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은 올곧게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리라
호세 14,2-10; 마르 12,28-34 / 사순 제3주간 금요일; 2024.3.8.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호세 14,2).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한편, 다시 한 번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따라 만민을 당신께로 이끄는 길로 돌아오기를 촉구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호세 14,10).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진리의 길을 올곧게 실천하는 의인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소수의 의인들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고 인류를 이끄시고자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이런 자비로운 섭리에 대해 호세아가 이런 말씀을 남겨 놓은 바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호세 14,6-7).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호세아 예언자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처럼 선대 조상들이 동물들의 모습을 본딴 상을 세우는 어리석은 우상 숭배의 소행에서는 벗어났으나 그렇다면 정작 어떻게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아 볼 것이며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마태 5,16 참조). 이라고 가르치신 바 있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무슨 상을 새길 필요도 없고 자기 욕심을 부리면서도 남을 억누르는 죄악을 열심한 종교심으로 위장할 필요도 없는, 진정한 자유의 길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만이 아니라 군중 앞에서도 산 위에서 가르치신 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모르던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그러자 구원의 역사를 선도해 나갈 소수 의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호세아를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이 전한 예언 말씀을 간추려 선포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제자들에게는 복음의 핵심을 진작에 가르쳐주시기는 했으나 율법 학자의 질문을 받으시자 그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엘리트들과 군중의 현실과 수준을 감안하여 설명해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본시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신 계명은 십계명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모세5경의 핵심이었던 십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단 두 계명으로 줄여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분수령이 생겨나고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본격적으로 밝혀지기에 이르렀는데(마르 12,28-31; 마태 22,34-40; 루카 10,25-28), 소수 의인들을 선도할 당신 제자들에게는 이를 다시 한 가지 계명으로 줄여서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가르침이야말로 올곧은 주님의 길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 이전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예수님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도, 소수 의인들은 이 길을 따라 걸어갔고 다수 죄인들은 이 길에서 비틀거렸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소수 의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해석, 즉 가르침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을 압축하신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은 신명기를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주 하느님은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6,4-7). 사실 ‘마음을 다 기울이거나’, ‘정성을 다 비치거나’, ‘힘을 다 쏟거나’, 게다가 ‘목숨을 다하거나’(마르 12,30),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도 동어반복(同語反覆)적인 부사를 표현을 바꾸어 되풀이하는 취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도, 우리 한민족도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祭祀)를 최우선으로 정성껏 바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이어 참하느님 백성으로 모인 교회에서는 이를 전례(典禮)라고 하는데, 제사에서든 전례에서든 기본적인 요소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드리는 기억 행위와, 이를 표현하는 예물 봉헌 행위(탈출 34,20), 그리고 이를 위해 일을 쉬는 파공(罷工)과 안식(安息) 행위(탈출 34,21), 또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기 위한 예언 활동과 식별 작업이 뒤따랐습니다. 이 예언과 식별의 골자에 대해서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하느님의 최고선 가치와 여기서 파생되는 인간 사회의 공동선 가치로 가르칩니다.
십계명의 나머지 일곱 계명을 압축한 이웃 사랑의 가르침은 레위기를 인용한 것으로서, 율법 학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구절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부각시키셨습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예수님께는 하느님 사랑이 인간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인들은 그 ‘이웃’의 범위를 동족으로 한정해 오고 있었고,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당되는 보편적 범위로 넓히셨습니다. 더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를 통해서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경우와 모든 사람으로 이웃 사랑이라는 행위의 질을 한껏 높이셨습니다. 유다인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발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이 지점에서 구분됩니다.
민족사의 초창기부터 홍익인간(弘益人間), 또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상을 진리로 떠받들어 온 한민족의 사상도 이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으나, - 이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례일 것입니다 - 사상을 넘어 삶의 실천으로는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확한 기준은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전해진 것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가치와 이에서 파생되는 공동선 가치를 인간의 존엄성, 재화의 보편성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연대성과 보조성으로 가르칩니다. 이 모든 가치들이 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고 전례에 참여하며 청해야 할 축복은 이런 것이지요. 자기중심적인 기복신앙을 최고선의 가치들과 공동선의 가치들이 한껏 꽃피우고 열매까지 맺게 될 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한 지향으로 성화시켜야 합니다.
수학에서 사물의 이치를 정확하게 측정하게 위해서 만든 것이 좌표입니다. 좌표는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진 두 축이 있고, 이에 의해서 네 개의 공간이 표시됩니다. 이 공간의 기준이 좌표의 원점인데, 오늘 복음 말씀은 좌표의 원점과도 같은 기능을 합니다. 개별 인간이나 시대별 교회나 인류가 어떤 수준과 정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상태가 오늘 복음 말씀으로 측정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삶의 실천으로 깨달은 바의 수준만큼만 오늘 복음에서 계시된 진리를 알아들어 왔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