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 / 유종인
노각이란 말 참 그윽하지요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말, 선선하고 넉넉한 이 말이 기러기 떼 당겨오는 초가을날 저녁에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銀魚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 아무려나 서로 검불 같은 생의 가난이 울릴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붓한 집 한 채 지어 건네는 맘 사랑이 그만치는 늙어가야 한다는 말 같지요
노각이라는 말 늡늡하지 않나요 반그늘처럼 늙어 떠나며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 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다는 거 은어 향서껀 수박향이든 늦여름 거쳐 가을 허공이든 그대 혀끝이나 귓볼에 스친 우박이든 저물지 않는 말간 상념의 맛집 내 욕심을 늙히어 그대에게 집 한 채 물려주고 가는 맛 같은 노각이라는 말 낙락하지요
-계간 《예술가》 2023년 여름호 --------------------------- * 유종인 시인 1968년 인천 출생, 시립인천전문대학(현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문헌정보학과 졸업 1996년 《문예중앙》 시 등단,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년 조선일보 미술평론 당선. 시집 『숲 선생』 외. 시조집 『답청』 외. 미술책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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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가 생로병사를 경험하지만, 하루살이 곤충이나 한해살이 식물의 노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시인은 “노각”이라는 단어가 “한해살이 오이한테도/ 노년이 서리고/ 그 노년한테/ 달셋방 같은 전각 한 채 지어준 것 같은” “선선하고 넉넉한” 말이라고 기뻐합니다. 그러고는 “늙은 오이의 살결을 벗기면/ 수박 향 같기도 하고/ 은어(銀魚) 향 같기도 한/ 아니 수박 먹은 은어 향 같기도 한/ 고즈넉이 늙어 와서 향내마저 슴슴해진/ 내 인생에 그대 내력이 서리고/ 그대 전생에 내 향내가 배인 듯”한 향이 난다며 세월을 품은 향기를 노래합니다. 시를 읽고 있으면 “늙어 떠나며/ 외투 벗어주듯 집도 한 채/ 누군가에게 벗어줄” 수 있는 노각이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은어 향처럼 잔잔한 기억을 남기며 늙어가는 것도 멋진 일일 것 같습니다.
- 최형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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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는 어쩌자고 저럴까 싶었지요. 덜 익으면 쓰거나 시어야 하거늘 한 모금 독이 없어 풋열매를 다 내어주니까요. 여름내 늙을 새도 없이 밥상에 오르지요. 오이무침, 오이소박이, 오이냉국이 되어 더위를 식혀 주지요. 다 따먹은 듯해도 한두 개쯤 이파리 사이로 내미는 늙은 얼굴은 뭉클하기도 하지요.
노과라는 말이 맞을 듯하지만, 노각이라 부를 이유가 생겼군요. 검불 같은 생에 지어 올린 말씀의 전각이 우뚝하군요. 서로가 서로에게 서리고 배인 삶이라면 가난하다고만 할 수 없겠군요.
-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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