아니면 태만 인지.... 늑장을 부리다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니 돈을 주고 저작권 을
사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 이지만 문제는 “국민감정”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음이라......
예전에는 12월이 되면 거리의 가게마다 경쟁하듯 크리스마스 캐럴송 이 요란했는데 요즘은
캐럴송을 아예 들을수가 없으니... 이는 가게 주인들이 저작권 사용료 를 주기 싫으니
아예 곡을 틀지 않는 것인데, 김광석 사태등 이제는 저작권이 정착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죽어도 유족에게 70년간 저작권 이 있는지라 2003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로리타 안
여사와 딸 등 유족과 교섭해 2005년 3월 16일 애국가 저작권을 무료로 기증 받았는데
완전한 무상 인지, 아님 독립 유공자 후손으로 인정 (연금?) 한 것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안익태 선생은 평양 숭실중에서 3.1 만세 사건으로 퇴학된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 구니다치 고등음악원 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 신시내티 음악원 에 입학한
후에 신시내티 교향악단에서 첼로주자 로 있다가 1934년에 헝가리 로 건너가
도야니 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1937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지휘자 가 됩니다.
1936년에 선생은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참가한 베를린 올림픽 에 즈음해 남의 나라
이별의 노래 올드랭사인 곡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현실을 마음아프게 생각해 애국가 를
작곡해 조선선수 와 불렀으며 임시정부에 애국가 곡을 보내 윤치호가 작사 했다고 합니다!
애국가 작사자로 훗날 친일파 윤치호 를 얘기하자면...... 영어 “liberty” 는 동양에 그
개념 자체가 없어 불교 경전에서 찾아 “自由(자유)” 라는 조어(번역) 를 만든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기치 는 그가 저술한 “문명의 개략”이 1875년에
조선에 입수되면서 문명개화론 은 김옥균과 윤치호 등 조선의 청년들을 사로잡게 됩니다
1881년 박정양을 대표로 홍영식등이 신사유람단 으로 일본에 가는데 이때 수행원 유길준 은
귀국하지 않고 후쿠자와가 건립한 게이오의숙 에서 수학했으며 수행원 윤치호 도 2년간
더 머물며 다음해 4차 수신사 박영효와 김옥균, 서광범 이 오자 5명은 후쿠자와 유기치
에게 사사하는데 2년뒤 갑신정변 실패후 박영효는 후쿠자와의 도움으로 친린의숙 을 엽니다.
시사신보 사장 후쿠자와 는 귀국하는 박영효 에게 인쇄기와 잉크, 금속활자와 종이 에 인쇄공
이노우에 를 붙여주니 다음해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는 후쿠자와에게
사사한 유길준 이 발행하는데, 1884년 갑신정변의 실제 설계자는 후쿠자와 니 김옥균
등이 실패하고 망명하자 후쿠자와 는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시녀를 첩 으로 주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애국가는 수십개 가 있었으니... 최초 로는 1896년 독립협회 회장
이완용 (독립문 현판 글씨를 쓴 명필로 후일 을사5적) 의 주도로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스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의 멜로디로 부른 작사 미상
애국가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 라고 합니다.
두번째로 대한제국의 애국가 는 1901년 고종이 초빙해 궁정 악대를 맡긴 독일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 가 1902년 작곡해 고종 생신때 궁정악대 가 불렀는데 프란츠는
22년전인 1,879년 일본 해군악대에서 근무하다가 1,888년 황궁 고전음악부에 근무
하면서 1,890년에 일본 국가“기미가요” 를 작곡해 천황(일왕) 생일에 불렀다고 합니다.
안익태 선생 은 1940년 일본 정부의 기원 2600년 기념축전 사무국이 요청한 황기 2600년
기념봉축 음악 을 작곡했고 같은해 12월 도쿄 가부기좌 (歌舞伎座) 에서 초연
되었는데... 이 곡은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연주 되었으니 이를 계기로
1941년 안익태 선생은 부다페스트를 떠나 독일의 베를린 으로 주 활동무대를 옮깁니다.
6.25 후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한국 환상곡”은 1,942년 일본의 괴뢰인 만주국 수립
10주년을 기념해 작곡했던 "만주국의 자기 표절”이며.... 일본 천황을 찬양 하는
“에텐라쿠”를 작곡했고, 군국주의 “日獨會 일독회” 의 경제적 후원 을 받았으며
독일에서 생활할 때에 주독 일본 영사관의 신세 를 졌다는 “친일파” 논란이 있습니다.
1942년에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축하하는 “큰 관현악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를 작곡하였고 1943년 7월 독일 제국음악원 정식회원이 되었고 1944년
독일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활동무대를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옮겼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애국가”를 사실상 국가로 불렀는데... 1965년 9월 16일 사망했습니다.
이런 논란은 음악가 홍난파 나 현제명 도 마찬가지인데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장지연,
박영효, 이용구, 서정주, 노천명, 모윤숙, 김동인, 주요한, 김동환, 김활란이
그러하며.... 3.1 기미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한용운과 손병희 등
10여인 을 빼고는 최린 등 상당수는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친일파로 변절" 하였습니다.
“선구자”노래는 알려진 것 처럼 이름모를 독립군 이 작사한걸 조두남 작곡으로 일제시대
부터 불리운 것은 아니니, 윤해영이 작사하고 조두남이 작곡한 유랑민의 설움을 담은
노래가 ‘용정의 노래’ 인데..... 1944년 봄, 만주 영안의 신곡 공연장에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윤해영은 친일단체 "영안협화회 회원" 이며 조두남 또한 같은해에 '간첩은 날뛴다’
와‘징병제 만세’ ‘황국의 어머니’ 를 발표한 대표적인 친일파인데, 해방 이후 '눈물
젖은 보따리’ 나 ‘흘러온신세’ 가 어처구니 없게도 “말 달리던 선구자” 로 바뀐 것이네요?
하기사 친일파들이 음악가와 시인 그리고 문인뿐이겠습니까? 1904년 8월 18일 구 독립협회
회원들 중심으로 조직된 유신회의 송병준 은 이용구의 진보회 와 합쳐 10만이 넘는
일진회 를 만들었으니 송병준에게 한일합방 공을 뺏길까 조급해진 이완용 은 한국 최초
근대 소설인 혈의 누 를 쓴 이인직 을 데라우치 통감에게 보내 한일합방 공적을 가로챕니다.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는 17세 일본 도진샤, 21세 상해 중서서원, 24세부터 미국 에모리대
에서 공부하던 1907년에 애국가 가사 를 썼으며 귀국후 독립협회 회장, 대성학교 교장을
지내며 민족의 힘을 키웠고 1912년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 사건인 105인사건 주모자 로
3년간 복역했으나.... 만년에는 친일 강연 중추원과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친일에 앞장 섭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그래도 안익태 선생의 유족들이 애국가 저작권을 대한민국에 무상
으로 기증해준데 대해 고마운 마음으로... 종이에 몇자 적어서 우편함에
넣고 빈 집을 향해 절을 하고는 되돌아 내려와 큰 도로에서 조금 더
걸으니 Palacio de Marvivent 를 만납니다.
첫댓글 글 감사 드리며 머물다
갑니다.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