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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1965년 8월 6일자에는 「송헌주씨 별세」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짧게 송헌주(宋憲澍, 1880-1965)의 생애를 정리하고 있으나 해방된 지 20년이 지나서인지 그의 독립운동과 관련한 공적을 제대로 밝히지는 못하였다.
송헌주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는 아니다. 그가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미주 독립운동에 대한 지금까지 우리의 지식은 이승만ㆍ안창호ㆍ박용만과 같은 이름난 지도자들에 국한된 점이 없지 않다. 다행히 최근 그들의 독립운동을 받쳐주고, 실제 미주 한인들을 지도하고 봉사하였던 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관련 자료의 확보와 연구자들의 증가에 힘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송헌주 역시 실제 미주에서 한국독립운동과 한인들을 위하여 공헌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다. 1910년대 로녹대학과 프린스턴대학을 마친 그는 이미 1907년 헤이그특사의 통역을 맡아 활동한 일을 비롯하여, 1920년 전후 구미위원부 위원으로도 일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재미한인의 통합을 위하여 진력한 바 있었다. 또 1930년대 후반 로스앤젤레스에 새로 지은 국민회관의 건축위원장과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국민회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0년대에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지도부의 일원으로 한인경위대의 사관으로 선임된 바 있었고, 해방 직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연합국회의에 참가할 임시정부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송헌주는 이민 초기부터 해방될 때까지 미주 한인독립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2015년 7월 31일은 송헌주 서거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7월달의 독립운동가로 추대된 그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을 되살려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그분의 생애에서 확인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지만, 조국의 광복을 위한 모습은 충분히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송헌주는 1880년 10월 22일, 오늘날 서울 마포구 공덕동인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62통 9호에서 은진을 본관으로 한 송득인과 창녕 성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시기 작성된 호적에는 그의 이름이 헌길(憲吉)로 기재되어 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양반 출신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1890년대 후반 관립 영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아마도 당시 다른 젊은이들처럼 전통교육을 받다가 새롭게 설립된 신학문 교육기관에 입학하였을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된 이후 관직에 관심이 있던 젊은이들이 많이 진학한 곳이 관립 영어학교였다. 물론 새로운 서양문명에 대한 관심 역시 그 학교에 진학한 이유였을 것이다. 관립 영어학교는 1894년 2월에 설립되었는데, 정부에서는 그보다 일찍 영어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883년 동문학과 1886년 육영공원을 설립한 바 있었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1891년 서울에 일어학교를 설치한 뒤 갑오개혁을 전후하여 영어ㆍ법어(프랑스어)ㆍ한어(중국어)ㆍ아어(러시아어)ㆍ덕어(독일어)학교 등 외국어학교를 설립하여 외국어를 교육하였다. 뒤에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되는데 영어학교의 규모가 가장 컸다.
송헌주가 언제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독립신문』 1898년 5월 31일자에는 훈련원에서 개최된 외국어학교 대운동회를 소개하였는데, 영어학도 송헌주가 220보 달리기에서 2등을 하여 상으로 서양 칼과 필통을 받았다는 기사를 통해 1898년에 그가 영어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11월 영어학교와 일어학교 생도 20명을 양지아문(量地衙門)2) 양지견습생으로 보임할 때에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1년 뒤 1899년 11월 해고된 교사 허치슨(W. F. du. Hutchison)을 재초빙하지 않으면 영어학교 학생들이 퇴학하겠다고 하여 문제가 되어, 학부에서는 해당 학생 12명을 퇴학시켰는데 그 중 그도 포함되었다. 송헌주 등 퇴학생들은 허물을 뉘우친다고 청원하여 4개월 뒤인 1900년 3월에는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송헌주는 영어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았다. 영어학교의 제1회 졸업식은 1903년 2월에 있었는데, 졸업생 4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보다 일찍 1901년 2월 15일자로 농상공부 통신사(通信司) 전화과(電話課)의 주사로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전화과 주사직은 바로 다음 날인 2월 16일자로 사임하였으므로 결국 하루 동안 관직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관직에 임용된 후 바로 사직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는데, 관직에 나아가고자 하는 계층이 관직경력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다. 아마도 그가 관직의 경력을 가지고서도 관립 영어학교에 계속 재학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그는 관립 영어학교에 얼마나 재학하였을까? 프린스턴대학교에 남아 있는 대학원 지원서에는 왕립 영어학교(the Royal English Academy)에서 5년간 수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신뢰하여 추정하면, 1900년까지 영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고 전제하고 1896년 전후에 영어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지원서에는 1886년 10월 22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국 대학에 입학할 때 연령을 낮춰 신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송헌주는 1901년 초에는 영어학교를 그만둔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대체로 1903~1904년 경 하와이로 건너가 1905년에는 한인상조회를 조직하고 『포와3)한인교보』의 발간에 관여하는 등 감리교에서 크게 활동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기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그가 하와이에서 이민회사의 사무원이었다는 현순의 『포와유람기』의 기록으로, 이민회사의 직원으로 하와이에 갔으리라 짐작된다. 하와이에 이주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일찍부터 한인사회와 교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점으로 미루어 국내에서도 기독교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인용한 『신한민보』의 사망기사에는 송헌주가 1903년 하와이 왔다고 하였고, 일본 정보문서에는 1904년에 온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한국인을 정리한 명부에서는 송헌주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Song, H. F.’라는 인물이 송헌주일 가능성이 크다. ‘F.’가 ‘J.’의 오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03년 12월 5일에 도릭호로 호놀룰루에 도착한 ‘Song, H. F.’는 서울 출신의 기혼으로 25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송헌주의 인적 사항과도 유사하다. 그리고 그는 단신으로 하와이에 왔다. 호적에 의하면 1902년 10월 딸 송순이가 출생하였다. 적어도 1902년 이전에 안동 권씨와 결혼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아내와 딸은 국내에 남겨두었던 것이다. 이 점은 그가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에서 유학한 다음, 귀국할 생각으로 하와이에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헌주가 하와이에 도착하여 이민회사의 사무원으로 일한 사실은 앞서 밝힌 현순의 『포와유람기』에서 확인된다. 현순은 송헌주가 1905년 7월에 교육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하와이 한인사회와 한인교회에서의 송헌주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몇 가지 사실을 찾을 수 있다.
1905년 5월 7일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 와드만 감리사의 집에서 남학생 기숙학교의 설립이 제안되었는데, 송헌주가 그 제안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 7월에는 송헌주와 해관 통역인 박윤섭이 주도하여 교육회를 조직하고 와드만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8월 24일에는 호놀룰루 한인예배당에서 한인상조회가 결성되는데 송헌주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한인동포들이 상호 상조를 위하여 와드만 목사의 지도로 단체를 조직하였다. 한인상조회장에 그가 선임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영어에 능통하면서도 바로 한인사회와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1905년 12월 28일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회 감리교연회에서 송헌주는 『포와한인교보』의 발행인으로 선임되었다. 『포와한인교보』의 주필은 윤병구 목사가 맡았다가, 민찬호 목사가 뒤를 이었다. 따라서 하와이에서 송헌주는 목사나 전도사는 아니었지만 한인 기독교계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하겠다. 송헌주는 감리사와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한국교인들의 권익과 발전에 앞장섰다. 1905년 10월 하와이에 왔던 외부협판 윤치호가 귀국할 때, 귀국선에까지 환송하였다.
1906년 4월 송헌주는 하와이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 본토로 가고자 호놀룰루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차이나호에 몸을 실었다. 이때 동생과 동행했다는 신문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 동생 송헌길이 호놀룰루에 왔다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간 것 같다. 송헌길은 이후 뉴욕에서 계속 거주하다 1944년 1월 사망하였다. 아무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4월 19일, 그들은 하선을 할 수 없었다.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도시 곳곳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차이나호는 4월 21일에 이르러 하선 할 수 있었는데, 이들 형제를 포함하여 25명의 한인이 배에 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후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으나, 송헌주는 곧 뉴욕으로 갔던 것 같다. 송헌주는 뉴욕에 머물며 한국유학생들을 정부 관비생으로 만들기 위하여 워싱턴의 일본공사관을 통하여 정부에 청원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부근 오클랜드에 있던 양주삼은 이를 전문하고 『공립신보』 1906년 7월 14일자에 광고를 내어, 자신의 이름을 송헌주가 허가 없이 사용하였다고 밝힌 것으로 그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후 정부 관비생 문제가 재론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주미 일본공사관이나 통감부에서 그의 관비생 청원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907년 6월 송헌주는 버지니아 주 세일럼에 위치한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은 당시 한국인에게 친숙한 곳이었다. 로녹대학 학장이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1892년 주미한국공사관과 교섭한 이래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이 학교에 재학하였다. 1893년 서규병이 입학하여 1898년 졸업하였으며, 의친왕 이강을 비롯하여 박희병과 김규식 등이 거쳐 간 곳이었다. 1897년에는 서광범이 명예석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1920년대까지 30명 가까운 한인유학생이 이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에 입학한 송헌주는 1914년에 이르러서야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까지 7년이나 걸렸던 것은 한국독립을 위하여 유럽을 오가느라고 중간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송헌주는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고종황제의 특사로 파견된 이상설ㆍ이준ㆍ이위종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미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정순만을 통하여 특사문제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박용만은 그해 7월 윤병구와 송헌주를 헤이그로 보내 특사들을 돕게 하였다. 윤병구와 송헌주는 하와이에서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송헌주는 대학에 입학만 하고 바로 유럽으로 떠났다. 아무튼 두 사람이 헤이그에 갔으나 특사들은 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이준은 분사하고 말았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윤병구와 송헌주를 대동하고 7월 19일 경 헤이그를 떠나 영국을 방문한 뒤,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고자 8월 1일 뉴욕에 도착하였다. 9월 초 이들은 헤이그로 돌아가 이준의 장례식을 치르고, 파리와 베를린, 로마 등을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였다가 런던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5개월을 각국의 지도자 등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08년 2월 송헌주와 윤병구는 이상설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7월에 덴버에서 박용만의 주도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하였다.
이후 송헌주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로녹대학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10년에 재입학하여 1914년 6월에 졸업한 것으로 나타난다. 재학 중에 미식축구부, 농구부, 테니스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외국인학생회 회장과 키케로축전 회장 등을 맡기도 하였고, 학생토론단체의 멤버이기도 하였다. 로녹대학에 재학하며 운동과 학내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남의 도움 받는 것을 싫어하여, 노동으로 학비를 마련하였다. 로녹대학을 졸업한 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대학원에 진학하였으며, 1915년 6월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박사과정에 진학하였으나, 1916년 3월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으로 초빙되어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갔다.
하와이 한인중앙학원은 1906년 7월에 설립된 한인기숙학교로 감리교회에서 맡아 운영하던 곳이었다. 송헌주가 1905년 발기한 교육회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학교였으나 송헌주가 1906년 4월 본토로 이주하여 그 설립을 보지는 못하였다.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온 이승만이 1913년 9월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한인중앙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남녀공학으로 만들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한인중앙학원의 여자기숙사 문제로 국민회와 결별하였고, 새로운 감리사 프라이 목사와도 교회와 학교의 재정문제 등으로 대립하다가 1915년 6월 한인여학원을 별도로 설립하여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감리교에서는 페지라는 인물을 교장에 임명하였지만 한인학생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결국 1916년 송헌주를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송헌주는 프린스턴에서 시카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하와이 감리교회에서는 송헌주를 한인중앙학원 교장과 함께 호놀룰루의 제일한인감리교회의 목회도 맡기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그를 목사로 지칭하는 신문기사도 보이지만, 그가 1916년 전후 감리교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혹 전도사 자격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되지만, 제일한인감리교회의 목회를 맡으면서 집사목사 안수를 위한 신학반에는 참석하여 1917년 당시 3년급이었다. 그렇다면 하와이에 돌아오면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리고 1917년 2월에는 『한인공보』라는 신문이 창간되는데, 의사인 이희경이 사장을, 송헌주는 총무와 재무를 맡았다.
하와이에 온 송헌주는 송메리와 재혼한 것으로 보인다. 호적에는 1919년 6월 3일자로 부인이 안동 권씨에서 전주 이씨로 정정되었다. 아내와 딸을 국내에 남겨두고 미국에 온 그가 어떠한 과정에서 송메리와 결혼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딸 송순이는 1923년 김은제와 결혼한 것으로 호적에 기록되어 있다. 하와이 한인이민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기고 있는 이덕희의 연구에 따르면, 송헌주는 1917년 8월 29일 한인여학원에서 사순남이(Mary Soonamie Sah)와 결혼식을 올렸다. 사순남이는 12년 이상 뉴욕에서 살며 고등학교를 마치고 노스필드 여학교에서 1년 수학한 뒤, 워싱턴의 내쇼날 트레이닝 스쿨에서 3년간 유치원 보모학을, 그 후 뉴욕의 바이블 티쳐즈 트레이닝 스쿨에서 3년간 성서교사 훈련을 받았다. 그렇다면 사순남이가 송헌주의 국내 호적에 정정되어 실린 전주 이씨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씨라는 성씨의 문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녀는 1886년 4월 18일생으로 기록되어 송헌주와 결혼할 당시 30세 전후였을 것이다. 아마도 사순남이는 송헌주와의 결혼을 위하여 하와이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송헌주가 1916년 3월부터 교장으로 일한 한인중앙학원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못하였고, 오히려 1년 뒤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1917년 7월 26일자로 하와이 제일한인감리교회에서의 목회도 한인들의 재정부족과 합동력 결핍을 이유로 사임하였다. 송헌주는 이어서 이승만이 운영하던 한인여학원의 부교장으로 옮겨갔다. 감리교회에서 이승만으로 야기된 한인중앙학원의 침체를 벗어나 발전을 기대하고 초빙한 송헌주가 한인중앙학원을 사임하고 한인여학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결국 그가 하와이 한인교육에 있어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형국으로 돌아섰음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가 제일한인감리교회를 사임한 것도 그러한 이유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인여학원의 운영에 참여한 송헌주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각 지방찬성회장들에게 한인여학원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인중앙학원을 사임하고 이승만이 교장으로 있던 한인여학원의 부교장으로 전직하였지만, 하와이 감리교회와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송헌주는 연회의 직임과 각종 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이승만도 감리교 연회와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교인들이 감리교회와 별도로 신립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1918년 7월이었고, 그 명칭을 한인기독교회로 한 것은 그해 12월이었다. 아무튼 송헌주와 이승만의 관계는 한인여학원에서 비롯되었으며, 1917년 말 송헌주가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부회장에 추천된 것도 그러한 관계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헌주는 부회장 후보를 사양하였다. 하와이 감리교회 연회록에는 그가 미국정부의 특별업무(Special Service U. S. Government)를 맡은 것으로 기재되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으나 연회가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한인기독교나 교육관련 업무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거족적인 3ㆍ1운동이 일어났다. 3ㆍ1운동으로 국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에서는 한성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국무총리제의 국무총리로 선임하였고, 한성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로 선임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president’로 표기하여 논란을 일으켰으며, 5월에 워싱턴에 ‘집정관총재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집정관 총재를 자임하고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통령중심제로 개헌하여 이승만은 임시대통령이 되었다. 송헌주는 3ㆍ1운동이 미주에 알려진 직후부터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독립금’을 기부 받는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4월부터 6월까지 2개월 동안 5만 달러를 약정 받았으며, 현금 3만 5,000달러를 모금하여 그 가운데 2만 달러를 이승만의 워싱턴 사무소 설치 등 외교활동에 사용하도록 지원하였다.
1919년 8월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본래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재무위원부를 만들려고 하다가, 명칭을 구미위원부라 하였다.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활동한 김규식을 위원장에 선임하고, 국민회의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에서 1인씩을 선임하고자 하였다. 캘리포니아대학 출신의 목사로 북미지방총회장이던 이대위와 하와이의 송헌주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송헌주가 3개월 사이에 3만 5,000 달러를 모금한 능력을 이승만이 높게 평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헌주는 1919년 8월 말 하와이를 출발해 9월 1일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워싱턴으로 떠났다. 구미위원부는 위원장 김규식, 재무 이대위, 서기 송헌주로 이루어졌다. 사실 구미위원부는 외교활동보다 재정문제를 맡게 되었는데, 대한인국민회와 애국금 모집문제로 갈등을 벌이게 되었다. 애국금을 국민회에서 걷어 임시정부로 송금하던 것을, 이승만은 국채 즉 공채표를 발행하여 구미위원부에서 전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국민회에서는 애국금과 공채표의 병행을 주장하였는데,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만이 재정을 관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의 해결을 둘러싸고 이대위가 9월 구미위원부 위원직을 사임하게 되었고, 결국 이 문제는 1920년 2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이 국민회 중앙총회가 관장하던 애국금제도를 폐지하고 독립공채에 응모하라는 포고를 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미주의 재정관할권을 확보한 구미위원부는 공채표 판매에 직접 나섰다. 1920년 6월 송헌주는 워싱턴을 떠나 7월 6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공채표 판매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민회 하와이총회에서는 구미위원부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갑자기 이승만이 7월 22일 송헌주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송헌주의 응답이 없자 7월 30일에 해임을 통보하였다. 이승만이 송헌주가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한다고 취한 조치였다. 이에 김규식도 사임서를 제출하였지만 반려되자 장기휴가원을 내고 하와이를 거쳐 상해로 떠났다. 이대위ㆍ송헌주ㆍ김규식 등 구미위원부 위원들이 이승만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송헌주는 8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8월 11일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중가주 리들리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송헌주가 김종림이 사장인 리들리건제회사의 이사를 맡은 것으로 보아, 과실과 채소를 건제하던 이 회사에 투자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리들리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다가, 1924년 전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여전히 ‘식물 상점’을 운영하였다. 1925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국내의 기근을 돕기 위하여 조직한 임시조국동포구제회의 위원장을 맡는 등 송헌주는 1920년대 로스앤젤레스에서 상점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그가 독립운동 일선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기할 것은 1921년에 그는 독립운동이 외교노선에서 성공하지 못하였으므로, 무장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신한민보』 1921년 10월 20일자 「송헌주 학사의 연설」).
송헌주는 1920년대 미국 서부에서 노동사회개진당의 활동에 적극 나섰던 것으로 회고하였다. 이살음이 주도한 노동사회개진당은 국민회 중심의 미국 본토에서 이승만과 구미위원부를 지지하였던 단체로 알려져 있는데, 송헌주가 이 단체의 대표원을 맡고 있었다. 이 단체의 고문부에 찬성장으로 서재필과 김규식이, 대표원으로 조소앙과 송헌주가 선임되었다. 송헌주는 구미위원부 문제나 외교노선 등으로 이승만과 갈등이 없지 않았으나 전반적으로는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에서 탄핵되었을 때, 노동사회개진당에서는 임시정부에 성토문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송헌주는 이 시기 국민회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본래 노동사회개진당은 1919년 12월 조소앙의 유럽외교를 후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으로 1920년대 초기에 활동이 두드러졌고, 이살음과 김정진 등이 주도하였다. 송헌주가 후에 이 단체와의 관계를 회고한 것을 보면, 알려진 것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송헌주가 미주로 옮긴 이후 감리교회 목사로서의 활동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감리교회 목사로서의 활동도 그만 둔 것으로 짐작된다.
송헌주는 국내에 두고 온 딸 송순이를 미국으로 부르고자 세 차례나 시도하였다. 송헌주가 도미할 당시 딸은 두세 살 정도의 아이였다. 딸의 도미는 일제가 불허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송순이는 국내에서 차미리사의 보호와 도움을 받았는데, 차미리사는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하여 1920년 근화여학교(현 덕성여대ㆍ덕성여중고)를 설립한 여성교육자였다. 송헌주는 1912년 귀국하는 차미리사에게 국내에 있는 딸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송헌주는 1965년 서거할 때까지 딸을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다행히 1950년대 도미한 외손자 김동국은 만날 수 있었다.
송헌주는 1930년에 로스앤젤레스 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다시 민족운동 전선에 나섰다. 1929년 말부터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되자, 1930년 1ㆍ2월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지에서 학생운동을 지원하며 미주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키고자 공동회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공동회는 “한국독립운동을 협조하며 나성 한인사회의 행복을 증진하기로 목적”하였는데, 송헌주는 위원제로 운영되는 공동회의 7인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공동회가 국어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선임한 교육위원에도 선임되었다. 공동회는 국민회와는 별개로 조직되었으며, 임시정부의 지원을 내세웠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0월 1일 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에게 혁명역량의 집중과 혁명동지들과의 연합전선을 희망하는 공함을 공포하였다. 이에 호응해 국민회, 중가주와 로스앤젤레스의 공동회, 멕시코 자성단 등이 그 해 12월 미주한인연합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송헌주는 한재명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공동회를 대표하였고, 중가주에서는 김정진과 이살음이 대표자로 나섰다. 송헌주는 이 단체의 집행부 사무장(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단체를 이끌고 나갔다. “미주 한인 전체의 역량을 집중하여 임시정부를 후원하며 국민선전에 노력”한다는 언급대로 임시정부의 후원과 국민선전을 목적으로 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미주한인연합회는 송헌주 명의로 임시정부에 인준 청원을 하였고, 임시정부는 1932년 1월 이 단체를 공식기관으로 인정하며 미주의 인구세 수납업무를 위임하였다. 이어 미주한인연합회에 여러 단체가 가입하고 임시정부에 인구세를 송금하는 등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여러 기성단체의 연합회와 같은 성격의 미주한인연합회는 조직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으며, 내부 결속도 약하였다. 특히 북미 한인사회를 주도하던 국민회의 적극적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국민회는 미주한인연합회 내에서 다른 단체와 같이 취급되는 일이나, 연합회가 1933년 2월 제네바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던 이승만에게 격려전보를 보낸 점 등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으며, 연합회 무용론도 제기되고 있었다. 송헌주를 비롯하여 미주한인연합회를 주도한 이살음이나 김정진 등이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알려져 있었던 점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1933년 3월 김규식이 방미하여 미주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국민회가 단독으로 가입하며 미주한인연합회를 탈퇴하자, 연합회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중가주와 로스앤젤레스의 공동회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를 결정하면서, 공동회를 대한독립당으로 개칭하였다. 송헌주는 그 회장을 맡았다.
사실 송헌주와 김규식은 매우 가깝고 밀접한 관계였다. 그는 김규식의 로녹대학 후배였지만 동년배로 구미위원부에서 함께 일하였으며, 노동사회개진당에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김규식은 1920년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워싱턴에 있으면서 상해에 있던 신한청년당에 송헌주를 소개해 주었다. ‘의형제’ 사이였다고 송헌주가 회고한 것처럼, 송헌주는 김규식의 노선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로스앤젤레스 공동회 주최의 김규식 연설회에서 송헌주 부부가 거금 150달러를 기부한 것이 그 단적인 예였다. 해방 이후 환국한 김규식은 미군정청에 송헌주를 추천하였으며 송순이를 방문한 바 있다.
1934년 4월 임시정부에서는 송헌주를 재무부 주미 제4행서 재무위원으로 선임하였다. 하와이의 국민회와 동지회 대표, 그리고 미주의 국민회와 대한독립당 대표를 재무위원으로 선임하였던 까닭이다. 따라서 송헌주는 1934년 말까지 대한독립당의 명의로 인구세를 걷어 임시정부에 두 차례에 걸쳐 117원 50전을 송금하였다. 그러나 송헌주는 임시정부에 재무위원 사임청원을 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여 김정진을 재무위원에 임명하였다.
결국 송헌주가 앞장섰던 미주한인연합회와 대한독립당은 해체되고 말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국민회가 주도하는 미주 한인단체의 통합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1936년 5월 국민회가 주도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북미 각 단체대표자들이 모여 한인사회 발전책 간담회를 통하여, 국민회 중심의 통합이 논의되었고 로스앤젤레스에 총회관 건립 등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물론 송헌주도 이 간담회에 참석하였으며, 총회관 건축의연금으로 200원을 기부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송헌주는 국민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즉 송헌주는 1937년 1월 위원제로 개정된 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이어 국민회의 숙원사업인 로스앤젤레스에 새로 건립하는 국민총회관 건축의 책임을 맡았다. 건축위원회 위원장으로 그는 1938년 4월 17일 낙성식까지 총회관 건축에 진력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공헌이 미주한인사회의 공감을 받아 그는 다음 해인 1939년도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될 수 있었다. 중앙집행위원장으로 국민회 활동 전반을 관할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40년에는 국민회 중앙상무위원회 교육부장으로 봉사하였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전반까지 국민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송헌주는, 한인사회가 국민회 중심으로 통합하는데 기여하면서 국민회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관내에서는 좌우세력의 통일전선운동이 계속되었고,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었다. 미주에서도 임시정부 봉대와 재미한인단체의 역량집중과 항일운동의 강화를 위하여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였고, 그 결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한족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한족연합회는 호놀룰루에 의사부를,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를 두었는데, 북미와 하와이의 국민회, 동지회를 비롯하여 많은 단체가 참여하였다. 재정모금으로 임시정부의 활동과 미주에서의 외교 및 국방 공작활동에 대한 재정후원에 주력하였으며, 태평양전쟁 이후 재미한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인 신분증도 발급하였다.
송헌주는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 직후 집행부 위원으로 참여하며, 국방과장을 맡았다. 국방과장은 미국을 후원하기 위한 국방공채와 스탬프 구입, 미국적십자사 모금활동 후원 등의 업무를 담당한 모금책임자였다.
아울러 1941년 12월 한족연합회 집행부가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 주 민병대 소속으로 맹호군이라 부르던 한인국방경위대를 편성하자, 1942년 2월 사령관 김용성과 외교과 소속의 송헌주가 정위 계급으로 임명되었다. 또 1943년 국방과장인 송헌주는 한미인 전시저금회 회장으로 동포들에게 미국국방공채의 구매를 촉구하였다. 송헌주는 미주한인의 미국국방공채 구매 등을 맡은 한인사회의 모금책임자였다.
임시정부는 해외한족대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1941년 6월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는 규정을 공포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에 임명하여 대미교섭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그러나 주미외교위원부가 이승만 개인에 의하여 운영되자, 한족연합회는 미주 한인사회에서의 재정수합ㆍ관리권, 외교위원 선정ㆍ인사권, 중경특파원의 역할 등 재정ㆍ인사권에 대하여 주미외교위원부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국민회와 한족연합회에서는 이승만의 면직을 청원하기에 이르렀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는 1943년 12월 한족연합회를 탈퇴하였다.
송헌주는 한족연합회 국방과장과 연구부 위원으로도 활동하다가, 다시 1944년도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에 이어 두 번째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그해 4월 4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그것은 한족연합회에 파송된 국민회 대표원들의 주도로 한족연합회의 워싱턴 사무소 설치가 강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송헌주는 임시정부에서 임명한 정식기관으로의 일원화, 즉 주미외교위원부 이외의 기관 설치를 반대하였는데, 국민회의 대표원들은 한족연합회의 워싱턴 사무소를 설치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이에 반대한 송헌주는 중앙집행위원장직을 사임하였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민회를 탈퇴하였다. 이러한 송헌주의 행동은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한 주미외교위원부를 지지하는 셈이었다. 아무튼 송헌주는 무소속으로 있으면서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관계자들과 가깝게 지내 부부가 독립신문사의 사우로 참여하고, 군사운동 촉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한족연합회에서는 동지회가 불참하였지만 전체대표회를 개최하여 주미외교위원부 위원 15인을 선임하였다. 물론 이승만과 동지회 계열은 제외시킨 인선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서는 이때 선임된 위원들을 승인하지 않고, 직접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을 각 정파별로 안배하여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이승만이 위원장이었으며 송헌주도 위원에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승만을 임시정부가 신임하며, 한족연합회의 반이승만 분위기를 무시하였다는 점이었다.
임시정부가 한족연합회 대신 이승만을 지지하자, 한족연합회는 임시정부에 반발하면서 결별의 단계에 이르렀다. 임시정부와 한족연합회의 불화는 샌프란시스코회의 대표단 문제를 비롯하여 많은 부분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족연합회는 이승만에 적대적이었는데 송헌주는 이승만과 대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월 이승만이 임시정부에 재정문제를 보고하기 위하여 송헌주에게 의견을 구하는 편지가 남아 있음에서 짐작된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단장으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파견할 임시정부대표단을 구성하였는데, 한족연합회 인사들은 대체로 불참하였지만 송헌주는 참여하였다. 이승만과 한족연합회가 합동으로 조직한 해외한족대표단에도 송헌주는 포함되었으나, 결국 한인대표들은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가할 수 없었고, 이승만은 얄타밀약설을 발표하였다. 해방 직전 송헌주는 주미외교위원부와 샌프란시스코회의 한인대표단에 대표로 선임되었지만, 실제 활동이 불가능한 정치상황에서 해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 1945년 11월과 1946년 2월 한족연합회 한국파견대표단 14명은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였다. 송헌주 역시 국내에 들어와 일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김규식이 그를 추천하여 군정청의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도록 요청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해방되던 해 그는 65세의 노년이었다. 송헌주는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전보를 보냈고, 이승만은 1948년 8월 20일자로 로스앤젤레스 동지회를 통하여 감사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이승만은 지난 30년간 송헌주와 자신이 같은 이유로 일하였고, 송헌주의 충실한 봉사를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승만과 부분적인 갈등이나 대립이 없지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는 개인적으로 김규식과 밀접한 관계였다.
송헌주가 귀국을 원하였지만 귀국하지 못한 것은 이승만과의 관계 때문은 아니었고, 아마도 고령에 재정적인 부담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료의 확인이 필요하지만, 송헌주는 뒤에 국민회에 복귀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계속 상점을 경영하다가 1965년 7월 31일 85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로스데일공동묘지에 묻혔다. 그가 돌아간 지 30년 만에 대한민국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50주기가 되는 2015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독립운동을 기린다.
일찍부터 미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송헌주는 교육과 선교, 외교활동에도 진력하였고,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활동은 국민회뿐 아니라, 미주한인연합회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등 한인단체의 연합에 집중되고 있었다. 재미한인단체의 연합으로 독립을 당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송헌주 개인과 관련된 서술은 미국 거주 송헌주의 외손자 김동국 선생이 수집한 자료(호적ㆍ졸업장ㆍ공문ㆍ서한 등)에 크게 의존하였다. 지면을 통하여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