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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源의 흔적들 그리고 그리움 1만3천년前
한민족의 발자국을 찾아서…
소설가 김종록의 한민족 원류 탐험기 바이칼에 서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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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으로 만든 연결쇠.’ 바이칼 호수
남서쪽에 놓인 환(環)바이칼 철도다.
슬루잔카에서 바이칼 항에 이르는 관광철도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철도를 달려 보기로 했다. 오전 9시30분 이르쿠츠크 역에서 슬루잔카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순전히 환바이칼 열차를 타보기 위해 마련한 여정이었다.
인구 2만명의 슬루잔카는 바이칼 남서쪽 끝자락에 낮게 엎드린 조용한
마을이다. 오후 1시에 도착해 열차 시간을 알아보니 오후 2시20분에
떠난다고 한다. 철길을 가로질러 레스토랑을 찾았으나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외식문화가 거의 없는 러시아에서 대도시를 벗어난 여행자가
겪는 불편사항이 바로 먹는 문제다. 안내를 맡은 정정길 사장은 이에
대비해 김밥과 과일을 준비했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애쓴
그의 아내 한민숙 여사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고마운 사람들 신세만 지고 사는 것 같다.
10여분을 거슬러 올라가서야 가까스로 레스토랑을 찾았다. 썰렁한 홀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뜨거운 국물을 시켜 김밥을 먹기가
바쁘게 역으로 뛰었다. 2량짜리 열차는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해바라기씨 한줌을 사 들고 기관차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열차는 종점인 바이칼 항까지 약 100km 구간을 시속 30km로 4시간
동안 달린다. 달린다기보다 천천히 미끄러져 간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지상에서 가장 수승(殊勝)한 풍광을 뽐내는 바이칼 호수를 천천히
감상하라는 배려였다.
시내를 벗어나자 울창한 타이가 숲이다. 열차는 유유히 설원을 미끄러져 간다. 이 여정의 새로운 동행은 한국토종약초연구회 최진규 회장이다. 그는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데 사진기술도 일품이었다. 20kg이나 되는 카메라 장비를 메고 온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카메라에 숲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산이 좋아, 나무와 약초가 좋아 반평생을 산에
바쳐온 그는 숲만 보면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인기리에 진행되던 방송 일을 놓자마자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겨울 시베리아를 찾아왔다.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열차의 왼쪽은 가파른 절벽이고 오른쪽은 바이칼 호수다. 차창을 열고 손만 뻗으면 잡힐 듯한 거리에 호수가 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는 간밤에 내린 눈을 솜이불 삼아 덮고 한낮의 햇살을 받아낸다. 얼음구멍을 내고 낚시를 드리운 이들이나 스키를 타는 이들 모두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번 겨울은 70년만에 맞는 따뜻한
겨울이라고 했다. 리스트비얀카에서는 예년보다 한달이나 앞당겨 얼음이 녹아 호수를 가로지르던 차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단다.
환바이칼 열차를 타기 직전 일행과 함께. |
이런저런 뉴스를 전하는 브리야트인 여승무원 발렌치나의 얼굴이 반갑다. 브리야트인은 언제 봐도 우리 사촌이다. 풍광 좋은 곳에서 열차를 잠시 멈춰줄 수 없겠는가 하고 물었다. 발렌치나는 환하게 웃으며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사장의 말로는 얼마간의 인사를 해야 할 것이란다. 담배 한갑 정도면 충분하다고….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것은 열차가 아니다. 쉬엄쉬엄 가다 아무데나 설 수 있는 환바이칼 나그네다.
초고속을 다투는 시대에 이런 느림의 미학과 만나다니. 반시대적 역행은 이렇듯 참신하다.
대학 1학년 시절 5월이었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그 무렵 내 청춘은 미친 듯 방황하고 있었다.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것이 성행해 술좌석에서 말만 잘못 꺼내도 붙잡혀 가던 때, 교내에서 몇몇 운동권 학생이 고독한 시위를 벌이다 딱정벌레를 닮은 진압대에
에워싸여 닭장차에 실려 가는 사건을 만났다.
당시까지도 나는 절집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억지로 떠밀려온 대학생활을 하느라 전전긍긍했고 오직 밤을 새워 원고지 채우는
일에 희망을 걸던 때였다. 마구잡이식 독서와 막연한 감상에 빠져 지내던 나는 현실을 냉철하게 보지 못하고는 좋은 글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밤 남으로 가는 완행열차를 탔다. 가방 속에는 마르쿠제와 칼 포퍼의 논쟁이 담긴 ‘혁명이냐 개혁이냐’라는 제목의 사회과학 서적이 들어 있었다. 완행열차 안에서 먹고 자며 전국을 일주해 볼 참이었다.
화순에서 부산 가는 비둘기호를 탔을 때였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날의 열차도 이 환 바이칼 열차 못지않게 느렸던 것 같다. 왼편 창가에 앉았는데 제법 넓은 들판을 낀 산자락 마을길을 달려오는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머리에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인 채 손을 휘젓는 꼴이
열차를 세우려는 듯했다. 역도 아닌데 열차가 설 리 없었다. 구부정한
노파의 달음박질은 필사적이었지만 열차는 무심히 지나치고 있었다.
노파가 인 보따리에는 필시 장에 내다팔 나물 따위가 들어 있을 거였다.
눈을 감아야 했다. 징징거리는 삶의 단면을 애써 외면하려는 심사였다. 그때였다.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열차가 멈추기 시작한 것은…. 열차는 얼마간 더 기다려 노파를 태운 다음 다시 시치미를 떼고 미끄러졌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기관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도의 목가적인 산하와 왁자지껄한 완행열차 안 풍경이 한없이 따뜻하고 정겨웠다.
1주일 가량의 열차여행후 나는 어떤 형태로든 동시대의 아픔에 동참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자퇴후 입산수도하려던 뜻을 접고 대학신문사 기자가 됐다. 덕분에 뜨겁고 예리하게 대학시절을 보낼 수 있었고
역사의 부채감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졸업후 뒤늦게 맞은 군시절에는 수인선 협궤열차를 즐겨 타곤 했다.
경기도 안산과 인천 사이에 있던 해안부대 인사과에서 복무한 덕분에
틈만 나면 수원으로 가서 덜컹거리는 열차에 올라 송도까지 갔다 오곤 했다. 협궤열차는 언젠가 소에 받쳐 넘어지기도 했다는 풍문을 싣고 추억 속으로 미끄러져 가곤 했다. 갯벌과 갈대와 염전과 새떼의 비상이 지금도 눈에 밟힌다. 선배 문인 윤후명 선생은 그 협궤열차에 관한 보고서를 문단에 제출하기도 했다. 개발은 눈부셨고 수인선 협궤열차는 아련한 기억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 무렵 안산의 예술인아파트 앞 포장마차에서 듣던 선생의 탄트라 비전 시리즈도 무대를 옮겨 서울 종로 청진동 골목을 감치고 있다.
바이칼 순환열차는 잔인했다. 어쩌자고 아무런 대책 없이 옛 시절 남도의 완행열차와 수인선 협궤열차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야 마는
것이냐. 산촌에도 어촌에도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한국에서 자연의 원형은 깨어졌고 피끓던 20대 청년은 거추없이 내달려 마흔이 되어버렸다. 하건만 오늘 환바이칼 열차는 느닷없이 느리고 고르게 삶을 경영하라고 주문한다. 언제나 수평잡기를 고집하는 지상 최대의 담수호
바이칼을 보면서 천천히 가는 인생을 배우라고 주문한다. 무엇 하나
허투루 놓치지 말고 유심히 보고 가라고 설득한다.
환바이칼 철도 위에서
바이칼 자랑에 열심이던 환바이칼 열차 기관사 루시킨 게나지.(왼쪽은 필자) |
열차가 터널을 지난다. 호수를 향해 돌출한 암벽에 40개의 터널을 뚫느라 공사는 어려웠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같은 길이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평균 공사비용의 14배가 들어 ‘황금 연결쇠’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공사는 2년3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환바이칼 철도의 터널은 대부분 아주 짧은데 가장 긴 터널은 807m나
된다. 속도가 워낙 느리다 보니 오래도 통과한다. 터널은 어둡다. 그래서 두렵고 곧잘 고통에 비유된다. 정사장이 준비해온 물과 오이를 꺼내 건네준다. 싱싱한 오이를 씹어 삼키면서 건강에 관해 얘기한다. 최회장은 바이칼에 왔으니 물 얘기를 하겠노라며 석간수, 곧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을 마시고 살아야 좋다고 한다. 갇혀 있는 물, 고인 물은
금해야 한단다. 지하 암반을 굴착해 뿜어올린 물은 부자연스럽게 응축해 있던 물이라서 나쁘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물이 뭐가 좋겠느냐고 묻는다. 수긍한다.
‘결국 순환의 문제로군. 자연도 우리 인체도 순환이 원활해야 생기가 넘친다는 말 아닌가?’
환바이칼 열차를 타고 순환론을 말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절묘하게 여겼다.
“모세혈관이 막히면 만병의 근원이 되지. 담백하고 청결하게 먹어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 법이오. 자연에 가장 가까운 먹을거리부터
장만하고 볼 일이지. 한국사람들 함부로 너무 많이 먹어 큰일이오.”
최회장은 소박한 양생법을 펼친다. 예방이 우선이며 병을 얻으면 우선 마음부터 고쳐먹고 생활습관을 고치면서 적합한 토종약초를 쓰면
웬만한 병은 다 고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터널을 빠져나온 열차가 한참을 더 달리다 이름모를 역에서 멈춘다.
안내원 발렌치나가 기관실로 가서 풍광을 마음껏 감상하겠느냐고 제안한다. 물론이었다. 우리는 신이 나 객차에서 뛰어내려 기관차로 옮겨 탔다. 두 사람의 기관사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기관차 앞 난간에
섰다. 담비 털모자를 눌러 쓰고 목도리로 얼굴을 감았다. 겨울바람이
살갗을 도려낼 듯 달려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연방 함성을 질렀다. 달리는 기관차 앞에 타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누구나 이런 순간을 꿈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그 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시간쯤 그렇게 달리면서 바이칼 호수를 감상했다. 바람맞은 온몸이
얼얼하게 얼어들 때쯤에야 난간을 돌아 기관실로 들어왔다. 사람 좋은 루시킨 게나지(43)는 6년째 이 열차의 기관사로 일한다고 한다. 슬루잔카에 산다는 그는 바이칼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르샨 온천에도 들러보라고 추천한다. 슬루잔카에서 130km 거리에 있는 아르샨에서 말을 타고 하루 거리의 슈막 온천은 굉장한 영험이 있다고 한다. 말에 실려 간 환자가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곳이라나.
저녁 7시, 바이칼 항에 도착했다. 감사의 표시를 하고 기관차에서 내리니 승객들은 모두 내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리뿐이다. 호수의 다른 곳과 달리 항구쪽은 물이 얼지 않는다. 앙가라 강으로 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타야 할 배가 이미 떠나고 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열차가 도착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배려 없이 제 갈 길을 가고 만다. 러시아인들은 도무지 ‘연계’라는 것을 모른다. 이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꼬챙이
같이 살아갈까. 잠시 건방진 이방인의 푸념을 쏟아냈다. 당신들은 이
거룩한 호수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빤히 건너다보이는 리스트비얀카로 가기
위해 우리는 1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했다. 얼음이 단단하다는 확신만
있었더라도 걸어서 건넜을 터였다. 저녁 8시30분이 돼서야 겨우 배가
움직인다. 지루했지만 창공에 빛나는 별을 보니 금방 마음이 맑아진다. 일기가 청명하여 별 바라기에는 적격이다.
밤 9시 리스트비얀카항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하다. 배는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접안한다. 그 불빛에 드러나보이는
바이칼 호수 바닥의 해맑은 돌멩이들이라니…. 청수(淸秀)한 풍광은
언제나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 맛에 오늘도 고행을 즐기는 것이다.
예약된 통나무집 숙소까지 3km의 밤길을 걸었다. 저녁 10시가 돼서야 자작나무가 타는 벽난로 옆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최회장이
준비해온 비장의 ‘신선주’가 너무 감미롭다. 술 한잔에 피로가 풀리고, 두잔에 이방인의 시름을 잊고, 세잔에 신선이 돼버린다.
다음날 이른 새벽 호수를 거닐며 일출을 맞았다. 털모자를 썼는데도
한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투명한 얼음 위를 거니는 일은 최고의 운동이었다. 순일무잡, 그야말로 무공해 산책이다. 서울 한남대교 근처 한강변을 달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가슴이 뻥 뚫린다.
‘시비리스카야 자임카’라는 숲에서 사우나를 했다. 바냐라고 하는
러시아식 사우나는 예전에도 겪어 봤지만 이번에는 얼음을 깬 물구덩이로 뛰어드는 점이 새로웠다. 자작나무 사우나에서 훈증한 다음 말린 자작나무 가지로 온몸을 두들겨 혈액순환을 돕는다. 그리고는 곧장 밖으로 내달려 얼음 구덩이에 풍덩 뛰어드는 것이다. 시퍼런 강물이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있어 뛰어들기가 무섭기도 한데, 그때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몸을 담그면 된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쨍한 느낌이 그렇게 시원하고 개운할 수 없다. 무중력 상태가 이렇지 싶다. 바로 이 맛 때문에 마른 사우나를 즐기는 것이다. 겨울이 기나긴 북국의 이색적인 풍속이다. 겨울 시베리아를 여행한다면 반드시
이 맛을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북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르쿠츠크에서 4시간을 날아 북위 65도 언저리에 자리잡은 야쿠츠크공화국으로 가는 행로였다. 북극해로 빠져나가는 아름다운 레나강 중류에 위치한 야쿠츠크는 우리에게 아주 낯선 곳이지만 몇몇 지인들을 통해 적잖은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 하나는 이곳에서 광산 혹은 가스전 사업권을 따내느라 몇개월씩 묵은 적이 있었다. 그가 선물한 매머드 상아 조각품은 아주 훌륭한 것들이었고 광석 샘플도 멋졌다. 특히 야쿠츠크 매머드 상아는 중세 이후부터 중국과 유럽으로 수출되던 명물이었다. 금관을
연구하는 김병모 교수나 무속을 연구하는 서정범 교수도 일찍이 이곳을 답사했다. 나는 그들을 통해 사전 지식을 쌓았다. 순록과 매머드와
다이아몬드와 툰드라 등
북두칠성의 고향을 찾아서
그러나 막상 야쿠츠크에 입성했을 때는 난처하기만 했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날아왔는데 시내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도 방이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야쿠츠크 공설운동장 개장식이 있는 날이어서 자매결연한 대만의 축하사절단이 시내 호텔을 다 차지한 판국이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배는
고픈데 숙소를 정하지 못했으니 저녁조차 먹을 수 없었다.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머리 위에 두고 민족의 시원문화를 탐방하겠다는 다소 감상적인 발상은 냉엄한 현실의 벽에 부닥치고 말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민박을 부탁했다. 살벌하고 황량한 작은 변방도시라서 해가 떨어지자 인적마저 드물었다. 어스름 저녁 한길에서
다짜고짜 민박을 부탁하는 나도 행인도 서로를 경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춥고 배고프고 막막했다. 벌써 11가 다 되어 있었다. 백야 때문에 초저녁 같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때 귀인이 나타났다. 슈퍼살롱을 타고 나타난 귀인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미끄러져 와 내 앞에 멈추더니 아주 다정스럽게 응대해 주었다. 조상신들의 도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로자와 그의 연인 이리나! 발로자는 나와 거의 구별이 안될 정도로
닮은 알렌뇨크(사슴)족 출신 몽골리안 청년이었고, 이리나는 백계 러시아 여인이었다. 두 연인은 저녁을 먹고 드라이브를 하다 나를 만났던 것이다.
“오늘 호텔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두 연인은 나를 태우고 시내를 쏘다니면서 잠자리를 물색했다. 그러나 하룻밤 묵을 곳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 이리나가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에게서 묘책을 얻었다. 야쿠츠크 중앙의료원이었다. 가서 부탁하자 관리인은 군말없이 병실 하나를 내주었다.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건물이었고 병실은 청결했다. 방값은
하루에 15달러, 식비는 끼니에 3달러씩 해주겠다고 한다. 깨끗한 목욕실까지 딸린 특실이었다. 근처 프레지던트 호텔이 120달러, 레나
호텔이 100달러인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전화위복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주방 아주머니들은 저녁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감격스러운 시베리아 변방도시의 인정이었다. 발로자, 이리나와 함께 분위기
있는 카페를 찾기로 했기 때문에 사양하고 아침을 부탁했다. 너무도
고마워 가방에 든 과자를 모두 털어 주었다.
짐을 풀고 카페를 찾아갔다. 한밤의 야쿠츠크는 유령의 마을처럼 어둡고 황적했다. 두 연인은 으슥한 골목과 썰렁한 거리를 누비며 여러
곳을 보여 주었다. 마음에 드는 곳에서 편안히 한잔 하자는 배려였다.
결국 찾아간 곳이 술과 간단한 음식이 나오며 춤까지 출 수 있는 카페였다. 고마움의 표시로 이리나에게 줄 샴페인 한병을 주문하고 발로자와 나는 스테이크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이리나가 기품 있는 분위기의 멋쟁이 여인인 데 반해 발로자는 솔직하고 씩씩한 청년이었다.
둘은 피부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발로자는
한국에 트럭을 사러 가겠다며 그때 만나면 잘해 달라고 유쾌하게 웃으며 호기를 부렸다. 그런 그를 이리나는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발로자는 트럭 운전기사였다. 시베리아 야쿠츠크에서는 선망받는 직업이라고 했다. 겨울철 6개월만 일하고도 일반인의 3배나 되는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트럭으로 4일 걸리는 북극권의 티크 시까지 생필품을 운반하는 일인데 겨울철에만 가능하다고 했다. 하절기에는 늪지대가 많은 육로 수송을 피해 레나 강의 뱃길을 이용하지만 강이 얼어붙는 겨울철에는 그의 트럭이 빛나는 산타클로스의 선물 수레가 되는
것이다.
“이이는 지금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사실 목숨 내놓고 하는 힘든 일이에요. 영하 60도가 넘는 북극까지 트럭을 몰고 가는 일이잖아요?
도중에 마을이라고는 전혀 만날 수 없는 구간이 이틀거리인데 이때
엔진을 끄거나 잠들면 얼어죽고 말죠. 눈을 붙이더라도 엔진을 켜놓은 상태에서 잠깐씩이죠. 차가 고장나기라도 하면….”
그러나 발로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씨익 웃는다. 자신은 젊고 사랑스러운 이리나가 기도해 주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믿음직한
사나이였다. 이 황량한 시베리아 변방에서 아름다운 이리나의 사랑을
독차지할 자격이 있었다.
이리나는 통계청 소속 공무원이었다. 모스크바 대학에 유학했으며 아버지는 박사학위 소지자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속 연구소인 매머드박물관 연구원이었다. 반가운 뉴스였다. 어쩌면 귀인을 만나도 이처럼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매머드박물관은 레나강 유람선과 함께 놓칠 수 없는 야쿠츠크의 여행코스였다.
“아무리 작가라지만 여기까지 별을 보러 왔다는 것은 정말 의외야.
올림픽때 뉴스로 봐서 잘사는 나라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한국인을
만난 것도 처음이고 나이도 비슷한데 친구하는 게 어때?”
발로자가 건배를 제안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신나게 잔을 부딪쳐 가며 맥주를 마셔댔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화장실 가는 길에 하늘을 우러렀다. 북극성이 머리 바로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언제
봐도 친숙한 북두칠성은 국자를 기울여 축복의 기운을 따르고 있었다. 나는 두손을 모으고 속으로 기도했다.
언제 따라 나왔는지 발로자가 옆에 서 있다 어깨동무를 한다. 나는 말없이 별을 가리킨다. 발로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도 별을 좋아한단다.
알렌뇨크족에도 북극성이나 북두칠성을 숭배하는 신앙이 있느냐고
묻자 고개를 가로젓는다. 야쿠트족에게도 북두칠성은 신앙의 대상인데 발로자의 고향은 사정이 다른 듯했다. 젊은 나이인 발로자가 미처
모를 수도 있었다. 야쿠트인들이 일곱개의 별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아랑가스 슬르스’가 바로 북두칠성이다. 그들의 장례풍습에는 나무 위에 관을 올려놓는 아랑가스 장법이 있다고 한다. 칠성장법이다.
영혼이 쉽게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배려다.
기러기에 관한 민속은 없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했다. 그의 고향마을에는 나무로 기러기를 깎아 세운 것이 있다며 내 취재수첩에 그림을
그려 보였다. 우리의 솟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 고향까지 갈 것도 없어. 박물관에도 있지. 내일 함께 가지 뭐.”
이야기가 그렇게 진전돼 아예 야쿠츠크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이리나도 직장 때문에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틈나는
대로 조퇴하고 동행하겠다고 한다.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마음껏 마셔댔다. 발로자와 이리나는 숙소가 된 중앙의료원까지 바래다주고는, 됐다는데도 굳이 잠자리까지 챙겨 주고 떠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병원 침상에 누워 상념에 젖었다. 나는 인연법을 믿는 사람이지만 이런 인연은 언제 어떤 복짓기로 만날 수 있는 것일까를 곰곰이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대에 내가 쌓은 덕이 뭐가 있을까. 쌓았으면 얼마나 쌓았겠는가. 모두 조상의 음덕이었다.
다음날 아침, 약속시간에 맞춰 발로자가 차를 가지고 왔다. 이리나는
낮에 합류할 것이라고 한다. 그 전에 자연사박물관과 매머드박물관을
둘러보잔다. 발로자는 두권의 화보집을 내밀었다. 이리나 서가에 있던 책들인데 이리나가 전하는 선물이라고 했다. 야쿠츠크와 사하공화국의 풍물이 담긴 컬러 화보집이었다. 이 황량한 북시베리아에서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의 연인들을 만나다니.
과연 자연사박물관에는 솟대가 있었다. 황금빛 이파리를 달고 있는
자작나무 아래 기러기와 까마귀를 깎아 세우고 금줄을 쳐놓았다. 야쿠츠크 원주민들에게 새는 하늘로부터 생명을 가져와 지상의 인간에게 전달해 주는 영물이다. 신라 금관 장식의 새를 상기했다. 그 새는
왕의 머리 위에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한다. 왕은 그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달한다. 알타이 지방에서 발굴된 ‘얼음공주’의 머리에도 새
장식이 있었다. 가운데 가르마를 타 빗은 머리를 수직으로 높이 세우고 중앙에 한마리의 사슴을, 그 주위에 날개를 편 13마리의 새를 장식했다. 스키타이 전사들이 쓰던 금속제 투구에도 새는 있다. 스키타이
후기 문화유적인 이식 지방 쿠르칸에서 발견된 황금인간의 모자에도
새가 앉아 있다. 모두 하늘의 자손임을 나타내는 천손신화의 유습이며 신조사상(神鳥思想)의 반영이다.
나는 또 전통 혼례식에서의 전안례(奠雁禮)를 상기했다.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 집에 가서 상위에 놓고 절하는 예법이다. 북방에 두고 온 조상신에게 당신의 자손이 멀리 남녘에 와서 지금 어엿한 신부를 맞아들이고 있다는 일종의 종족번식 예고 같은 거였다. 그 의식은
초저녁에 이루어지고 상 위에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화촉이 타고
있게 마련이다.박물관에는 샤먼의 복식과 무구들도 있었고 청동기 시대의 목곽묘를 발굴 당시대로 재현해 놓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끈 것은 벽에 걸어놓은 커다란 카펫이었다. 높이 3m, 폭 2m 가량의 카펫에는 별이 성성한 밤하늘로 흰옷을 입은 여인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날아가는 비천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아래로 솟대가 세워져 있었다.
별밤에 솟대가 세워져 있는 마을 위를 나는 비천상! 무슨 의미일까?
박물관 안내를 맡은 할머니는 하늘로 돌아가는 영혼을 형상화한 그림이라고 했다. 우리의 전통적인 영혼관과 너무 유사했다. 무가(巫歌)의
한 대목을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것만 같아 애정이 갔다. 오래 된 것은
아니고 현대작품이라고 했는데 이 지방 원주민들의 의식구조를 잘 나타낸 수작이었다.야쿠츠크에도 세르게가 있고 그것들은 집 앞에서 말을 매는 말뚝으로 쓰이고 있다. 서민들은 한개를 세우지만 부유층은
아홉개까지 세운다. 첫번째 말뚝은 존경하는 손님을 위한 것으로 또이온 세르게(귀인의 말뚝)라고 하고 두번째 말뚝은 중간 정도의 손님을 위한 것으로 오르뜨 세르게(중간 말뚝)라고 하며 세번째는 하층민을 위한 것으로 켈린 세르게(뒷말뚝)라고 한다.
야쿠츠크는 금과 다이아몬드로도 유명하다.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의
무기고에 있는 다이아몬드 컬렉션은 수백 캐럿의 다이아몬드 왕관과
팔찌·목걸이 등의 장신구들로 가득해 도저히 값을 계산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 다이아몬드의 대부분이 이곳 야쿠츠크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했다. 어른의 머리통 만한 금덩이도 보았는데 그것 역시 야쿠츠크 출토물이라고 써 있던 것이 기억난다.세계에서 유일한 매머드박물관으로 향했다. 매머드는 코끼릿과에 속하는 화석 동물로 크기는
4m, 몸무게는 1t에 달한다. 생후 11년이 되면 새끼를 낳을 수 있고 수명은 70~80년이며 하루에 먹는 양은 500kg이나 된다고 한다. 1799년 레나강 유역에서 애덤스 매머드가 처음 발견된 이래 1970년 매머드의 집단무덤이 발견되었고 1990년에는 2개월 된 새끼 매머드가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털이 긴 코뿔소, 들소 등도 발견되었다.
야쿠츠크의 메머드박물관 사진. |
학자들에 따르면 매머드를 비롯해 큰 몸체의 동물들이 100만년전 북반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기온은 조금 서늘한 정도였는데 약 2만년전 갑자기 대륙성기후로 바뀌면서 강추위로 먹을 식물을 얻지 못해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었다고 한다.발견 당시 내장까지
그대로 보존된 것도 있어서 당시의 기후와 식물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곳에 전시된 매머드는 우리나라에서도 전시된
적이 있다고 한다.
냉동실 입구에서 방한복으로 갈아입고 얼음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얼음덩이 속에 새끼 매머드가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돼 있었다. 수만년전 시베리아가 따뜻했을 때 대지를 누볐던 생명체가 급작스러운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만년빙은 그의 시신을 온전히 지켜냈다. 이 덩치 큰 포유류는 공룡보다 작지만 역사시대와 가깝다는 이유로 거대함의 상징이 되었다. 다 자란 매머드의 상아는 2m에 달해
축치족들은 매머드의 상아를 세워 골조를 만들고 사슴가죽을 덮은 집에 산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매머드를 사냥한 적이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시베리아가 추워지면서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왔을 테니까. 그때 그들은 새를 숭배하는 신앙도 가지고 내려와 솟대를 동네 어귀에
세우고 살았을 것이며 북두칠성에 비는 것으로 조상과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했을 것이다.
점심시간에 맞춰 이리나가 합류했다. 레나강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그런데 차에 기름이 떨어졌다. 주유소가 문을 닫는 날이어서 꼼짝없이 발이 묶일 판이었다. 이리나가 또 묘안을 냈다. 자기 아버지 차에서
기름을 뽑아 옮기자는 제안이었다. 이리나 아버지의 아파트는 매머드박물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허술하기는 하지만 차고가 갖춰져
있었다. 공터에 개인적으로 세운 것이라고 했다. 도난과 동파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곳 겨울의 맹추위는 지상의 모든 것을 얼리고 지하까지 깊숙이 파고든다. 실제로 지표로부터 1m 이하는 사계절 빙하지층인 툰드라 지대다. 겨울에는 꽁꽁 얼었다가 여름에 풀리기를 반복하는 지표의 변화는 모든 매설물이나 건축물을 뒤틀어 놓는다. 그 때문에 송유관이나 상수도관 등의 시설물은 모두 지상에 지지대를 세우고 그 위에 설치된다. 지하로 깊이 들어가는 대형 건물이 아닌 작은 집들도 수상(樹上) 가옥처럼 지표와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야생화들도 봄에 토양층이
풀리는 틈에 재빨리 뿌리를 내리고 서둘러 작은 몸에 꽃을 피운다. 눈물겨운 생명의지다.
툰드라의 대지야말로 동토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리나가 키를 가지고 왔다. 기름을 뽑는 일은 발로자의 몫이었다. 연료탱크에 호스를 박고 입으로 빨아올려 통으로 옮긴 다음 다시 옮기는 번잡스러운 일을
발로자는 웃으면서 잘도 해냈다. 고맙고 믿음직한 친구였다. 그러나
정작 유람선은 탈 수 없었다. 당일코스는 이미 마감했고 2박3일 코스만 있었는데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다음날 이르쿠츠크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로 가면 안되겠어요?”
이리나가 또 제안했다.
“왜 안되겠어요, 이리나!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우리는 상점에 들러 맥주와 빵과 과자를 사 싣고 레나강 하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러시아 여인들의 이름 가운데 상당수가 ‘레나’일
만큼 레나강은 수려한 풍광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도중에
이리나는 자신의 ‘다차’에 들렀다.
다차란 통나무집과 그에 딸린 텃밭으로 이루어진 주말농장이었다. 여름별장이기도 한 다차는 러시아 도시인들의 중요한 생활터전이었다.
5월이 되면 주말마다 도시는 텅 비고 다차로 가기 위한 차량 행렬이
이어진다. 다차에서 그들은 텃밭을 일구고 감자·양파·마늘· 당근
등 야채나 과일나무를 가꾸며 여가를 즐긴다. 전기와 상수도 시설이
있고 개중에는 러시아식 사우나인 ‘바냐’도 있어 전원생활을 만끽할 수 있다. 자작나무 장작으로 바비큐를 해서 보드카를 마시기도 한다. 맑은 햇볕에 일광욕도 하고 한가롭게 독서도 한다. 지하에 염장한
채소나 감자 등을 저장해 두고 기나긴 겨울식량으로 쓰기도 한다.
다차는 1862년의 농노해방이나 산업화와 관계가 있다. 지방 영지에
머무르던 귀족들은 도시로 나와 관료생활을 하며 도시생활에 적응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전원생활을 그리워했다. 그러다 도시 근교에
땅을 사 집을 짓고 주말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이같은
전원생활은 공산혁명이 일어난 1917년으로 끝을 맺는다.
다차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후르시초프 집권 시절이다. 그는 집권 초기 인민주의와 평등을 강조하면서 개혁을 시도한다. 공산주의의
그릇은 풍요의 그릇이며, 그 그릇은 항상 가득 채워져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하며 도시 서민들에게 전원을 분양한다.
이렇게 해서 다차는 러시아의 독특한 문화양태로 자리잡았다. 러시아
사회주의가 1990년대 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다차의 존재를 꼽는 이들도 많다. 자본주의가 도입된 지금, 다차는 부의 상징이기도 하다. 별장처럼 크고 호화로운 다차는 몇십만달러에 거래되기도
한다.
이리나의 다차는 소박하고 텃밭도 아담했지만 빈터 하나 없이 감자·토마토·오이 등 갖가지 채소들이 잘 가꿔져 있었다. 그는 토마토 몇개와 오이를 따 봉지에 담았다.
두시간 가량 달려 드넓은 개활지 너머로 푸르고 드넓은 레나강이 궁싯거리며 흐르는 곳에 당도했다. 강폭이 2km는 넘을 듯싶다. 모래사장 군데군데에 키 작은 버드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발로자는 모래사장으로 차를 몰아 소들이 한가롭게 버드나무 잎을 따먹는
곳에 차를 세웠다. 보닛 위에 돗자리를 깔고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이리나의 다차에서 따온 토마토와 오이 맛은 기막혔다. 한국에서도 이처럼 낭만적인 강변소풍을 즐긴 적이 없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레나강을 향해 모래사장을
달렸다. 발바닥에 감지되는 모래알들의 숨결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렇게 어렵사리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내 영혼의 씻김의식, 성욕(聖浴)을 해야만 했다. 그대로 강물로 뛰어들었다. 하상(河床)에는 완만하게 모래가 깔려 있어 한참 걸어 들어가도 강물이 무릎을 넘지 못했다.
나는 허리가 잠기는 곳까지 이르러 몸을 던졌다. 강심을 향해 헤엄을
쳤다. 바이칼과는 다른 느낌이다. 바이칼이 크리스탈처럼 쨍그렁한
느낌이었다면 레나는 모유나 양수처럼 온유한 느낌이었다. 내 몸과
내 영혼을 씻은 강물은 북으로 북으로 치달려 마침내 북극해에 다다를 것이다.
강물에서 나오니 춥고 숨이 찼다. 모래사장에 활개를 치고 누웠다. 발로자가 연방 사진을 찍어댔다. 이리나가 수건으로 덮어 주었다. 눈을
감았다. 눈앞에 파란 불덩이가 어른거렸다. 극북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일까. 아니면 빙령현상? 메마르고 단조로운 경관, 추위, 어둡고
기나긴 겨울, 비타민 결여 등은 이 지방의 환경이 지니는 악조건들이었다. 굳이 샤먼이 아니라고 해도 극북 히스테리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고 한다.
레나강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암각화 가운데 하나인 쉬스카(Shiska)가 있고 하류의 단애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지만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날이 저물어 야쿠츠크로 돌아온 우리는 근방에서 유일한 산이기도 한
도시의 서쪽 야트막한 동산에 올랐다. 도시가 한눈에 조망되는 그 동산에는 미인송이 하늘 높이 뻗어 있는 완만한 구릉들로 연이어지고
있었다. 연인들이 숲속 벤치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모습이 평화롭다. 이곳에서 저녁이 오기를 기다려 별을 보고 내려가면 좋겠다 싶었는데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졌다. 옷을 적실 정도는 아니어서 숲길을 걸었다. 흐린 날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잠시 모닥불을 쬐고 있자니 날이 개고 하늘에 성근 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쳐드니 밤하늘에서 호수들이 빛을 발한다. 북방 하늘의 중심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두손이 모아진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는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가 어머니와 아들로 나온다. 곰이 된 요정 칼리스토는 사냥 나온 그의 아들 아스카스와 숲에서 만난다. 곰이 자신의 어머니임을 모르는 아들은 곰을 잡으려 하는데 전능하신 유피테르 신은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살모(殺母)의 대죄를 면하게 하려고 돌개바람을 시켜 북쪽 빈 하늘로
옮겨 서로 이웃한 별자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우리와 똑같이 북두칠성을 국자로 보는 전설이 있어 유럽과는 다른 동양문화권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가뭄이 심해 국자로 새벽이슬을 털어 병든 어머니의 갈증을 달래 주려던 딸이
도중에 목마른 노인을 만나 물을 적선하고 만다. 노인은 큰 선물을 주겠다며 마을에 단비를 뿌려준다. 마을은 가뭄에서 벗어나고 어머니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노인은 딸의 착한 마음을 하늘에 올려 주겠다며
이슬을 털던 국자로 별을 만들어 준다.
우리 민족은 북두칠성을 숭배한다. 고조선 시대의 고인돌 위에도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고 고구려의 무덤 속에서도 북두칠성은 뚜렷이 빛나고 있다. 삼신(해와 달과 북두칠성) 할머니는 우리의 명줄을 태워주는 분이다. 우리 여인네들은 이른 새벽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칠성님에게 빌었다. 생사를 주관하는 그 별에 빌지 않고는 못배겼던 간절한 비원이 여인네들의 가슴 속에는 서리서리 감겨 있었다. 칠성님에게 빌던 그들도 죽으면 칠성판을 지고 저 세상으로 떠나야 저승길이 편안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북두칠성이
비치지 않는 협착한 땅은 가히 사람이 살 만한 터가 아니라고 단정했다. 집터를 잡는 바로미터로서도 북두칠성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북두칠성은 또한 친숙한 천문시계이기도 하다. 봄철에 해가 지면 북두칠성의 두병(斗柄), 곧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별인 자루의 방향이 동쪽을 가리킨다. 여름에는 남쪽을, 가을에는 서쪽을, 겨울에는 북쪽을
가리켜 계절을 알게 해주고 저녁시간도 알게 해준다. 이 때문에 낮에는 해시계를 이용하고 밤에는 북두칠성을 이용했던 것이다. 게오르기
루카치의 말대로 창공에 빛난 별을 보고 길을 묻던 그 행복했던 낭만주의 시대가 구한말까지 우리 땅에는 있었다.
시베리아는 지구 전체 표면적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드넓은 대지다.
지형적으로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동서로는 광활하다. 카자흐스탄 고원과 러시아 몽골 국경을 따라 뻗어나간 외몽고 고원지대 때문에 시베리아는 북극해를 향하여 서서히 낮아지는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시베리아의 강과 하천은 아무르 강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극해로 흐른다. 러시아의 5대강은 볼가·오브·예니세이·레나·아무르인데 그중 아무르만이 태평양으로 흐른다.
대지의 신은 평안하다
시베리아는 흔히 황폐한 땅으로 인식되지만 원주민들에게는 그들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의 젖통 같은 땅이다. 카자흐 기병대에게도 비옥한 땅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뿐인가. 종교적 이단자들에게는 신천지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베리아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땅이었다. 제정
러시아 당시 니콜라스 1세의 외교부장이었던 칼 네셀로드는 시베리아가 지구의 끝인 줄 알았고,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시베리아를 차르 황제의 뒷간이라고 멸시해 불렀다. 1890년대에 시작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가리켜 영국인과 미국인들은 아무것도 없이 황량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녹슨 철도라고 조롱했다. 솔제니친도 ‘수용소군도’에서 시베리아를 스탈린 시대의 강제수용소에 비유했다.
흔히 시베리아 원주민인 몽골로이드는 무지스러울 정도로 강인한 용맹성과 반지성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서양 사람들은 폄하했다. 아시아 유목민족의 특성인 남성적이고 거친 성품과 야성을 하나의 고유한 문화로 보지 않고 미개한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러시아 영토를 우랄산맥으로부터 태평양 북단까지 확장한 카자흐 개척시대는 원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시련의 시작이었다.
카자흐족은 리투리아인과 함께 시베리아로 침입하면서 온갖 약탈과
강도 행위를 자행한 마적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영토확장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오로지 시베리아산 흑담비와 모피를 구해 돈을 벌어보자는 욕심뿐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을 약탈, 살인하고 보드카와 성병 그리고 폐병을
남겨두고 떠났다. 약탈자들은 모두 일확천금의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반 대제는 칭기즈칸의 후예인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전쟁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카자흐 원정대가 성공하자 이반 대제는 뒤늦게 이들을 공신으로 추대하고 영웅적인 제국의 건설자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고 한다.
18세기 들어 슬라브족은 브리야트나 야쿠트족 등의 시베리아 원주민보다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다 러시아 혁명기에는 4대
1의 비율로 앞서고 현재는 20대 1을 기록하고 있으니 굴러온 돌이 안방 차지까지 하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대지는 누구든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을 편안히 보듬어준다. 원주민이건 이방인이건 가리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준다.
알혼 섬에서 나와 옐란치 마을에 다다르기 전, 타저란스키 초원에서
시베리아의 아픈 역사가 상징처럼 서 있는 세개의 세르게를 보았다.
다숴랑 세르게라 불리는 성소에서 차를 세운 샤먼 발렌틴은 경건한
자세로 기도한 다음 세르게에 얽힌 사연을 풀어 나갔다.
“1991년 6,000명의 주민들이 여기에 모여 아홉마리의 양을 제물로
바치고 제사했습니다. 한 세르게에 세마리씩의 양을 바친 것입니다.
여기에는 저마다 각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왼쪽부터 첫번째 세르게는
여러분이 보았던 알혼 불칸바위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념하고자 세운
것입니다. 라마승이 샤먼 부부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며 활을 쏘아 남편을 죽였지요. 그때 순교한 샤먼을 기립니다. 두번째 세르게는 그리스정교 선교사들이 샤먼 다섯명을 불로 태워 죽이려 했던 사건을 기념하고자 세운 것입니다. 그때 네명의 샤먼이 한명을 몸으로 감싸고
보호해 자신들은 불에 타 죽었으나 나머지 한명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살신성인과 살아남은 샤먼을 기립니다. 마지막 세번째 세르게는 지나간 잘못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세운
것입니다. 대지는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인간의 욕심도 과오도 대지는 말없이 모두 보듬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깊은 감동은 옆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발렌틴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초를 치고 나온 운전수 세르게이의 아내 악산나의
말이었다. 그것은 백인의 입을 통해 나온 너무도 의외의 발언이었다.
“서쪽에서 온 문명인들은 아무 허락도 받지 않고 이 땅을 짓밟고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남의 땅에 들어와 마음대로 약탈했고 신앙의 자유마저 유린했다. 하지만 그들이 무지몽매한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던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따뜻한 우유를 주고 잠자리를 제공했다. 누가
더 야만인인가? 누가 더 문명인인가?”
악산나의 어조는 자못 격앙돼 있었다. 뭉크가 통역을 끝내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발렌틴은 감동한 나머지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나도 악수를 청했다. 익산나의 선조들은 침략자로 남았지만 그들의 후예인 그는 이제 더불어 사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있다.
아름다운 일이다.
문득 아메리카 인디언 수쿠아미(Suquami) 추장의 편지가 생각났다.
땅을 신성시하고 자연과 더불어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던 인디언들에게 백인들은 땅을 내놓고 보호구역으로 가라고 명령한다. 추장은 그러마 하고 응하며 백인들에게 대지를 함부로 훼손해 황무지로 만들지
말고 사랑해야 하며 짐승들까지 형제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환경문제가 대두된 오늘날 추장의 편지는 가슴을 울리는 명문장으로
남아 있다.
현재 시베리아에는 백계 러시아인들이 주류를 이뤄 원주민들은 아주
소수에 그친다. 브리야트족은 야쿠트족과 더불어 바이칼 주변의 대표적 원주민이다. 브리야트라는 말은 ‘불사냥꾼’ ‘불산(山)사람’에서 왔다고 한다.
이 땅의 사람들은 풍요로운 대지 위에 보금자리를 세우고 가정을 꾸렸다.
북극해로 흘러드는 레나강.러시아 여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레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레나강은 수려한 풍광으로 러시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몽골의 겔과 같이 둥근 이동 주거양식인 유르타가 그것인데 목조 건축기술이 발달되면서 여러 형태로 바뀌었다. 리스트비얀카로 가는 길목에 있는 민속박물관 딸취에는 팔각형 유르타가 있다. 천장에 뚫린
환기구로 햇살이 들어와 실내의 기둥에 비치는 것으로 시간을 알 수
있다.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공간이다. 문은 반드시 남쪽으로 내고 사방에 네개의 기둥을 세운다. 북서쪽 기둥에 햇살이 비치면 아침이다.
차 한잔을 마시고 일터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북동쪽 기둥에 햇살이
비치면 점심때다. 버터를 만들 시간인 것이다. 남동쪽 기둥에 햇살이
비치면 저녁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을 맞을 준비를 한다.
유르타는 전통문화가 숨쉬는 공간이다. 유르타 안에는 씨족의 수호자인 온곤(Ongon)이 모셔져 있는데 후에는 불교 제단으로 바뀐다. 유르타에는 엄격한 원칙이 있다. 문은 언제나 남향으로 낸다. 손님은 말을
말뚝에 맨 다음, 무기와 칼을 유르타 밖에 놓아두고 입구 문 위쪽 가로대를 손으로 만져야 한다. 문 왼쪽 내부, 그러니까 서쪽에는 안장·마구·활·화살 등 주인의 사냥장비를 보관한다. 이곳에는 모직 이불을
넣는 장롱이 있다. 장롱에는 태양 문양의 동심원 장식이 있는데 안에서부터 검정색, 노란색, 하늘색, 주황색이 칠해져 있다. 태양문양 둘레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장롱 옆에는 나무로 만든 양동이와 시큼한 우유가 담긴 가죽 술부대가 있다. 유르타의 오른쪽 공간인 동쪽은 여자들의 공간이다. 주인의 딸이나 미혼의 여자들이 그곳에서 잠을 잔다.
입구 근처에는 탁자와 선반이 있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부엌도구 등
가사에 필요한 물건들이 놓여 있다. 중앙에는 화로가 있다. 북쪽은 영예로운 곳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다.
이르쿠츠크에서 알혼 가는 길로 70km 상거 왼편 갈림길에는 우스제르드라고 불리는 브리야트 자치구 마을이 있다. 미셀니사, ‘삭풍’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민속박물관을 찾았다. 나리사(30)라는 브리야트 여인의 온정어린 안내를 받으면서 나는 우울했다. 자신들의 기름진 터를 슬라브족에게 내주고 삭풍이 몰아치는 벌판 한구석에서 모여 살아가는 그들의 문화유산은 너무도 보잘 것 없었다. 전시할 유물이 빈약해 커다란 홀은 미술관으로 쓰고 있었고 그
옆방은 나비 표본들로 채워놓고 있었다.
하지만 의미마저 초라한 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나리사는 우리의
천마도와 똑같은 말의 휘장 앞에서 브리야트인들은 말을 하늘의 전령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말을 신성시하며 제사할 때 희생으로 쓴다고 했다. 전통 천막가옥 모형 위에는 뿔 달린 사슴의 머리가 올려져 있었는데 액을 물리치는 벽사다.
“이 나무요람 옆에 달린 동물의 뼈는 양의 복숭아 뼈입니다. 이 요람에 담긴 아이의 숫자를 나타내지요. 과거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아 10명 중 겨우 2명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모두 귀한 자식이지만 밖에서는 아이 이름을 험하게 불렀습니다. 개똥이나 쇠똥이라고 말이지요.”
아이 이름을 험하게 부르는 전통은 우리와 완전히 똑같았다. 지금이니 제 자식 예쁘다고 내놓고 자랑하지, 이른바 386세대인 내가 자랄
때만 해도 그랬다가는 부정탄다며 집안 어른들로부터 호된 야단을 맞아야 했다.
이 박물관에서 암각화 몇점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형이 아니고 바위를 떼어 원형 그대로를 진열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품에 대한 자료집이나 연구논문집을 찾았으나
나리사는 전혀 없다고 했다. 어느 학자도 연구하지 않는다는 푸념도
곁들였다. 소수민족의 설움을 그는 맑은 눈 속에 가득 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기다리라며 내실에 들어갔다 나온 그가 내민 책자는 박물관과는 관계없는 사진집이었는데 인쇄술이 조잡해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박물관에 견학온 브리야트 학동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한국의 시골마을 아이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몇몇 백계 러시아 아이들만 섞여 있지 않았더라면 누구라도 속을 거였다.
브리야트인들은 매년 여름이 시작되는 6월 1주일 동안 수르하르반이라고 하는 민속경기 축제를 연다. 경기종목은 말타기, 활쏘기, 씨름,
양털깎기 등인데 수천명의 브리야트 사람들이 모여들며, 많은 러시아
사람들도 구경 온다. 이때 브리야트 전통춤인 요하르도 볼 수 있다. 이
춤은 우리나라의 강강술래와 같이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인데 주로 저녁에 시작해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된다. 알혼 섬에서 샤먼 발렌틴과 함께 춘 바로 그 춤이다. 부족의 시대는 갔다. 추장이나 샤먼의 시대도
갔다. 그러나 대지는 여전히 기름지며 평안하다. 시베리아의 대지에도 꽃은 피고 풀이 자라며 짐승들이 자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머니안 대지를 노래하고 춤을 춘다.
브라야트 민속박물관에서 만난 브라야트 어린이들.몇몇 백계 러시아 아이들만 섞여 있지 않다면 우리의 시골마을 아이들과 전혀 구별이 안간다. |
우리가 쓰는 말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배웠다. 우리와 관계
깊은 어족은 고시베리어어족과 알타이어족, 몽골어, 만주어 등 광범위하다. 국어는 여기서 대략 6,000년 전에 분리되어 나왔고 북방민족어군과 같은 계열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북방민족을 우리 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보는 데는 무리수가 따른다. 다만 그들의 외모나
전통문화는 그들이 활동했던 무대와 더불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우리에게는 쌀농사를 비롯한 남방문화의 유습도 많으며 인적교류도
활발했다. 그래서 우리 문화를 북방과 남방의 절충문화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세계 어느 문화와도 잘 융화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생화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민족은 북몽골 갈래이며 약 1만3,000년전 후빙하기인 충적세의 따뜻한 기후와 함께 바이칼 호수를 떠나
한반도에 정착한 것으로 본다. 또 지문이나 항체유전자는 티베트·몽골·만주·브리야트·아이누·꼬략족과 유사하다고 한다.
약 2만년전, 후기 구석기시대에 바이칼 일대에서는 좀돌날 몸돌이라는 석기가 유행한다. 한 덩어리의 돌에서 표준화된 여러 석기 제작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좀돌날 몸돌인데 우리 조상들은 그 석기 제작기술을 전파하면서 남으로 내려왔던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이 남하하던 당시 바이칼 주변의 기후와 자연생태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이칼을 찾을 때마다 어렴풋이나마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중요한 시원지 가운데 하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티베트나 몽골, 알타이산과 만주 지안 일대에 관한
기록은 미루고 바이칼과 그 주변만 언급한 것도 바이칼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만 바이칼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리움은 바이칼 깊은 호수 굽이굽이에도 어려 있다. 일찍이 어느 샤먼이 달에 오른 적이 있어
그의 북소리 둥둥 울리며 달이 떠오를 때, 바이칼은 남쪽나라로 떠나간 그의 후예들이 그리워 푸르르 몸을 떤다.
바이칼이 있어 시베리아가 풍요롭듯 그를 찾는 남쪽나라 사람들이 있어 바이칼은 외롭지 않다. 곧 남북한을 잇는 경의선이 뚫리면 바이칼은 우리의 뒤뜰처럼 가까이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한 대륙과의 연결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전통과 맥락을 잇는 겨레의 얼을 회복함이며 나아가 새로운 세계의 앞마당을 여는 단초다. 하여 우리의 시야는
커지고 가슴은 넓어진다. 북으로는 대륙이 열리고 남으로는 대양이
펼쳐진다. 대륙을 말달리던 한민족의 진취적이고 개척자적인 웅혼한
기상은 이제 미래를 향해 뻗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