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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사경회의 회개운동
1. 머리말
한국의 순수한 오순절로 평가되는 1907년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그 성격에 관해서 대부흥운동이냐 대각성운동이냐, 대회개운동이냐,
대사경회냐는 논쟁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영계 길선주 목사가 자리하고 있다.
영계 길선주 목사(1869-1935)는 ‘조선 크리스토교의 아버지’요
'조선 교회의 지대에 한 큰 초석'이며 또는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 인물 중에 한 사람’이요 새벽 기도회 운동과
1907년 부흥사경회 등 한국교회의 신앙의 몇 가지 특성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고 ‘한국장로교회 보수주의 신학 사상 형성에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 평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길선주 목사는 명실공히 1907년 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서,
또 3. 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계 첫 번째 인사로서 명성에 걸맞는 발자취를
한국 크리스토교사에 남 긴 인물이다.
백낙준은 선생은 우리 교회 50년 사상에 대표적인 인물로서
우리 교회 반세기 역사를 끝막으셨다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1907년 1월 전후하여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난
일련의 열화 같은 신앙운동의 실상을 재구성하고 그 운동의 성격을 재조명해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1907년을 재조명하는 여러 논문에서 별로 주목하지 못한
1906년 12월의 집회 즉 길선주 목사 자신이 대사경회라고 회고한 내용을 소개하고
이어서 1907년의 대사경회의 대회개 운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종합하여
그 일정을 재구성하여 보려고 한다.
2. 1906년 12월의 장대현 교회 대사경회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회개운동은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된 영성운동으로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인데
그 주역은 길선주 임에 분명하다
1905년 장대현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시작한 길선주 장로는
평양신학교의 졸업을 앞둔 전도사로서
여러 차례 사경회(The Bible Conference)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길진경의 <영계 길선주>에 의하면 1922년 일기에 친필로
"1906년 동기 대 사경회 때에 성신 강림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증언한다.
이는 "매큔 선교사의 제의로 시작된 크리스마스 이후 한 주간의 특별기도회가 끝나고
1월 2일에 사경회(the winter Bible training)가 시작되었다."는 PCUSA(19O7)의 보고서와 일치한다.
그러나 1906년 12월 마지막 주간의 이 대사경회는 그 동안 별로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06년 12월의 대사경회의 열기가 이어저 1907년 1월 대사경회가 열렸다는
점에서 새롭게 주목하고 평가할 내용이라고 여겨진다.
우선 길선주 1922년도에 작성한 기록에 ‘1906년에 대사경회’가 있었다는 하였으며,
‘대부흥회'라는 용어 대신 '대사경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대부흥회라는 용어의 적합성에 관한 논란에 커다란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영계 길선주>의 저자 길진경 역시 1906년 겨울에 있었던
장대현교회의 대사경회 때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임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1907년 대부흥회'라는 용어 대신 의식적으로 '1906-7년 부흥회'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였다.
그리고 1906년 성탄절이 지난 다음 5일간 계속된
대사경회의 집회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그 경위는 이렇다.
평양 거주 선교사들은 원산에 있던 하디(Howardie) 박사를 초청해서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일주일 동안의 집회를 열고
한국교회의 부흥을 열망하고 통회와 자복으로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그해 9월 서울에서는 존스턴 (Howard Agnew Johnston) 박사를 초청해서
집회를 열었는데, 선교사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
그 집회를 마친 존스턴 박사는 10월에 평양을 방문하여 장대현 교회에서
특별사경회를 열고 영국 웨일즈 지방에 큰 부흥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 조선교회를 부흥시킬 자는 손을 들고 일어서라고 하였다.
회중은 잠잠하고 아무도 응답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당시에 아직 장로인 선생이 감동하는 바 잇어 거수하고 이러서매
박사는 조선의 부흥을 예언하고 도라 갔다"고 한다.
길선주가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것이 이때이다.
그해 12월 12부터 22일까지 황해도 도사경회가 약 600여명이 참석하여
재령에서 개최되었다.
성령의 역사는 이 집회를 인도하는 길선주를 통해 나타나,
김익두와 이원민 등 후에 한국교회의 유력 한 지도자가 된 이들이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았다.
길선주 조사(어떤 기록에는 장로)는 성경 공부와 새벽 기도회의 불길이 일어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별집회를 통해 배가운동을 하기로 계획하고
당회장 이길함 선교사와 협의하고 당회의 결의를 얻었다.
그 시기는 동기사경회(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한 집회) 바로 직전에 하기로 하고
평양 전역에 광고를 하여 성탄절이 지난 수요일부터 집회가 시작되었다.
첫째 날 집회부터 초만원이었고 길선주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성신을 영접하라'는 설교하였고
수 백명이 남아 밤을 세워 기도하였다.
둘째 날 집회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설교를 하였다.
설교 중반쯤에 한 젊은이가 일어나더니
아내와 어린 자식을 위해 식량을 도적질하였다고 눈물로 회개하였다.
장대현 교회의 집회에 성령이 크게 임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셋째 날에는 방은덕(方恩德)이라는 순포(경찰)이
사람들이 모여 온갖 죄를 자복한다는 소문을 듣고 범죄자를 잡을 생각으로 참석하였다가,
'지옥을 취하려, 천당을 택하랴'는 제목의 설교가 끝나자 일어서
"저는 천당에서 죄인을 잡으려 했던 방순포 죄인입니다"고
대성통곡하며 고백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소문이 평양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퍼저 나갔다.
넷째 날에는 '성령 앞에 숨을 자는 없다'라는 설교를 하였고
집회에 참석한 승려 한 사람이 일어나
"길장로의 설교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진리를 깨우쳤다고"
감사하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표시로 김덕엽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염주를 길장로에게 주었고 이 염주를 그의 아들 길진경 목사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다섯째 날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고
한 가톨릭 신부가 일어서서 구속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노라고 고백하고
이 집회에서 받은 은혜의 기념으로
길장로에게 염주를 내 놓았는데 이 역시 길진경 목사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5일 동안 계속된 1906년 12월 말의 집회는
1907년 1월 초부터 시작된 대사경회 바로 직전에 이루어 진 것으로
길선주 목사 혼자서 인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1907년과 달리 선교사들이 참석하지 않아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본격적인 자료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장대현 교회도 해마다 이러한 사경회가 연례행사로 진행되었으므로
1907년 뿐 아니라 1906년에도 대사경회에 성신이 크게 임한 것이다.
3. 1907년 대사경회의 대회개운동
사경회는 1892년부터 시작되었고 그 열기는 대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면 1901년 평양에서 여성 신자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위한 사경회가 개최되자
“평양에서뿐만 아니라 150-400리 이상 떨어진 삭주, 창성, 의주 등지에서까지
자매들이 몇 주일간 먹을 쌀을 짊어지고 참석”할 만큼 열심이었으며,
다음 해에 남자 신자를 위한 사경회가 평양에서 개최되자
400명 정도의 남자 신자들이 의주, 삭주, 창성 등 북부 지방에서는 물론
멀리 서울과 목포 무안에서까지 참석하는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으로
1907년 1월 초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연례행사로 시작된 평안남도도사경회이다.
그 시작 날자와 기간에 대해서 김인서는
1월 6일 시작하여 15일(화)에 열흘간 계속된 것으로 기록하였고,
박용규는 1월 2일부터 낮 사경회가 시작되었고
1월 6일부터 저녁집회가 시작되어 15일까지 2주간 계속된 것이라고 한다.
길진경은 설교는 길선주 목사가 전담하기로 하고
선교사들이 번갈아 가면서 사회를 보기로 하였다고 하지만,
설교는 선교사들과 길선주 목사가 번갈아 한 것이 정확한 것 같다.
첫째 날에는 1500여명의 교인들이 모였고 여자들은 밖에 자리를 만들고 않았다.
첫 날 밤(1월 6일 저녁집회)에 길선주 조사(전도사)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고 외쳤을 때에 사람들의 마음에는 큰 충격과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사실 세속적 유혹에 깊이 싸져 있었고 영적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바로 자기를 지적하는 것으로 알고 통회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경회 처음 일주일 동안은 특별한 성령의 역사나 나타나지 않았다.
1월 12일(토) 저녁 집회에서 평양 북장로교 선교사 방위량(W. N. Blair, 方偉良) 목사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오,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성구를 읽고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사랑의 결핍상을 통박하였을 때
선교사들과 신도들은 손을 붙잡고 울며 통회하였다.
1월 13일 주일 저녁 집회 역시 모인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성령의 놀라운 임재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길선주 장로의 능력 있는 설교 후 그레함 리 선교사가 다시 기도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도 기도하기를 원치 않는 분위기였다.
길선주 장로가 안타까운 나머지 회중들을 향해 '죽었느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기일(J. S. Gale) 선교사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주일 밤까지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진행하였으나 특별한 역사가 없자 그 다음 주일까지 집회를 연기하였다고 한다.
1월 14일(월) 밤 집회는 2000여명이 참석하여 은혜를 사모하였기에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고 한다.
헌트 선교사의 설교가 있은 후 선교사 그레함 리(Graham Lee)가 강단에 올라가"
‘여러분이 다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면 다 같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더니
온 회중이 일제히 소리 내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기도소리는 마치 폭포소리와 같아서
기도의 대해조(大海潮)가 하나님의 보좌로 밀어 올라가는 듯 하였다.고 한다.
스왈른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이 날 저녁 집회가 끝난 후에도
회중의 1/3 정도는 새벽 2시까지 남아
한사람 한사람 씩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의 기도를 계속했다고 한다.
1월 15일(화) 마지막 날에 '가장 은사 받은 한국인 설교자' 길 장로의 설교가 있었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길장로는 설교를 하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다.
"나는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약 I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
내 아내는 무능하기 때문이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내가 잘 돌보아 드릴테니 염려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중 미화 100불 상당의 금액을 나는 사취(邪取)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 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길선주 장로가 자백을 하자마자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던 무거운 장벽은 무너지고 성령이 놀랍게 역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길선주의 뒤를 이어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
저녁예배는 7시에 시작되었는데 새벽 2시까지 끝나지 않았다.
이 날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들이 있지만
장대현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이길함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길장로의 설교가 있은 뒤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근 6, 7백명이 기도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우리와 몇몇 선교사들은 길씨와 주씨 두 사람을 위해서 특별기도를 했다.
강단에 앉아 있건 그가 갑자기 일어나서,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 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방위량(W. N. Blair)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음을 회개한다 했을 때,
그는 산산 조각났다.
그의 번민으로 인한 단발마의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보기에 너무 비참했다. 그는 정신없는 사람처럼 땅에 넘어졌다. 그가 넘어지자 회중은 눈물 바다가 되었다.
우리 선교사들도 간단히 멈출 수가 없어 회중과 같이 울었다.… 찬송을 부르는 동안에 회중은 조용해 졌다. 그러나, 다시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이 계속 얼어나, 고백은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현장의 목격자였던 게일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 다음날 밤… 길선주는 외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것은 길선주의 얼굴이 아니었다.
한 때 완전 장님이었다가 아직도 장님인 길선주,
그러나 여기서 그의 얼굴은 대단한 위엄과 능력의 얼굴,
순결과 거룩함으로 불타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고백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 사경회 동안 길 장로는 세례요한처럼 통회와 자복의 회개를 외쳤고,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의 불길이 참석자들을 심령을 사로잡았다.
많은 선교사들의 의해 이 사경회는 '순수한 한국의 오순절'로 평가되었다.
성경공부와 철야기도를 통해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체험한 사경회의 열기는
여성과 학생에게 전이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와 같은 경이적인 사경회가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길목사는 전국을 순회하면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중국에까지 그 불길이 번져 가게 되었다.
1908년 미국북감리교회의 사년차총회가 발티모어(Ba1timore)에서 열렸을 때,
한국과 일본주재 감리교 감독 M.C. 해리스(Harris)는
1907년 대사경회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부흥운동의 효과는 전적으로 훌륭하였다.
즉 교회의 신앙수준을 더 높아졌고,
미리 자상한 성경교육이 있었으므로 광신(狂信)은 거의 없었고,
정신이상 같은 경우는 하나도 없었고,
수 천명의 신도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세웠고,
다수에게 성직(聖職)의 소명을 받게 하였고,
그보다 더 많은 교회들이 성경말씀을 공부하려고
무려 2천명의 대부흥회가 한 양소에서 거행되었으며,
수 천명이 글 읽기를 배우고, 크리스토교를 알아보려고 문의하며,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쟁이, 살인강도, 독선적인 유학자들,
구태의연한 불교도들, 여러 천명의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다 크리스토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것은 모두 다 지나가고 말았다."
따라서 1907년 대사경회는 대각성이나 대부흥이라기 보다는
대회개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길선주 목사의 통렬한 회개가 회개운동의 폭팔시킨 기폭제로 작용한 것이다.
4. 1907년 대사경회의 여파
이와 같은 경이적인 회개운동이 전국에 알려지자
각처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고자 평양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동시에 길선주 장로와 같은 부흥사를 초빙하여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평양사경회가 끝난 지 꼭 1개월 만에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길장로의 부흥회가
개최되었으며, 8월에는 의주에서 사경회가 길장로에 의해서 인도되었다.
그해 9월 17일 장대현 교회의 목사로 청빙 받은 길선주 목사는 당회의 양해를 얻어
그해 11월 20일부터 순회전도 여정에 올랐다.
이러한 일련의 사경회 결과 1906년 교인수가 37,407명에서
그 다음해에는 94,407명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길선주는 목사는 1935년 11월 26일 새벽 고창교회 강단에서 쓰러져 죽을 때 까지
그의 40년 교역생활 중 그가 수많은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성경을 가르쳤는데
"그의 전도 목회의 자취를 보건대 선생의 문하에서 목사, 장로, 교사된 이가
팔백인 이상, 설교는 일만 번 이상, 선생의 전도 설교를 들은 이 삼백 팔십 만 명 이상,
선생의 손에서 세례를 받은 자 삼천인 이상"이었다고 한다.
1907년 대사경회의 회개운동은 곧 '백만명구령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출처] "1907년 대사경회의 회개운동", [대전신학대학보] 제65호(2006.11.10)
1907년(광무 11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 길선주의 고백이 기폭제가 되어 일어난 대부흥이자 원산 대부흥과 같이 대한민국 개신교의 확산을 가져온 대사건.
2. 발생 이유
1907년의 국제정세는 매우 불안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는 완전히 무너졌고
러시아는 삼국 간섭 이후 연해주를 빼앗아서 서서히 남하하고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서히 조선을 합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지만 조선 정부는 세도정치와 이에 따른 폐단으로 인해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조선인들은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크리스토교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은 비록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닌 정치적인 동기에서 교회로 오고 있다고 보았고
이에 이들을 진정한 신자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1903년 여름 여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원산의 조그만 성경공부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의 강사는 하디였는데 그는 당시 한국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가운데 하디는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각성이 아니라 자신의 각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국인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당시 신자들도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였다.
(원산 대부흥) 동년 10월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프란손(F. Franson)이 원산을 방문하여
집회를 열었고 하디에게 대중적인 부흥회를 인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하디는 1903년 말부터 1904년 말까지 송도, 서울, 제물포, 평양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하디가 시작한 부흥운동이 보다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1905년 9월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크리스토교 연합기관인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선교단체들이 소속된 이 모임은
하디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마침 이때는 을사조약으로 민심이 흉흉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신앙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동시에 한국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실질적인 신앙으로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06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초기에 남감리교(미국 남 감리교)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부흥운동이 전국에 있는 교회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1906년 9월 부흥사인 존스톤(H. A. Johnston)이 조선을 방문하였는데 그는 당시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성령운동을 설명하면서 이 같은 운동이 조선 교회에도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발언했다. 이런 존스톤의 언급에 평양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감흥을 받았다.
4. 시작
1907년 1월 2일부터 1월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동계남성사경회'가 열렸다.
장소가 협소해 남성과 여성을 나누어 여성들은 평양북교회, 산정현교회, 남문밖교회,
서문밖 지역의 사랑채에 모여 선교사의 아내들이 인도하여 집회가 열렸다.
사경회는 13일 간 새벽기도회, 오전 성경공부,
기도회, 오후 노방전도, 저녁집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진행 10일째가 되도록 성령충만이나 전도의 성과, 회개운동 등 사경회가 추구하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자
1월 14일 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열어 열심히 기도했다.
5. 절정
1월 14일 저녁 결정적인 저녁기도회가 열렸다.
이길함 목사의 인도 하에 성도들은 통성기도를 이어갔고,
15일 오전 2시까지 600명이 남아 철야기도회를 가졌다.
이 날 길선주 장로는 1906년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임종 당시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 달라고 맡긴 100달러의 거금을 횡령하였던 죄를
600명이 넘는 교인들 앞에서 고백하며 회개의 포문을 열었다.
뒤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신의 아이를 죽인 여성, 불치병에 걸려 아파하는 아내에게
매일 술만 마시며 저주를 퍼부은 남성, 첩을 두 명이나 두고 가정을 외면했던 남성,
선교사의 돈을 14전이나 훔친 여성 등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기도회에 참석한 한 사람이 죄를 회개하며 울기 시작하자 이어서 모든 회중들이 울기 시작하였고 하나 둘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주저앉아 울며 마룻바닥을 두들기며
자신의 죄를 벗어 버리기 위해 비명에 가까운 통곡이 이어졌다.
또한 평양시내 영문 부근에 방은덕이라는 순포(경찰관)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경회 기간 중 장대현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온갖 죄를 자백한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가면 범죄자도 많이 잡고 실적도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암행순찰하는 방식으로 그 날 장대현교회 집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 날의 설교 제목이 '지옥을 취하랴, 천당을 택하랴?'였다.
이 날 설교에서 길선주 목사는
"물질을 도둑한 사람은 잡을 수 있지만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죄는 다스릴 수 없다,
죄 있는 마음은 지옥이요, 죄를 회개한 마음은 천당이다."라고 선포했는데
방은덕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마음이 찔리고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설교 도중 일어나 "선생님, 이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천당에 와서 죄인을 잡으려 했던 방순포 죄인입니다. 어찌하리이까?" 라며
대성통곡하였고 그 날로 방은덕은 순포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평안북도 맹산군으로 귀향하여 그 곳에서 맹산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회개를 목격한 선교사는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여는 것과 같았다.
살인, 강간 등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죄가 고백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남에게 손해 또는 손상을 입힌 사람은 집을 찾아다니며 사과했고 타인의 재물을 절도한 사람은 직접 갚는 일도 있었다. 당시 평양과 중국을 왕래하던 한 중국인 상인은 "자신과 거래했던 크리스토교인이 찾아와
수 년 전 부당이익을 취하며 모은 것이라며 거금을 환불해 주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밝힌 바가 있다.
이 일로 평양시내가 발칵 뒤집혔고 목사들은 각 지역의 교회에 내려가 이 열기를 전했다. 그 중 그레이엄 리 (이길함) 목사는 평안북도 선천군으로 내려갔고, 그것을 계기로 선천군은 근대 크리스토교의 중심지가 되어 종교가 금지된 현재 북한 체제 하에서도 "고개 숙인 선천"으로 통한다고 한다.
윌리엄 스왈론(소안론) 목사는 전라남도 광주군으로,
길선주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부와 한성부로 내려가 삽시간에 이 열기가 확산되었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각지로 전파되었고
6. 결과
본문은 <개혁신앙>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조선 크리스토교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신앙생활에 있어 성경 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다.
사경회가 열리는 곳마다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4월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이웃 국가인 청나라로 확산되었다.
청나라에서 온 신학자 호만성(胡萬成), 장석정(張賜禎)이 1907년 입국하여
평양에 일주일 간 체류하면서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돌아가 전했는데
그 결과 청나라에서도 평양에서 일어난 강력한 회개와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는데
여성의 지위 향상, 신분 타파, 교육의 열기, 의식개혁, 세계관의 변혁, 민족의식, 미신 타파,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시각 변화 등 부흥운동은 사회 전반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 되었다.
1907년 이기풍 선교사가 전라남도 제주목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가 되었으며
191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선교사 3명이 북양정부 산둥성에 파송되며 최초의 해외 선교사가 되었다.
7. 특징
1.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 가운데 일어났다.
2. 성령의 임재와 함께 철저한 회개가 뒤따랐다.
3. 처음에는 선교사가 주도했으나, 나중에는 조선인이 주도했다.
4. 이 부흥회의 결과로 한국 교회에 뜻 깊은 도덕적 갱신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