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애인 (외 2편)
이은화
감자가 놓인 테이블 위로
밀랍 촛농이 떨어지는 저녁
궁핍해서 미안하다는
살구꽃 옛말 쌓인다
살구꽃 지자 사라진 밥상처럼
감자가 식으면 지워질 식탁 앞
분자나무로 깎아 놓은 젓가락을
손님이 와 입에 문다는
시 한 편 촛불에 타고 있다
당신은 손님입니까
정인입니까
둥근 식탁을 사이에 두고
꽃 피울 이름 불러보는데
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지금이라면
품속의 수저 한 벌 꺼내고 싶은
봄밤, 꽃잎 쌓이듯
망설임만
쌓이는
칸나
칸나가 피었다
집시들은 춤 혼이 피었다며
칸나의 계절을 예찬한다
사내의 입에서 구르는 수십 개의 혀
노래에 맞춰 무희가 플라멩코를 춘다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는
빨강, 피를 데운다 뒤꿈치가 들린다
칸나의 중심이
기타 치는 사내의 손끝에서 타들어 가는
사크라몬테 집시촌*
캐스터네츠가 맥박처럼 뛴다
칸나를 가두던 가장자리
거친 입김이 단단한 중심을 풀어 놓는다
춤이 칸나로 발화하는 동굴 속
절벽 끝을 스치며 만개하는
칸나
박수 소리가 집시 눈에서 나를 끌어낸다
* 스페안 그라나다의 집시촌. 동굴을 파서 주거지를 만글었다.
유리달
지하실 벽 너머 유리 공장
깨진 유리 퍼 담는 소리
부서진 파도가 가죽 포대에 쌓인다
수만 권의 책을 쌓아
벼랑을 이루고 있는 계단 끝
절벽 타고 올라가
시퍼런 달의 서슬에 목을 베이고 싶다
눈 감으면
달빛을 타고 흘러내리는 황홀한 핏물
머리말 쌓여가는 책 더미 위에
나를 한 권의 책으로 올려두고 싶은 밤
몸 안에서 파도가 출렁인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마저
파편으로 튀는 위험한 방
파도가 몰고 오는 용암 끓는 소리에
잠을 놓친다
농담으로 조각 난 유리가
몸 밖으로 아프게 돋아난다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 2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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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화 / 1969년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0년 《詩로 여는 세상》봄호로 등단.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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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애인 (외 2편) / 이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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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1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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