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풀고 즐기는 날
에스더 9:17-2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추석 연휴이다. 행복한 추석을 맞을 준비를 하는가? 추석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명절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도 있다. 8월 한가위는 일 년 중 가장 넉넉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바란다. 명절에 가장 생각나는 것은 역시 집을 떠난 식구이다. 평소와 달리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생각이 나는 시간이다. 이 자리에는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다. 어제 밤 라오스 평화선교사 부부가 추석 안부를 전한다.
“한국은 벌써 추석연휴가 시작되었다지요? 타지에 있으니 명절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뻔했습니다. 새롭게 이주한 지역에 와서 맞이하는 첫 추석인데, 그래도 주변에 한국 ㅅㄱ사님 가정도 몇 가정 있고, 또 이곳에서 만난 라오스 이웃들도 따뜻해서 외롭지 않은 명절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명절에는 더 풍성한 결실과 감사의 제목을 가지고 인사드릴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늘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그립고 보고싶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나도 그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추석은 바로 그리움의 명절이다. 둥근 보름달은 보고 싶은 얼굴일 것이다. 특히 해외에 사는 가족, 친지, 지인, 우리 동포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비는 절기이다.
예전에는 민족의 명절이니, 어쩌니 저쩌니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동안 외국에서 살다 보니 추석이니, 설날이니 참 대단한 명절이더라. 몇 일동안 온 나라가 들썩이는 이런 명절을 갖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큰 선물이다. 누구에게나 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골고루 누리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1)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지켜온 부림절이란 명절을 소개하고 있다. 3대 절기인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신 날을 감사하며 축하하는 축제일이다.
에스더서는 죽음의 낭떠러지에 빠졌던 유다 백성의 절망과 다시 생명을 얻은 기쁨을 맛보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이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축제 때 읽는 다섯 작은 두루마리의 하나인 에스더를 읽는다.
에스더서는 이방 땅에 살던 유다인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남다른 유일신 전통은 늘 이방인들에게 억압을 받았다. 유다인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은 늘 살얼음판처럼 불안하였다. 뿌리를 지키면서 사는 일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였다.
사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포로로 잡혀왔는데, 이젠 그들의 신앙 때문에 고난을 겪게 되었다. 조국을 떠난 디아스포라가 겪는 필연적인 역설이다.
역사적 배경은 이렇다. 고레스 왕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이제 자기 땅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그들의 신을 섬길 수 있도록 해방령을 내린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들과 함께 많은 유다인들이 귀향하였다. 제2성전을 건축하였고, 예루살렘 성벽을 복원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여전히 페르시아 땅에 머물렀다. 아마 그곳에서 집도 짓고, 혼인도 하고, 기반도 마련했기 때문에 선뜻 돌아올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아하스에로 왕이 통치하였다. 왕은 아각 사람 하만을 제국의 2인자로 세웠는데, 아말렉 족 하만은 유다 민족과 적대적인 역사를 갖고 있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하만의 조상 아각은 모르드개가 속한 사울 가문과는 원수였다.
에스더의 삼촌인 모르드개는 상관인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각의 후손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르드개는 오직 하나님께만 절하였고, 왕에게만 경의를 표할 뿐이었다. 하만은 이런 모르드개에게 분노하였고, 유다인 전체의 씨를 말리려고 들었다. 그래서 왕에게 유다인은 왕의 법을 지키지 않는 민족이라고 음해하였고, 그 결과 왕은 제국 전체에 유다인 진멸계획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하만은 유다인을 진멸할 길일을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그 제비를 ‘부르’라고 부른다. 유다인을 모두 죽이기로 ‘부르’를 던져 결정한 운명의 날은 아달월 14일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기가 닥쳤다. 모르드개와 모든 유다인들은 크게 절망하였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에 4:3).
모르드개는 왕후 에스더에게 유다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으니, 즉각 나서라고 촉구하였다. 마침내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 유명한 고백을 우리는 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2)
에스더의 믿음과 용기는 모범적이다.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였고, 자신도 죽을 운명에 처한 유다인임을 당당히 밝혔다. 에스더는 왕후였지만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진정 하나님의 손이 그를 도우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분명히 도우신다.
에스더의 믿음과 용기로 페르시아 제국의 제2인자 하만은 몰락하였다. 그는 자신이 꾸민 불의 때문에 고꾸라졌다. 사람의 목숨을 제멋대로 죽이려 한 자의 당연한 결과였다. 성경은 불의한 자의 종말을 가리켜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시 7:16)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교만한 인간,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시키려던 지배자의 종말이었다. 하만은 졸지에 죽었지만, 그가 죽이려던 유다인에게는 생명과 평화가 찾아왔다.
상황이 바뀌었다. 제2인자 하만은 나무에 달려 죽고, 그가 죽이려던 유다인 모르드개가 제국의 제2인자가 되었다. 유다 민족은 죽음 직전에서 살아나게 되었다. 제사상이 잔치가 되고, 장례일은 명절이 되었다.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에 8:16).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 하만의 음모에 희생양이 될 뻔한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출애굽하면서 경험한 해방의 기쁨을 다시 누리게 되었다. 그들에게 부림절은 제2의 유월절이었다. 다시 출애굽을 경험하는 듯, 새로운 명절이었다. 마치 출애굽 전야의 밤처럼 해방을 맞은 것이다.
본문은 명절을 가리켜 이렇게 설명한다. “잔치를 베풀고 즐기”(19, 22)는 날이다. 고난과 아픔의 기억을 잠시 잊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시름과 염려를 함께 나누면서 식구가 힘을 모아 다시 새로 살 지혜를 모으는 날이다.
3)
부림절은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경은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원근을 막론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20-21).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슬픔이 기쁨으로 달라졌다.
애곡해야 할 날이 즐거운 명절로 변화하였다.
유다인들은 지금도 하만이 유다인들을 죽이기로 확정했던 12월 13일을 ‘에스더의 금식일’로 지킨다. 그리고 14일과 15일을 민족적인 명절인 부림절로 지킨다. 이 날은 큰 잔치를 베푼다.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없도록 배려한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22).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가 생사를 책임지지 못하는 처지의 유다인을 돌보셨도다!
에스더 이야기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닮았다. 두 사람 모두 포로로, 종으로 잡혀 간 신세였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한다. 포로의 자손이 왕후가 되고, 죄수의 신분이 총리로 변하였다.
그들 에스더와 요셉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때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과단한 결단성과 하나님의 뜻을 믿었던 신앙의 인물들이다.
에스더는 말한다.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요셉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당신(형)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고백은 얼마나 위대한가? 사람들은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갖는다.
먼저 좌절부터 하는 사람이 있다. ‘내 코가 석자’여서 남의 권면도 듣지 못한다. 그러나 ‘한번 죽지 두 번 죽나’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올해 추석에 보름달을 잘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기후 위기로 날씨가 제멋대로다. 사실 같은 달을 쳐다보더라도 사람마다 생각이 제 각각이다.
유럽 사람들은 달 속에서 유형 당한 남자의 얼굴을 본다. 그래서 보름달을 무서워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질투하다 쫓겨간 여인의 낯을 본다. 아랍 사람들은 낙타를, 인도사람들은 토끼를, 중국 사람들은 두꺼비를 본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계수나무 꺾어다가 초가삼간 지어 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사는 꿈을 본다.
올해 보름달은 그런 그리움을 가득 담은 둥근달이면 좋겠다.
신앙은 상황을 변화시키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나와 세상을 변화시킨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편에 선다면, 적어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이것은 에스더의 믿음이었다. 유다인 모르드개의 고백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내 인생을 명절로 만들어 가려는 믿음의 길이다.
2011년 늦가을에 일본으로 평화기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 오사카에 있는 쯔루하시(鶴橋) 시장을 방문하였다. 그 일대는 코리아타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장 골목이 마치 안양중앙시장의 한 구석같은 풍경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들, 반찬가게, 떡집 그리고 전 집들이 있었다. 재일동포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는 기회였다.
그때 전 집을 보면서 목구멍으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감동같기도 하고, 서러움 같기도 한, 아마 재일동포에게서 느끼는 고난의 공감대 같은 것일 듯하다. 일상의 풍경에서도 그랬으니, 만약 추석 풍경을 보았다면 더욱 깊은 민족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색동교회는 명절이란 느낌을 담고 있다. 아마 명절을 색깔로 표현하라면 ‘색동’일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모든 명절의 대표 색깔은 색동이다.
그 명절은 억지로 가야 하는 귀성 행렬도 아니고, 음식 장만에 시달리는 피곤한 날이 아니며, 사랑이란 이름으로 젊은이에게 의무를 강요하는 날이 아니라, 누구나 기뻐하고, 삶이 회복되며 힘을 받는 그런 날이다.
우리 교회가 그런 명절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민족의 명절을 기억하고, 그 아픔과 기쁨까지 베풀고 누리는 그런 주님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명절 같은 교회니만큼 여러분도 명절을 명절답게 잘 쇠기를 바란다.
바라기는 우리 민족, 특히 남과 북의 백성들, 해외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그리고 더불어 사는 이웃, 모두가 함께 베풀고 즐기는 명절을 누리는 그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 모두의 삶 위에 그런 넉넉한 은총을 베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