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45
3월30일[사순 제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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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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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_wioS2aysIM
(최기홍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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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세례를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엄마가 제일 싫어할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여러 대답들이 나왔습니다. 애써 저녁상 차려놓았는데, 아무리 오라 오라 해도 식구들이 안 올 때, 속옷이나 양말 뒤집힌 채 세탁기에 넣을 때, 그리고 이런 대답도 있더군요. 애써 목돈 주고 개명(改名)했는데, 남편이 촌스러운 옛날 이름 떡 하니 부를 때...
이름을 바꾸는 전통은 교회 역사 안에 종종 있어 왔습니다. 회심을 기점으로 사울은 바오로로 개명했습니다. 아브람의 부인 사라이 역시 사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베르골료 추기경님 역시 266대 교황님으로 선출되면서 프란치스코라는 새 이름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 성사를 통해 또 다른 이름이 추가 되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한 인간 존재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의 운명을 결정짓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이제 그를 당신 구원 계획안에 큰 역할을 부여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과거의 삶과 결별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굳은 결심이요, 종래와는 철저하게도 차별화된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강력한 표시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친히 선택하시고, 큰 민족의 아버지로 세우겠다는 약속의 징표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십니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기 17장 5절)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은 힘차고 장엄합니다. 그러나 좀 웃기고 신뢰가 안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였으며, 아내 사라 역시 이미 가임이 불가능한 연세였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주시려면 진작 주시지, 이 늙은 나이에 자식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이없기도 한 나머지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라 역시 한참 웃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된 하느님의 약속에 마침내 아브라함은 믿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지만, 하느님이 거듭 말씀하시니 마음을 새롭게 하여 힘차게 응답합니다. “네! 믿습니다. 주님!”
기이하게도 인생을 정리할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사악을 얻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인간적 시각으로 볼 때, 가혹함, 기이함은 계속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다시 아브라함을 당혹함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정든 땅을 떠나라고 요청하십니다. 자신의 미래이자 전부인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앞뒤 따지지 않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순명으로 하느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습니다. 그의 자손은 대대로 이어집니다. 그는 전 세계 모든 신앙인들의 모델로 자리매김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세례를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마리아, 루치아...
우리들의 새로운 이름은 과거의 낡은 삶과 결별하고 주님 안에 새 삶을 시작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들의 세례명은 주님의 제자요 자녀로서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명하겠다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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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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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살다>
2005년 삼성 이건희 회장 막내 딸 이윤형씨가 뉴욕 자신의 숙소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남자친구와 사귀었었는데 그 남자친구의 집안 배경이 썩 좋지 못하자 집안의 반대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우울증을 앓아왔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윤형씨에게 삶의 의미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살아왔었는데 이루어질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좀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한 남편이 버스 추락으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다 아내가 죽은 자리에서 자신도 몸을 던져 자살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남편에겐 아내가 삶의 의미 전부였던 것입니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일까요? 반대로 무엇 때문에 사람이 무기력증이나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마더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방문하여 어떤 도시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여자 교우 한 분이 테레사 수녀를 붙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자살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을 듣고 테레사 수녀는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매여, 자살하기 전에 내가 자매에게 한 가지만 요청하고 싶어요. 내가 있는 인도의 캘커타에 와서 나와 같이 한 달만 일하고 난 후에 자살을 하세요.”
이 여자 교우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테레사 수녀를 따라서 인도의 캘커타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오랜 기아와 질병으로 까맣게 말라 비틀어 죽어가는 그들을 붙들고 부지런히 간호하고 치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살고 싶어졌습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내게도 살 만한 보람이 있었구나.’ 그래서 이 여자 교우는 자살의 유혹을 극복하고 테레사 수녀와 함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말하면 ‘무엇을 위해서 (What for)’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즉 삶의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살아가지 않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게 창조된 존재입니다. 생존 자체가 목적인 것은 동물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고 싶어 하고 그 이유를 정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동물은 살기 위해서 살지만, 인간은 세상에 왜 내던져 졌는지 그 존재 이유를 묻고 그 이유를 찾아야만 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공지영 씨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세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세상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던 자살만 기도하던 사형수는 한 여자의 사랑을 받고 처음으로 다시 살고 싶어짐을 느낍니다. 사랑만이 살아 있음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게 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소중히 간직해야 할 보물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살고 싶어집니다. 이 ‘위해서’가 바로 지금의 우리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만이 참으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잃어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삶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할 때도 그 사람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해 주려 노력하고 그것이 행복이기는 하였지만,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삶의 근본적인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셨다면 무엇을 위해서 사셨겠습니까? 바로 인간 구원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사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 ‘무엇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 사셨던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분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랑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인간 모두의 삶의 목적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당신을 위해서’ 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를 위해 사셨기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아버지와 인간을 ‘위해’ ‘사신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순교자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을 산 것이지 참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을 위해 살 때 ‘죽음’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죽음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복할 때 살아있다고 느낍니다. 죽으면서도 행복하다면 그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 벌써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 죽음도 죽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됨을 되새겨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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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한약을 달일 때 어른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약을 달이는 것은 정성이 중요하다.” 약효가 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약을 달이는 사람의 정성이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한약을 먹을 때도 몸가짐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한약을 먹으면서 술을 마시면 효과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약을 먹으면서 먹지 않아야 할 음식도 정해 주었습니다. 한약과 궁합이 맞지 않으면 약효가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약은 분명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을 대하는 사람의 정성이 함께하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는 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의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이 여인을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나병환자도, 중풍병자도 치유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말씀을 선포한 적은 많은데 정작 말씀을 듣는 데는 소홀했습니다. 미국에온지 4년이 되었는데 피정은 3년 전에 한 번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토론토 신문홍보를 하는 길에 꽃동네 피정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에서 11년째 선교하는 신부님의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백번 묻는 것은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백번 보는 것은 한번 행하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아이티에서 11년을 살고 있는 신부님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걸인을 데려오고, 먹여주고, 병자성사주고,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러주는 일이 일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갱단에게 납치를 당할 뻔도 하였고, 총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선교에 대한 이상과 열정은 아이티에 도착하면서 식어버렸다고 합니다. 사회는 무질서하고, 아픈 사람은 너무 많고, 도와줄 힘은 없고, 매일 무력함을 느껴야 했다고 합니다. 기저귀를 갈아 주어야 하고, 대소변을 받아야 하고, 욕창에 벌레가 있는 몸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악취가 진동하는 시신을 염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라면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삶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신부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왔던 모세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습니다.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니 매일 아침 만나가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드리면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같은 만나를 먹으니 그것이 지겨웠습니다.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가 생각났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니 하느님께서는 메추라기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드리면서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메추라기도 매일 먹으니 지겨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 은총을 내려주셨는데 그 은총에 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총을 지겨워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구호물품으로 오는 쌀밥이 지겨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 걸인을 보내주시고, 아픈 사람을 보내 주셨습니다. 생각하면 그것이 은총이었습니다. 신부님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도 그 은총을 지겨워했다고 합니다. 이만하면 한국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신부님께 은총을 주신다고 합니다.
동창 신부님들보다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동창 신부님들보다 영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동창 신부님들보다 언변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하느님께서는 신부님이 좋은 사제 되라고 은총을 매일 주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어머니는 전화하시면 인제 그만 돌아오라고 합니다. 아이티의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제는 아시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도 이제 피정이 끝나면 다시 아이티로 돌아가야 하는데 솔직히 두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에도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곳에 300여 명의 꽃동네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를 비롯한 피정에 함께한 교우들 모두 신부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신부님께 해당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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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51-59: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51절)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이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말씀은 본성상 죽음이 보이지 않도록 막아준다. 이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빛을, 생명을 주시며 그 빛을 꺼뜨리지 않고 생명을 잃지 않는 사람은 결코 어둠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당해야 할 두 번째 죽음, 영원한 죽음, 지옥의 죽음, 저주받은 자들의 죽음, 악마와 그의 부하들이 받을 몫인 그 죽음을 보지 않게 해 주셨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53절)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당신을 아브라함과 예언자들보다 높다고 하신다고 비난하면서,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53절) 하며 대든다. 예수께서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54절) 하시며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신다. 예수께서 당신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을 그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아들을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55절)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했지만 잘 알지 못했던 분을 당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그들이 그분을 알았더라면 그분의 아들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하셨다. 우리도 그분을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57절)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요?”(57절)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58절) 하신다. 여기서 ‘전’은 지나간 시간을 의미하고 ‘부터 있었다.’라는 말씀은 현재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이 바로 ‘있는 나’이다. 그러므로 항상 계신 분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가까이 오시고 당신 생명을 완성하시는 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시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59절)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고 돌을 던지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셔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신다. 볼 수 있는 이들은 그분을 보지 못하고, 육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를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도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고 따르며 그분을 올바로 보고 알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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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원한 생명>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이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6장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그저 사는 동안 복을 빌기 위해서, 또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만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영생’이 그런 것이라면, 즉 지금의 인생과 지금의 생명이 무한대로 연장되는 것이 영생이라면, 그것은 그냥 지옥일 뿐입니다. 지금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생’이어야 그것을 희망할 이유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17장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말씀에서 ‘알다.’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와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은, 아버지와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서 함께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버지처럼, 또 예수님처럼 되어서 그분들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부활과 영생에 대해서 이렇게도 표현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4-36)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말씀은, ‘몸 없이’ 영적으로만 부활해서 산다는 뜻이 아니라, 육적인 욕망 같은 것들을 모두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교회는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는 말씀은, 가족과 가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욕망에서 비롯된 갈등과 다툼 같은 일들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부부와 가족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도 가족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지속될 것입니다. 어떻든 ‘영생’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인생이 무한대로 연장되는 것도 아니고, 또 지금의 몸을 가지고서 무한대로 생존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세상에서, 즉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몸으로 지금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완전하고 순수하고 참된 행복과 평화와 기쁨을 영원히 누리는 ‘천상의 삶’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요한 8,52-53)
여기서 ‘마귀 들렸다.’라는 말은 ‘미쳤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말이 ‘부활’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그들도 마지막 날의 부활은 믿지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헛소리’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영원히 안 죽을 것이다.”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유대인들은 표현만 보고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한 번은 무조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진실일까? 아닙니다. 예외적으로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창세 5,24; 2열왕 2,11)
<그래서 예언자들도 죽었다는 유대인들의 말은 ‘틀린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할 때 바로 그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6-17)
재림 전에 죽은 사람들은 부활해서 재림을 맞이할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에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채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채로 심판 때 구원을 선고받으면, 그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간절하게 바라는 희망에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장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소망도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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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아브라함을 비교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지금으로서는 그 시기를 명확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어 그분의 축복을 백성에게 내려 준 가장 위대한 선조입니다.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그 뒤로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이 계약에 따라 하느님의 축복을 상속받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위대한 선조인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축복으로 장수하였지만 영원히 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고 하며, 더 이상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논쟁에서도 질문이 등장합니다.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선재’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 이전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계시는 분으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요한 복음은 이런 방식으로 독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의 내용을 기억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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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동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하느님과 유목민 아브람의 계약을 기억합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배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유다 민족의 계약이 사라진 듯 보였을 때, 사제들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고자 온갖 인간적인 희망을 등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던 아브라함을 회상하며, 온 인류와 연관되는 아브라함의 후손과 하느님의 영원한 계약을 다시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표상은 어제의 복음처럼 오늘 복음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적대자들에게 행한 예수님의 변론과 경고를 내리는 설교를 모아 놓은 요한 복음 8장이 오늘 끝납니다.
인류와 맺는 새롭고 결정적인 하느님의 계약을 이루시는 예수님께서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그분을 믿지 못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육체적인 의미로 이해하였기에 계속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고 비난하고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죽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그분을 몰아세웁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는 다시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시고 또 아브라함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시면서 대화를 마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예수님께서 맞이할 죽음의 시간은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예수님 당신 자신의 뜻과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그분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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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자주 보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보잘것없는 ‘목수의 아들’로, 율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거짓 예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아버지’이므로, 누구도 감히 아브라함이 가진 신앙의 원천과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유다인들에게 쉰 살도 안 된 예수님께서 하신 오늘 복음의 이 선언은 ‘하느님의 모독자’로 사형당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도발적인 이 말씀, 당신께서 지니신 신성에 대한 계시는 유다인들을 격분시켰습니다. 그 말씀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던지신 예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은 우리는 깊은 사색에 잠기며 질문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자의식, 하느님을 모른다고 말하면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자의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선언은 우리의 지성만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점점 다가오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숨겨져 있던 당신의 비밀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예수님에 관한 진리는 논리 정연한 학문적 체계나 성경에 관한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체험으로 알아듣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진리를 체득하고 선포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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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죽음>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접하는 사람들이 의사들입니다. 한 의사의 고백입니다.
‘가끔가다 보면 어떤 환자나 그 가족들은 마치 의사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무한한 기대치를 가지면서 의지합니다.
반대로 어떤 의사는 자신이 무슨 병이든지 다 고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환자나 가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의사 생활을 수십 년 하고 나서야 의사는 환자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치유하시도록 다만 옆에서 치료가 잘되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넘어서다가옵니다. 늙은 할머니가 어린 손자보다 꼭 먼저 죽는 법이 없습니다. 죽음은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국 삶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소비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운명입니다.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은 반드시 무한한 하느님의 시간을 소유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석한 것은 죽음을 이기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패배를 보았습니다. 죽음에서 승리하신 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우리의 죽음이 언제 닥치더라도 부활의 영광이 우리의 삶을 떠나지 않도록 늘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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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상에 마음을 두면>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 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창조 이전에, 더더욱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한 분이십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 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따랐다기보다 따름으로써 믿음이 굳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둘기가 콩밭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둘기 마음이 콩밭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나무 위로 오르는 것은 원숭이 마음이 나무 위로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마음이 가 있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그래서 마음을 선한 곳에 두어야 합니다. 천상에 마음을 두면 지금의 모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시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시고 “자손을 많이 낳을 축복”을 허락하시며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맺어주신 일방적 계약입니다. 하느님 측에서 본다면 손해를 보는 계약입니다.
그러나 그 계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둘 곳은 분명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7)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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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주 전, 잠에서 일어났는데 목과 어깨가 너무 아픈 것입니다. 잠을 잘못 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겠지 했는데 점점 더 아픈 것입니다. 그다음 날 강의가 있기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목을 조금만 움직여도 큰 아픔이 있어서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강의에 대한 걱정 속에 강의가 있는 성당에 갔고, 걱정을 품고 강의 연단에 섰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제 강의에 너무나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셔서 아주 신나게 강의할 수 있었습니다.
90분 동안 쉬지 않고 강의를 한 뒤에 강복과 함께 마쳤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팠던 목과 어깨의 통증이 사라진 것입니다. 조금도 움직이기 힘들었던 딱딱하게 굳은 목과 어깨가 완전히 풀린 것이지요.
이렇게 집중하면 새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집중이 불편한 마음을 해결할 수도 있는데도, 불편해서 집중할 수 없는 것으로 당연하게 여깁니다.
주님께도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 저를 지켜주시는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면 이 보호가 필요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편안한 마음을 대신 채워줄 사람을 찾아서 친구, 애인, 배우자 등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편안함보다 상처를 얻어 불편함을 호소할 때가 많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불편한 마음보다 편하고 기쁜 마음을 간직하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대화를 나눕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마귀들렸다는 말도 하고 또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구원의 말씀을 하셔도 듣지 않습니다. 듣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집중할 수 없게 되겠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 그만큼 주님께 집중하면서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집중하고 있을까요? 주님이 아닌 세상에 집중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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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함께>
요한 8,51-59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그분과 함께>
나는 살아있으나
나는 죽을 테지요
오로지 나에게
매달리니
삶은 삶이요
죽음은 죽음일 뿐이지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는 살아있으니
그분 안에서
나는 죽을 테지요
그분과 함께 삶이요
그분과 함께 죽음이니
삶과 죽음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그분과 함께함만이
오롯이 있을 따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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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폐가 아닌 관상을>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 믿음의 아버지라고 믿는 아브라함이 주님께서 오실 때를 내다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기다렸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정작 그 주님을 몰라본다는 주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얘기하고, 계약을 맺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첫마디를 떼십니다.
“나를 보아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이 실은 인간을 보지 말고 당신을 보라는 것이고, 인간 중에서도 나이 먹은 자기를 보지 말고 당신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보거나 특히 나이 먹은 자기를 보면 너에게서 많은 자손과 민족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과 저는 하느님은 안 보고 자기를 보고, 그리고 자기를 보기에 아브라함처럼 멀리 내다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천 년 뒤의 주님 오심을 내다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는데 저는 주님을 보지 않고 내다봐야 고작 칠십 너머의 저를 보며 불안해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저만 보면 이 세상에서의 저밖에 볼 수 없는데 저는 이제 얼마 안 남았고, 그나마도 병들어 사람들에게 짐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 없이, 과거를 돌아보면 죄밖에 보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면 불안합니다.
그러니 이제 생각을 바꿔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보고 영원을 봐야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을 내다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 없이 자기 바라보기는 내성도 아니고 반성도 아닌 자폐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자기 바라보기는 내성이요 반성이고 더 나아가 하느님 관상이요 자기 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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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깊고 넓은 내적시야內的(視野)를 지닙시다>
- 기도와 성독(Lectio Divina) -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4)
화답송 시편 한 구절을 오늘 삶의 지표로 삼고 싶습니다. 어제 입원중인 지인과 주고 받은 일화가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옆침대 환자께 예쁘고 고우신 간호사님 음성
오물오물 꿀꺽 생각하며 참으로 천사같은 간호사님이다 싶습니다.
이렇게 일을 예쁜 분위기로 잘 하시다니 감상하는 오늘 점심시간이었나이다. 좋은 오후 되옵소서.”
“주변을 환히 밝히는 꽃같은, 천사같은 간호사님 같습니다! 오후도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입원중인 자매님을 생각하면 아프고 슬픕니다. 이렇게 고운 마음을 지녔고, 25년 이상을 헌신적으로 수도원과 저를 물심양면 헌신적으로 도운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마음이 착잡하고 답답할 때는 그동안 삶의 전 과정을 렉시오 디비나 하는 마음으로 살펴보게 되며 기도하게 됩니다. 35년동안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수도공동체와 관계를 가졌다 떠났는지 살펴 보면 더욱 기도하게 되며 삶의 전 과정을 성독하는 마음이 됩니다.
“깊고 넓은 내적시야를 지닙시다-기도와 성독(Lectio Divina)-”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부단한 기도와 성독이 깊고 넓은 내적시야를 지니게 됩니다. 성독의 대상은 비단 신구약 성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및 내 삶의 역사와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 역사 전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그러니 부단한 기도와 성독의 훈련이 우리에게 깊고 넓은 내적시야를 선사하면서 무지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함을 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제1독서의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야 말로 기도의 사람입니다. 하느님과의 은밀한 소통의 대화의 기도가 그의 내적시야를 한없이 깊고 넓게 했음을 봅니다. 결국은 기도와 공부도 이런 내적시야를 날로 깊고 넓게 하기 위함입니다. 역시 “그 무렵”으로 시작되는 말마디가 언제나 지금 여기가 시작 지점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 무렵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새삼 우리의 경우 주님과 대화의 기도를 위한 장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 역시 매일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내밀한 친교의 기도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바로 우리가 기도할 자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입니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은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늘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과의 은밀한 내적기도가 아브라함의 내적시야를 날로 깊고 넓게 했으며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미래를 직면하게 했음을 봅니다. 오늘 요한복음을 통해 요한교회 공동체의 성독이 얼마나 깊은 경지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전 과정을 성독했음이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음 예수님과 주고받는 말씀을 통해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분으로 또 다윗이 그분의 날을 보고 기뻐했음을 고백하는 내용에서 그들의 성독의 경지가 얼마나 깊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요?”-
이어지는 다음 대목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깊고 넓은 내적시야와 비교할 때 이들 유다인들의 내적시야는 얼마나 협소하고 닫혀 있는지 그리하여 예수님 말씀후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 합니다. 이들의 협소한 내적시야에 이 말씀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불경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괄호안의 영문을 보면 예수님의 신원이 바로 “하느님(I AM)”으로 드러납니다. 요한공동체의 성독은 이정도로 깊었던 것입니다. 이미 이들은 예수님을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이자 마지막인 하느님으로 알아챘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 삶은 예닮의 여정임과 동시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가면서 우리의 내적시야는 날로 깊어지고 넓어져 우리의 기도와 성독(Lectio Divina) 역시 날로 풍부해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다음 화답송 후렴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시편105.8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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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8,51)
<죽음의 의미!>
오늘 복음(요한8,51-59)은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유다인들과의 갈등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활 전반부의 갈등이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율법, 곧 안식일 규정을 지키시지 않은 것에 대한 갈등'이었다면, 공생활 후반부의 갈등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유다인들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8,58), 곧 '세상 창조 이전부터 있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죽음은 어떤 의미의 죽음일까?
그 죽음은, 때가 되면 모두가 반드시 죽는 보편적 죽음인 육체적 죽음,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에 대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 말씀을 지키는 이는 영이 죽지 않고 살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영이 죽는 것이 진짜 죽음입니다. 영이 죽어 있으면, 곧 내 마음의 창고 안에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영인 성령이 없으면,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 되고,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하는 '산송장과도 같은 사람'이 됩니다. '영이 살아있는 사람이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유다인들의 몰이해!'
유다인들은 아래에서 왔고, 세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위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나의 영을 살리기 위해서, 마침내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기쁘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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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OucetQCd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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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내 아버지시다."(요한 8, 54)
봄꽃 지듯
빠르게 지나가는
아쉬운 우리의
봄날입니다.
사라질 재력과
권력이 아닌
사라지지 않을
하느님의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생명에 생명을
더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버지 없이는
아들이 있을 수
없듯, 하느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아버지
하느님께 속한
영광의 삶입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빛나시는
영광이 있기에
십자가의 길도
사랑으로
빛날 수 있습니다.
온 생명을 다해
사랑하시는
그 삶이 영광의
참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럽게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립시다.
아버지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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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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