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람들의 글자는 대개 무게가 없고 경박스러워 삐딱하게 기울어지거나 날카롭고 약해 보이지 않으면 사납고 거칠다. …어찌 심히 개탄스러운 마음을 이길 수 있겠는가.'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지은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 후기 문예부흥을 이끈 정조는 순정하지 못한 당대의 서풍(書風)을 바꾸고자 했다. 이른바 서체반정(書體反正)이다. 정조는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유생의 필법이 바르지 않다 하여 낙방시키기도 했다.
정조가 215년 만에 부활하여 우리 시대를 본다면 개탄을 넘어 통탄을 하지 않을까 싶다. 정조는 점획이 서예의 법도에 벗어나도 외형만 그럴듯하게 쓰면 잘 쓴 글씨라고 여기던 세태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런데 요즘은 글씨의 외형이 어지러운 것은 물론 손 글씨 자체를 어려워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평소 손 글씨를 쓸 일이 너무 없다 보니 정작 글씨를 써야 할 상황이 되면 당황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손 글씨를 쓸 기회가 왜 줄어드는가. 컴퓨터, 휴대폰 등 디지털 장비가 발달하고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연필·펜 같은 필기구를 쓸 일이 현저히 줄어든 탓이다. 어디서든 문서 작성은 컴퓨터 자판과 마우스로 대부분 처리한다. 학교 칠판도 대형 스크린이나 프로젝터로 대체되면서 젊은 선생님들이 판서에 애를 먹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악성(樂聖) 베토벤은 악필(惡筆)로 유명했다. 그의 명곡 '엘리제를 위하여(Fur Elise)'는 원래 '테레제를 위하여(Fur Therese)'였는데, 출판사 직원이 글씨를 잘못 알아보고 적은 것이 그대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베토벤 같은 저명인사는 악필이 역사의 에피소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악필은 대다수 사람에게 큰 콤플렉스다. 특히 입사 전형에서 논술 등 글쓰기를 요구하는 직장에 가려는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악필이 치명적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500여 년이 되는 오늘, 자신의 한글 필체를 한 번쯤 돌아보면 어떨까. 정갈하고 개성적인 한글 서체를 갖는다면 삶도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지만, 연애편지는 직접 손으로 정성들여 써야 더 효과가 있지 않을까. 부모들도 자녀들의 선행 학습에만 골몰할 게 아니라 어릴 적부터 글 쓰기 연습도 부지런히 시켜야 장래가 훤하지 싶다.
글쓴이: 장지태 부산일보 수석논설위원
첫댓글 글씨는 아니지만 문체(文體)가 문제된 사례가 호학군주인 정조임금과 조선의 명문장가 연암 박지원간에 있었는데,정조는 박지원에게 내린 어명에서,“요즈음 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 죄이다. 이 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하게 해야 한다.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