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차별로 굳어진 사람에게는 정당하다는 의미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차별로 본 자기 생각이 정당할 뿐이지요. 선입관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차별의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차별이 있습니다. 아무리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고 있다 하더라도 21세기 지금도 차별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습니다. 우리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조차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흔한 인종차별은 이 문명시대에도 거침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기야 그렇게 넓게 가지 않아도 한 나라 안에서조차 지역 간 차별이 존재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남북의 차이나 동서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녀차별도 흔하지요.
차별의식이 선입관과 합세하여 굳어지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그런 대상자에게 상표를 붙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모든 말이나 행동이 그 상표에 따라 평가됩니다. 사람은 보지 않습니다. 상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항변한다 해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분노를 사게 됩니다. 논쟁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인으로까지 발전합니다. 정당방위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피신해야 하고 도망자가 됩니다. 차별주의자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함께 복수의 의지를 불태웁니다.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적으로 간주하여 반드시 찾아 응징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본래 원주민을 쫓아내고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네끼리도 땅 차지하는 전쟁(?) 속에서 자란 나라입니다. 그러니 광야의 맹수들보다 낯선 사람들이 더 위험을 느끼게 합니다. 언제나 자기보호를 우선으로 하며 살아야 합니다. 늘 무기를 지니고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법이 생기고 치안관이 세워진다 해도 그 미치는 힘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위험 속에서 살아야 하는 나라입니다. 법이 지켜주기 전에 스스로 지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법이 도달하기 전에 사건사고가 발생하기 일쑤니까요. 법적인 처리는 나중에 뒤치다꺼리 하는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디언 혼혈인 ‘챠토’는 보안관으로부터 심한 차별과 모욕을 당합니다. 결국 사살합니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챠토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그는 인디언이니까요. 백인이 지배하는 지방에서 인디언이 백인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 생각으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추격대를 모집하여 챠토를 찾아 나섭니다. 남북전쟁 때 남군의 장교였던 ‘퀸시’가 대장으로 나섭니다. 동네를 다니면서 지원자를 모집합니다. 사건이 알려지고 흩어져 살고 있는 주민들이 한 마을 사람임을 핑계로 결집합니다. ‘꼭 가야 해요?’ 나서는 남편에게 묻습니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마을을 지키는 일이니 빠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인디언 한 사람을 잡으려고 열 명 넘게 추격대를 조직하여 뒤를 쫓습니다. 인원으로 보면 든든합니다. 문제는 그곳 지리가 백인들보다는 인디언에게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커다란 전쟁을 할 때도 그렇지만 쫓고 쫓기는 싸움을 할 때도 수자만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은 몇 배의 군사를 가진 자보다 우세할 수 있습니다. 추적대에는 인디언의 숩성을 잘 아는 또 다른 인디언 혼혈인 멕시코인이 동행합니다. 그래서 차토의 행적을 간파하여 보고해줍니다. 퀸시는 그를 믿고 고용했고 또한 신실하게 따라줍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가고 성과가 없이 하나 둘 희생이 발생하니 무리 가운데 의심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추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챠토의 꾀임에 빠져서 광야를 돌고 있다고 깨닫게 됩니다. 물과 식량도 바닥나고 있습니다. 이미 챠토에게 당한 사람이 반이나 되어갑니다. 이렇게 되면 붙잡는 것은 고사하고 그에게 모두 당할 위험이 더 큽니다. 마침 차토의 집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집에 있던 그 아내를 겁탈하고 벌거벗겨 모욕을 주며 묶어 놓습니다. 어린 아들이 아비인 챠토에게 도망하여 사실을 알려줍니다. 무리 가운데는 그래도 양식이 있는 주민도 있고 비교적 독실한 신자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도를 지났다고 비난하지만 묵살됩니다. 겁탈한 그 청년은 챠토에게 무참히 살해됩니다. 동행한 형이 복수심으로 눈이 뒤집어집니다.
아무리 뜻을 모아 하나의 일을 한다 해도 우선 목숨이 걸린 문제이고 둘째 성공에 자신이 없어지고 셋째 지쳐가고 있는 마당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또한 기다리는 가족도 생각이 납니다. 어쩌면 확실하고 정당한 이유가 없이 단순한 복수심으로만 모인 집단일 뿐입니다. 소위 대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오히려 위험은 커지고 사명감도 없고 의심만 생기는 상황에서 처음 가졌던 의무감도 지워지기 쉽습니다. 그 땅이 누구에게 더 친밀한가 생각하게 합니다. 퀸시가 말하지요. ‘그에게는 자신의 땅이야. 그에게 땅은 사람과 같아. 살아있는 존재지.’ 차토는 바로 그 광야와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영화 ‘인디언의 땅’(Chato's Land)을 보았습니다. 1972년 작품입니다.
첫댓글 잘보구 갑니다.
감사합니다. 복된 한 주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