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문학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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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을 찾다
이운룡
낯선 길은 낯설어서 좋다.
몇 굽이돌아 들판을 가로지르고
발길로 풀숲을 툭툭 건드리면서
땅거미 내린 저녁을 밟고 천리를 간대해도
발이 부르트지 않는다.
가다, 가다 뒤돌아보면
아득히 추억의 손수건이 펄럭이고
저녁이슬에 젖은 하루 끝자락이 촉촉해진다.
낯선 길 가슴속에 담는 날
세월의 끝이 궁금한 날
낯모르는 길손 머리 깊이 인사하고
가다오다 어깨 거는 날 있으리니
하늘과 사람, 짐승과 초목이 하나 되는 섭리
그게 자연의 얼굴이고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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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고 TV는 웃다
이운룡
나는 행복해서 가슴에 꽃이 피고
TV는 슬퍼서 웃는다.
두 아이 엄마는 집 나가고 아빠가 엄마인 집
군 입대를 앞둔 해직자의 몸은 셋이다.
나는 가슴이 쓰린데
아이들은 밥 수저 들고 아빠 얼굴과 눈 맞춘다.
아빠마저 떠날까?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뼛속에 저장해두려는 듯이
내 말은 비문非文이다.
머릿속도 말 나오는 길목도 어긋났나보다.
TV는 날마다 슬퍼서 웃고
나는 날마다 행복해서 속상하다.
눈물로 마른 목적시고 빈다.
일 년이 하루같이 어서 커라,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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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허호석
꼭 나만 따라 하는 동생처럼
얄밉기도 하지만
나를 닮은 동그란 거울
거울은 나의 사진관
쑥쑥 자라는 내 모습도
솔솔 재미있는 생각도
거울은 꼭 그대로 찍어내니까요
거울을 닦으면
내 마음도 맑게 닦여요
창가에 덜어둔
나의 하늘까지도 닦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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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허호석
“마당쇠 이놈
마당은 쓸지 않고 웬 낮잠만 자는 거냐?
내 이놈을…….
“잠깐, 잠깐만요. 꿈을 꾸었는데요. 통쾌했어요.
꿈 얘기 한 번 들어보실래요?”
“깐놈 꿈 얘기 들어보나 마나 하지만
그래 그 꿈 얘기 한 번 들어보자”
마당쇠가 갑자기 놀부님을
업어치기로 내꼰졌다
“아니, 이놈이 나를 내쳐 내 이놈을…….”
“꿈에요. 꿈에 그랬다니까요”
“응! 꿈에……. 아이고 허리야…….”
“마당쇠야, 그 꿈 얘기 더 듣고 싶지 않다
그 꿈 얘기 그만, 그만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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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원을 위해서
김용호
살아오면서 있었던 실패도
꿈꿔오면서 있었던 좌절도
희망 속에서 있었던 고통도
평화 속에서 있었던 환난도
오늘은 아름다운 영원을 위해서
영원히 잊기로 하자
부질없는 적대감도
주체할 수 없는 분노도
유익함이 없는 노여움도
있어서는 안될 불만도
오늘은 아름다운 영원을 위해서
영원히 버리기로 하자
값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수많은 은혜가운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를
사랑으로 표현 할 줄 아는 삶을 지탱하면서
오늘은 아름다운 영원을 위하여
새로운 결심을 하기로 하자
살아온 날들 나는 왜 그리 지혜롭지 못했는가
살아온 날들 나는 왜 그리 겸손하지 못했는가
살아온 날들 나는 왜 그리 용서하지 못했는가
살아온 날들 나는 왜 그리 진실하지 못했는가
뒤돌아보며
오늘은 아름다운 영원을 위하여
지혜롭게 살기로
겸손하게 살기로
용서하며 살기로
진실하게 살기로
내 마음 밭 깊은 곳에 다짐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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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속에
김용호
초록의 꿈을 키우는 아름다운 산천에
바람이 지나 가야 할 곳이 있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사랑이
지나 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강으로 이여 지는 계곡에 부드러운
물이 지나 가야 할 곳이 있듯이
우리의 협소한 마음속에 부드러운 이해가
지나 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이런 저런 유혹과 갈등에 마음이
조금은 흔들려도 균열이 생겨서는 안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위해
자기를 다 태우는 희생의 촛불 하나
우리의 마음속에 밝혔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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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김용호
사랑한다는 것은
내 마음의 행방은
언제나 그대를 향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러므로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은
영원히 행방불명되지 않는 거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둘 사이
마음에 저지선이 없다는 뜻이야
만약에
우리 둘 중에 한사람이
먼저 죽는 다면
죽는 순간까지
곁에서 사랑해야 할 사람은
우리 둘 중에 하나는
그대이거나 나 인 거야
제일 슬플 때 함께 하면
슬픔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거야
제일 기쁠 때 함께 하면
기쁨이 두 배로 늘어나는 거야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슬픔도 기쁨도
우리 둘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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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지(5)
-학도병 장사상륙작전
전병윤
펜을 던지고 총을 잡았다
교복에 명찰이 붙은 10대들의 학도병,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하여
770여명은 문산호로 부산항을 출발했다
학도병들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려고
인민군복으로 위장한 작전술을 세우고
장사상륙작전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9.15.새벽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시간에
젊은 피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3일간의 작전을 끝내고 퇴진하렸는데
아뿔싸, 문산호의 좌초로 미아가 된 병사들
아- 장사리가 학도병들의 무덤이 될 줄이야
새파란 학도병들이 산화되어
낙동강 방어선이 수호되었고 뜨거운 피는
세계 전사를 쓰는 붉은 잉크가 되었다
꽃다운 중학교 3,4,5학년
말랑말랑 육신을 던져 한국을 구했다
*장사상륙작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1950, 9.15. 06:30에 벌어진 상륙작전.
당초 미8군에 떨어진 작전명령임.
특수작전의 성격상 한국군 중 학도병들에게 작전명령174고지가 떨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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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적지(6)
-다부동 전투*
전병윤
두 달간 피 비린내 붉던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의 승리가 있었기에
지구상에 대한민국의 지도가 남아있다
한국전쟁 최후의 격전지 바위산, 유학산
839고지 가산산성, 328고지의 일진일퇴
피가 시냇물 되어 지형마저 바꾸었다
백선엽 장군은 장병들에게 유언을 했다
“여러분! 내가 물러서면 여러분은 나를
쏘아라 제군들이 물러서면 내가 쏘겠다“
지옥의 육박전 속에서 형제간의 상봉
형은 반가워서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데
동생은 형의 심장에 대검을 찔렀다
한여름 소낙비로 퍼붓는 포화 속
피 썩는 냄새에 미친 흡혈귀는 두 달 간
다부동 전쟁사를 벌겋게 써 내렸다
기념공원엔 6.25 산 증인들이 늘어서서
자유 평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셈 할 수 없었던 피의 값도 알려 준다.
*다부동 전투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2)
미국 제8군단과 국군 제1사단이 합동 작전으로 두 달 동안
숨막히는 전투 속에 만 명의 모숨을 바치고 승리를 했다.
그 결과 낙동강 전투와 인천상륙작전까지 승리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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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전적지(7)
-지평리* 전투
전병윤
유엔군 병사들이 낯선 땅에서 낙화할 때
몽클라르** 장군이 이 강산에 피를 뿌릴 때
농부들은 우리 논밭에서 씨앗을 뿌렸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몽클라르는 프랑스 지원병을 모집했고
중장 계급장을 버리고 중령 대대장이 되어
세계 평화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
중공군 삼개 사단에 포위된 지평리 전투,
신출귀몰한 노병의 전술에 적은 파멸 했고
훗날 그 자리에 전쟁기념관을 세웠다
오늘 우리가 지구촌 곳곳에 태극기를
높이 세울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된
6?25 참전 용사들의 그 피의 값을…
오늘 주적을 모르거나 잊으면 우리는…
대한민국, 이 땅이
자유와 평화의 꽃씨를 받는
지구촌의 정원이 되길 마음 모아 빈다.
*지평리: 지명,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한국전쟁중 격전지중 한 곳임.
**몽클라르: R.Monclar (1892.2.7~1964.6.3)프랑스 전쟁 영웅
육군 중장. 당시 프랑스는 세계 제2차대전 후유증으로 정규군을
한국전쟁에 파병할 형편이 못되었다.
형편을 안 몽클라르는 정부와 협의 하에 전역을 돌면서
지원병을 모집하였다
대대병력을 모집하여 스스로 강등하여 삼성장군 계급장을 떼고
중령으로 대대장(당시 58세)이 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특히 지평리전투의 승리로 유명함, 정전협정 때까지
중부전선을 지켜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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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라지 꽃
강만영
밤하늘에 별처럼
반짝이는 꽃
산 밭 가득 피었네
산 숲에 도라지 향
피우고
무엇을 생각할까
하얀 꽃 보랏빛 꽃
오순도순 어울려 노는데
산새는 혼자서 노래하고
호랑나비 한 마리
꽃술에 입 맞춰
도라지꽃도 방글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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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빛
강만영
동이 뜨는 아침
빨간 풍선이 하늘 높이
빈터를 돌며 떠오른다.
어둠이 지는 저녁노을
저 멀리 맞닿은 산에도
구름조각 붉게 물들인다.
들녘 파란 풀밭
뉘엿뉘엿 침묵 속에
노을 빛 곱게 색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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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이 보내준 봄비
고영진
자네를 보내고 난 후
때마침 비가 내리네
이 비가 친구들과 자네의 눈물이 합쳐진 것 같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재성이 엄마
남편의 병수발에 힘들어했을 텐데
허전함에 뒤척거릴 집사람을
잘 지켜주기 바라네
엄마 목을 잡고
눈커풀을 뒤척이는
막내아들이 눈에 밟히네
이 비가 그치면
이 모든 열기도 다 식을 걸세
고통 없는 그곳에서 자네는 젊으니
반장 완장차고 재미있게 사시게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해 미안하네
지나고 나니 더 속이 상하네
오늘따라 내리는 늦은 봄비가
막걸리도 취하지 않게 만드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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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의 대화
구연배
당신을 띄워놓고
강과 대화하고 있어요.
흘러 흘러 바다까지 가야겠다고
다짐 돌 놓고
사랑 실은 종이배를
척후선처럼 띄워 보내고 있어요.
오늘 밤 당신 꿈에
비밀리 정박할 지도 모르겠네요.
강이 끝나면
우리의 바다가 시작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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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의 비결
구연배
뿌리째 뽑혀 쓰러진 나무
안쓰러워 쓰다듬다가
모든 뿌리가 바위를 감싸고 있음을 보았다.
아무 것도 아닌 돌을 껴안고
백년을 살았을지 천년을 살았을지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쓰러지지 않도록
나무는 바위를 바위는 나무를
중심 잡아 줬구나.
거목일수록 큰 바위를 끌어안고 서 있다는 것
그렇다! 신념도 돌 같이 무거워야
마음의 중심이 되는 것
큰 사람일수록
큰 근심을 품고 사는 것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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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자답 1
구연배
당신은
달빛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울컥해서
마음의 편지를 쓰고
나는
울컥해서
달빛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편지에 마음을 쓴다
헤어져 다만 그리운 채로
너는 허공을 건넜고
나는 밤을 건넜다
밤새 당신을 자문자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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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김강호
뒷모습만이라도
볼까 했던
생각에
올해도
꽃 등불 들고
왔다가
그냥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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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꽃
김강호
누군가
몸서리치게
슬픔을
건너나 보다
긴 밤이
흥건하도록
일렁이는
흐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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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김강호
온 몸이
무너지도록
밤새워
울었다면서
개 가슴
한 귀퉁이도
못 울린
너는 바보
따뜻한 편지
-사랑하는 엄마께
김영화
엄마!
TV에 손 모델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나왔는데
희고
손가락이 가느다란 그녀는
손가락마다 예쁜 반지를 끼고
손톱엔 반짝거리는 돌기 매니큐어를 얹어놓고
그 고운 손을 간직하기 위해
집안 일은 모두 남편이 도맡아 하고
손에 행여 상처가 날까 봐
손을 상전처럼 모시고 산다고 자랑하네
내 손은 검고 손가락 마디가 굵어
거기다
흉터도 있는 거 기억하시나요?
엄마,
나의 고향이신 엄마!
그 날도 마을 앞 냇물을 건너 비탈진 산으로
삭정이를 꺾으러 가셨지.
눈 덮인 산길에서 몇 번이나
쭈르륵 쭈르륵
미끄러지면서
삭풍은 가지 끝에 부는데
서툰 낫질을 허공에 휘둘러도
나뭇단은 불어나지 않았어.
어린 내가 작은 삭정 나무 한 개라도 보태려다 그만…
힘든 세상을 살면서 엄마를 생각나게 해준 그 흉터
세월이 흘러
흉터가 흐릿해질수록 엄마의 모습도 희미해져
슬프지만
엄마,
엄마의 주름진 손처럼
저도
희고 고운 손이 아니어서 자랑스러워요.
이 흉터 있는 투박한 손으로
얼마나 많은 지친 사람들을 안아줬는지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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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코로나19
김영화
엄마,
온종일 밥을 못 먹었어.
눈에 치킨이 아른거려
이 코로나 정말 지겹네요
통장에 모든 수입 칸이 막힌 지 오래여요
오랜만에
사업하는 아들에게서
온종일 굶었다는
그래서 만 원짜리 치킨이
눈에 아른거린다는 전화를 받은 어미는
손에 힘이 풀리고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어느새 내 손은 폰뱅킹으로 가 있었다.
아들아
엄마도 여유가 없어 크게 보태주진 못하지만
우선 밥은 먹어라
엄마,
고마워요.
치킨 안 사 먹고 라면 사다 끓여 먹었어요
그래, 너만 힘든 게 아니니 우리 모두 잘 견뎌보자꾸나.
당분간 집에 와 있으면 엄마가 밥걱정은 안 할 텐데….
그리고 며칠 후
사랑하는 아들은
집에 내려와 일주일을 있으면서
대학 졸업 후 참으로 오랜만에
일주일 동안 따스운 엄마 밥을 먹고 갔다
하마터면 나만 배부르게 먹을 뻔했다.
고맙다, 코로나19!
힘내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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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
김상영
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손을 마주 잡으며
안녕이란 말도
차마 못하고 돌아선
그 밤
아~~
쓸쓸하게도 내렸네
밤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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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밤
김상영
작은 별
큰 별
곱게 찬란히
비추니
나는 또
너를
너는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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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우꽃
김상영
무우꽃 핀 들판을
하얀 고의적삼으로
목놓아 부르며
나는 울었다
그 언제인가
그리움에 다시
손을 잡고
마주하는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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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사랑
김예성
허리끈을 풀어 힘껏 끌어당기는 거야
어깨에 진물이 나도 쉼 없이 눈물로 감아 돌리는 거야
휘파람 섞인 허공은 기다림만으로도 충분하지
남남으로 이어지는 이별 따위는
잠시 하늘에 걸어 두고
사랑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 줄 몰라야 빛나는 거야
어둠이 찢겨 별빛에 실려 나가도
쉿,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입술
밀어는 침묵으로 시작 침묵으로 마침
다시 팔 벌려 밤새도록 속삭여도
사랑의 지붕은 이슬 덮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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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어둠만 땅에 묻는다
김예성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 위를
신발 한짝 떠내려간다
어쩌나, 사람들 강둑 난간을 딛고
살 떨며 소리친다
이어 꽃 한 송이 떠내려간다
사람들 목이 막혀 울지도 못한다
며칠이 지나가고
강가에 모인 사람들 고개를 숙인다
나를 용서해주세요
우리의 죄 큽니다
너무나 나약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꿇은 무릎을 꿇고
모두 눈물 젖은 어둠만 땅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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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갈참나무
김예성
여기에
갈참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열 손가락을 가진 햇살이 팔을 벌리면
열 발가락이 부드럽게 입술을 여는 동산
부지런한 바람이 어쩌다 혀를 깨물어
아픈 피를 흘리면
대지는 가슴으로 닦아준다
이 자리에
다시 둥근 창문을 만들고
구름 없는 날
하늘이 멈칫 서 있는 산비둘기 한 쌍을 부른다
동산은 거짓 없는 손짓 울타리를 열어
환히 웃는 사람들과
마음 가난하여 서로 사랑하여 평화를 노래해
나뭇가지 사이로 맑은 웃음 띄우며
살과 힘줄을 들어
열매를 키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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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캐다가
김자향
까치 긴 꽁지에서 봄이 깝죽거린다
햇살이 앉으려다 깜짝깜짝 흔들린다
냉이 꽃다지 쑥부쟁이 벌금자리
아지랑이숨결까지 한 소쿠리 캐 담는다
씀바귀는 상처마다 피가 맺혀 있다
그 피, 젖빛이다
절망의 깊이까지 햇살 움켜쥐었을 저 피맺힘이
내 삶인 양 싶어 쓰디쓴 뿌리를 살펴본다
봄빛 따사로운 들녘, 나물 캐는 엄마
등에 업힌 내 귓가에 도란 도란거리는
아낙네들 말품앗이와 도랑물소리
복사꽃가지에 울던 종달새가
엄마의 젖은 목소리를 물고
중천의 한 점으로 박혔을 때
그리움 아롱아롱
흐린 기억의 언덕에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고 싶은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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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란도 할미꽃
김자향
내가 할미 될 줄은 몰랐당께
나 따로
할미 되는 여자 따로 있는 줄로 알았당께
이른 봄 가란마을 뒷산 누비며
할미꽃 찾던 가란도 가시내, 우리 엄마
배 타지 않고도 학교갈 수 있는
뭍에서 사는 게 꿈이었다지
그 꿈 십분의 일은 이루어져
겨우 목나루 건너 분배마을로 시집와
아들 낳고 딸 낳고
백발에 가는귀먹은 할미 되어서도
기막히게 좋은 물 때 놓치지 않고
목나루 갯질 가자 채근하시면
기어이 모셔다 드려야 했지
호미 끝 엔간히도 억척이시더니
예견하셨던 거야, 긴 이별
어느 무렵부터 갯일엔 도무지 관심 없고
가란도 개 바라지만 하염없이 바라다보시고
등 굽은 허리, 흰머리 해풍에 날리는 할미
꽃처럼 웃으시던 우리 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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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봄
김자향
시름시름 속 앓이 하는 봄
씻나락 속에서 젖은 허기를 골라내시는
아버지
유채 밭 언덕에 부리는 한숨
소고삐 바투잡고 반음계의 봄을 갈아엎는다
진갈이 마른갈이에 숨 가쁜 워낭소리
논두렁밭두렁에서 비척 비척거릴 때
눈자위 붉어지는 하루해
황소울음 가둔 천수답다랑논에서
땀 흘린 소출이 평년작을 밑돌자
대출상환기일 예고장이 먼저 날아와
백발의 뼈가 삭아 펄럭거렸다
불임(不稔)의 땅에서 얻는 어지럼증은
뜨거운 삶 태우고 간 한 생의 슬픔일지니
조팝꽃 흐드러진 들녘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 저녁 휘파람 같은 수염은
어디서 하얗게 날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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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고 사는 사람
박부산
눈뜨고 살다가 눈감고 사는 사람
늘그막 빛 잃고 조심조심 외줄 타듯
생명의 빛 샛별처럼
직관으로 감지하다
형형색색 유혹 앞에 고스란히 진상眞相 묻혀
바늘 귀 밝은 눈 속고 사는 세상
꼴불견 못 본 척하여
눈감아 편하다
가도 가도 긴 동굴 순수한 원색뿐
돌부리 막아서도 지맥 짚고 찾아가는
마음의 눈 지혜롭다
사리판단 명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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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근황近況
박부산
무료할 때
문 여는 인터넷 바둑 방
점잖은 신선놀이 덕담 주고받고
끝내기
묘수 한 수로
회춘, 살맛나다
정석 벗어날수록
시들시들한 화분
정성껏 가다듬어 기사회생 바둑처럼
반갑다
꽃향기 넘치는 가훈,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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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堂
박희종
해가 뜰락말락
어스름한 새벽녘이면
“꼬끼~요”하며
어서 일어나라고 울던 꼬꼬닭
요즘엔,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댄다.
마을회관 평상에 앉아
할머니 시집올 적 얘기
호랭이 담배 먹던 얘기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할머니! 왜 저놈의 닭은 한낮에 울어댜?”
“점심 먹으라고 울지!”
“저녁나절엔 왜 울어?”
“궁딩이 근질근질해도
코로나 생각해서, 집 안에 콕 박혀
막걸리나 먹으라고 울지, 왜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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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생활
박희종
헌집 줄게 새집 달라던
달팽이가
어느 날, 내 몸 속에 살며시 들어왔다
앉았다가 드러누우면 빙그르
누웠다가 일어나면 핑그르
천장이 돌고
벽기둥이 돌고 도니
나도 따라 돌았다
세상이야기 두루 듣다보니
못마땅하여 귀딱지가 굳었나?
나이 먹었으니 매사에 참견말고
못 들은 척 하라는 이야기인가?
알았어.
알았다구!
안 좋은 이야기에 귀 닫고
봐도 못 본 척, 눈감고
바람소리 물소리 들으며 살아갈 테니
기분 좋을 정도로만 돌게 해다오
☆★☆★☆★☆★☆★☆★☆★☆★☆★☆★☆★☆★
생강나무꽃 차
성진명
이른 봄
산에 들에 꽃들이 핀다
기나긴 겨울
시체처럼 거무칙칙한
동체에 숨어있던
생명의 숨결이 어느 순간
하느님이 아담에게 숨결을
훅 하고 불어넣은 듯 피어난다
꽃을 따다가
꽃차를 만들려고 찜솥에 찐다
봄의 향기가 온 집안을 휘감아 돈다
그늘에 말려서
다시 찌고 말리고
찌고 말리고
찌고 말리고
찌고 말려서
꽃차를 마신다
조그만 찻잔에
펄펄 끓인 물을 담고
네댓 개의 생강나무 꽃잎을 띄우니
연노랑의 빛깔로 물이 번지고
너무 진하지도 않은 향기가
코끝을 통해 가슴으로 번지고
한 모금의 차 향은
목구멍을 타고
온몸을 싸르르 적신다
생강나무꽃차를 마시니
자꾸만 생각난다
생강꽃차 치매엔 딱이다
☆★☆★☆★☆★☆★☆★☆★☆★☆★☆★☆★☆★
어머니 산
성진명
다른 이들은 말귀를 닮았다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하늘을 향해 봉긋 솟은
저 포근한 한 쌍의 봉우리는
아기에게 물려주는
엄마 젖가슴이 아니겠어요?
어머니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이 땅은
그 옛날 아브람과 모세가 찾아 나섰던
바로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겠어요?
예쁜 연인들이 손을 잡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걸어
천황문 앞에서 고즈넉한 풍경소리 들으며
아들, 딸 점지해 달라하면
설마 못들은 척 하시겠어요?
아버지들의 아버지
그 아버지들의 오랜 아버지 때부터
아낌없는 사랑으로 이어온
대대손손 뿌리를 내리고 싶은 곳
바로 여기
진안고원이 아니겠어요?
☆★☆★☆★☆★☆★☆★☆★☆★☆★☆★☆★☆★
굿바이 바비BAVI
성진명
무려 오십사일간의 긴 장마로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가
결리고 쑤시고 아파 죽겠는데
팔월 이십이일에 대만에서
태어난 너는
시속 육십오킬로미터급으로
아주 쎈놈이라는 무성한 입소문이
바람보다 빠르게 한반도를 강타했다
드디어 네가
제주도에 상륙한 이십육일
역시 너는 사납고도 날카로워
날리고 부수고 무너뜨리며
하룻밤 새 남해를 짓밟고 서해로 강행군을 하였다
하지만
꼬부랑 꼬부랑 소태정 고갯길을
넘어오느라 힘이 빠져
진안에서는 말랑말랑한 바비브라운**이 되어
*2020년 제8호 태풍으로 베트남 하노이 바비현 부근에 존재하는
석회암 산맥인 ‘바비산맥’에서 가져온 이름.
**밥이 브라운(누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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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그리워하며 하고 싶은 말
송미숙
언제 보아도 늘 변함이 없는 당신이
내게 존재하고 있어
진실이 없는 이 세상에
당신의 꽃 같은 마음이 있기에
내가 당신 마음에 항상 있는 것처럼
당신을 지켜만 봐도 나는 너무 행복하다
그러나 문득 당신이 내 곁을 떠나
어디론가 떠나 버릴 것 같아
두려움에 잠겨
긴 잠을 잘 수가 없을 때가 있다
당신이 고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기라도 한다면
당신이 먼저 사랑의 말을
걸어주기라도 한다면
나 기다림에 지쳐 슬프고 고독할 때
또 보고 싶음에 지쳐 있다 하여도
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 사랑하리라
아름다운 미소로 고백하고 싶어요
예쁜 내 마음의 꽃들에 솔직히 고백했어요
해 뜨는 이른 새벽이면 그 예쁜 꽃들이
내가 당신에게 하고픈 그 말을 곱게
아름답게 당신에게 전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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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 글
송미숙
그사이 같은 마음이 되었나
몸부림을 안고 태풍이 스칠 정도로
목소리는 없고 댓 글 인사 나누면서
아직도 비밀이 있나
빗소리에게 묻고 싶다
보여줄게
밀렸던 댓 글도
기다렸던 댓 글도
고운 사람 찾기보다
빗방울 소리에 맞추어
사랑노래는 어떨까!
보여줄게
밀렸던 댓 글도 시간이 걸리지만……
☆★☆★☆★☆★☆★☆★☆★☆★☆★☆★☆★☆★
시 농부
송미숙
마음 밭에 마음의 씨를 뿌린다
너무나 깊이 파헤쳐 심장소리 파도친다
시 연상이 발버둥친다
기다리다 지쳐 꿈속 탄생을 기다린다
단잠을 깨도
마음 밭에 씨뿌리기를 주저한다
싹이 트면 아끼던 숨소리 들으며
빈 공간을 채울텐데
아직도 시의 씨앗은
마음 밭에 서성거린다
심장 속에 움추려 있다
터질 듯 말듯
안아주고 싶다
살포시 싹트기까지 엄마의 마음으로
☆★☆★☆★☆★☆★☆★☆★☆★☆★☆★☆★☆★
거리 두기
안현심
멀찍이 서서
눈시울만 익히기로 하자
너는 저만치
나는 이만치
옆구리 비비는 억새 밭에서
섬진강을 감아 도는 모래톱에서
그리움으로 피고 지는
목화솜구름처럼
너는 운장산 봉우리에 머무는 바람
나는 피아골 너럭바위를 흐르는 물.
☆★☆★☆★☆★☆★☆★☆★☆★☆★☆★☆★☆★
아버지의 쑥
안현심
달빛에도 목마르던
윤사월
봉분
마른 흙을 뚫고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애기발가락,
피우지 못한 이데올로기가 짱짱한 쑥으로
돋아났네요
진달래 핏빛 물든 산자락에서
반듯한 이마로 잠든
아비여
이 쑥국을 끓여 먹으면 당신의 꽃봉오리 만질 수 있을까,
어린 아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꽃자루 한마디들을 수 있을까.
☆★☆★☆★☆★☆★☆★☆★☆★☆★☆★☆★☆★
잠의 능선
-고령 지산리 고분군
안현심
잠이 옵니다
자꾸자꾸만 잠이 옵니다
대가야가 잠든 능선에서
고대의 연못으로 빠져듭니다
왕의 무덤에 순장되었다가
환생의 강물에서 노 젓는 귓바퀴에
대장장이의 망치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엿가락처럼 철鐵을 벼리던 장인의 숲에서
나긋나긋 휘어지는 잠
별자리 베고 누워
구만리 하늘 길을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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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지 대본
우덕희
자신과 모두를 위해
누군가 흘리는 땀방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생명의 근본인 먹을거리
그럼에도 대가의 초라함
어제오늘 아니건만
아직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
우리네 현실
천하의 근본인 농사가
제 대접을 받는 날
농자지천하지대본
제대로 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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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다운 나라 만들기의 좋은 기회
우덕희
선거참여가 18세로 변경되어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
전체 국회의원 수 300명
알 듯 말 듯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47명
1인 2표로 지역후보와 지지정당을 투표하여
선출된 한량들
20대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국개의원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많은 아쉬움이 있지만
유권자들은 촛불 정권에
더 많은 힘을 실어 줄 수 있도록
많은 의석을 주었다.
문재인 촛불정권은 일신하여
가열찬 개혁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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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실 진안
유순예
나는 문화를 먹고사는 예술가예요.
닫혀있는 것
머무르는 것
곰삭히는 것
싫었어요.
문화를 마실 줄 아는 손길들이
나를
커뮤니티 문화 공간으로 꾸며줬어요.
문화적 휴식이 있는 공간
삶이 풍요로워지는 공간
일상을 나누는 공간
예술가들의 창작 전시 공간
지역 주민들의 마실 공간
꿈나무들의 놀이터
나는 한때, 땀내 먹고사는 연습실 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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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봉수대 산천초목에 외치다
유순예
혼자 얼마나 외로울까
‘막걸리라도 사들고 와서 따라드릴 걸’
후회할 짬도 없이
태평봉수대는 많은 것을 보여준다.
봉수군도 없이
산맥과 산맥 사이에 용담호를 들여앉혔다.
아홉 개의 봉오리 가족들이 모여 사는 구봉산을 손짓한다.
산 마을과 산 마을을 이어주는 산길에게 눈인사를 보낸다.
야무진 겉모습과는 다르게
이름 모를 들꽃 세 송이 기르는 모습이 애잔하다.
이끼 머금은 돌이 곰삭은 말을 다독이는 모습이 숙연하다.
돌과 돌 틈새를 에돌아가는 바람이 쉬쉬 거린다.
태평하게 보이지만 태평하지 않은
태평봉수대, 산천초목에 외친다.
횃불과 연기 없어도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말발굽 소리 사라졌어도
나 여기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그따윌랑 걱정마라.
마이산 정기를 불러
운장산 정기를 불러
싸리나무들을 불러 모아, 회초리부대를 몰고 가서
역병, 그따윌랑 한방에 물리칠 것이다.
태평하게 보이지만 태평하지 않은
태평봉수대, 산천초목을 내려다보며
혼자 얼마나 외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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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린 탑이 낳은 설화
-진안 운산리 삼층석탑
유순예
나는 흰옷 입은 할아버지
신성한 것이 나뿐이겠는가
구전되는 이야기들이 하나뿐이겠는가
석탑이란 것이 나뿐이겠는가
돌이 되어서라도 전승하고 싶네
내 기운
돌탑이 되어서라도 지키고 싶네
내 자리
산이 높아 못 온다는 핑계, 대지 마시게
‘쉬이 쉬, 쉬이 쉬.……’
골바람 드나든다는 낭설, 믿지 마시게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듯
문화와 관광이 공존하듯
신성한 내후사동 마을에서 대대손손 번성하시게
꿈에서나 생시에서나
웃는 얼굴 만나거든
그게 나인 줄 아시게
‘새, 세상, 새 세상……’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거든
그게 나인 줄 아시게
하마터먼
일본 땅 어디에선가 망향가를 부르며 울고 있을 뻔한
나는 흰옷 입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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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지 않음
윤일호
날 풀리니
마을 빈터에
아이들 여럿이 모여서 논다.
어느새
울퉁불퉁 먼지 폴폴 땅도 어울리고,
제각각 피어있는 들꽃도 어울린다.
파란 하늘과 구름도 함께 어울리고,
지나가던 바람도
아이들과 어울린다.
뾰족구두 또각 또각 미연이 엄마
“미연아,
에그 흙 좀 봐.
얼른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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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마트 아저씨
윤일호
들어오는 사람마다
필요한 걸 척척 안다.
승호 좋아하는 과자
할아버지 마시는 막걸리
엄마, 아빠 살거리
말 안 해도 금세 안다.
20년 간 마트를 하면
저렇게 알 수 있구나.
자주 안 보던 아저씨 얼굴
자세히 보니
정말
도사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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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부터
이병율
자유를 이고 걸었다
비탈길로 떨어진 무상은 저만치 가고
부유해 무거워 볼맨 소리가 난다
땀으로 떠나는 가벼워진 마음
초겨울의 한낮 운무가 낀 나뭇가지에
하얀 그리움으로 머무는 위령선
떠돌다 그리는 구름의 꿈을 회상하였다
고갯마루 안겨주는 상큼한 바람 길
양방향 서로 다른 계절을 가리키는 나목
환대 받으며 낙엽 소리를 밟았다
산그늘 내리는 장엄한 길을 걸으며
오랫동안 감추어진 기억으로 드러나는 탐욕
비워야 보이는 바람과 햇살의 가벼움
마음에 스며드는 유심으로 걸었다
☆★☆★☆★☆★☆★☆★☆★☆★☆★☆★☆★☆★
장날의 단상
이병율
눈요기로 유인하는 진안장날
꾸부정한 삶의 무게가 차분해진 오후
반가운 정이 꽈배기에 기대어
쓸쓸해진 등뒤로 걸어온 하나의 세상
검은 비닐에 세상을 흔들고
막걸리 맛에 황홀해진 걸음걸음
노인의 얼굴에 묻은 삶의 기록을
석양빛 햇살로 털어 낸다
☆★☆★☆★☆★☆★☆★☆★☆★☆★☆★☆★☆★
산 목련
이병율
이맘때 되면
하얀 꽃잎은 청순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깊은 산 기운을 담아
다소곳한 사랑이 그리워지는 향기
청아한 새소리를 듣는다
사랑의 시절이 그리워 회상하고
소박했던 마음으로 소곤소곤 다가와
유월의 고결한 초록빛 사이로
함박꽃 붉은 수술로 기록한 누이의 미소
청조해진 가슴이 고요하다
어디선가 날아드는 날갯짓 소리
자연의 기운으로 완성된 성지
산 사람 소리는 잎맥을 보고
곱고 소박한 빛으로 피어오른 천년화
꽃잎 떨어지는 삶의 시간이
향기 그윽한 어머니를 기억했다
☆★☆★☆★☆★☆★☆★☆★☆★☆★☆★☆★☆★
수항리 노을
이현옥
저 보랏빛 폭죽이여
강에 닿으라
저물녁 사랑이
물에 잠기면
나는
혼절하듯
그댈 부르리라
사랑은
끝까지
절망 아니면 희망
쓸쓸함 아니면 벅차오름
상처 아니면 기쁨
어느 것을
선택한다 해도
노을지고
바람 불고
꽃 지고
또 피고
☆★☆★☆★☆★☆★☆★☆★☆★☆★☆★☆★☆★
불면의 문장
이현옥
도대체
너를 두고 잠들 수 없었네
詩는 네가 썼지만
나에게 왔으니
문장은 나의 것
그 문장사이에
꽃무늬를 넣다
소나기 한 줄 뿌리다
쓸쓸한 기다림 가득했을
원고지 네모에 갇히고 싶다가
새벽빛 커튼 걷어내고
밤사이 다녀간 내 몸의
꽃 문신을 찾다가
서쪽 끝
아직 이울지 못한 별빛처럼
금강초롱
밝힌 아침
훼스탈과
한방소화제 섞어 먹은
불면의 글자 체함
☆★☆★☆★☆★☆★☆★☆★☆★☆★☆★☆★☆★
드론 농약
이현옥
우리 시골도
드론이
농약을 한다
등에 지고
통으로 농약 마시며 뿌리던
고단한
시대는 가고
휙휙 비행기처럼
하늘을 날며
그 너른 논을 순식간에
끝내는 시대
돈이 땀을
돈이 노동을
대신하는 논 위에
결국
두 배의의
노동을
요하고 있다
땀과 노동을 진 드론에게 값을 지불하기 위해.
☆★☆★☆★☆★☆★☆★☆★☆★☆★☆★☆★☆★
봄밤에 그대도 깨어 있나요
이점순
한 잠자고 나면 별빛이 구름 뒤에서 서성이며
뭉그적거리는 나를 본다.
"그만 일어나시지? 뭉그적거리지 말고~"
기분 좋은 미소로 내 손을 끌어 일으키는 별빛에 싫찮은
눈흘김을 주면서 몸을 세운다.
새것으로든 남의 손때 묻은 것으로든 내게와 머리맡에서
서성이던 책들을 주섬주섬 정리하며 한 권을 든다.
'적요 숨 쉬다' -이적요, 글 그림
그의 일상 속 상념을 엿보는 시간에 나를 반성한다.
예술의 혼이 다른
예술의 공간이 다른
예술의 상황이 다른 적요와 나의 숨쉬기를 가름해본다
아니 입맞춤처럼 맞대어 본다.
스무 살 적 부끄럼은 아니지만 세월이 지나간 얇은
자존심은 아니지만 살아 온 흔적이 여유롭지 않았지만
나를 담금질하고 모서리를 사포질해 寂寥(적요)의 시간에 나를 가둔다.
육십 나이가 되면서 부쩍 손등을 덮고 있는 살갗의
쪼골거림이 유난해 진다.
지난여름을 견디느라 흙빛으로 윤이 났던 살색도 희끄무레하니
도시색이다
겨울 칼바람에도 풀이 죽지 않은 풀이 서서히 등을 세운다.
심심한 겨울이 가고 호미질에 어깨며 허리 서껀 아우성치겠지만
기대가 사뭇 차 오른다.
홀로 깨어 있는 봄밤에.
☆★☆★☆★☆★☆★☆★☆★☆★☆★☆★☆★☆★
선물
이점순
습관 된 내 한숨은
진한 가래처럼 가슴에 철썩 붙어산다.
더딘 날 샘이
올올이 올라앉은 흰 머리칼에 시간을 버티고
그릴 것도 외롤 것도
암시랑 안한 척
그저 한 세월 잘 살다간 인연으로 주는
선물쯤으로
그래 늙는 것은 서런 것이 아니고 선물임을
뭘 더 기대하고
뭘 더 寤寐(오매)할 것이 줄어드는 것이어서
마음을 편케하는 선물인 것을
그렁그렁 가슴을 치는 한숨을
한 순간 카악 뱉어버리고
양팔 가득 안은 선물보따리 받은 기분으로
나이 듦을 가슴에 가득 안아 줄 거다.
☆★☆★☆★☆★☆★☆★☆★☆★☆★☆★☆★☆★
천성이 그리운 게지
이점순
구름에 달이 살짝 가려지는 밤이면
밤나무에 메인 동이는
우우우거린다.
천성이 실린 긴 울음을 운다.
파도같이 달려오는 떨 잎*을 보면
왼 발 오른 발 바뀐 신발도 모르고
우우우 뛰쳐나가
나이도 잊고 천성으로 내달음질을 한다.
날이야 새든 지든
그대야 가든 오든
떨 잎에 실린 내 천성은 마구 발방이다.
☆★☆★☆★☆★☆★☆★☆★☆★☆★☆★☆★☆★
다람쥐
이정우
바람이 스산한 가을 산
겨울 양식을 저장하는
굴밤 나무 밑 다람쥐들
도토리 입안에 가득 물고
나무 중턱에 파놓은 굴속을
들락 달락 겨울 양식을 모은다
그 속에 새끼들이 있겠지
눈 오는 날 식구들이 모여 앉아
하얀 앞니로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 들리네
☆★☆★☆★☆★☆★☆★☆★☆★☆★☆★☆★☆★
식물도 인내심이 있다
이정우
봄은 푸르름을 더해가며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나무는 서로에게 배려를
하면서 뻗어간다
서로에게 공간을 가져가며
봄은 바닥으로부터 온다
푸르름을 더해가며
가을은 반대로 위에서부터 온다
한 잎 두 잎 단풍부터 들고
나뭇가지부터 앙상해지며
겨울 준비를 한다
홀딱 벗은 알몸을 떨면서
여유 없게 봄을 기다린다
☆★☆★☆★☆★☆★☆★☆★☆★☆★☆★☆★☆★
3.15 부정 선거
이정우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채스카 여사 사이에
자식이 없어서 부통령 이기붕, 부인 박마리아여사
장남 이강석 군을 대통령께 양자로 주었다.
1956년 3.15 부정 선거로 인해
온 국민이 일어나고 정치가 마비되었다.
그 때 이강석 군은 이기붕, 박마리아 부모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기도 자결을 했다.
3,15 부정 선거 여파로 일선 경찰관들은 서장 및 정보과장이
대기 발령을 받고 우리는 군산 경찰서 경비과장으로
좌천이 되었다.
그 해 9월에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고 직장을 잃게 되었고
나는 그 충격으로 앓아누웠는데 병원 의사가 다녀가도
모르고 옆집에서들 문병을 왔는데도 스크린처럼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었다.
이제 이사를 해야 하는데, 나는 전주로 가자고 했는데
남편은 미련이 남아서 그 때 민주당 거물급인
무주 출신 국회의원이 곧 복직을 시켜 준다고 약속을 했단다.
이런 때 고향에 가서 동기간 옆에 잠깐 살다오잔다
나는 고향 용담으로 와서도 오랫동안 병원을 다녔다.
부정 선거만 아니었으면 남편은 진급을 하고
국가에 많은 일을 했을 텐데 위에서 정치를
잘못하고 오직 공무에만 열중하는 청렴결백한
남편만 억울했다.
그 때 얼마 안가서 정권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뀌면서 복직이 어렵게 되었다.
현직에 있을 때 전라북도 경찰관 상이라면
거의가 그이 꺼 라고들 했단다.
대통령 상장 두 번에 방위 포장증, 각 장관 상장들이
많아서 금성화랑무공 훈장 두 개를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 유공자다.
☆★☆★☆★☆★☆★☆★☆★☆★☆★☆★☆★☆★
너 아니
이종천
버스에서 내려
어두운 골목길이었지
벽에 기어오르는 담쟁이 어쩜 어둠속에 빛이 되어 있을까
이른 아침 궁금했거든
늦잠을 잔 것일까
아무도 없는 휭 한 담장에는 그저 낙서처럼 그만 서 있었지
누가 보든가 말던가
그가 말했어
의기양양하게 어디 사느냐고
나는 강남의 어디라고 기가 질린 듯이 고하고 말았거든
뚝심 좋은 갈 참 무는 뿌리가 깊지 못하다고
질책하는 말투 속에 야! 거기는 임대 주택이 판치는 거기잖아
그래, 그래, 하늘아래 등급은 있거든
폭목 이라는 거 아는 걸까
아니면 또 아니지 또 뭐,
산에 오르다 보니
오르기는 힘들어도
올라보니
야호 외치는 건 메아리도 순간이더라
너 아니.
☆★☆★☆★☆★☆★☆★☆★☆★☆★☆★☆★☆★
비밀 창고
이종찬
샤워를 하고 있었지
유리창에 비친 몸의 비밀을 훔쳐보는 재미보다
보물찾기 식의 두려움이 앞서더군
매일 아니면 이틀 삼일에 봐왔던
비밀 창고의 문은 퇴색해 가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되었어
비밀의 창고에는 부끄러움과 추함이
반복되는 활동사진과 같았지
길을 가다가 마주친 시선이 멈춰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
고정된 렌즈속의 동그란 동공이 어지럼을 느끼더군
겨울이었던 가
나무보고 나목 이라고 하기에 빤히 바라봤지
발가벗겨진 내가 거기에 오돌 떨고 있지만
비밀을 가릴 가운은 없었나봐
봄이 오면서 앳된 꽃들이 수줍어하는데
왠, 아우성이 소란 떨까 싶었어
며칠 있으면 고개를 떨군 흔적만 남길 텐데 그리고 여름이 왔어
늦게 찾아온 장마가 화사하더군
곧 가을일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지친 계절의 호들갑이
어느 순간 비밀에 부쳐 버리기로 했지
거울 앞에 서 있는 추상과 비밀을 감추기 위한
성스런 의식으로
☆★☆★☆★☆★☆★☆★☆★☆★☆★☆★☆★☆★
연유를 몰랐네
이종찬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산 마을 곳곳마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
고갯길 넘자 넘자 하지만
저만큼 높은 재가 어디 있을까
여자가 홀 딱 벗고 홀 딱 벗고
아낙의 애절한 웃음과 흐느낌이 흐드러지네
사내가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선 머스마 애절한 몽정 쑥스럽게 볼이 타네
춘삼월 생 많은 연유 알듯 모를 듯
흐드러진 꽃잎이 똑 뚝 눈물 떨구네
진즉에 알지 못했던 꽃말 이제야 알았네
검은 뻐꾸기의 울음을
☆★☆★☆★☆★☆★☆★☆★☆★☆★☆★☆★☆★
푸르른 비상
이필종
아릿한 그리움에 젖은
무심한 금낭화
어둠이 찬연한
여명의 탯줄이여
어느 여인의 가슴에 핀
서럽도록 고운 꽃이려니
푸르른 화심을
비바람인들 흔들 수 있으랴
☆★☆★☆★☆★☆★☆★☆★☆★☆★☆★☆★☆★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이필종
아스라한 세월을 품고
그가 앉은자리가 곧 세상이다
미소는 그윽하고 평화롭고
말하지 않아도, 할 말을 다하는
그의 생각은 여기서
그 곳 까지 아득하다
처처에 맑고 고요하여
무릇 시방세계의 태동에 이르고
푸른 이슬 머금은
한 송이 연꽃은
내 가슴 실핏줄을 타고
마디마다 그리움에 젖어든다
부질없는 번뇌도 탐욕도
언젠가 또 다른 저편을 향해
다 내려놓고 가야하는,
산자에 대한 운명이 아니던가
☆★☆★☆★☆★☆★☆★☆★☆★☆★☆★☆★☆★
시계 꽃
이종찬
저절로 저리될 리가 없다
먼 옛날 그의 조상은 남루한
초막의 선비였거나
산촌 은하수마을 이어주던
가난한 뱃사공이었으리
그의 핏줄이 돋아 오른
그 꽃
가슴으로 보아야
푸른 화심을 본다
청산계곡 오솔길 오르며
도포자락 흩날리고
푸른 강물에 노 저으며
부르는 아련한 뱃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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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이호율
하늘 참 이쁘다
파란천에 흩뿌리듯 그려진
하얀 구름
어쩜 이리 고울쏘냐
유명한 화가는 아닐지라도
무심한 듯 그려진 그림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담은 듯
아니 유난히도 내 마음을 담았나보다
지금의 이 기쁨을……
듬성듬성
여운을 남기고
살그머니 이는 바람에
어느새 또 새로운 그림이
아! 전 그림이
지금이 더 좋은데
다음. 다음. 다음 그림은
호기심에 눈을 돌리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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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이호율
만지작 만지작 하다 보니
전화왔네
필요하면 다시 하겠지
혼자 생각에
받지 아니하고……
어찌어찌하다 휘힉 지나가고
전화 온 것도 잊은 채……
이것은 아닌 것 같아
깊은 시름에 잠기고
무심히 지나간 세월
궁금하고, 필요해서 연락했을 터인데
이런 소소한 예의가
길흉화복이 될 터인데
연락 올 때 즉시 받고
부재중일 때 미안함을 안고 연락하자
일상의 얘기라도
전화한 이의 마음을 헤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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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이호율
친구 !
그대 눈에 나만 보이기를
덧없는 희망인가?
너의 귓가에는
나의 목소리만이
욕심일까
큰일났네
독과점이네
어허 그러게
욕심꾸러기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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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 폐렴
임우성
겨울이 가고
우한폐렴이 왔다
발생국에서 방역보다 먼저 확실히 한 것은
개명이었다
우한폐렴이 아닌
코로나19래나 뭐래나
나는 본명을 쓰기로 했다
우한폐렴!
눈뜨면 뉴스 특보
밥 먹을 때도 뉴스 특보
일하다가도 뉴스 특보
쉬는 시간에도 뉴스 특보
신천지가 휘몰아치고
이탈리아 사망자가 일만명을 넘고
미국 확진자가 십만명을 넘고
무심히 창을 열었더니
언제 어떻게 피었던가
매화도 우한폐렴
다 지고도 우한폐렴
없어도 우한폐렴
싱그러워 속이 더 끕끕한
연초록 우한폐렴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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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증상 감염자
임우성
아무렇지 않은데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몸속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지니고
그 바이러스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기도 한다면
황당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멀쩡해 보이는 사람에게서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에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를
어떻게 믿고
어떻게 마음을 주고
따뜻하게 손잡아 볼 수 있겠는가
저주咀呪받은 종種, 사람에게
최악의 재앙이 닥친 거다
더불어 살아가던 사람들끼리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서로를 피해야 하며
검사를 받아 보기 전까지는
나 자신마저도 믿을 수가 없는
불신과 의심과 불안의 일상,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콩나물 시내버스, 광란의 공연장
열광의 함성 각종 경기장
스스럼없이 부대끼며
함께 어우러질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이
평범하고 당연했던 그런 시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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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몰락
임우성
이제 하느님도 조또 아니랑게요
철저한 무신론자 강씨의 말씀이거니
거북살스럽기가 그지없다
전강후니 목산가 멍가 하는 새끼가
까불먼 씨발 죽여불란다고 해도
베락도 안내리고 찍소리도 못하자나요
언제 하나님이 나쁜놈들 벌주시는 신이었던가
신앙인들 말씀과는 달리
착한 사람들에게 복주시는 신도 아닌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하긴 하지만
하나님이야 말로
믿는 자이건 믿지 않는 자이건
사유思惟하는 짐승으로서의 사람이
극적인 절망에서 부르짖게 되는
보편적인 호칭
최후의 보루가 아니던가
표현이 거슬리긴 해도
강씨가 말하는 그 새끼가
과연 목사로서 합당하다고 한다면
나 역시 하나님
욕먹어도 싸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겠지만, 그 새끼가
나한테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자꾸 쌍욕이 나오려 하는 것은
아이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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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秋夜
전근표
낙엽 뒹구는 소리에
귀뚜리 밤새 슬퍼 울고
툇마루 구석진 곳에
내려앉은 하얀 달빛은
밤 거미 생명줄을 놓았구나
뜰 앞 솔 나무 가시에 찔린
초승달은 황금빛 금가락지를 걸고
코끝에 부서지는 서늘한 바람
국화 향이 깊은 밤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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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길
전근표
가녀린 새싹
지구를 뚫고 서서
창공을 휘저으며
큰소릴 친다
내 가는 길 저리 비켜라
자랄 만큼
그래도 혼자 가고 있다
하늘을 꿰뚫고서
꿈이 있다
희망이 있다
자유가 있다
살아 있어 행복한 나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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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사랑하자
전근표
자연을 훼손하는 사람
자신을 죽이고 천추의 한을 남긴다
날으는 새
하나하나 존귀한 생명이지 않는가
헤엄치는 물고기
살생하지 말자
손으로 일궈 얻어지는
곡식 과일 푸성귀
직접 먹이 주고 기르는
가축만을 먹자
하늘과 땅은 알고 있다
인간이 태어난 이유를…
우리가 어찌 공기와 물
숲의 고마움을 모를까 보냐 마는
사람들아 자연을 사랑하자
우리 모두는
잘 난 게 하나도 없다 자연에 묻혀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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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 씨 뿌리는 마음
정재영
어찌 열매만 보려하는가
입추 지난 사랑은
구황救荒의 시기
기다리는 소식은 가뭄이 들어
잔잔한 눈길에
웃음 잃은 지 오래다
달빛 차가운 산과 들
붉은 옷 입기 전
철늦은 사랑은 언제나 꽃이다
낮엔 안개꽃
밤엔 소금 꽃 보려
숨겨둔 늦 사랑 씨를 뿌린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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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수제비
정재영
물 건너 두고 온 푸름 익은 곳
굳은 마음 실어 깨우는 마음
물맴이 둥글게 둥글게 크게 그려
끝없이 펼치는 동심원 화폭 위
말 못한 그리움 묶어 보내도
계신 곳은 멀어서 보이지 않아
날아가다 주저앉는 어설픈 마음
흘러가는 물결에 사라지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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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전후
정재영
아직 남은 더위 끝자락
가지 않으려 발광하는 뜨거움
이름만 가을이라니
잠 못 이룸은 열대야 탓이 아니다
서북풍에 구름 걷혀 달도 밝은 밤
오가는 철새들 하늘을 보며
잠 못 들고 있을 그 날도
날씨가 차가워서 그런다 할까
비 오고 바람 불어
뿌 뽑히도록
흔들리는 기다림으로 보낸 우리 사랑
도리 없는 이만치에서 접어두자
이파리 우수수 떨어져
옆구리에 찬바람 들어오는 날
가슴마저 시리지 않도록
뜨거웠던 마음 고이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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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폿집 추억 1
최규영
집에 가면 양식 떨어졌을 텐데
자식놈 월사금 줘야 되는데
돌아가는 발걸음 터덕거리는데
밀린 외상술값 더 두려워
쭈빗쭈빗 용기내어 들어선다.
반가운 듯, 외상술 경계하는 듯
주모 겹친 표정 외면하고
목로 한구석 자리하여
한 사발, 두 사발 들이키다 보니
어느새
술값 걱정
양식 걱정, 월사금 걱정
저절로 스러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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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폿집 추억 2
최규영
설거지 대충 마친 반백의 주모
외상 술값 채근하러 옆에 와 앉아
요새 일거리 없어 힘들지?
나도 손님 없어 참 힘들어,
연탄 백 장 떼기도 어렵다니까.
그래도 예전엔
이 장사로 먹고는 살았는데,
이제는 잔술 팔아 집세도 모자라.
때려치워야 할지 말지…
허, 내 처지보다 못하다고?
여하튼 대폿잔은 요술을 부려
일배, 삼배 더해갈수록
호호탕탕 장부기질 되살아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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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길
한숙자
생生과 사死는 한순간 바람이라네
저기 힘겹게 이고 지고 가는 나그네
한없는 욕심은 허리를 휘게 한다네
사는 게 무엇이길래
무거운 짐과 끝없는 허욕으로
생애를 누렇게 시들게 하나
구름 따라 바람 따라 흘러가노라면
기화요초 사운대*는
천국은 우리 것 아니겠는가
*사운대다→살랑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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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한숙자
아침 햇살 펴듯 마당에 멍석깔아
빨강 고추 널어놓고
이웃집 마실간 아낙네
심술궂은 먹구름 천둥 번개 앞세워
소나기 한줄기 퍼붓고 지나가니
마실간 아낙네 잰걸음 달려와
젖은고추 걷을 때
천둥에 놀라 토방 밑으로 숨었던
삽살개 어정어정 기어 나와
젖은 몸 떨어내는 여름날 오후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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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
한숙자
한여름 선비들 모여 시詩 한 수 읊던 누각
한내천 맑은 물에 참게 잡으며
물장구 치고 물놀이 하던 어린 시절
아낙네들 빨래하며 동네 이야기 꽃 피던 곳
여름밤 몰래 나와 여인들 목욕할 때
반딧불이 불 밝혀 함께 놀던 한벽루
지금은 옛 선인 사라지고
세월만 흐르고 흐르다 보니
냇물 고기 오모가리 탕이
낯선 손님들 반가이 맞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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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하광호
마이산은 엄마의 품 같아서
볼수록 마음이 포근하고
안보면 보고 싶다
돛대봉, 용각봉, 마이봉, 문필봉
계절 따라 이름도 바뀌며
언제 보아도 마음 설렌다.
코흘리개 어릴 때부터
우러러 보며 꿈을 키웠고
초등학교 때에는
엄마와 함께 소풍가서 놀다가
내년에 또 오마고 약속했는데
이제는 어른 되어 찾아갔어도
두 귀 쫑긋 세우고 맞아주는
영원한 우리의 벗 마이산
그동안 잘못된
허물과 시기, 오기, 비방들은
탑영 저수지에 퐁당 씻어버리고
마음은 언제나 신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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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읽어는데 너무 길어서요
하루에 조금씩 올려주시면
보는 분들도 편하게
읽을듯요
즐밤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