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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알렌, 제임스 게일, 에드워드 아담스
아펜젤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1858년 2월 미국 펜실베니아의 서더튼에서
아버지 기드온과 어머니 마리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주로 농장에서 보냈다.
어려서부터 독일계 루터교회에서 복음적인 위엄과 엄격함을 배우며 자라
철저한 신앙 정신으로 14살에 세례를 받았으며 18세에 중생을 체험했다고 한다.
20세 되던 1878년 필라델피아 서부의 마샬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연구하였고
여러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수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드류 대학의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성직에 몸담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품과 학업에 열중하여 드류 대학의 신학적 학풍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교회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조선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아펜젤러 목사를 선교사로 준비하였으며,
가우처 박사는 한국선교를 위한 첫 만남은 한국 사절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아가 맥클레이 박사는 이러한 실무를 도맡음으로써
조선에 대한 미감리교회의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미 초대공사 푸트(Lucius H . Foote)의 입국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위시한 홍영식, 서광범 등의 사절단이
일본을 거쳐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워싱톤 행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한국사절단을 초청하여 선교를 위한 상황을 파악하여
감리교 기관지에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으며,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선교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1883년 총선교위원회에서 한국선교를 정식으로 결정하여
일본주재 선교사인 맥클레이 박사에 의해 선교답사를 하게 하였다.
맥클레이 목사는 디킨슨 대학을 졸업하여 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며,
중국선교사와 일본선교사로써 크게 활동하였다.
그러한 그가 또다시 한국을 위한 선교의 첫장을 열게 되어 참으로
큰 기쁨을 받고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감사하였다.
그 당시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완화되고 있었으며,
이미 일본에서 만났던 김옥균이 승정원의 승지로써 외교업무를 보고 있었으며,
그에게 부탁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였는데
김옥균 역시 한국의 개화에는 개신교의 활동이 최선의 길임을 인식하여 환영하였다.
이를 통해 의료와 교육 사업을 위한 윤허를 받게 된 것이었다.(1884. 7. 3.)
이러한 시기에 1884년 12월 아펜젤러는 도지(E. J. Dodge)양과 결혼하였으며,
드류신학교를 1885년 1월에 졸업하였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고 스크랜톤 박사 가족과 함께 한국선교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제 1회 한국선교사회를 열고 맥클레이 박사를 총책임자로 아펜젤러는 부책임자가 되었다.
1885년 4월5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기도하기를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2개월간 동경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6월 20일에 재입국하였다.
그는 17년동안 한국인들 사이에서 선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선교 및 목회에 열중하였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학생으로 시작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명을 하사 받았다.
배재학당은 남학생들을 전용으로 가르쳤으며,
과정은 예비과정부, 교양과정부, 대학과정부를 두었으며,
영어, 중국고전, 서구의 과학과 문학 등을 공부했다.
이화학당에서는 스크랜튼 부인의 주도로 주로 고아나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으로부터 시작하여 교육선교를 시작하였고 여성의 지위향상과 복음사역에 충실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학교였다.
스크랜튼은 알렌이 경영하던 제중원에서 잠시 일하다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봉사에 힘을 써
고종은 그의 희생적 봉사를 기려 시병원(施病院)이란 칭호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는 1888년에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文)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중·영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여기에서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 특히 격주간지 [교회](1889년 5월)의 발간으로 신앙의 교제와 소식을 나누었고, 영문 월간지 Korean Re- pository(1892년 1월)는
폐쇄적인 조선사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5권까지 발행되었으며, 지금까지 조선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 되어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크리스토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 및 교육 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의 설립자였고, 한국 감리교 선교회의 감리사였으며,
종교신문의 편집자였고, 출판사와 서점의 운영자이면서 영국 왕립협회 아시아지부 도서관의 사서, 외국인 묘지협회의 회계로써 보다 훌륭한 인간을 만드는 일과
조선의 복음선교 사역을 위해 충실한 목회자였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요, 자상한 아버지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자녀를 양육하려고 노력한 신사였다.
아펜젤러 목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제물포(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선상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한 광산 기술자의 목격담에 의하면 1902년 6월11일,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눈 뒤 아펜젤러는 방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군산 앞바다에 이르러 이때 갑작스런 짙은 안개로 인해 선박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비서와 어린 소녀들을 먼저 인도하고 함께 나가려고 하였으나 이미 늦어 배와 함께 순교하고 만 것이다.
아펜젤러는 하나님과 감리교회에 대하여 충성스러웠고 교리와 법을 준행했다.
교회의 지도자를 존중하였고, 교회의 발전과 봉사에 전념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말하는 복음적 크리스토교의 진리와 정신, 체제와 정책을 한국인에게
전해주었으며, 그가 교회에 충성하였던 것처럼 친구와 조국, 그리고 모든 선한 사업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크리스토교의 전달자 역할뿐만 아니라
암흑과 무지, 빈곤과 무질서, 미신과 부패를 타파하고 조선의 근대화와 자립정신을 일깨워주고 끝내는 함께 가던 조선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조선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설교하고 싶다."
알렌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들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오신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다.
그렇다면, 알렌 선교사가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가장 먼저 들어 올 수 있었을까요 ?
당시 알렌 선교사님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알렌 선교사는 8개월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조선이 문을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바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썼다.
조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 였습니다.
그가 1884년 6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의보다는 왕실의 시의가 되면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올 것을 알고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 가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막 넘은 12월 어느 날,
조선에 큰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되었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이 3일 천하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갑신정변이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었고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과도한 출혈 끝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습니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다 .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885년 4월 12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렸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이다.
그 후 이 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설립자 알렌은 미국 선교사이자 주한 미국 공사관 의료진으로,
갑신정변 첫날밤 개화당의 공격을 받아 얼굴과 목, 그리고 등에 이르는
치명적 상처를 입었던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게 됩니다.
광혜원은 문 연2주 만에 고종으로부터 ‘제중원’이란 이름을 하사받고는
빠르게 발전 속도를 타게됩니다.
1883년 8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항구에는 긴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조선의 젊은 관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큰 갓의 챙으로 스며든 햇살이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러나 충격에 빠진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습다.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의 오랜 배멀미는 이제 서구 문명에 대한, 다스릴 수 없는 멀미로 뒤바뀌게됩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조선 유사 이래 서구의 세계를 최초로 견문하게 되는 이들은
조미(朝美)조약 체결 1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報聘使)들이었습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에 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
보빙사를 이끌었던 정사(正使) 민영익은 미국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자신의 조국을 암흑세계라고 표현하고,
자신은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할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다.
홍영식이 그토록 열망하였던 서구식 근대 교육의 싹이 바로
이 광혜원을 중심으로 죽순처럼 솟아오릅니다.
광혜원이 자리잡은 곳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참살된 홍영식의 재동 집이었다.
이 비극적인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도, 역사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핏자국이 남아있을 뿐.
고종이 알렌의 병원 설립 요청에 흔쾌하게 응답하고 그 병원에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한 것은 이 파란 눈의 서양인에 대한 믿음만은 아니었다.
청나라의 속국화 정책과 무너지기 직전의 재정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텅비어있는 국고를 샅샅이 뒤져 중국 상하이로부터 근대화 사업에 필요한 서적을
3만여 권이나 사들였다.
알렌이 광혜원을 세우던 무렵,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이 본격화되었다.
1885년에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최초의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1년 후에는 역시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조선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을 개교하였다. 같은 시기, 선교사 언더우드가 고아들을 모아 시작한 구세학당은
훗날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됩니다.
“지금 조선에서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대단하다.
그들의 한결같은 목적은 영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건, 전신국 교환수가 되어
출세를 하는 것이다.”자기 집에서 조선인 두 명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듬해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정동에 조선 최초의 르네상스식 벽돌건물을 지어
완전한 근대 학교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 아펜젤러의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1880년대 중반의 서울 거리에는 몸을 앞뒤로 흔들며 낭랑하게 중국 고전의 경구를 외우는 소리 사이로 낯선 언어가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신분으로 보장된 출세가 가능하지 않은 청년들,
양반이 아니어서 오히려 본능적으로 진보적이고 실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중인 청년들은 세계의 변화에 이런 식으로 민감했다.
1886년 3월에 설립된 제중원 부설 국립의학교에는 양반 자제들의 입학이 없어서,
각 관아에서 차출해준 기녀들이 그 첫 번째 입학생이 되었다.
알렌의 기록에 의하면, 이 아름답고 우수한 기녀들은 훌륭한 의학도였을 뿐만 아니라
파티 석상에서는 권주가를 부르는 솜씨 또한 근사했다.
조선의 근대교육은, 조선인들 스스로 세운 원산학사나 고위 관리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세웠던 신식학교 육영공원에서도 그 맹아를 찾을 수 있다.
학교를 세웠으니 학생들의 벼슬 길을 열어달라고 청원하는 원산학사(1883년)나,
양반 학생들의 불성실한 수업태도로 말미암아 문을 닫게 되는 육영공원(1886년)은
아직 미래의 문을 힘껏 열기에는 그 힘이 미약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청년들을 난세의 심장부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조선 최초의 근대우편제도가 설립되고, 병기제조장인 기기창이 세워지고,
전선이 조선의 구석구석으로 뻗어가며 뒤처진 근대의 길을 빠르게 쫓아갔다.
하지만 국제우편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세계화를 앞당길 수도 있었던 해저전선과,
서로 북로 전선은 일본과 청나라의 보다 본격적인 침탈의 도구가 되었다.
문명은 근대화를 앞당겼지만,
무너져가는 나라 조선을 더 빠르게 근대적 식민지로 몰아가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 나라에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알렌을 미리 보냈고
갑신정변의 사건을 통해 고관 민영익의 생명을 살리면서
선교사가 들어오기에 전혀 어려움 없도록 하셨던 것이다.
실지로 처음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알렌의 도움으로 알렌의 집에 거하면서 조선선교를 위해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 뿐 아니라 초창기 조선에 들어왔던 모든 분들이
알렌의 도움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렌 선교사를 통해 또 갑신정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조선 선교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마음껏 조선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던 것이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 제임스 게일과 청년 이승만
선교사 제임스 게일 (James S. Gale , 奇一 , 1863-1937)
우남이 회심(悔心)하는 과정과 출옥한 이후에 세례를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하는 과정,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YMCA에서 학감(한국인 총무)으로 일하는 모든 과정에
우남의 성장을 지켜보고 우남을 돕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은 바로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S 게일이라는 분이었다.
게일은 우남을 만난 이후로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우남의 비범함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위대한 크리스토교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특별한 후견인(後見人),
멘토의 역할을 했다.
1. 게일의 생애
게일은 1863년 2월 캐나다 온타리오 주 엘마(Elma)에 개척 농장에서 장로교회 장로인 아버지의 5남 1녀의 자녀 중 다섯 번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884년 토론토 대학에 진학하였고 대학에 재학 중에 프랑스에 가서 불어를 공부하고 선교(宣敎)단에서 일하면서 교파를 초월한 선교방법을 배웠다. 1886년 북미 하령회(夏令會)에 참석해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외지 선교를 할 것을 결심하였다.
토론토대학 기독교 청년회(YMCA)의 지원을 받고 평신도 선교사로서 25세의 나이로 1888년 12월 15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게일은 조선어를 배우기 위하여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깊은 시골로 들어갔다. 조선에서 개신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진 솔내마을로 공부를 하러 간 것이다. 그는 솔내에서 조선인 최초의 개신교도인 서상륜의 집에 하숙을 하면서 조선어를 상당히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머물렀다. 후에 게일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외국인 한국어 학자로 간주 되었는데 한자(漢字)에 대한 지식은 그 어느 외국인도 따라갈 수 없었다. 솔내에 있는 동안 그는 전적으로 조선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1889년 3월 황해도 소래에서 평생의 조사(助事)가 된 이창직을 만나 한글, 한문, 풍습을 공부하고 마침내 1900년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게일은 자신을 파송한 토론토대학 청년회에서 선교비가 끊어지자 1891년 미국 북장로교회로 전직(轉職)하였고, 한국에 온지 10여년이 지난 1897년 5월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목사로서 안수를 받았다. 한국에서 39년간 사역하다가 영국의 베스(Bath)라는 곳에서 십 여년 동안 아내와 더불어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74세를 일기로 오르몬드 로지(Ormond Lodge)라는 양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2. 게일의 사역(使役)
게일은 부산(1889-1891), 원산(1892-1897), 서울(1900-1927) 평양등지에서 사역하였다. 연구와 탐사를 위해 걷거나 말을 타고 한반도를 무려 25회나 여행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정리하면 ①지역 순회전도 활동과 연동교회에서의 목회활동 ②예수교 학당인 경신(敬信)학교와 평양신학교에서의 교육활동 ③한국학 연구와 저술활동 그리고 성경번역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게일은 교육에 뜻을 두어,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후에 피어선 성서신학원 원장으로 교육 일선에서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게일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남긴 공헌, 특히 문서분야의 공헌은 아무리 칭찬해도 과(過)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의 사역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 할 수 있는데, 자신이 담임한 연동교회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국전체를 상대한 큰 그릇으로서 선교하는 것(선교사)과 가르치는 것(교육가), 글을 쓰는 것(저술가)이었다.
3. 게일의 번역 및 문서 활동
천성(天性)이 학자로서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열의가 대단해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 4시까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는 서양에서의 한국학의 효시(曉示)라고 지적될 수도 있는 훌륭한 저서들을 많이 저술했는데 그의 번역물인 『텬로역정(天路歷程)』은 한성감옥에 갇혀있던 선비들을 개종(改宗)시키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책자는 존 번연(John Bunyan)의 ‘순례자의 과정(Pilgrim's Progress)’의 번역물인데 기독교인이 수많은 유혹과 역경을 헤치고 천성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한성 밖의 세상에서도 성경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읽혀진 책이었다. 게일은 문인(文人)으로서 수많은 책을 썼는데 그 중 『코리언 스켓치』라는 책은 구한말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록해 놓은 책이다. 모두 43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4. 게일과 옥중에 있던 양반들과의 만남
게일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수시로 감옥을 찾아가 성경 및 기독교 서적을 차입해 주고 전도하였다. 게일은 한국인 개혁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개혁파 정치인들과 개인적인 신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1989년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사건으로 한성 감옥에 전후에 투옥된 후 옥중에서 선교사와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예수 믿기를 결심하였는데 감옥 안은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토론하는 옥중학교, 옥중 도서실로 인해 화해, 감격과 감동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게일은 그의 저서 『전환기의 한국』에서 복당(福堂: 한성감옥)에 모인 정치범들의 성경연구 및 기도반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벙커 목사 부부가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이들〔이승만, 유성준, 김린,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등〕의 감옥은 처음에는 ‘진리 탐구의 방(an inquiry room)’으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기도의 집(a house of prayer)’이 되고 그 다음에는 ‘예배당(a chaple for religious exercise)’으로 바뀌었다가 급기야 ‘신학당(a theological hall)’이 되었다. 이 과정을 끝내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감옥에서 내보내어 사역하도록 하셨다. 그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우수한 한문 실력 때문에 이 나라 수도의 기독교계에서 최초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1901년 3월 귀양살이에서 서울 감옥으로 이송된 이원긍은 게일 등 선교사들이 찾아가 간절히 예수 믿기를 권함으로써 점점 뜨겁게 감동되었다.
1902년 두 번째 투옥된 이상재는 성경을 읽는 도중 마태복음 5-7장에 감명을 받은 뒤,
벙커 목사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옥중 세례(洗禮)를 받았다.
그는 출옥한 후에 게일을 찾아 연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역시 1902년에 투옥된 김정식은 감옥에 있는 동안 게일 목사의 끈질긴 전도에 의해
〈무디의 설교집〉을 읽고 개종하였다.
그는 후에 일본에 있는 한국 청년기독교회(YMCA) 총무가 되어
크리스토교 지도자로 평생을 헌신하였다.
한성감옥에서 출옥한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원긍은 출옥 후
연동교회에 있던 게일을 찾아 갔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옥중에서 신자가 된 사대부들이 선비 못지않게
박식(博識)하고 개방(開放)적인 게일 선교사를 따랐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이들보다도 출옥시기가 늦었던 이승만도 석방 후 게일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게일의 전기를 저술했으며,
한국에 와서 성공회 신부로 지낸 러트(Richart Rutt)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연못골교회(연동교회)는 새로 크리스토교에 입교한 독립협회 회원들의 집합처럼 되었다. 그들은 일찍이 과격한 정치 운동을 하다가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살이를 하던 사람들이다. 게일은 특히 이원긍, 즉 학자이며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유명한 사학가 이능화의 부친을 좋아했으며, 일찍이 경무관 벼슬을 지낸 김정식, 초대 우정국장이며 한국 초기의 초창기의 신교육과 독립협회 창설에 주동 역할을 한 이상재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게일은 이승만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이 개화파 지도자들은 상류 지식인들로 크리스토교 신자가 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의 몇 사람은 다년간 연못골에다 교적(敎籍)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게일이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며 확신을 갖게 된 점은
그들의 교육사상과 종교 사상이었다.”
5. 게일에 대한 평가
해방 전까지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은 대략 1500여명으로 산정하는데
그 중에서 게일 만큼 특이한 선교사는 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일(奇一)이라는 그의 이름처럼 기(奇)이하게 살았던 것이다.
크리스토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탁월한 언어학자로, 저술가로,
번역가로 목회자로 한국학의 대가(大家)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게일 목사는 당시의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지적이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한국에 있던 다른 선교사들보다도조선어에 능통하였고,
조선에 대한 이해도 깊었으며, 조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분이었다.
그는 조선어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사와 문학 등 한국의 거인(巨人)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상당한 식견(識見)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이 성경 중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연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월남 이상재(李商在)는 ‘게일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을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속에 있는 사람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 하였다.
구한말에 누구보다도 서양 문명과 사람들에 대하여 정통하였던
윤치호(尹致昊)는 “게일 박사는 상상 이상의 박식(博識)가요 문학가입니다.
지금까지 조선에 온 서양 선교사로는 그 재주와 박식에 있어서 씨(氏)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하는데
게일은 조선 문화의 예찬(禮讚)자이었고
조선문학과 명현들의 경전(經典)에 통달한 거인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에
조선의 큰 지도자가 될 우남의 잠재력(潛在力)을 알아보고
그의 신앙적 인격적 성장을 도운 것은 게일의 커다란 공로(功勞)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교수로 평생 동안 선교사 게일을 연구한
유영식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게일은 선교사인 동시에 문인이었다.
당시 조선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은 고전번역, 사전편찬 등 여러 업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특히 ‘크리스토교의 조선화’를 강조한 분으로
조선의 근대화(近代化) 시기에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 될 것이다.”고 설명했다.
6. 이승만과 게일의 멘토링 관계
조선왕조 정부 타도를 획책했다는 황국협회의 무고로 1898년 11월에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은 우남 이승만은 크리스토교로 개종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승만에게는 마음의 해방이 생겼다. 그것은 크리스토교로 개종(改宗)한 일이었다.
이것은 1904년 장로교 목사 제임스 S. 게일의 조력(助力)에 의한 것이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하자 급격한 정치적인 변혁으로
정치범에게 석방의 특사가 내려지자
가장 늦게 출옥한(8월9일) 우남 이승만은 게일 목사를 찾아가
그의 지도와 세례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게일 목사는 그가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으므로
감리교회에 우선권이 있다고 세례 주는 것만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게일은 우남이 크리스토교인으로 세례를 받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게일의 편지를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 편지는 우남이 미국으로 출국 할 때에 지닌 것으로
후에 그에게 세례를 준 장로교 계통의 햄린(Lewis T. Hamlin) 목사에게 전달이 되었다.
게일은 우남이 정직하고 충실한 크리스토교인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진실하게 간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우남 이승만이 반도에서 정직하고 총명한 청년들 중에
가장 앞서가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게일의 소개서를 받은 햄린 목사는 우남을 조지 워싱톤 대학의 총장이며
한국공사관 법률고문인 찰스 니드햄 박사에게 소개해
우남 이승만은 장학생으로 2학년에 편입 할 수 있었고
세례는 같은 해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을 통해
워싱턴에 있는 커버넌트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Covenant)에서
햄린이 손수 베풀었다.
실제로 우남 이승만은 햄린과 자주 만나기도 하였고,
우남은 그에게 금전적인 도움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올리버가 수집한 기록에 의하며 햄린 박사는 1월 6일에 2달러,
1월 8일에 3달러를 우남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추천서를 통하여 장로교 선교사 게일이 얼마나 우남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를 사랑하며 우남의 장래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가를 알 수 있다.
게일이 ‘이 분은 조선의 독립을 믿습니다’라고 한 표현은
이승만의 옥중생활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게일은 바로 우남의 이러한 뛰어난 점들을 간과(看過)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남은 하버드 대학 재학 시부터 졸업 후 자신의 진로문제에 대하여
서울에 있는 게일과 간간이 편지(便紙)로써 조언을 구했다.
게일은 한결같이 한국에는 할 일이 많다고 강조하면서
꼭 귀국하여 함께 일할 것을 권고하였다.
게일은 우남이 황성 기독교청년회, 즉 서울 YMCA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였고 결국 서울 YMCA로부터 최종적 제의를 받은 우남은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은 다음날(7월19일) 취임 수락의 편지를 썼다.
우남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YMCA의 한국인 총무로 활동하는 동안(1910-1912)도
게일과 자주 교제하였다.
게일이 교장으로 있던 정신여소학교와 경신남소학교 졸업식이 있을 때에
이상재와 더불어 참석해서 이상재는 기도순서를,
우남은 성경봉독(聖經奉讀)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남이 귀국 후에도 계속해서 게일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게일 선교사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
헤론 부인과 만나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을 이창직의 도움으로
1895년에 한글판을 내게 된 일이다.
이 천로역정은 당시로서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으며,
구한말 독립협회 사건으로 한양감옥에 같혀 있던
이승만, 이상재, 김정식 등이 모두 천로역정을 읽고 감옥에서 예수를 믿었으며
이들이 출옥한 후 한때 연동교회에 출석을 했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천민 만 다니는 교회로만 알던 연동교회는 이들이 출석하면서
교인을 다시한번 쳐다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ht Gale, 奇一)은 1863년 2월 19일 캐니다 온타리오에서 스코틀랜드 계의 부모로부터 출생했다.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기독청년회 지원으로 25세 되던
1888년 12월 15일 기포드와 함께 인천으로 내한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과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한 뒤,
1890년 예수교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891년 2월 토론토대학의 선교비 중단으로 같은 해 8월 3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전적했다.
1892년 4월 7일, 헤론 선교사의 미망인 깁슨(Harriet Elizabeth, 별명:Hattie) 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했다.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성서 번역에 착수한 것은 1893년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작업은 1887년의 성서번역위원회에서 비롯된다.
5명의 선교사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890년에 특별히 언더우드와 스크랜튼에게 성서 번역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정에 의해 언더우드는 게일로,
스크랜튼은 아펜젤러로 교체된다
게일이 성서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언더우드의 역할을 대신 맡게 되는 1892년이다. 그는 이 때부터 사도행전과 마태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1895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후에 신약 후반부의 단편 성서들을,
즉 『바울이 갈나대인에게 ? 편지』, 『에베소인서』, 『고린도젼셔』, 『고린도후셔』를
번역한다.
1900년에는 다른 선교사들의 신약 번역도 마무리되는데,
이것들은 교정작업(아펜젤러(언더우드), 레이놀즈, 게일)을 거쳐
1906년 한국 최초의 공인 역본 『신약젼셔』로 나오게 된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천주’로, 마펫과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관철하였다. 게일에게는 마가복음 번역을 책임지게하고,
1891년 언더우드의 귀국으로 요한복음도 맡아 번역하였다.
언더우드는 1903년에 와서도 하나님 사용을 반대하고 天主를 주장하고 있었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으로 성경 전서(신·구약)을 출판하였다.
1897년 4월, 「그리스도 신문」 주간으로 시작하여 기독신보를 바뀐 뒤까지
10여 년간 주필로 활동하였다.
게일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1897년 미국에 갔을 때 신학은 안 했지만
그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일들이 너무 훌륭해서 마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 사의 주선으로 인디아나주 뉴알비니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한국에 와 서 당당하게 성찬예식도 거행하고 설교권도 갖게 되자
1900년 처음 연동교회 담임목사가 되는과 동시에
제1대 당회장이 되는 김쁨도 누리게 되었다.
1900년 5월, 연동교회 목회를 시작으로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1901년 한국성교서회 회장(제3대)과 황성기독청년회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1903)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으로 두차례(1908, 1910)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음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다.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하여(1922) 출판하는 등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첫 부인 해티는 1908년 3월 29일 결핵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아-14)에 안장되었다.
1908년 게일 선교사는 부인을 잃고
그 정력을 한국 문화와 풍습을 익히는데 사용 해야 한다면서 그 어려운 교통난을 헤치고 12번이나 한반도를 휘접고 다녔다면 그의 정열을 알 수도 있다.
그후 그는 황해도 솔래에서 만난 이창직을 항상 대동하 면서
개인적으로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착수하였다.
때마침 일본 나가자키에서 만났던 윤치호는 정동에다 기독교문화출판 사업을 한다면서
기독교창문 사를 만들어 기독교서적 출간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무렵 게일은 첫째 부인을 잃 고 충격이 컸는지라 결혼을 하려고 하는 생각을 잊고 있었는데 때마침 일본을 다 니다가 뜻하지 않게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영국인 실업가의 딸인 세일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후 1910년 4월 7일 영국 실업가의 딸 루이스(Ada Louise Sale)와 재혼했다.
1927년 5월 연동교회 시무를 마치고
1928년 정년 은퇴하여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는 성경 중심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상재 선생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 하였다.
에드워드 아담스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은 1895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해 부산선교부에서 2년간 한국어와 지방풍습을 공부하고 1897년 대구 선교부로 파송됩니다.
그는 1898년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대구 제일교회의 모태가 된 것이다.
또한 대구선교부의 책임자로 많은 동역 선교사들을 필요로 했고 의사인 죤슨 선교사와
함께 제중원을 설립해 복음화를 이루게 되는데 이 병원이 지금의 동산병원이다.
지금의 대구 제일교회와 동산병원 부지,
계명대학의 구 캠퍼스 모두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가 선교사역 가운데서 얻은 땅들이다.
선교사들이 그 땅을 얻을 수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선교사들이 대구 성내에서 사역하면서 가장 힘들어했던 3가지 S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Smell 입니다.
선교사들은 하수처리가 되어있지 않은 환경 속에 살면서 냄새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했다.
또 하나는 Smoke 다. 쌩나무를 태워서 밥을 짓고 난방을 위해 불을 피웠기 때문에
그 연기로 인해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Sound 입니다. 서양인만 보면 짖어대는 개소리와 밤마다 무당 굿 소리에 곤혹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4대문 성안에 사는 것 보다 밖에서 살기를 원했다.
지금의 동산병원과 계명대 캠퍼스 자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지 못해 몰래 시신을 묻었던 버려진 땅이었다.
당시 고관들에게도 그 땅이 골치 아픈 땅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쉽게
그 땅을 구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그 땅은 대구지역 복음화의 요람으로 남아있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와 사역을 감당하던 아담스 선교사는 부인 닐 딕의 죽음으로 큰 아픔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스 선교사님은 그 고통가운데에서도 조선 사랑을 이어갑니다.
제일교회 내에 남자 소학교를 세워 교육선교를 지속하면서
계성중학교를 세웠고 후에 계명대학까지 아담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지게 됐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복음전도기금으로 내놓고 1923년 대구선교부를 은퇴하기까지
근 40년 동안 조선선교를 위해 온 생애를바쳤다.
그는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 아들들도 아버지의 조선사랑을 위해 한국에서 우리 민족과 아픔을 같이하며 일생을 보냈다.
선교사들은 십자가의 복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남기고 갔다.
대구의 ‘사과 미인’이라는 말도 선교사들이 대구에 사과를 심음으로 생겨난 말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세우고
우리 민족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의 삶을 살고 간 사람들이다.
동산병원 선교관 앞에 자리 잡은 선교사들의 무덤은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민족이 됐는지를 알려주는 증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