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성당 제대 이야기] 가르멜 수도회 인천 수도원 소성당
가르멜 수도자들의 마음의 고향
2월 2일은 요셉 성인과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에 바치심을(루카 2,22-38)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이자 ‘봉헌 생활의 날’이다.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하느님께 봉헌된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쳐 모범을 보여 준 봉헌의 삶을 본받아 2000년대 복음화의 주역이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1997년 봉헌 생활의 날을 제정했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정결, 청빈, 순명이라는 복음적 권고의 삶을 사는 봉헌 생활자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몫을 잘 수행할 때 교회가 내적으로 충만한 생명력을 지니고 주님의 충실한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주님만을 바라는 열정이 교회 전체에 성령의 불을 전하기 때문이리라.
하느님과 사랑 가득한 합일
한국 가르멜 수도회의 첫 공동체 창립 미사는 1974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거행하였다. 당시 마산교구장 장병화 주교의 초대로 프랑스 가르멜 남부 관구에서 양성을 받은 박병해 신부와 정대식 신부, 이탈리아 베네치아 관구의 요아킴 귀조 신부, 그리고 프랑스에서 양성을 받던 박태용 수사가 그해 종신 서원을 하고 창립에 합류하였다.
성직 수도회라 신학생을 양성하고자 서울 혜화동 신학교 근처 삼선교 지역에 임시 공동체를 설립하였지만, 비싼 땅값 때문에 인천시 계산동의 계양산 자락에 첫 수도원을 세웠다. 당시 창립자들은 수도원의 재정 형편이 어려워 손수 집을 지을 재료를 구하러 다녔다.
그렇게 시작된 수도원에 젊은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젊은이들, 하느님을 향해 더 열심히 나아가겠다고 결심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고자 부단히 자신과 싸웠다. 그때 이 젊은이들을 키운 것은 주님을 만나는 자리인 소성당이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통나무 제대가 있다.
거대한 통나무 하나로 이루어진 제대
“투박하고 담백한 소성당 제대가 상징하듯 당시 수도원의 모든 것은 단순했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주님만을 바라보는 데만 열렬하였고, 외부의 화려함은 모두 잊고 살았습니다. 겨울이면 두툼한 솜이 불을 한 시간쯤 비벼 열을 내고서야 잠이 들었고, 장작을 때 데운 물을 조금씩 나누어 썼습니다. 식사와 이발, 농사는 형제들이 서로 도와가며 했습니다.”
수사들은 날마다 아침과 저녁 한 시간씩 제대 앞에 무릎을 꿇는다. 묵상 시간이 끝나면 이 제대에서 만나고자 그리 애쓰는 예수님 사랑의 신비를 미사를 통해 재현하고, 형제들은 수도 생활의 활력을 얻었다.
당시 제대는 정대식 신부가 만들었다. 정 신부는 날마다 몇 시간씩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이라 말씀으로 온화한 기운이 감돌게 하고자 했다. 그렇게 인천항 일대를 뒤져 외국에서 들여온 커다란 통나무를 골랐다.
지름 1미터, 길이 1.5미터가 넘는 통나무를 가로로 잘라 3분의 2는 제대, 3분의 1은 받침대로 썼다. 잘라 평평해진 부분을 각각 위아래에 두고 두 원통 부분은 파이프를 잘라 앞과 뒤에 여섯 개씩 열두 기둥을 세워 지지했다. 열두 개의 기둥은 열두 사도,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인천 수도원 소성당의 제대는 한국 남자 가르멜 정신의 시작을 체화하여 언제나 그들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한다고 한다. 일곱 개의 공동체로 성장한 지금도 그 제대 앞에서 묵상하며 열렬했던 기도 생활의 현장을 원체험처럼 품고 수도 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수도자의 삶은 자신을 비우는 삶, 청빈, 정결, 순명을 통하여 자신의 것을 버리고 자신의 애정을 버리며 자신의 의지를 버리는 것. 그러나 이런 버림을 통하여 수도자는 채워질 수 있으니.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으로 채워질 수 있으니….”
[경향잡지, 2020년 2월호, 글 · 사진 김민수 편집장]
(청년시절에 신부님, 수사님, 수녀님, 서울서 온 신자분들과 미사를 올렸고, 성탄 때는 수사님들이 기타를 치면서 신나게 노래 불렀고, 영성체 때 99도짜리 포도주에 다소 취하기도 했고, 남은 포도주도 나누어 마신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