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李秉岐(1892 ~ 1968)】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1931년 조선어학회 강사」
1892년 1월 28일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여산면(礪山面) 원수리(源水里)에서 이채(李倸)와 윤병(尹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가람(嘉藍)이다.
1898년 고향 사숙에서 한문을 시작하였고, 1906년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세우게 되었다. 20세 되던 해인 1910년 3월 전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1912년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문법을 배웠다. 1910년 3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남양공립보통학교·전남제2공립보통학교·여산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3월 교직을 그만두고 상경해서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만주를 여행하였다. 같은 해 10월 만주행을 독립운동과 관련 것으로 의심한 일제 경찰에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1920년 서울에 체류하면서 조선불교회·중앙구락부·대종교 등에 참여하며 국학 문적을 수집·연구하기 시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하며 창작을 시작하였다.
1921년 11월 권덕규(權悳奎)와 조선어사전 편찬을 계획하였다. 또한 임경재(任璟宰) 등과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발기회를 갖고, 12월 조선어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총회에서 간사를 맡았다. 1922년 4월 동광·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습자를 강의하였다. 1926년 10월 『동아일보』에 시조 관련 논문을 연재하는 한편 실제 시조를 창작하여 그 지위와 가치를 높이는 일에 앞장섰다. 같은 해 영도사(永導寺)에서 시조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7년 2월 권덕규·최현배(崔鉉培)·정열모(鄭烈模)·신명균(申明均) 등과 한글사(社)를 조직하여 동인지 『한글』 창간호를 발행하여 한글문화의식을 기여하였다.
1928년 가요연구회를 개칭하여 고전가사를 광범위하게 연구할 수 있는 조직을 확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 시조시 관련 논문 발표, 시조시 창작, 시조시 강연 등 시조시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국민문학론을 주창한 김영진(金永鎭)·염상섭(廉想涉)·양주동(梁柱東) 등과 뜻을 같이해서 시조시의 현대적인 혁신과 부활에 선두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1920~30년대에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계축일기(癸丑日記)』·『가루지기타령』 등 우리 고전의 발굴과 수집에 열의를 쏟았다.
1929년 권덕규와 함께 결성한 조선어연구회가 조직한 조선어편찬회에서 위원을 맡아 한글문화운동을 계속해갔다. 1930년 조선어연구회 한글철자법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동아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조선어연구회를 확대·개편한 조선어학회의 일원으로 전주(全州)·군산(群山)·여수(麗水)·목포(木浦)·영광(靈光) 등지를 순회하며 한글강습회 강사로 참가하여 수많은 지도층 청년들에게 한글을 강습하고 민족의식 함양에 기여하였다. 1934년 5월에는 진단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5년 1월에는 조선어학회 산하 조직인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22일 조선어학회 사건에 김선기(金善琪)·이강래(李康來) 등과 함께 구속되어 함남 홍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11개월 간 투옥되었고,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1945년 8월 17일 여산민회(礪山民會) 부위원장을 맡아 고향인 전북 익산의 안녕과 질서를 확립하고, 같은 해 10월 30일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관에 취임하여 중학교 국어 교과서 수록 작품의 선정에 관여하였다.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전임교수가 되어 ‘국문학개론’을 강의하였다. 1951년부터 전북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주요 저서로 『가람시조집』, 『국문학전사』, 『국문학개론』, 『가람문선』, 『가람일기』가 있다.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