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운세 (외 3편)
고선경
나는 남을 돕는 팔자라고 그랬다
그렇게 말한 사주쟁이가 한둘이 아니다
잘 봐
내가 얼마나 쉽게 슬퍼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
나를 슬프게 만들면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슬플수록 사나운 표정을 짓게 되는 내가 있고
사나운 표정을 해명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
행운의 색깔은 하늘색
오늘 내가 가진 물건 중 하늘색은 하나도 없네
누군가는 모든 게 나의 조급함 때문이라고 그랬다 또 다른 누군가는 힘들어도 꼭 이루어질 테니 기쁨이라고
제일 친한 친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흔 살 되면 다 해결될 건데 뭐가 문제?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이지
팔자가 싫을 때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라고 적었다
월급도 못 주는 회사를 관뒀을 때 가스가 끊겼을 때 이십육인치 캐리어 질질 끌고 남의 집 전전했을 때
보세요 부의 기운을 담은 부적입니다 영민함을 상징하는 토끼 두 마리가 그려져 있지요 아 그건 한정판 순금 부적이에요 승천하는 청룡과 여의주가 길한 기운을 가져다줍니다
단돈 칠만 원
없어 인마
내가 태어난 게 대길인 줄이나 알아
오늘의 운세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머릿속이 답답하니 주변을 정리하라길래 창문 열고 쓸고 닦고 방 청소를 했다
창밖은 건물뿐이지만
잘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하늘이 빼꼼 청명함을 드러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찢어진 노트 한 장
뒤집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
그게 꼭 부적 같아서
바깥만 나가면 하늘이 드넓다는 걸 알게 되어서
바깥을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나도 부적 하나 써 줄게
만사형통이나 만사대길 말고
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 줄게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
알았지?
럭키슈퍼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
토마토를 씻고 물을 버렸다
그사이 한 달이 다 갔다
내가 죽고
나에게도 애도할 시간이 필요했다
눈이 내리는 소리 대신
녹는 소리 들렸다
친구들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 먹고 술 먹고 울고 웃었다
그게 좋아서
박장대소
토마토는 얇게 썰어서
꿀이나 설탕 뿌려 먹는 게 맛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안주잖아 기억나지?
알지
우리가 제일 잘 알지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거
다 마음이라서
술이 잘 들어가네
나는 취해도 취한다 말 안 하는데
술 뺏을까 봐 알지?
나한테도 박수 좀 쳐 줘
잘했다고 해 줘
완전히 엎드려 절받기다
나 이제
돈 안 벌어도 되고 책 안 읽어도 되고
빨래랑 설거지 양치랑 샤워 안 해도 되고
취하지 않고 어디 가서 실수도 않고
더 많은 걸 볼 수 있겠지
꼭 그만큼 못 보는 것도 생기겠지
그래도 기다리지는 말아야지
낡고 이상한 세계에서
더 낡고 더 이상한 세계로
옮겨 가는 동안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무연히 지켜봤다
영원히 찾아 헤매겠다 생각했던 것들
무수한 별, 아름다움
어둠 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사람의 것과 사람의 것 아닌 아름다움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기억하지 마
다시 십이월이 올 거야
우리의 뜨거운 맥박도
도무지 이어 쓸 수 없던 한 편의 시도
폭설이 다 지워 줄 거야
흥청망청
왜 이리 신이 나지?
공짜 비행기 티켓을 얻은 것처럼
노래방 애창곡 다 같이 불러 주는 것처럼
손흥민이 골 넣었을 때처럼
우리가 만나서
왜 헤어져야 하는지
슬픈 질문 앞에서 충분히 슬퍼했다면
박수와 함성
너무 고요해서 귀를 막고 싶은
깊고 눈부신 어둠 속
묻어 둔
내 예쁜 금붕어 한 마리와
우리가 살아서 나눠 가진 아름다움
잘 다녀왔어?
거짓말은 안 통하던
수많은 저녁의 기쁨
오래된 기억인지 오래전 꾼 꿈인지 알 수 없어요
무슨 영화를 볼지 고르는 오후에
아무것도 아닌 오후에
영화를 고르는 일은 좋지
두툼한 이불에 파묻혀서
나는 계속해서 틀리고 싶다
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생각 또한 아무것도 아니니까
봄비
하품
봄잠
버스
나는 자국을 남기는 것들이 좋더라
그런데 취향도 낡아 갈까
빗물의 농도랄지 잠의 깊이랄지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을 에워싸고 울타리를 친다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누구라도 잘됐으면 하는 마음과 모두가 망했으면 하는 마음이 같다는 게
실은
나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빌려 쓴 마음
왜 안 갚아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아무렇지 않게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갔다
봄비
하품
봄잠
버스
누비던
나비의 날갯짓
짓이기던 눈짓
나는 나를 밀려 써서
늙거나 죽지 않고
무엇을 물어내야 할지 모르면서
꿈과 기억의 값을 매기고 있어
꿈과 기억의 바깥에서
이 감기는 일 년째 낫지 않네
나는 오직 한 사람만 기다렸지만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테니 저를 거둬 가세요”
아무도 원한 적 없는 한 문장을 우체통에 넣었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머리에 탱자를 이고 가는 고양이 한 마리를 봤다
감기 기운인지 봄기운인지 헷갈려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일 년도 가고 십 년도 갔다
텅 빈 우편함에서 탱자 냄새 희미하게 불어왔다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2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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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경 / 1997년 안양에서 나고 전주에서 자랐다.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