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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에세이-
성숙사회의 시민정신
黃 晋 燮(에세이스트)
1.사회발전의 추세
출산율의 증가와 함께 평균수명의 연장이 급속한 인구팽창의 결과로 이어질 무렵,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양(量)의 추구는 불가피 하였으며 성장지향은 당연하였다.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대량생산체제의 획기적 전개는 양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어졌으며 이에 사람들은 보다 낳은 질(質)의 추구에로 가치의식의 기준이 변하기에 이르렀다.
출산 자제와 인구조절 정책의 결과는 양적인 성장의 필요에 한계를 가져 왔으며 사람들의 가치체계는 질적인 성숙의 지향에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아브라함 매슬로(A.Maslow:1908-1920)는 인간을 욕구단계로 분석하면서“인간은 어느 정도 배가 부르게 되면 경제외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게 된다.”고 말하고, 후진사회로부터 선진사회 진입은 양의 인생에서 질의 인생으로 전환하는 기점이 된다고 한 논리는 선진화로 발 돋음 하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진국에 들어서는 문턱은 소유인간(To have)에서 존재인간(To be)으로의 분기점이라고 풀이한 「엘리히 프롬」(美 정신분석학자 1900~1980)의논리도 또한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결핍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무턱대고 갖으려 들고, 갖은 것은 추호도 노치지 않으려는 소유인간이 양의 추구형 이라고 한다면 사는 뜻, 사는 보람을 지향하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갈 것인가에 고뇌와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인간은 분명 질의 추구형 이라고 할 것이다.
양적인 결핍으로부터의 해방과, 물질적 욕구충족을 위해 지속되어 온 그 시대의 필연인 성장 질서의 와중에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불가피하게 의식적으로 순치 되어 왔던 인간소외와 인간성의 상실을 극복해야 될 필요성이 절실하다.
인간 존엄성의 회복과 함께 외적인 풍요에 더하여 내적인 삶의 질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여망은 선진사회 진입의 문턱에서 필연적이며, 오늘 우리사회가 실천해야 될 긴요한 과제이다.
질의 추구와 성숙의 지향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답이며 그 구체적인 양태는 향후 진전이 기대되고 있는 선진화의 완성과 더불어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균형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불란서 「드골」정권하에서 7개 장관직을 역임한 바 있는 문화인류학자 「알렌 페일피트」는 불란서에 있어서 1인당 GNP 5.000불의 의미는 국민의 과반수가 “장티이욤” 즉 「젠틀맨」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피력하였다.
그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장티이욤”정신의 실체를 오늘 우리들에게 적용시켜 보면,
・금전과 선동에서 자존과 주체성을 지켜나가는 정치적 소신과
・스스로 투기를 삼가고 페어플레이 정신에 의한 선의의 경쟁과, 법으로 일일이 규제하지 않더라도 철저히 환경의식을 지켜 나가는 경제적 윤리.
・질서의식과 사회정의가 확립되고, 누가 보지 않더라도 길거리의 쓰레기 를 주울 줄 아는 사회적인 도덕.
• 햄버거나 피자 보다 빈대떡이나 된장찌개에서 참맛을 찾을 줄 아는 문 화적인 주체성 등이다.
그 시대 불란서의 5.000불은 바로 선진국 진입의 관문이었다.
일련의 사례를 통하여 사회발전의 추세는 양적인 사회로부터 질적인 사회로, 규모의 사회로부터 격조 높은 내실의 사회로, 성장의 사회로부터 성숙의 사회로 발전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천이 바로 후진사회로부터 선진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모든 선진국들이 양적인 성장과 함께 질적인 성숙을 이룩하였다.
우리도 지난 세대에 이룩한 괄목할 성장의 바탕이 아직 살아 있고, 21세기 초엽 10년간 주춤거려온 아쉬움이 있으나 다시 새로운 성장에 시동을 걸고, 나아가 성숙사회를 이룩하려는 시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선진화와 세계화도 결국 성숙사회를 앞당겨 실현하고 선진 여러 나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세계 중심 국가로 진입하려는 노력과 시도를 의미한다.
우리는 뼈아픈 세계 변방국가의 비애를 면치 못하다가 급기야 60년대 이후에야 지연된 발전의지를 불태우면서 드디어 국민소득 2만 불을 넘기게 되었고 세계적 교류와 협력의 지평위에 세계 조정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적극 대처하고 적응하는 세계화 전략을 통해 세계 중심 국가로 당당히 서야 할 시점에 가까웠다.
이를 위해 먼저 내적으로 선진화와 성숙사회의 여건을 재정비 강화하고, 시민의식도 성숙의 도를 더욱 높게 가다듬는 분별심이 요청되는 때다.
2. 성숙사회의 모습
성숙사회는 광범하고도 높은 도덕적 규범의 확립이 우선적인 요건이다.
국민에게는 자유가, 민중에게는 정의가, 민족에게는 자주가, 시민에게는 번영과 풍요가, 사회에는 공동체가 더 높은 가치로 인식 되는 수준 높은 도덕사회다.
바람직한 성숙사회는 곧 선진형의 민주시민사회로서 각계각층의 사회적 기능이 더욱 다양하고 조화롭게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는 사회여야 한다. 보람 있게 산다는 것은 물질적 풍요 위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 다시 말하면 인간 존중의 사회에서 가능하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하는 사회, 개체의 합리성과 전체의 합리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사회야 말로 사회적 통합이 굳건히 이루어 지는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될 성숙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것인가?
첫째, 성숙사회는 편리한 사회다.
편리한 사회는 합리성이 보장되고 인정되는 바탕위에 이루어 질 수 있다.
합리성이란 목적에 따라 필요한 것(있어야 할 것)은 있고, 불필요한 것(없어야 할 것)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선진사회는 모든 것이 편리하다.
필요한 제도와 시설을 적재, 적소, 적기에 고루 갖추어 놓았을 뿐 아니라 목적에 따라 필요성이 소멸 되었을 때는 적기에 제거하여 불편을 추방한다.
후진사회로 갈수록 불편의 도가 더해진다.
있어야 할 것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없어야 할 것이 가로 막아 일의 능률을 저해하는 사회는 불편한 사회다.
일본의 도로교통 표지판은 한자와 영어로 병기하여 적소에 적절하게 설치되어 있고, 누구나 초행길이라도 표지판을 따라 서슴없이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어 참으로 편리하게 되어 있다.
서울의 교통체계와 표지판이 외국인에게는 물론, 내국인에게도 편리의 도를 고려한 합리적인 것인가를 점검해 봐야 할 필요성은 없는 것인지?
일의 처리와 사고방식도 합리적이어야 편리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불필요한 행정규제가 산업발전을 가로막고 국제경쟁력 제고를 저해한다는 지적이 높아 상당부분 개선된 듯 하였으나 아직도 규제해소를 위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기업경영에 있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꼭 필요한 도장을 찍고 있는 것인지, 기업의 경쟁력과 일의 능률을 위하여 검증해 볼 일이다.
정부에서도 꼭 필요한 부서가 적정규모를 갖추고 있는지, 적정한 공무원수가 어느 정도인지 더욱 세심히 점검해 능률적인 정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없어야 할 사회적 관행을 이제는 철폐하여 생산적이고 능률적인 시스템을 이루기 위한 국민적인 결의도 끽긴하다.
지연, 학연, 혈연을 매개로 한 각종 청탁은 부패와 부조리라는 측면을 논외로 하더라도 사회적 생산성의 측면에서 불합리의 요인이 된다.
청탁이란 특수한 인적관계에 의하여 자유경쟁을 기피하는 것이고 더 유능하고 우수한 사람의 기회를 박탈하게 되므로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고, 공중질서와 사회정의를 파괴한다.
후진사회에서는 당연히 될 일도 청탁을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어렵고 되지 않아야 할 일이 청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사례가 빈번하여 불합리를 조장한다.
우리 사회에 납품, 인허가, 인사, 법질서 위반 등의 경우에 청탁의 관행은 어떠하며 국민의식 수준은 어떠한지 자문자답해 볼 일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공정하고 주도면밀하게 가려, 필요한 것을 갖추는 지혜와 불필요한 것을 철폐, 제거하는 용단이 필요하다.
둘째 성숙사회는 안전한 사회다.
안전한 사회는 불안이 없는 사회를 말한다. 불의의 사고가 빈번하지 않고, 안전위주의 사회정책에 관심을 높게 가지는 사회가 안전한 사회다.
선진국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 있다.
기업경영과 생산시설의 설치 및 일의 진행에도 안전에 관한 의식이 높아 산업재해 발생률이 낮다.
우리나라는 아직은 지진 같은 참화의 경험이 없어 이웃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천혜의 지리적 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6. 25의 전란을 경험 하였고 아직도 근 200만에 이르는 남북한 군대가 대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근년에는 북한의 핵 개발과 대량살상무기 개발로 한 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국민의 정서에 불안의 그늘이 드리워 져 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과 같은 북한의 공격성은 국민의 불안의식을 조장하기에 족하다.
지난날 비행기 추락사고와 유람선 화재사건은 우리 사회의 업무진행에 있어 안전의식의 결여가 얼마나 막심한가를 일깨워 준다.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를 동반한 교량붕괴사고와 도시가스 폭발사고는 시민생활을 불안의 극으로 몰아넣은 바 있었다.
지존파, 온보현 사건 등 간단없이 발생된 엽기적인 사건에서 인간존엄성에 대한 모독과 비인간화의 극치를 보는 듯하였다.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체재기간 중 불안했던 일을 신고하는 사항 중 교통 불안과 위험한 택시운행을 제1로 꼽는 지적이 해마다 거듭되고 있음은 우리들에게 심각한 경각심을 촉구한다.
근년에 들어 경기도 이천의 대형화재, 서해안 기름피해, 남대문 소실을 비롯한 빈번한 화재사고 등등은 불안을 자아내고 민심을 혼란케 하였다.
안전한 사회는 원칙을 준수하고 기초에 충실함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다. 익숙하지도 못한 수준에서 원칙에 반하여 예외의 활용에만 능란 하고, 기초의 중요성을 외면하는 방만한 업무태도의 결과가 어느 날 불의의 대형사건 사고를 유발하는 사례를 빈번하게 경험한 바 있다.
안전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기초에 충실하고 차근차근 순서를 지켜 튼튼하게 쌓아가는 기풍과 관행이 우리에게 요망된다.
정부는 이미 국제문제화 된 북한 핵의 위협을 불식하기 위해 외교력을 발휘하고, 한편 대북관계 전개에 있어 국민적인 의지와 결의를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과 지도력을 보여야 한다. 국민을 불안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성숙사회는 서로 믿고 사는 신뢰사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직이 기본이 되고 사적, 공적 약속이 어김없이 이행되는 사회는 불신풍조가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정직한 사람들 사이에는 상대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
약속이 지켜지는 사회에 믿음과 신뢰의 꽃이 피며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 진다.
정직, 그것은 어떤 민족, 어떤 문화에서도 공통적인 덕목이다.
유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공통이고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 족에서부터 중국의 한족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공동선(共同善)이다.
우리도 이미 정보사회에 살고 있는데, 정보의 생명은 진실성에 있고 진실성이란 그 정보의 근원과 전달자의 정직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공자는 그의 수제자 자공(子貢)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믿음과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국가의 존립과 사회의 번영을 위한 세 가지 요건 즉, 군대(足兵), 식량(足食), 믿음(足信) 가운데 불가피하게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을 버립니까?” 자공의 질문이다.
“족병을 먼저 버린다. 다음으로 부득이 또 하나를 버린다면 식량(足食) 을 버려라. 끝까지 버릴 수 없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과 신뢰가 허물어지면 모든 것이 바로 설 수가 없다.(無信不立)”라고 갈파하였다.
정부와 국민이 서로 믿지 못 하면 아무것도 이루어 질 수 없고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깨어지면 의심과 질투와 증오심이 싹트기 마련이다.
현대적인 해석으로 법은 곧 약속이다.
우리 공동체의 삶이 문란해 져 서로가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공동의 약속이며 최소한의 규범이다. 법이란 지상의 인간이 정의를 추구하는 문화규범이요. 법질서 준수의 수준은 한 나라의 성숙도를 가리키는 척도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결국 법치주의인데,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이 법의 권위를 드높이는 의식이 결여 될 때 사회는 무질서와 오합지졸이 되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법의식에 있어서 당위성과 현실적인 이해관계 사이에 갈등과 혼돈을 느끼고 있다.
지키면 손해가 되 갈등을 느끼고 안 지키면 양심적인 갈등으로 혼돈과 고민에 봉착한다.
법치주의가 무너지면 선진화, 세계화는커녕 민주주의 기초가 허물어진다.
만인의 약속인 법을 만인이 지켜 보편적인 신뢰가 확립되고 예측이 가능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성숙사회는 편리한 사회, 안전한 사회, 신뢰사회이다.
편리한 사회를 위해 불편을 해소하고 안전한 사회를 위해 불안을 척결하고 신뢰사회를 위해 불신을 극복하는 것이 성숙사회로 가는 첩경이다.
편리하고 안전하고 서로 믿고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불편, 불안, 불신 등 3불 추방의 노력을 경주해 나가야 한다.
3. 성숙사회의 시민의식
사회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성숙사회는 시민의식의 성숙과 인격적 성숙의 바탕위에 이루어 질 수 있다.
시민의식의 성숙화를 위해 우리가 가다음어야 할 몇 가지 심성의 요체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로 욕구자제의 양식(良識)이다.
자제(自制)는 스스로 자기를 조절하고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과 욕구가 있다.
생리적인 욕구를 비롯하여 재물을 탐하는 욕심, 명예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등 경우와 사람에 따라 수많은 욕망이 있다.
만인이 각자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고 무한 발산할 때 이 사회는 만인과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될 것이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 같이 욕망을 가지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인간은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제력을 포기하거나 기피하는 것은 동물적인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요. 욕구를 자제하고 참는다는 것은 인간의 삶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동물사회에는 도덕이 있을 수 없고 인간사회에만 도덕이 있기 때문이다.
욕심은 무한하고 현실은 유한하다.
유한한 현실은 무한한 욕심을 따를 수 없으므로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은 언제나 불평불만과 갈등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현대인의 정신적인 갈등관리의 방편으로 욕구자제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제력은 참을성(忍耐心인내심)에서 나온다.
생리적인 욕구에 대한 참을성이 부족할 때 성 범죄가 발생하게 되고, 재물욕에 대한 자제력을 잃을 때 절도 강도 와 비리 부조리 사건이 일어나게 되며, 분에 맞지 않는 명예욕을 자재할 줄 모르면 잔꾀와 간계가 나오기 마련이다.
교통량이 폭주하는 도로에서 빨리 가고 싶은 조급증을 억제하지 못하면 교통사고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참을성 있고 자제할 줄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느긋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간다.
자제력과 인내심이 있는 사람들은 목표를 추구하되 수단과 과정을 중시한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될 과정을 끈덕진 인내심으로 감내하는 것이다.
흔히들 목표(목적=결과)지상주의에 치우치기 쉬우나 과정(수단=방편)과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과정이란 결과로 가는 징검다리 같아서 과정에 충실한 사람은 완벽한 결과(목표달성)를 얻게 되지만, 과정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
과정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목표 지향주의, 결과 만능주의에 치우칠 때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한탕주의, 투기, 부조리, 비리를 당연시 또는 정당화 시켜준다.
목적의 정당성이 수단과 과정의 부당성에 의하여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Bible을 읽기 위하여 촛불을 훔치는 것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고 종교적인 헌금을 위하여 사기횡령하는 작태가 정당화 되어서도 안 된다.
성숙사회의 성숙된 시민은 욕구를 자제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둘째로 이해심(理解心)이다.
성숙사회는 서로 돕고 화합하는 협동의 사회다. 오늘날 교우관계나 직장에도 화합과 협동의 미덕이 강조되고 있다.
화합은 사람들 사이에 이해심이 없이는 절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해는 화합의 어머니다.
이해심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는 마음이다.
가까운 친구 사이에 이해심이 없으면 절대로 우정이 싹 틀수 없을 것이며 부부간에도 이해심이 메마르면 애정이 메말라 갈 것이다.
세상살이는 모듬살이에 비길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기에 더불어 생각함이요. 더불어 있음이요. 더불어 이룩함이다.
생각의 첫머리에서부터 끝머리까지를 자기 생각으로 종결하면 자기 시각의 울타리에 갇혀 다른 사람과 세상을 모르게 되고 이런 사람을 우물 안 개구리, 이기주의자라고 규탄하게 된다.
대인관계에 있어 가장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할 부류가 이기주의자이다.
그러므로 생각의 첫머리는 자기생각으로 시작할지언정 끝머리는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생각하게 되면 최소한 우물 안 개구리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는 서로 다른 입장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데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이해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의사충돌이 있을 때 “네가 내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봐라” 라고 하는 것은 역지사지하여 이해하자는 뜻이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많은 갈등을 서로 입장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상충하는 사람들이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노(勞)와 사(使)가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상호 역지사지하면 이해가 성립되고 화합과 총화의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성숙사회의 성숙된 시민은 이해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셋째로 희생심(犧牲心)이다.
희생심은 먼저 베풀어 주는 마음, 조금은 손실을 감수하는 삶을 말한다.
사회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양태는 양보해 주는 것, 섬겨 주는 것, 상대방을 위해 주는 것 그리고 용서해 주는 것이다.
인간을 수수(授受)의 동물이라고 한다.
주는 것(授)이 받는 것(受)보다 먼저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도 “주고받는다.”라고 말하며 “받고 준다.”가 아니다.
영어에서도 “Give and Take.”이지 “Take and Give."가 아니다.
먼저 베풀어 주고 위해 주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득이 되고 스스로를 위하는 길이 된다.
“얻으려거든 먼저 버려라.”
“주는 대로 받느니라.”
“대접 받고 싶으면 먼저 대접하라.”
이런 말들은 각박한 사회가 훈훈하고 인정 넘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된다.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 그 욕이 나에게 되돌아오고, 상대방에게 눈을 홀기면 그 험한 눈길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친구에게 덕담을 하면 그 덕담이 나에게 되돌아오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면 저쪽에서도 따뜻한 미소를 되돌려 보낼 것이다.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희생심은 서비스정신이다.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최고의 서비스정신으로 생산하면 소비자는 그 상품을 많이 사 줌으로써 생산자를 위해 주게 된다.
성숙사회의 성숙된 시민은 서비스 정신을 일상화 하고 희생심을 발휘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회라는 교차로에서 살아간다.
일방통행의 길에서는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일방통행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교차로에서는 양보하고 이해하고 화합하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사회라는 교차로를 성숙된 질서와 아름다운 평화의 거리로 만들기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과 자제력이 필요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알아주는 이해심이 필요하고, 남을 위해 양보하고 용서하는 희생심이 필요하다.
4. 비람직한 공동체 사회
17세기 영국의 시인 존던(John Dunn:1572-1631)의 시를 다시 음미해 본다. 그는 시인이면서 성직자이기도 하였다.
No man is island(인간은 섬이 아니다)
누구도 외딴 섬처럼 독존할 수는 없다.
이웃이 고통 받을 때, 상처를 입을 때, 죽음을 당할 때
그 고통과 상처와 죽음은
바로 당신 자신의 몸과 마음에도 아픔으로 와 닿는 것이다.
따라서 어디선가 조종이 울릴 때
그것이 누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종소리인가 묻지를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곧 당신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이니라.
그는 머지않아 닥쳐올 산업혁명을 예견하면서 그 여파로 다정하던 마을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전통적인 일차원 농경사회가 해체될 것으로 보여, 큰 아쉬움을 지니고 있었다.
대량인구의 집결로 거대도시화, 곧 네트워크 사회가 될 것을 예측하면서 천명한 경고인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네트 워크사회다.
사회 모든 기능은 그물처럼 서로 얽혀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이쪽의 파장이 피안에 까지 퍼져나가는 현상과도 같이 오늘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 그리고 행동은 자기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2만 여개의 부품을 조립하는 종합공업이다.
단 하나의 부품이라도 빠지면 완성차가 될 수 없다.
부품을 생산하는 어느 중소기업의 파업으로 그 작은 부품이 납품되지 못하였을 때 완성차 생산의 긴 라인이 올 스톱 될 수 있다.
1980년대에 실제로 그런 사례가 빈번하였고 1990년대 까지 간헐적으로 그런 유의 노동쟁의로 사회에 혼란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자동차가 장기간 출하되지 못하면 운수업계가 영향을 받는다.
그런 예도 실제로 있었다.
승용차가 안나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화물자동차가 적기에 출하되지 못하면 수송에 지장을 가져온다.
그 뿐인가? 수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출선적을 제 날짜에 맞출 수 없다.
국제 신인도에 적신호가 켜질 것이며 국가 경쟁력에 타격을 받게 된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러 조직 속에 얽혀 있다.
개인적으로 동창회, 종친회, 그리고 각종 친목회.....
공적으로 직장이라는 경직된 조직에도 속해 있다.
주거지로 돌아가면 이웃이라는 보이지 않는 조직 속에 들게 된다.
이웃의 불행이 나에게로 닥아 올 수 있으며 나의 불행이 저 멀리 다른 분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단층화 된 사회가 화합과 총화를 이루기를 우리 모두 바라고 있는 시점이다.
자기의 사고와 행동이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삼가고 숙고하고 용약하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그리하여 잘 짜여 진 네트워크 사회에서 윤활유의 역할을 해야 하고 신뢰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바람직한 공동체 사회이다.
성숙사회의 시민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켜 나가는 노력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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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께워 주는 글 감사합니다. 성숙된 시민이 되어야 성숙된 사회가 되겠지요.
성숙된 시민정신 그래야겠죠. 내자신도 추수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직 넘무 많다는게!!.
아직도 시민사회가 성숙해 질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겠죠.....
이 딱딱하고 긴 글을 읽으시고 코맨트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간지에 발표한 글인데 독자들로부터 상당한 반향을 받았습니다. 고독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