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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쇠법(七不衰法) 1
만법(萬法)의 원리인 성주괴공(成住壞空)과 같이한 국가의 흥망성쇠도 필연적인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한 나라가 패망하게 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외세의 힘에 의한 패망보다는 내부의 알력이나 부패로 인한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의 예를 보더라도 왕권의 타락으로 몰락한 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진시황의 진 제국이 그렇고,
가깝게는 붕당 정치로 몰락한 대한제국의 역사에서도 이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330년 동안 존속했던 몽골-튀르크계 왕조로, 전성기에는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국가인 무굴 제국이나, 삼 대륙을
거의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가 있다면, 부처님이 생존했던 인도에는 아쇼카
(Asoka) 왕이 있습니다.
아쇼카는 인도 마가다 국 제3 왕조인 마우리아 제국의 세 번째 임금으로 인도 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룬
왕입니다. 또한 그는 불교에 귀의한 뒤에 불교를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도 전역은 물론 나아가 동남
아시아와 중국, 중앙아시아 나아가 페르시아와 그리스, 이집트 등 헬레니즘 세계로까지 포교관을 보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천관산에 가보면 <아육왕 탑>이란 천연 돌 탑이 만들어질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진
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 경전에 나온 이야기를 약술(略述)합니다.
아쇼카 왕은 빔비사라 왕의 2번째 왕자로 태어났지만, 형인 수사마(修私摩)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일종의 찬탈인 셈인데 이로 인해 대신들은 물론 신하들까지 아쇼카 왕을 멸시하고 명을 잘 따르지 않았습
니다. 심지어는 그의 별호가 <무(無憂)>였는데 무화 꽃이 활짝 핀 것을 즐겼는데 나무가 그를 닳았다고
해서 궁녀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화과나무 꽃들 모두 꺾어버릴 정도로 아쇼카를 냉대했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한 아쇼카 왕은 그를 반대한 오백 명 대신들은 물론 궁녀까지 모두 참살해 버렸습니다.
빔비사라 왕에게는 101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친동생 한 명을 제외하고 이복형제인 99명 왕자를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물론 왕권 강화의 목적이 있었지만, 그의 살육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이를 본 성호라는 대신이 포악하게 변한 아쇼카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때리거나 죽이거나 하는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고, 응당 스스로는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드라마의 말을 빌리자면 살인은 청부업자에게 맡기고 점잖은 선한 사람 행사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받아들인 아쇼카 왕은 기리가(耆利柯)라는 백정을 뽑아 집을 지어주고 모든 범죄자를 그 집에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 집은 8대 지옥만큼 갖은 형구를 갖추고 있었고 그 집에 들어온 자는 절대 살아서는 나가지는 못한다는
철칙까지 만들어 놓은 집으로 옥사(獄事)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기리 가는 왕명을 받기 전에 부모의 허락을
구하러 갔다가 부모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부모까지 죽이고 왕명을 수락한 악랄한 자였습니다.
한때 궁에서 죄를 지은 여자를 쇠 절구통에 넣고 쇠 절구로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 악랄하여 전타 기리가
(旃陀耆利柯)라고 불릴 정도로 이명(異名)을 지닌 자였습니다.
잘 타는 배에다 천을 두르고 부처님이 임신시켰다고 거짓 소문으로 부처님을 힐난했다가 생지옥으로 떨어진
바라문의 딸의 이름에서 따온 말입니다.
당시 해상 무역으로 큰돈을 번 장자에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장자의 이름은 위해(爲海)였는데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보시하고 사문이 되어 걸식으로 공양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걸식 차 들린 집이 불행히도 기리가 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온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위해(爲海) 사문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리가에게 잡힌 위해는
죽이더라도 한 달간 만이라도 죽임을 연장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악랄한 기리가 도 무슨 마음인지 이를
허락하고 약속한 한 달이 되자 위해를 기름 솥 가마에 넣고 불을 지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단을 써도 불이 지펴지지 않자 기리가 가 직접 불을 지폈습니다. 그랬더니 불이 붙고 가마솥
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오자 솥뚜껑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뜨거운 열기 속에 연꽃이 피어 있고
그 연꽃 송이 위에 위해가 참선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기리 가도 어떻게 할 줄 몰라했는데 이 소문이 퍼져
아쇼카 왕의 귀에 까지 들어갔습니다. 아쇼카 왕이 직접 가리가 의 집을 방문하고 집을 나가려는 찰나
기리가 가 말합니다.
"이 집은 누구도 들어와서는 살아서는 나갈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왕도 예외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아쇼카 왕은 대답합니다.
"그렇지 그런데 이 집을 지은 후 누가 제일 먼저 이 집에 들어왔지?"
그러자 기리가가 말합니다.
"당연히 주인이 저입니다."
그러자 아쇼카 왕은 그럼 너 먼저 죽어야겠구나 하고 참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정복 왕으로도 불리는 아쇼카 왕은 '칼링가'라는 이웃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
부대 9천 마리를 이끌고 쳐들어가 10만이 넘는 인명을 해쳤는데, 폐허가 된 칼링가의 수도를 직접 둘러보다
가자신의 야심으로 무수한 인명이 죽고 고아가 된 아이들 모습과 미쳐버린 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아 불교
에 귀의했다고 합니다.
그는 부처님 사후에 그가 정복한 나라에 8만 4천 개의 탑을 지을 정도로 불교 포교에 힘쓴 왕으로
그의 이칭(異稱) 또한 폭군 왕에서 전륜성 왕, 법왕, 정복 왕 등 다양한 이칭을 가지게 된 왕입니다.
그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주변의 작은 국가들을 하나하나씩 정복해 나갈 때쯤에 그중 하나 인
밧지국을 정복을 하려고 부처님에게 문의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들은 부처님이 아난에게 설한 법이
바로「칠불쇠법(七不衰法)」입니다.
밧지국은 한때는 방대한 국가였지만 당시에는 작은 부족 국가 정도로 몰락한 국가였기에 정복하는 데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규모의 나라였는데, 아쇼카 왕은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조언을 바랐던
것입니다. 이는 잡아함경 제23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釋迦牟尼(석가모니) 부처님이 '라자가 하[왕사성] 기사굴 산'에제자 천 이백 오십 명과 함께 계실 때의 일입
니다. 마가다 국의 아사세 왕은 작은 나라로서 대국인 마가다 국에 순종하지 않는 밧지국을 침공하기 전에,
부처님께 대신(大臣)인 우사를 보내어 전쟁을 일으키면, 승리할 수 있을지를 여쭙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신을 맞은 부처님은 대답 대신, 제자 아난다에게 물었다.
"아난다 야, 내가 예전에 밧지국에 머물며 「七不衰法(칠불쇠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는데 요즘 그들은 어떠
하더냐?"
"부처님, 밧지국 사람들은 지금도 부처님이 가르친「七不衰法(칠불쇠법)」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주 모임을 갖고, 바른 일에 대해 의논합니다.
둘째, 회의 중에는 임금과 신하가, 공명 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며,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을 존경하는
기풍이 있습니다.
셋째, 옛 풍습을 지키며, 예의를 존중합니다.
넷째, 부모님께 효도하며, 어른을 존경합니다.
다섯째, 돌아가신 조상을 받들고 가업 잇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도덕적이며, 음란하지 않습니다.
일곱째, 사문과 바라문을 공경하고, 계율을 지키며, 바르게 생활하는데 게으르지 않습니다."
"아난다 야, 이「七不衰法(칠불쇠법)」가운데 한 가지만 지켜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밧지국은 일곱 가지를 다 지킨다면, 그 나라는 더욱 안온하고, 강성 하여, 누구의 침략을 받아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사신은, 이 대화 내용을 아사세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아사세 왕은 말 뜻을 알아듣고 전쟁을 포기했습니다.~이하 중략(中略)~
부처님의 이 설법 당시의 시대 상황과 현시대의 상황을 비교하면 다르지만
이를 참고해 볼만한 귀감의 글입니다.
첫째, 자주 모임을 갖고 바른 일에 대해 논의한다는 것은 소통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소신을 피력하고
또 상대의 소신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른 일이라는 어느 한쪽에 치우친 편파적인
일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중도의 길을 밝힌 것입니다.
둘째, 공명 정대하고 존경을 말한 것은 힘에 의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힘은 다수결에서 좌우되지만 그렇다고 선동된 여론을 등에 업고 행하는 것은 또 다른 힘이
됩니다. 대의명분을 앞세우지만 그런 힘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리당략에 의한, 어떤 집단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뿐입니다.
그것은 공명 정대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국민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 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존경하는 기풍이란 상대에 대한 어법(語法)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토론이든 아니든 간에
논쟁을 벌이게 되면 격해지기 쉽고 예(禮)를 벗어나기 일쑤고, 심지어는 폭력까지도 행사하게 됩니다.
토론은 공명 정대하고 또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겸양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상대를 존중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 옛 풍습을 잘 지킨다는 것은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의 풍습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일 순간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전통을 지켜가며 순차적인, 단계적인 절차로 나아
가야 합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옛말이 있듯 옛 것만 따라도 아니 되고, 또 무시해서도 안 되듯 새로운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는 한쪽을 우선시한다면 무리수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진보니, 보수니 하는 사고 관념을 부처님이 예측했나 봅니다.
넷째, 효도를 말한 것은 인륜의 도를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개념을 앞세우는 바람에 인륜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성범죄는 바로 우리의 인륜이 무너져 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륜의 첫걸음은 바로 효(孝)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자가 무슨 가정을 화목하게 꾸려갈
수 있으며 나아가서 사회나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인륜에는 경제보다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경제 문제가 개입되는 순간 인륜의 벽은 무너지게 됩니다.
깊이 명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섯째 돌아가신 조상을 받들고 가업을 잇는다는 말은 오늘날 전통문화 계승의 측면에서 보면 더없이 본보기
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통이란 경제성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문화를 살찌게 하는 것입니다.
계승되는 전통문화를 대중적인 눈으로 보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인기도 그다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루가 멀다고 초고속으로 발전하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 일생을
그런 일에 쏟아붓는다는 것은 현시대적인 감각에 비추어 보면 허망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런 문화 계승이
있으므로 한 민족이라는 얼을 온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바라는 정책전문가들이라면 당연히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여섯째, 도덕적이며 음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가정을 가진 개인은 물론 국가의 녹을 받는
자라면 당연히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은 사필귀정입니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게 된다는 말은 흘러간 옛말이 아닙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한 본보기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곱째, 바라문을 지키고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집단적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을 말합니다.
개인 간의 윤리와 도덕도 중요하지만, 집단적인 활동을 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는 사회라는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더 엄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 정의는 힘에 의한 정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정의가 실현될 수 없는 사회로 변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종 열성 팬 현상에 다, 다양한 집단이 형성되고, 이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자신의 집단 소속
자들에게는 관대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다반사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새겨둘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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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쇠법(七不衰法) 2
앞서 올린 칠불쇠법(七不衰法)은 국가를 위한 이야기였고 이번 두 번째 이야기는 부처님이 교단의 발전과
화합을 위해 설한 <칠불쇠법(七不衰法)>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당시 불교의 교당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말
할지 모르지만, 25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이 칠불쇠법을 관조(觀照) 해 보면 평범한 말 같지만,
시공을 초월한 예언이나 한 듯 현시대의 단체나 개인들에게 이르는 귀감(龜鑑)의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첫 번째는 『복잡한 일을 적게 하고 단순한 일을 많이 하라.』는 교훈입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 했습니다.
생각한다는 말을 서구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불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분별>을 말합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간택심(揀擇心)이라고 말합니다. 간택심은 본래의 마음 일심(一心) 즉 청정심(淸淨心)
에서 벗어난 마음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이런저런 궁리로 허망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를 망심(妄心)이라고 합니다. 망심이란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마음, 아닌 것을 그렇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이 분별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일으키는 욕망이 있습니다. 식욕(食欲), 명예욕(名譽慾), 색욕(色欲), 명예욕(名譽慾),
재물욕(財物欲)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오욕(五欲)이라고 합니다. 오욕은 바로, 이 분별심에서 비롯됩니다.
일례로 재물에 대한 욕심을 봅시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운 좋게 하나의 회사를 가지게 되면 더 많은 부(富)를
위해 이런저런 궁리를 짜내어 회사를 늘여가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문어 발 식으로 늘여가
게 됩니다. 사업이 번창해질수록 단순했던 일이 점점 복잡하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사업이 성공하게 되면 하나의 회사를 가졌을 때는 사장(社長)이라고 불리지만 여러 개의 회사를 가지게 되니
명칭도 회장(會長)으로 바뀌게 됩니다. 부(富)가 명예도 가져다줍니다. 성공한 사업가로 인기도 누리게 되고,
운 좋게 권력도 쥐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오게 됩니다. 더 큰 욕망을 계속 낳게
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富)를 향해 살다 보면 일만 있고 사람이라는 자신의
존재는 사라지게 됩니다. 소위 사람이 아니라 일 벌레가 되고 맙니다. 사업이 잘돼도 그렇고, 잘못되면 더더욱
그 병은 짙어집니다. 그리고 부(富)가 가져다주는 편리함과 인기와 쾌락에 젖어 이를 행복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밤마다 꿈을 꾸게 됩니다. 꿈 속에서는 대통령도 될 수 있고, 재벌 총수도 될 수 있고 유명한
연예인도 될 수 있습니다. 온갖 부귀영화와 쾌락도 마음먹은 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깨고 나면
허망해집니다. 꿈속의 일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승들은 인간의 삶은 <환해(幻海))
라고 합니다. 신기루나 무지개 같은 허망한 꿈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욕망이란 꿈에서 깨어나야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공수래공수거>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이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깨닫게 될 때까지는 큰 노력과 시간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욕망이라는 꿈속에서 깨어날 때 진실로 그 말의 의미를 체증(體證)하게 됩니다.
삶은 복잡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하나의 일로 족해야 합니다.
선어(禪語)에「어사무심(於事無心), 어심무사(於心無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사무심>는 일을 할 때는 복잡하게 여러 마음을 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별 망상으로 가득 찬 복잡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의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은 <정심(正心)>을 의미합니다. <어심무사>는 마음으로 부질없이 이런저런 일을 꾸미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정심(正心)에는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르다고 하는 <정(正)>의 글자를 보면『 一』과 『止』의 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에 머무를 때가 바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잡한 것을 버리고 하나에 몰입하는 것을 선가(禪家)에서는 다른 말로 <방하착(放下著)>이라고도
부릅니다. 말의 뉘앙스는 다르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경(經)에서 단순한 일을 많이 하라는 의미는 그 하나에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사자가 한 마리 토끼를 잡을 때도 온 정신을 집중하듯 마음이 그러해야 합니다.
선가(禪家)의 말을 빌리자면「백척간두(百尺頭) 진일보(進一步)」란 의미와 상통합니다.
방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험난하고 위험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기업도,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에도 머리를 굴려 복잡하게 살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단순하게 산다는 말은 평상심(平常心)으로 살라고 하는 말입니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이 평범한 속에 누리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침묵하기를 즐겨하고, 많은 말을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침묵하기를 즐기라는 말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매사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중하지 못한 말은 화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사람들은 하나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열 가지 말을 하게 됩니다. 아는 자는 말이 없지만 모르는 자는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목우자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 >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참여해야 할 일이 없으면서 이 방, 저 방, 이 집 저 집으로 드나들지 말아야 하며,
남이 숨기려 하는 일을 굳이 알아서 도움 될 게 없으니 억지로 캐어내려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할 일도 아닌데 남의 일에 끼어들어 이런저런 훈수 들기를 좋아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본분을 넘어 티를 내고도 싶어 합니다. 묻지도 않은 남의 일에 나서거나, 자기의 일도 아닌
것을 조언이나 충고한다고 괜스레 개입하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부질없는 이런 말로 인해 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양수의 계륵(鷄肋)이라는 고사(故事)처럼 자신의 영특 함을 과신하다 목숨을 잃게 된
이야기는 좋은 귀감이 될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직위나, 부(富)를 믿고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은 일을
앞서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설령 피해는 아니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
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괜스레 남의 가정 사에 끼어드는 것도 그렇고 남의 일에 호(好), 불호(不好)를
이야기하는 것도 주제넘은 것으로 이는 결국 자신의 허물이 될 뿐입니다.
세 번째는 『잠을 적게 자고 쾌락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두뇌가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자는 것도 정도가 지나치지 말아야 하고, 인연
경계에 끌려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는 휴식이 되어야 합니다. 잠을 자게 되면 우리의 의식은 무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잠을 자면서도 의식이 깨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몽중삼매(夢中三昧)라
합니다. 이는 도(道)의 경지에 오른 고승(高僧)들의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무의식(無意識) 상태가 됩니다.
생각이 많으면 잠자는 시간이 짧아집니다. 아예 잠을 못 이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기네스북의 기록에 의하면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최장 시간은 277시간이라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사람이 10일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심장에 무리가 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죄자나 정치 범을 잠재우지 않는 고문(拷問)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무의식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욕망이라고 합니다. 그 욕망을 프로이트는 리비도(libido)라
했습니다. 성적 본능(性的本能)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성적 본능은 무의식 속에서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속을 등진 수행자라 하더라도 인간의 오욕 중에서도 가장 끊기 힘든 것이 색욕(色欲)
즉 성욕이라고 합니다.
<사십이장경>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것이 하나 이기 망정이지 둘이면 천하에 도 닦을 사람 하나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힘든 수행이라는 것을 의미입니다.
지혜를 불교에서는 명(明)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는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의 삶이란 무의식의
삶입니다. 눈을 뜨고 살고 있지만 꿈을 꾸고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무의식의 삶은 꿈속에 사는 삶입니다.
빛이 아닌 어둠 속에 사는 삶입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말처럼 인간의 쾌락은 무명(無明) 속에서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동물은 빛이 있는 낮 동안에 짝짓기 하지만 유독 어둠 속에서
짝짓기 하는 동물은 인간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잠을 줄이고 쾌락을 멀리하는 말은 깨어 있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무리를 이루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무리를 지어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취미를 가진 동우회를 결성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지원한다거나, 어떤 지역 일을 도모하기 위해 협력자들을 규합하고, 지역 발전을 위해
여러 사람과 결탁하여 지원군이 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사회 현상이다.
그러나 명분만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그 실 오로지 자기들만의 이익과 권리만 내세우고 이를 누리기
위하여 반대 집단이나 개인을 위해(危害)하고 비방하며, 시위나 집회로 사회에 위협이 된다면 이런 단체는
아무리 명분이 그럴싸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사이비 집단에 불과하고, 폭력 단체나 모리 배 같은 이익 집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범죄자들이 모여 조직을 구성하여 명분상으로 법의 수호를 외친 들 그것이 무슨 존립
의미가 있겠는가.
사회적인 동물이 생존을 위한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모임은 어쩔 수 없지만 이런 유형의 집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그만큼 어지럽히고,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징조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
된다.
단적인 예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는 정치적 펜덤 현상은 그 조직이 크고, 방법 또한 교묘하여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좌지우지할 정도로 힘이 막강해져 가고 있습니다. 비록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그들의 집단적인 위협 때문에 방관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먼 앞날을 내다보시고 무리를 지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고 하신 모양입니다.
다섯 번째는 『아무 덕이 없으면서 자랑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 안이 빈 사람일수록 지식을 앞세우고 못생긴 사람일수록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려 한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도 없는 사람은 자기가 전문가 인 양 입으로만 떠든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는
갖은 추한 짓을 하면서도 사람들 앞에만 서면, 마치 성인군자인 척하는 사람, 가진 것이 쥐뿔도 없는데도
부자인 척 짝퉁을 들고 명품인 양 허세를 부리는 사람, 부모의 권위나 지위를 이용하여 마치 자기가 유명인
인 양 자랑과 허세를 부리는 사람, 포획이나 사냥을 취미로 여기면서 동물 보호자로 자처하는 사람, 사랑과
자비가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면서 거리에서 종교인 행사하는 사람 사기와 거짓말로 똘똘 뭉친 사람일수록
정직과 청렴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남에 대해서는 투쟁과 논쟁 만을 일삼다가 자신이 문제가
되면 협치와 화합을 외치는 사람,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다른 철면피 같은 사람, 돌아서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치미 떼는 사람, 덕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행동을 반성할 줄도 모르고 도리어 더 뻔뻔하게 자신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남에게 자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보라는 의미가 여기 담겨 있는 것이다.
여섯 본째는 『악한 사람과 짝 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생선을 담은 바구니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담은 주머니는 향 냄새가 난다. 정직하고 선한 사람을 가까이하면
심성이 맑아지고, 거짓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가까이하면 심성 탁해진다. 백정을 친구로 두면 살생의
기술을 배우고, 정원사를 친구로 두면 화초 가꾸는 법을 배울 것이다. 모든 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자경문>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쁜 벗이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세속적 욕망을 즐기는 이를 멀리하여야 한다.
반면 계행이 청정하고 지혜가 밝은 이를 가까이하여야 한다. 만약 속인의 집에 들게 되거든 부디 바른 생각을
굳게 지니되 보고 듣는 경계에 끌려 방탕하고 삿된 마음에 휩쓸리지 말아야 할 것인 바, 하물며 옷깃을 풀어
헤치고 웃고 떠들면서 쓸데없이 잡 된 일이나 지껄이고, 때도 아닌 때에 밥 먹고 술 마시며 망령 뒤이 무애행을
하노라 하여 부처님이 정해주신 계율을 크게 어길 것인가? 또(그렇게 함으로써) 어질고 착한 이들과 싫어하고
의심하는 사이가 된다면 어찌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했습니다.
선한 것은 가까이하고, 악한 것은 멀리해야 하는 이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불교 또한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하라는 말이 과거 칠 불(七佛)에게 공통된
법(칠 불 통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산이나 숲 같은 한적한 곳에, 있기를 좋아하라.』라는 교훈입니다.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入深山住蘭若(입심산 주란야)岑崟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
번역하면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니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이는 언뜻 보면 풍류의 도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철 스님은 이를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막는 것 없는 천당에 왕생하는 이가 적은 것은 중생이 탐·진·치 삼 독 번뇌로 제 집 재산을 삼음이요.
유혹하는 이 없는 악도에 태어나는 사람 많은 것은 사대육신과 온갖 욕망으로 망령되어 마음 보배를 삼는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비구가 되면 처음 배우게 되는 <자경문>에 이른 말이 있습니다.
『누군들 산에 들어가 도 닦고자 하지 않으리오만 그리하지 못함은 애욕에 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속에 들어가 마음 닦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힘이 닿는 데로 선행하기를 외면하지 말 것이다.
세간 쾌락을 능히 버린다면 마치 성인처럼 신뢰와 공경을 받고 육 바라 밀의하기 어려운 행을 하면
부처님처럼 존중받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검색 창에서 옮김>
출처 : 현림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