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회개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이 원칙에 의해서 죄와 악습을 끊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고 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초월 신이 과연 존재할까 라는 믿음과 의심으로 섞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자신의 감정에 의해서 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충동적 감정에 이끌리기 때문에 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반신 반의 하는 초월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 사후에 벌을 내리리라는 엄포나, 회개하면 용서하겠다는 관념을 정신에 형성하는 것 뿐이다. 그가 선행을 했다고 하늘에서 선물 보따리가 떨어지거나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마른 하늘에 벼락이 내려 그를 벌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도덕심에 의해서 선을 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감정과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서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당했을 때, 그는 마음 속으로 선을 행하는 자신을 비웃기도 하며, 악을 행하면서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신의 용서는 당연한 것이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람이 처벌을 받을 텐데 나라고 어쩌겠나" 라고 속으로 되뇌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월신의 역할이다. 초월신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 존재를 100%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렇다면' 이라는 생각을 믿음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은 죄와 회개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옛 이스라엘 백성이 꼭 이와 같은 패턴을 반복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이 믿는다는 야훼 신이 그들의 이익에 반하여 도덕심을 기르라고 강조하지만 실제로 당장 벌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악행을 하지 않고는 입에 풀칠을 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죄를 저지르면서 한편으로는 회개한다고 야훼에게 제물을 갖다 바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패턴은 결코 인간 세계의 죄를 정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해악을 초래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때에 비로소 죄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선(善)의 정의이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나와 타자에게 유익을 베푼다는 뜻이다. 나에게 이익이 되고 타자에게 해악이 되는 것은 결코 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드시 자신에게도 해악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번 만은' 지나가겠지 하는 그릇된 마음이 발생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초월 신이 바로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혹자는 인간 이성이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코 사물의 정확한 인식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점은 분명히 예리한 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적 직관력을 기르고자 신의 본성을 탐구하고 신적 견지에서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존재 방식이며 인간을 통하여 나타나는 신의 능력인 것이다. 신은 결코 쌀독에 붙은 쌀 한알이 증가 되어 쌀독을 채워 주거나 강을 건널 수단이 없다고 해서 물 위를 걷게하는 능력을 베풀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신의 질서있고 체계적인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월 신을 막연하게 반신 반의하면서 부화뇌동하여 대중의 종교를 따를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무엇인지, 즉 유익과 해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도 있도록 초월신이 아닌 자연 신에게 요청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의 질서에 합당에게 모든 인간과 사물에게 유익한 행동을 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