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밴댕이요리/인삼막걸리 -- ‘밴댕이 소갈머리’란 말이 있는 생선으로 나는 철(5-6월)이 따로 있다. <선수밴댕이 횟집촌>이 유명. 특히 석모도 가는 배가 있는 외포리선착장(032-932-6007)주변에 밴댕이 횟집촌이 밀집되어 있다. 이곳에서 밴댕이요리에 인삼막거리 곁들이면 좋다. 특히 돈대횟집 932-2833(밴댕이회, 숭어회)이 유명.
1. 우리옥(백반/순무김치) (강화읍내 우리은행 건너편 032-934-2427)
백반이 유명, 4천원. 여기가면 순무김치(5월이 제철)를 맛볼 수 있다. 가마솥밥, 기타 강화도의 식재료 다 등장)
1. 토속음식점 대선정(937-1907) 해안가 광성보 덕진진 지나 바로 나옴. 초지진에서 100미터 거리임. 시래기밥 /메밀칼싹둑(칼국수) /장어구이 /숭어요리. 강화순무에 밴댕이젓으로 담근 김치가 이 집의 별미.
@ 기타 볼거리, 알거리.
1. 강화도 일몰
아마 무형의 재산이지만 강화도 가면 이것은 꼭 보고 오세요..
동해안이 일출이라면 서해안은 일몰이지요.
@ 강화도 서쪽 화도면 내리 <장곶돗대>가 일몰로 손꼽히는 곳이지요. 갯벌과 하늘과 바다가 어우러져 참으로 장관이지요. 단 길 찾기가 좀 힘듦. 안되면 부근의 <장곶회집> 937-8266에서 일몰 볼 것.
@ 강화 서남단 장화리 앞바다의 갯벌과 수평선 너머 지는 저녁놀을 감상할 수 있는 전통 찻집 -- <해둥지 937-2525>
@ 동막리의 동막해수욕장의 일몰과 갯벌도 유명합니다.
부근 맛집 <동막소라집 937-8220>
1. 영화 <시월애>의 촬영지 석모도
-- 가기전 영화 꼭 빌려 보세요. 시월애--이현승감독, 이정재, 전지현 주연
해안가에 지은 아름다운 집(일마레) 인상적인 영화인데 그 집이 있던 곳(현재 태풍으로 부서짐)이 석모도다. 석모도 일주해도 좋음. 도로 완비.
@ 석모도 <하리낚시터 -- 이정재가 담배 사러 다니던 곳, 이곳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에 일마레가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시월애 촬영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음. 이 집에서 식사 가능. 석모도에 내리면 하리마을로 가는 길 물어 가면 돰.
@ 석모도 삼량염전 -- 오후 4시쯤이면 소금탑을 볼 수 있다.
@ 석모도 일몰 -- 일정상 강화도에서 보기 어려우면 석모도에서 꼭 볼 것. <민머루통나무집 민박 932-9410)에서 일몰을 볼 수도 있음. / 삼산해수욕장 --여기서도 갯벌과 일몰 볼 수 있다.
@ 석모도 민머루 해수욕장 -- 광활한 갯벌로 유명. / 일몰 보기 가능 / 석모도 선착장에서 해안도로 따라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약 20여분 가면 나옴.
@ 석모도 어유정항 -- 이곳 포구에도 밴댕이회가 많다.
@ 석모도 보문사 마애관음 보살상 --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강화 8경의 하나. 보문사 앞바다의 파도소리/ 눈섭바위/ 마애관음 보살상은 유명. 석모도 갔다면 꼭 보고 올 것.(일주도로에서 왼쪽으로 약 30여분 소요/민머루해수욕장 다음코스임)
@ 관광 안내
1.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 930-3621)
1. 석모도 가는 배 타는 곳 (외포리선착장 032 932-6007)
# 주의 : 외포리에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선착장(여기도 석모도 가는 배가 있다) 말고 인근에 우회전해서 가면 큰 선착장 있다. 차를 배에 싣고 갈 수 있다. 꼭 차 가지고 갈 것.(외포리/석포리 두곳에 선착장이 있다. 현지인에게 불어 볼 것.)
# 참고 : 2001년 기준 (배값은 1인당 1200원, 승용차 도선료는 1대당 1만 4천원/ 석모도까지 약 10분 소요/ 평일 30분, 휴일 10분 간격으로 운행/ 강화로 나가는 배(페리호)는 오후 8시가 막배)
# 주의 : 주말이면 석모도와 선착장 주변 몰린 인파와 교통 체증 심함, 휴일 오후면 일찍 빠져 나와야 현명할 듯. 5시만 되어도 선착장의 줄은 수백미터다. 석모도는 식당과 이색카페 즐비. 어디서나 식사 가능.
# 애들하고 간다면 배 타기전 꼭 새우깡 큰 것 살 것. -- 석모도 가는 배 타고 가다 보면 갈매기가 배를 따라 모여드는데 애들이랑 던져주면 잘 받아 먹음. 이때 사진 비디오도 촬영)
@ 기타 권하고 싶은 것(도서/자료)
백범 김구가 평하기를 ꡒ강화에는 두 사람의 인물이 있는데,양반 중에는 이건창이요, 상놈 중에는 김주경ꡓ이라 했다.
강화에는 우리가 찾아볼 유적지가 여러 곳이 있다. 광성보, 초지진, 덕진진 같은 전적지와 함께 강화학파의 이건창의 생가나 또한 민중으로 의인의 삶을 산 김주경의 집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겁니다.
-- 참고 자료
@ 신영복선생의 책 ,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간행 -- 가운데 ‘하일리의 저녁노을’ 「사기 이시원과 영재 이건창 이야기」---- 아래 하단부에 수록됨.
@ ‘강화학파’ 알고 가면 더 좋지요. -- 인터넷 검색해서 찾기
@ 민영규 선생의 저작 -- <강화학 최후의 광경> 우반 간행
우리시대 탁월한 저작이다. 절판되었는데 헌책방에서 찾을 수 있다.
@ 이 인물은 알고 가야죠.
강화학파로 애국시인이자 암행어사로 이름 떨치던 명미당(영재) 이건창의 조부 사기 이시원은 병인양요로 강화진이 점령되자 유서를 남기고 손자(명미당)가 보는 앞에서 자결한다. -- 이것이 강화학파의 정신이다.
@ 이규보 시집이나 문집 참조 -- 이규보 묘가 강화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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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강화학파
정제두를 시조로 하여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특한 학문적 경향을 가진 학파를 말한다. 조선후기무렵 양명학(陽明學)을 천명한 정제두가 강화에서 학문을 하는데, 그의 자손을 비롯해 이광사, 이광려, 이광명, 신대우, 이진병 등이 모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한 것이다. 강화학파는 200여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로써 강화는 유교의 성리학을 배척하는 강화학파가 둥지를 틀며 일찍이 개명했고 신교육과 산업에도 눈을 떴다.
강화학파는 시대를 내려오며 당시의 지식인들과 그 후예들로 인맥을 형성, 일본제국주의침략에 단호히 저항하게 된다. 당쟁의 폐해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실망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강화로 낙향했던 이건창, 그의 아우 이건승,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국학 진흥에 한 획을 그은 정인보 등이 정제두의 강화학파를 이은 거목들이다.
☞ 참고서적
이이화, 「이야기 인물한국사1」, 한길사, 1993
이이화, 「이이화 인물한국사3」, 한길사, 1993
이현희, 『우리나라 근대 인물사』, 새문사, 1994
이은직, 『한국사 명인전1』, 일빛, 198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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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의 생애와 문학
구한말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시의 대가였던 이건창(1852~98) 의 호는 영재 또는 명미당. 병인양요 때 순국한 충정공 이시원의 손자이 자 군수공 상학의 아들로 15세 때 문과에 급제하고 약관으로 옥당에 들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문호 김택영(1850~1927)은 나라 안 아홉 문장의 한 사람으로 그를 뽑 았다. 역사상 보기드문 청백리였지만 반대파의 중상으로 멀리 압록강변 벽동과 고군산도 등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저서로 '명미당집', '당의통략' 등이 있다. 강화의 화도면 사기리에 생가가, 양도면 건평리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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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화첩기행; <14>
---- <조선일보> 1998년 05월 25일
이건창과 강화
어둠의 역사 밝힌 강도의 시
생가앞엔 탱자나무꽃
환란 현실속;양요의 아픔 ꡐ생생ꡑ
사진설명 :
(위) 힘과 기세 그리고 탈속과 비범함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이건창의 문장 세게는 마치 질풍처럼 들판을 가르며 달리는 한 마리 준마를 연상시킨다.
(아래) 천연기념물 제79호인 이건창 생가 앞의 이 늙은 탱자나무는 원래 적병의 접근을 막기 위해 심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의 증인이기도 한 셈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크고 붉은 해가 치솟았다.
해는 점점 커져 하늘을 메우더니 미친 불길이 되어 파도를 삼키고 섬을 덮친다.
푸른 섬은 삽시간에 불덩이로 타올랐다. 꿈이었다.
전날 일몰을 욕심내 「석모도」에 들어왔던 것이 탈이었다. 저녁해의 장려함에 취해 그만 그 이쁜 섬에서 1박하고 만 것. 내가 「민머루 해변」에서 본 해는 그토록 아름다웠건만 웬일로 꿈은 흉몽이었다. 석모도 부두에 선다. 우국(우국)의 섬 강화로 되돌아가기 위해.
환란(환란)도 일종의 양요(양요).
나라는 지금 상처입은 짐승처럼 앓고 있다. 옛 시인은 듣는가. 그 뒤척이는 신음을.
항몽(항몽)의 망명정부, 그 한많은 몽진(몽진촵임금이 난리를 피해 옮겨감)의 땅으로 가는 감회는 화창한 날씨임에도 가볍지가 않다.
끼룩끼룩 갈매기 떼는 뱃전을 덮다시피 따라온다. 사람들이 던져 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쫓아. 문득 드넓은 바다와 푸른 창공을 버려두고 날개들을 부딪치며 뱃전에 엉기는 저 갈매기들이, 추해 보인다. 내가 지금 그 흔적 찾아가는 강화의 옛 시인 이건창의 삶은 저렇지 않았다. 비석 하나 없이 「건평리」 야산에 초라한 봉분으로 누워 있지만 시인은 세속 명리 좇아 저렇게 아귀다툼으로 덤비지 않았다.
이건창, 가팔랐던 이 나라 근대사의 불길 속을 부릅뜬 눈과 표표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던 사람. 밖으로는 외국 열강들이 침흘리며 옥죄어 오고 안으로는 권문세가의 부패가 극에 달하던 시절에 서슬 퍼런 글로 시대의 미친 바람을 꾸짖었던 사람.
『…지금 나라는 치욕을 당하고 있고 백성은 근심에 잠겨 있으며…, 재정은 고갈되어 이 상황은 진실로… 눈물 흘리며 통곡해야 할 때입니다. …일서(일서) 일국(일국)의 편제를 약간 바꾸는 정도의 명(명)만의 개화 아닌 실(실)의 변화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의론시정소촵의론시정소)
역사는 어쩌면 이리도 동어반복으로 되풀이되는 것인가. 1백년 전 시인의 한탄과 질책은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향하는 것인 양 생생하기만 하다. 「찬우물약수터」와 「철종외가」와 「시인 이규보 묘소」를 빠르게 지나쳐 간다. 강화는 과연 민족사의 축소판. 지나치는 곳곳마다 역사의 맥박이 짚어진다. 까마득한 날의 지석묘(지석묘)와 「한울님」께 제사 올린 성산(성산) 마니산과 참성단, 수많은 국방 유적과 함께 정제두와 강화학파의 생명사상이 숨쉬고 있는 곳. 그 민족 최후의 보루 강화에서는 옛 조선포대의 후신인 해병대 초소들마저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함허동천」 가는 한적한 외곽도로를 돌아 마침내 화도면 사기리(사기리) 167번지 이건창 생가에 닿는다. 저 작은 초가에서 그는 조부 이시원(이시원)에게 무릎 꿇고 글을 익혔을 것이다. 그리고 이조판서였던 그 조부가 병인양요에 스스로 목숨 끊는 것을 보면서 충절의 유훈을 뼈아프게 새겼을 것이다.
생가 앞 들판 한쪽에는 흰눈을 뒤집어쓴 듯 탱자나무 꽃이 눈부시다. 제 가시로 제 몸을 찔러 향기를 낸다는 나무. 프랑스 함대 포소리에 놀라 새벽녘 벌판을 달려 동검도 앞바다로 시커멓게 몰려가는 이양선을 바라보았을 소년 이건창을 저 늙은 나무는 지켜보았을까. 원래 성벽 아래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심어졌다는 강화의 탱자나무.
적은 함포로 공격해 오는데 순후한 우리 백성은 탱자나무 가시로 막으려 했는가.
풍광은 변함없이 눈부시건만 섬의 역사는 왜 이리 애달픈 것인가. 이건창의 4백수 넘는 한시들 역시 한결같이 풍광의 「눈부심」 아닌 삶의 「애달픔」을 담고 있다.
『(팔려간) 한구(한구), 주인의 말 듣고/…새 주인 따라갔네/…(밤이면) 몰래 옛 주인집으로 돌아와/…차마 옛 주인 보지는 못하고/다만 주인집의 문만 지켜주다 가네…. 』
그는 장시 「한구편(한구편)」에서, 팔려갔으나 밤마다 옛 주인의 집에 돌아와 그 문을 지켜주고 돌아가는 충직한 개를 그리고 있다. 원악(원악)의 귀양길에서조차 나라 사랑으로 눈물 뿌렸던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일까.
이건창의 죽음을 접하고 멀리 전라도 장수(장수)땅에서 「북으로 팔백 리」를 달려와 통곡하며 시인 매천 황현(매천 황현)은 이렇게 제문(제문)을 썼다.
『공(공)의 돌아가심은 커다란 구슬이 (소리내며) 부서짐 같습니다. 사람들이 들에서 통곡하고 잠자리에서 웁니다. …공을 모함하던 자들도 오히려 슬퍼하거늘, 하물며 나같이 외로운 자는 그 눈물이 어찌 강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이제 풍상우로(풍상우로)에도 내가 목숨 부지하려 함은 오직 공을 통곡하기 위함입니다…. 』
그러나 그 황현 또한 이건창 사후 십여년 만에 한일합병 소식을 접하고 절명시를 남긴 채 음독하고 만다.
-- 글 /그림: <김병종․서울대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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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선비론]寧齋(영재) 이건창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浪人)의 손에 시해되고 시신이 불태워지는 처참한 변고가 있은 뒤 친일내각이 구성되고 국왕은 왕비를 폐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1895년 음력8월20일 그 사변이 있고 나서 달이 바뀌었어도 상복을 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강화도 큰사골 집에 칩거하던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은 홍승헌(洪承憲) 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궐하에 엎디어 폐비의 칙명을 거두고 죄인을 잡아 처형하라고 주장하였다.
강한 이웃을 두려워하여 왕비의 상도 치르지 못하는 우리 조정이 못내 한심했던 것이다. 이보다 더한 변고가 있다면 그것은 조국의 멸망이다. 9월5일 이건창은 이렇게 ꡐ청토복소(請討復疏)ꡑ의 상소문을 올렸으나 고종의 눈을 거치지 않고 반송되었다. 13일에 다시 올렸으나 역시 내각에 의해 내쳐졌다. 그러나 그의 상소를 전후하여 민심은 하나로 합해졌고 의병들도 일어났다.
이건창은 청나라 리훙장(李鴻章)이 개국을 주선할 때 이미 ꡒ스스로 지키는 것 없이 그 자만 믿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가 팔리고 말리라ꡓ고 시정소문(時政疏文)을 지어 우려하였다. 수호통상(修好通商)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개항을 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그 방법을 허(虛)가 아니라 실(實)에서, 이웃나라가 아닌 아(我)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고 허명으로만 개화를 외치는 시류배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건창은 불의와 부정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로 충청우도 안렴사(忠淸右道 按廉使), 말하자면 암행어사가 되었을 때 충청우도 감사 조아무개의 은닉 재물을 찾아내고 숱한 비행을 밝혀냈으며 그의 행동을 과민하다고 의심하는 국왕 고종 앞에서 탐관의 만행을 조목조목 낱낱이 알렸다.
서른두살에 경기도 안렴사가 되었을 때는 연안 13개 고을을 진휼(賑恤)하고 광주 수원 개성의 세금을 실정에 맞게 덜어주었다. 서울 부시장격인 한성소윤(漢城少尹)으로 있을 때는 외국사람이 가옥과 토지를 범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때문에 청나라 공사의 간섭으로 자리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함경도 안핵사로 나가서는 그곳 감사의 비행을 낱낱이 밝혀 파면시켰다. ꡐ지방관이 올바른 행정을 하지 않으면 이건창이 찾아간다ꡑ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이건창은 법률의 문구만을 좇는 도필리(刀筆吏․아전을 얕잡아 일컫는 말)가 아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글귀나 아로새기는 조고가(문필가)로 그치지 않았다. ꡐ참된 도리(實理)ꡑ를 내심에서 파악하여 ꡐ참된 일(實事)ꡑ을 실천하려는 강화학(江華學)의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남의 아픔을 내 고통으로 느끼는 그의 마음가짐은 양명학자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이후로 강화학이 지켜왔던 실천내용이었다. 또한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은 조부 이시원(李是遠)의 가르침이었다.
충청우도를 암행할 때 죄인을 신문하고 쓴 시 (녹수작․錄囚作)에서 이건창은 ꡐ피맺히는 고통을 모르고 돈 먹는 달콤함만 말하다니 너희들도 사람이거늘 살가죽이 어찌 견디랴ꡑ라 하고 ꡐ채찍 하나 회초리 하나에도 혹 상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관대하다는 잘못이 있을망정 내 마음은 본디 이와 같도다ꡑ라고 하여 탐욕에 눈먼 인간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측은해 하였다.
그 시기에 태안반도의 안흥에서 수군(水軍)과 어촌의 실상을 기술한 시와 모진 흉년에 관교들의 횡포로 초주검이 된 산골 사람을 그린 시, 경기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환곡(還穀․농민들에게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제도)의 문란과 농민의 고통을 목도하고 쓴 시, 황해도 관찰사로 가다가 연평도 조기잡이의 삶을 노래한 시 등은 우리나라 사실주의 문학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다. 기층민의 애환에 동정하고 조국의 자주적 부강을 염원하는 뜻에서 나왔기에 그 말이 절실하고 그 사상이 온화하면서도 강건했다. 그는 결코 문학가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그의 산문은 구한말의 문학가인 김택영(金澤榮)이 고려 조선의 대문장가 아홉을 꼽은 선집에 최후의 인물로 선별되어 있다.
1898년 귀양지인 고군산도에서 돌아와 마흔일곱의 짧은 생을 마친 뒤에도 그의 시문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을 비롯한 여러 불꽃같은 지식인들의 손으로 베껴져 전하다가 1917년 중국에서 ꡐ명미당집(明美堂集)ꡑ으로 간행되었다.
이건창은 당색(黨色)의 제한 때문에 그의 정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서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는데는 붕당정치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한 그는 ꡐ당의통략(黨議通略)ꡑ을 집필하였다. 윗대의 이긍익(李肯翊)이 ꡐ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ꡑ을 엮었던 사학 연구의 맥을 이은 것이기도 하다.
이건창의 자는 봉조(鳳鳥 혹은 鳳藻), 호는 영재이다. 1852년에 태어났고 죽은 해는 1898년 광무(光武) 2년이다. 당호(堂號)는 조부가 병인양요때 순국하면서 남긴, 시대의 소임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명미당(明美堂)이라 하였다.
노성인(老成人․노련하고 성숙한 사람)은 갔어도 그 전형은 남았다. 아우 이건승(李建昇)은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뒤 강화도 사기리에 남아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저우(滿洲)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건창이 굳게 지켜낸 강화학의 정신과 민족자주이념은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에게 계승되어 큰 줄기를 이루었다.
--- 심경호(고려대교수․한문학)
[약력]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일본 교토대에서 박사학위 △저서 ꡐ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ꡑ ꡐ한시로 엮은 한국사기행ꡑ ꡐ다산과 춘천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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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연소 급제자[만14세] 이건창
조선시대 20세 미만 급제자는 30명이며 그중 최연소 급제자는 1866년[고종30년] 강화도
별시문과에서 6명중 5등으로 뽑힌 만14세의 이건창[전주이씨]이다.
이건창은 판서 이시원의 손자로 강화출생이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조정에서도 너무일찍 급제하였다하여 4년뒤인 만18세가 되어서야홍문관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건창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으로 암행어사때는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낱낱이 들쳐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여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당의통략]을 저술하는 등 조선말기의 대문장가로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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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읽는 책] 김호기/ '강화학 최후의 광경'
마음이 쓸쓸할 때면 가끔 찾아가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 아닌 섬 강화도다. 강화대교를 건너 전등사 옆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사기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평범한 이 바닷가 작은 마을이 바로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이 태어난 곳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건창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과 함께 구한말 한시 3대가이자 유명한 ꡐ당의통략(黨議通略)ꡑ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강화학(江華學)이라 알려진 조선 후기 양명학자 가운데 한 분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우국충정에 분노해 자결했던 이시원(李是遠)이 다름 아닌 영재의 할아버지였으며, 영재는 이런 정신과 의리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내 전공은 아니나 커다란 감동을 받았던 책 가운데 하나가 조금은 이색적인 제목인 ꡐ강화학 최후의 광경ꡑ(우반, 1994년 출간)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뤄진 민영규 선생의 글 모음집 중 첫째 권으로, 강화학 관련 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양명학에 대해 아는 바 거의 없지만, 이 책 1부에서 다뤄지는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강화학자들의 삶은 흥미로우면서도 한없이 가슴이 아프다. 그 가운데 특히 ꡐ강화학 최후의 광경ꡑ은 단연 이 책의 백미(白眉)다. 강화, 개성, 구례, 서울, 그리고 만주와 블라디보스톡을 무대로 강화학자들이 기품 있게 견뎌왔던 삶은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이 땅의 지식인들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길이기도 했다.
민영규 선생에 따르면,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이 양명학의 가르침이라 한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를 물을 바가 아니라, 질(質)의 참됨만이 지식인이 갈 길이라 한다. 매천이 남긴 절명시의 한 구절인 ꡐ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날을 생각하니 글하는 사람 갈 길 헤아리기 어려워라ꡑ도 이와 뜻을 같이 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것은 지식인은 과연 자기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지식사회학적 질문이다. 굳이 푸코를 떠올리지 않아도 담론에 내재된 권력을 성찰해야 하는 것은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지식인의 당연한 의무이며, 그리고 이것이 강화학의 현재적 의미이기도 하다.
사기리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역시 바닷가 마을인 건평리가 나온다. 그곳에는 영재의 무덤이 있다.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서해의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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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좋아함과 다름은 크게 차이가 나겠지요.
제가 한때 명미당을 좋아하여 책으로 만들까하여 준비해 둔 것이 있어 일부를 보냅니다. 어쩌면 명미당이야야말로 제가 추구하는 상(狀)인지도 모릅니다. 당대의 명문이자 신영복 선생의 칼날 같은 글입니다.
하일리의 저녁노을
-- 글․신영복 1995년 12월26일【7회】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霞日里)는 저녁 노을 때문에 하일리입니다.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립니다. 그러나 하일리의 저녁노을에서는 하루의 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적(赤)과 흑(黑)으로 확연히 나누어지는 산마루의 일몰과는 달리 노을로 물든 바다의 일몰에서는 저 해가 내일 아침 다시 동해로 솟아오르리라는 예언을 듣기 때문입니다.
하곡(霞谷) 정제두(鄭濟斗)선생이 당쟁이 격화되던 숙종 말년 표연히 서울을 떠나 진강산 남쪽 기슭인 이 곳 하일리에 자리잡은 까닭이 바로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강화까지 걸어서 이틀길이었습니다.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으려고 하곡은 강화의 서쪽 끝인 이곳 하일리로 들어왔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손돌목의 세찬 물길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칼처럼 자르고 떠나온 그의 강한 결의가 지금도 선연히 느껴집니다. 하곡이 정작 자르고 왔던 것은 당시 만연했던 이기론(理氣論)에 관한 공소한 논쟁과 그를 둘러싼 파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곡이 이 곳에 자리잡은 후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많은 인재들이 강화로 찾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석천(石泉) 신작(申綽),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등 하곡의 맥을 잇는 학자 문인들이 국학연구 분야에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의 산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등 조선후기 실학(實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이른바 강화학의 전통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문을 영달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일색의 허학(虛學)을 결별하고 경전(經典)을 우리의 시각에서 새로이 연구하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는 한편 인간존재의 본질을 사색하는 등 다양하고 개방된 학문의 풍토와 정신세계를 이루어 내었던 것입니다. 곤궁을 극한 어려운 생활에도 개의치 않고 25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이러한 실학적 전통을 연면히 지켜 온 고장입니다. 이른바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 온 곳입니다.
강화학이 비록 봉건적 신분질서와 중세의 사회의식을 뛰어 넘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곳이야말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준엄한 지식인의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인간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학파라고 생각됩니다. 민족과 인간과 진리에 대한 믿음을 이 강화학의 사람들만큼 굳건히 견지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ꡐ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거운 물 사태(沙汰)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鹽澤)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서 장장 8천 8백리 황하를 이룬다ꡑ
이 이야기는 강화학을 이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이 해방직후 연희대학에서 가진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인의 환영식에서 소개한 한대(漢代) 장건(張蹇)의 시적 구상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화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큰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강화로 찾아 든 학자 문인들이 하일리의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던 것이 바로 이 황하의 긴 잠류였으며 일몰에서 일출을 읽는 내일에 대한 확신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공고한 신념, 그리고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인지도 모릅니다.
강화에는 참된 지식인의 자세를 묻는 준엄한 사표가 곳곳에서 우리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이 병인양요를 맞아 자결한 곳도 이 곳이고, 1910년 나라의 치욕을 통분하여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ꡐ지식인이 되기가 참으로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ꡑ이란 그 유명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곳도 이곳입니다. 가난한 어부들에 대한 애정과 나라의 치욕을 대신 짊어지려는 헌신과 대의로 그 길고 곤궁한 세월을 견디어 내며 박실자연(朴實自然)의 삶을 지향하였던 그들의 고뇌가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저기 아름다운 러브호텔이 들어서고 수많은 횟집의 유리창이 노을에 빛나는 강화에 이들의 묘소와 유적들은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려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당대의 가장 냉철한 지식이었던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묘소에는 어린 염소 한 마리만 애잔한 울음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고 만주로 떠나는 독립지사들의 성지였던 계명의숙(啓明義塾)터는 곡식도 없는 텃밭으로 묵어 있다.
마니산의 도토리나무는 지금도 강화벌판을 내려다보고 풍년이 들면 적게 열리고 흉년이 들면 많이 열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곤궁한 이들의 생계를 걱정하여 그 부족한 것을 여투어주려는 배려였는지도 모릅니다.
ꡐ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ꡑ
당신이 읽어준 이 간결한 글만큼 지식인의 단호한 자세를 피력한 글을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이 곳 하일리로 찾아오는 당신의 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모의 바닷가에서 새해의 시작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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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이 韓國學은 없다 -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에 대하여..
< 그가 없이 韓國學은 없다 >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
한국 불교학의 태두, 서지학의 권위자, 근세 儒學史의 증언자이자 嫡孫, 게다가 기독교 신학에 대한 파천황의 문제제기까지…. 말이 좋아 갖다붙인 공허한 수사가 아니다. 비록 제자를 기르는 데는 실패해 묻힌 이름이 되었지만 그가 없이 진정한 韓國學은 없다. 西餘 閔泳珪옹. 그의 학문 여정과 못다 이룬 아쉬움을 듣는다.
먼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5월13일 송광사에서 받은 예견하지 못했던 충격이었음을 밝힌다. 무슨 시끌벅적하고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경천동지할 사건이 벌어졌던 것은 아니지만, 현장을 지켜본 사람인 필자와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곰곰이 되씹게 만들면서 긴 여운을 남겨준 인상깊은 장면이 하나 있었다. 내남없이 부박하고 용렬해진 요즘 시절에 한 노학덕(老學德)으로부터 받은 뭉클한 감동의 실체를 스스로 풀어보고 싶다는 판단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스스로의 자문자답을 통해 반세기를 훌쩍 넘게 불교학과 기독교 신학, 그리고 조선조 양명학의 한 갈래인 강화학(江華學)을 두루 연구하면서 파천황의 문제제기와 함께 진정한 학문의 자세를 보여준 우리와 동시대의 한국학 연구자가 대중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도 실은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적지않이 무거운 주제임이 분명하지만, 요즘처럼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시대에 진정한 학문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한 학덕의 아름답고 높은 수준의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記)가 오히려 더 역설적이면서도 의미있고 생산적이지 않을까 하는 판단도 재우쳐 해본 길이다.
밝히자면 그분은 우리 시대 한국학 연구의 한 큰 이름인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87․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 학술원 회원) 선생이다. 내년으로 미수(米壽)를 맞는 학계의 큰 어른이면서도 동시대인 중 그를 기억하는 이 많지 않겠지만, 그 연세의 학자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학문적 긴장감, 그리고 그분의 학문함의 행위를 일관하는 열쇠 하나를 필자는 그날 송광사에서 정말 운 좋게 지켜볼 수 있었다. 귀띔하자면 그것은 깊은 학문적 함축과 당신의 삶을 전해 주는 ꡐ시적(詩的)운치의 기조강연ꡑ 혹은 선문답이었다.
그날 송광사 사자각에서는 문화관광부에 의해 ꡐ5월의 문화인물ꡑ로 선정된 고려 때의 보조지눌 선사를 기리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그 전날 제자인 한양대 조흥윤(문화인류학) 교수 등 제자 몇 분과 필자의 동행으로 노구를 이끌고 송광사로 내려간 서여 선생은 기조강연을 맡기로 돼 있었다. 기자 신분인 필자는 1990년대 초반에도 송광사와 해인사 등에서 서여가 간헐적으로 행한 강연을 취재한 인연이 있었고, 그러저러한 인연 속에 서여 선생을 사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ꡐ이런 좋은 공부의 기회가 따로 있겠나ꡑ싶은 마음으로 성큼 동행하기로 했다.
2001년 5월 송광사에서의 충격
서울에서는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내려갔는데 조흥윤 교수가 굳이 필자를 뒷자리 서여 옆에 앉게 한 배려 덕분에 한갓지게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우선 조심스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물어보았다.
ꡒ선생님 절에 가셔서 무슨 얘기를 하실 것인지요?ꡓ
운전석 앞자리의 조교수가 스승의 어두운 귀를 염두에 두고 두어차례 복창하자 그제서야 서여가 운을 뗐다.
ꡒ글쎄 무슨 말을 할까 고민이야. ꡐ인간의 발견ꡑ에 대해 말할까 생각중이요. 당나라 선불교는 한마디로 인간을 넘어서려 했던 ꡐ인간 초월ꡑ ꡐ인간 초탈ꡑ의 역사 아니겠어요? 그래서인지 다소간 말장난에 빠진 감이 없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 신라 불교는 달랐어요. 중국과 달리 진정한 ꡐ인간의 발견ꡑ을 말하고 있거든? 그걸 말하면 어떨까 싶은데….ꡓ
선문답 비슷한 한두마디를 던지고 서여는 내처 입을 닫았다. 무슨 말일까? 나름대로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그날 저녁 송광사에서 필자와 같은 요사채를 쓰게 된 조교수가 불쑥 말을 던졌다.
ꡒ인간의 발견이란 서양 르네상스 시대 이야기인데 조금 핀트가 안 맞는 것 아닐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ꡓ
동행 모두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 돌아와 ꡒ서여문존ꡓ(西餘文存, 우반 간행, 1994년)이라는 이름을 단 서여의 전집 두 권 ꡒ강화학(江華學) 최후의 광경ꡓ ꡒ사천강단ꡓ(四川講壇)을 다시 읽어보고 난 뒤 보다 확연해진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불교학․유학․기독교 신학을 포함해 서여 선생 당신의 학문행위의 평생 화두이기도 했다. 그렇게 믿는 근거는 많다.
우선 당신은 1970년대 전후 한우근․천관우 같은 분들의 사학계가 너무 좁게 해석한 공리적이고 실용학문 중심의 조선조 실학 연구 경향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이의제기를 하기도 했다.
도올 김용옥도 주목할 만한 최한기(崔漢綺)의 기학(氣學) 연구서인 ꡒ독기학설ꡓ(讀氣學說, 통나무, 1992)을 통해 비슷한 지적을 했던 것을 필자는 기억한다. 실학이란 조선 후기에 실체가 있었다기보다 근현대사의 현재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라는 식의 비판이었다. 이와 또 달리 서여는 양명학에 영향을 받은 조선조 후기의 신 지식사회집단은 서양 근대와 닮은 꼴의 공리주의적 멘탈리티보다 양명학의 원조인 왕양명의 말대로 동기의 순수성과 이를 통한 주자학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더 중요시했다는 식의 지적을 해왔다.
생각 끝에 서여가 양명학의 또 한 갈래인 강화학 250년의 내력에 대해 ꡐ시작과 끝을 오직 진실과 양심에 호소했을 뿐, 성패를 묻지 않은 것이 강화학의 가르침ꡑ이었다는 것, ꡐ모진 핍박과 갖은 곤궁 속에서 성취한 인간의 존엄과 인간 발견의 역사ꡑ라고 쓰셨던 대목이 기억났다. 따라서 ꡐ인간의 초탈이 아닌 인간의 발견ꡑ이란 말에 묻어 있는 뉘앙스란 그런 강화학 연구 방향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동시대의 민초들의 삶을 끌어안으려는 박애주의적 자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가늠해 봤다.
또한 ꡐ인간 발견ꡑ의 메시지란 그의 선불교 연구에서도 거듭 메아리로 확인되고 있지 아니한가? 무엇보다 그의 선불교 연구란 지금까지 상식으로 통하던 제1조 보리 달마 이후 6조 혜능의 승리를 상식으로 알아온 것을 뒤집는 작업이고, 선가(禪家)의 무수한 공안과 선문답의 번쇄함과 말장난을 지적하려는 작업이다.
흔들릴 수 없는 계보학으로 통하던 ꡐ교과서적 인식ꡑ을 뒤집어 보이는 작업의 결과로 서여는 불교에서 요구되는 진정한 수행이자 사회봉사활동인 두타행과 보살행의 실천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8년전, 그러니까 지난 1993년도에 필자가 모시고 갔던 송광사에서도 그 비슷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시 강조하려 함이겠지 하고 속으로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국내 스님들 가운데 한학(漢學)에 그중 밝다는 송광사 주지 현봉 스님은 서여와 제자 일행을 정겹게 맞았다. 현봉 스님은 서여의 중국 사천성 답사에도 동행해 오면서 오랜 인연을 맺어온 분이기도 했다. 서여는 식사시간에는 매우 흔쾌한 표정이었지만, 그날 저녁 요사채에서는 다시 무거운 표정으로 가라앉았다. 골똘히 무언가를 거듭 생각하는 표정이어서 그가 기조강연에 임하는 자세의 진지함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다음날 현봉 스님은 서여를 가리켜 ꡐ불교학의 태두(泰斗)ꡑ라고 소개하면서 기조강연의 마이크를 넘겼다.
단상에 오른 서여가 말문을 열었다 싶었는데 40, 50대 연배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 흥미로웠다. 한데 서여는 불과 30여초만에 기조연설을 마치고 내처 연단을 내려서 버렸다. 순간적으로 너나 없이 모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메모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기조연설을 끝내버린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으면 이렇다.
ꡒ우리의 국화인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 저녁이면 집니다. 한번 피었다 시들거나 지지 않으면 꽃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한번 피었다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그것을 새겨보고 싶었습니다. 제 강연은 이상입니다.ꡓ
세상에 이런 선문답 아닌 선문답이 어디 있고, 강연 아닌 강연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얼핏 생각해도 무서운 주문임이 분명했다. 비록 몇 마디였지만 그 의미는 고사하고 서여의 표정이나 말에 묻어 있는 긴장감부터 보통의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훅 하고 체감으로 전해졌다. 그 넓은 사자각에 모여 있던 스님 100여명과 신도 수십명은 전혀 예견할 수 없었던 사태의 의미를 깨닫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지만, 다음 주제발표가 시작되자 서여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이내 사자각을 빠져나왔다.
어쨌든 굉장한 긴장감이요, 서여다운 행동이다 싶은 생각과 함께 얼떨떨하기는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교수와 함께 서여를 모시고 대웅전 옆의 휴게소로 들었다. 뒤이어 현봉 스님이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고 휴게소로 들어왔다. 필자가 농담을 던졌다.
ꡒ스님, 기조 강연이 너무 짧아 어디 본전이라도 뽑을 수 있었던가요?ꡓ
필자의 말을 받는 현봉 스님의 말이 걸작이었다.
ꡒ아무 문제 없습니다. 서여 선생님이 항용 하시던 말씀의 녹음 테이프가 돌아가 이류중행(異類中行)에서 피모대각(皮毛戴角)이 나오고, 두타행(頭陀行)이니 하시는 말씀, 그리고 신라의 무상 선사에서 구산선문, 고려시대 일연 스님, 조선시대 설잠(雪岑) 김시습 얘기를 되풀이 하실 줄 알았더니만…짧으니 좋습디다.ꡓ
현봉 스님 역시 고수임이 분명했다. 나중에 그날 학술대회에 참석했던 분으로부터 말을 들으니 현봉 스님은 학술대회의 마지막 멘트를 ꡒ서여 선생님이 제기한 무궁화 론(論)을 오늘 학술대회의 화두로 삼자ꡓ며 모양새있게 마무리했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서여와 필담을 나누면서 다시 물었다.
ꡒ선생님 기조강연을 스님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까요?ꡓ
왠지 필자는 미심쩍었기 때문이었다. 쪽지를 본 서여는 망설임 없이 흔쾌하게 말했다.
ꡒ아 물론이지요. 알아들었을 것입니다.ꡓ
글쎄다. 따라서 이 글은 문자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필자가 결국 문자를 통해 그날 서여가 던진 화두를 풀어보는 작업이겠고, 속으로 서여의 학문함에 대해 품어온 의문과 알음알이를 정리해 보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이를 통해 앞에서 던졌던 바람, 즉 인문학의 죽음이 거론되는 와중의 빈사의 한국학에 서여의 삶과 학문이 갖는 풍부한 함축까지 음미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글 -<월간중앙> 2001년 8월호에서 <조우석 중앙일보 출판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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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 이 나라 5대 도서(島嶼)의 하나
@강화도 가는 길은 최근 강화대교 외에 아래쪽에 새다리가 놓여 길이 좋아졌다.
문의해보고 좋은 길로 가길...
강화사상 배우기
강화는 예로부터 생명사상이 흐르는 곳입니다.
동국이상국집을 쓰신, 백운 이규보 선생님의 묘가 불은면에 있으며 사시던 곳이 백운곡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또한, 양명학의 거두 정제두선생님은 강화에 오셔서 강화학파를 세우셨으며, 선생의 묘가 양도면 무지개 뜨는 언덕, 하우고개에 있습니다.
강화학파를 집대성하신 이건창선생님의 생가인 명미당도 있는데요. 명미당은 사기리에, 선생의 묘소는 건평리횟집촌 뒤 언덕에 있습니다. 사기리에 가시면 명미당 건너편에 이건창선생님의 선조가 심으셨다는 400년 된 탱자나무도 있으니 꼭 들러보세요.
1. 밴댕이요리/인삼막걸리 -- ‘밴댕이 소갈머리’란 말이 있는 생선으로 나는 철(5-6월)이 따로 있다. <선수밴댕이 횟집촌>이 유명. 특히 석모도 가는 배가 있는 외포리선착장(032-932-6007)주변에 밴댕이 횟집촌이 밀집되어 있다. 이곳에서 밴댕이요리에 인삼막거리 곁들이면 좋다. 특히 돈대횟집 932-2833(밴댕이회, 숭어회)이 유명.
1. 우리옥(백반/순무김치) (강화읍내 우리은행 건너편 032-934-2427)
백반이 유명, 4천원. 여기가면 순무김치(5월이 제철)를 맛볼 수 있다. 가마솥밥, 기타 강화도의 식재료 다 등장)
1. 토속음식점 대선정(937-1907) 해안가 광성보 덕진진 지나 바로 나옴. 초지진에서 100미터 거리임. 시래기밥 /메밀칼싹둑(칼국수) /장어구이 /숭어요리. 강화순무에 밴댕이젓으로 담근 김치가 이 집의 별미.
@ 기타 볼거리, 알거리.
1. 강화도 일몰
아마 무형의 재산이지만 강화도 가면 이것은 꼭 보고 오세요..
동해안이 일출이라면 서해안은 일몰이지요.
@ 강화도 서쪽 화도면 내리 <장곶돗대>가 일몰로 손꼽히는 곳이지요. 갯벌과 하늘과 바다가 어우러져 참으로 장관이지요. 단 길 찾기가 좀 힘듦. 안되면 부근의 <장곶회집> 937-8266에서 일몰 볼 것.
@ 강화 서남단 장화리 앞바다의 갯벌과 수평선 너머 지는 저녁놀을 감상할 수 있는 전통 찻집 -- <해둥지 937-2525>
@ 동막리의 동막해수욕장의 일몰과 갯벌도 유명합니다.
부근 맛집 <동막소라집 937-8220>
1. 영화 <시월애>의 촬영지 석모도
-- 가기전 영화 꼭 빌려 보세요. 시월애--이현승감독, 이정재, 전지현 주연
해안가에 지은 아름다운 집(일마레) 인상적인 영화인데 그 집이 있던 곳(현재 태풍으로 부서짐)이 석모도다. 석모도 일주해도 좋음. 도로 완비.
@ 석모도 <하리낚시터 -- 이정재가 담배 사러 다니던 곳, 이곳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에 일마레가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시월애 촬영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음. 이 집에서 식사 가능. 석모도에 내리면 하리마을로 가는 길 물어 가면 돰.
@ 석모도 삼량염전 -- 오후 4시쯤이면 소금탑을 볼 수 있다.
@ 석모도 일몰 -- 일정상 강화도에서 보기 어려우면 석모도에서 꼭 볼 것. <민머루통나무집 민박 932-9410)에서 일몰을 볼 수도 있음. / 삼산해수욕장 --여기서도 갯벌과 일몰 볼 수 있다.
@ 석모도 민머루 해수욕장 -- 광활한 갯벌로 유명. / 일몰 보기 가능 / 석모도 선착장에서 해안도로 따라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약 20여분 가면 나옴.
@ 석모도 어유정항 -- 이곳 포구에도 밴댕이회가 많다.
@ 석모도 보문사 마애관음 보살상 --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강화 8경의 하나. 보문사 앞바다의 파도소리/ 눈섭바위/ 마애관음 보살상은 유명. 석모도 갔다면 꼭 보고 올 것.(일주도로에서 왼쪽으로 약 30여분 소요/민머루해수욕장 다음코스임)
@ 관광 안내
1. 강화군 문화관광과 (032 930-3621)
1. 석모도 가는 배 타는 곳 (외포리선착장 032 932-6007)
# 주의 : 외포리에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선착장(여기도 석모도 가는 배가 있다) 말고 인근에 우회전해서 가면 큰 선착장 있다. 차를 배에 싣고 갈 수 있다. 꼭 차 가지고 갈 것.(외포리/석포리 두곳에 선착장이 있다. 현지인에게 불어 볼 것.)
# 참고 : 2001년 기준 (배값은 1인당 1200원, 승용차 도선료는 1대당 1만 4천원/ 석모도까지 약 10분 소요/ 평일 30분, 휴일 10분 간격으로 운행/ 강화로 나가는 배(페리호)는 오후 8시가 막배)
# 주의 : 주말이면 석모도와 선착장 주변 몰린 인파와 교통 체증 심함, 휴일 오후면 일찍 빠져 나와야 현명할 듯. 5시만 되어도 선착장의 줄은 수백미터다. 석모도는 식당과 이색카페 즐비. 어디서나 식사 가능.
# 애들하고 간다면 배 타기전 꼭 새우깡 큰 것 살 것. -- 석모도 가는 배 타고 가다 보면 갈매기가 배를 따라 모여드는데 애들이랑 던져주면 잘 받아 먹음. 이때 사진 비디오도 촬영)
@ 기타 권하고 싶은 것(도서/자료)
백범 김구가 평하기를 ꡒ강화에는 두 사람의 인물이 있는데,양반 중에는 이건창이요, 상놈 중에는 김주경ꡓ이라 했다.
강화에는 우리가 찾아볼 유적지가 여러 곳이 있다. 광성보, 초지진, 덕진진 같은 전적지와 함께 강화학파의 이건창의 생가나 또한 민중으로 의인의 삶을 산 김주경의 집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겁니다.
-- 참고 자료
@ 신영복선생의 책 ,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간행 -- 가운데 ‘하일리의 저녁노을’ 「사기 이시원과 영재 이건창 이야기」---- 아래 하단부에 수록됨.
@ ‘강화학파’ 알고 가면 더 좋지요. -- 인터넷 검색해서 찾기
@ 민영규 선생의 저작 -- <강화학 최후의 광경> 우반 간행
우리시대 탁월한 저작이다. 절판되었는데 헌책방에서 찾을 수 있다.
@ 이 인물은 알고 가야죠.
강화학파로 애국시인이자 암행어사로 이름 떨치던 명미당(영재) 이건창의 조부 사기 이시원은 병인양요로 강화진이 점령되자 유서를 남기고 손자(명미당)가 보는 앞에서 자결한다. -- 이것이 강화학파의 정신이다.
@ 이규보 시집이나 문집 참조 -- 이규보 묘가 강화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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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강화학파
정제두를 시조로 하여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특한 학문적 경향을 가진 학파를 말한다. 조선후기무렵 양명학(陽明學)을 천명한 정제두가 강화에서 학문을 하는데, 그의 자손을 비롯해 이광사, 이광려, 이광명, 신대우, 이진병 등이 모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한 것이다. 강화학파는 200여 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로써 강화는 유교의 성리학을 배척하는 강화학파가 둥지를 틀며 일찍이 개명했고 신교육과 산업에도 눈을 떴다.
강화학파는 시대를 내려오며 당시의 지식인들과 그 후예들로 인맥을 형성, 일본제국주의침략에 단호히 저항하게 된다. 당쟁의 폐해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실망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강화로 낙향했던 이건창, 그의 아우 이건승,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국학 진흥에 한 획을 그은 정인보 등이 정제두의 강화학파를 이은 거목들이다.
☞ 참고서적
이이화, 「이야기 인물한국사1」, 한길사, 1993
이이화, 「이이화 인물한국사3」, 한길사, 1993
이현희, 『우리나라 근대 인물사』, 새문사, 1994
이은직, 『한국사 명인전1』, 일빛, 198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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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의 생애와 문학
구한말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시의 대가였던 이건창(1852~98) 의 호는 영재 또는 명미당. 병인양요 때 순국한 충정공 이시원의 손자이 자 군수공 상학의 아들로 15세 때 문과에 급제하고 약관으로 옥당에 들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문호 김택영(1850~1927)은 나라 안 아홉 문장의 한 사람으로 그를 뽑 았다. 역사상 보기드문 청백리였지만 반대파의 중상으로 멀리 압록강변 벽동과 고군산도 등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저서로 '명미당집', '당의통략' 등이 있다. 강화의 화도면 사기리에 생가가, 양도면 건평리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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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화첩기행; <14>
---- <조선일보> 1998년 05월 25일
이건창과 강화
어둠의 역사 밝힌 강도의 시
생가앞엔 탱자나무꽃
환란 현실속;양요의 아픔 ꡐ생생ꡑ
사진설명 :
(위) 힘과 기세 그리고 탈속과 비범함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이건창의 문장 세게는 마치 질풍처럼 들판을 가르며 달리는 한 마리 준마를 연상시킨다.
(아래) 천연기념물 제79호인 이건창 생가 앞의 이 늙은 탱자나무는 원래 적병의 접근을 막기 위해 심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의 증인이기도 한 셈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크고 붉은 해가 치솟았다.
해는 점점 커져 하늘을 메우더니 미친 불길이 되어 파도를 삼키고 섬을 덮친다.
푸른 섬은 삽시간에 불덩이로 타올랐다. 꿈이었다.
전날 일몰을 욕심내 「석모도」에 들어왔던 것이 탈이었다. 저녁해의 장려함에 취해 그만 그 이쁜 섬에서 1박하고 만 것. 내가 「민머루 해변」에서 본 해는 그토록 아름다웠건만 웬일로 꿈은 흉몽이었다. 석모도 부두에 선다. 우국(우국)의 섬 강화로 되돌아가기 위해.
환란(환란)도 일종의 양요(양요).
나라는 지금 상처입은 짐승처럼 앓고 있다. 옛 시인은 듣는가. 그 뒤척이는 신음을.
항몽(항몽)의 망명정부, 그 한많은 몽진(몽진촵임금이 난리를 피해 옮겨감)의 땅으로 가는 감회는 화창한 날씨임에도 가볍지가 않다.
끼룩끼룩 갈매기 떼는 뱃전을 덮다시피 따라온다. 사람들이 던져 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쫓아. 문득 드넓은 바다와 푸른 창공을 버려두고 날개들을 부딪치며 뱃전에 엉기는 저 갈매기들이, 추해 보인다. 내가 지금 그 흔적 찾아가는 강화의 옛 시인 이건창의 삶은 저렇지 않았다. 비석 하나 없이 「건평리」 야산에 초라한 봉분으로 누워 있지만 시인은 세속 명리 좇아 저렇게 아귀다툼으로 덤비지 않았다.
이건창, 가팔랐던 이 나라 근대사의 불길 속을 부릅뜬 눈과 표표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던 사람. 밖으로는 외국 열강들이 침흘리며 옥죄어 오고 안으로는 권문세가의 부패가 극에 달하던 시절에 서슬 퍼런 글로 시대의 미친 바람을 꾸짖었던 사람.
『…지금 나라는 치욕을 당하고 있고 백성은 근심에 잠겨 있으며…, 재정은 고갈되어 이 상황은 진실로… 눈물 흘리며 통곡해야 할 때입니다. …일서(일서) 일국(일국)의 편제를 약간 바꾸는 정도의 명(명)만의 개화 아닌 실(실)의 변화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의론시정소촵의론시정소)
역사는 어쩌면 이리도 동어반복으로 되풀이되는 것인가. 1백년 전 시인의 한탄과 질책은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향하는 것인 양 생생하기만 하다. 「찬우물약수터」와 「철종외가」와 「시인 이규보 묘소」를 빠르게 지나쳐 간다. 강화는 과연 민족사의 축소판. 지나치는 곳곳마다 역사의 맥박이 짚어진다. 까마득한 날의 지석묘(지석묘)와 「한울님」께 제사 올린 성산(성산) 마니산과 참성단, 수많은 국방 유적과 함께 정제두와 강화학파의 생명사상이 숨쉬고 있는 곳. 그 민족 최후의 보루 강화에서는 옛 조선포대의 후신인 해병대 초소들마저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함허동천」 가는 한적한 외곽도로를 돌아 마침내 화도면 사기리(사기리) 167번지 이건창 생가에 닿는다. 저 작은 초가에서 그는 조부 이시원(이시원)에게 무릎 꿇고 글을 익혔을 것이다. 그리고 이조판서였던 그 조부가 병인양요에 스스로 목숨 끊는 것을 보면서 충절의 유훈을 뼈아프게 새겼을 것이다.
생가 앞 들판 한쪽에는 흰눈을 뒤집어쓴 듯 탱자나무 꽃이 눈부시다. 제 가시로 제 몸을 찔러 향기를 낸다는 나무. 프랑스 함대 포소리에 놀라 새벽녘 벌판을 달려 동검도 앞바다로 시커멓게 몰려가는 이양선을 바라보았을 소년 이건창을 저 늙은 나무는 지켜보았을까. 원래 성벽 아래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심어졌다는 강화의 탱자나무.
적은 함포로 공격해 오는데 순후한 우리 백성은 탱자나무 가시로 막으려 했는가.
풍광은 변함없이 눈부시건만 섬의 역사는 왜 이리 애달픈 것인가. 이건창의 4백수 넘는 한시들 역시 한결같이 풍광의 「눈부심」 아닌 삶의 「애달픔」을 담고 있다.
『(팔려간) 한구(한구), 주인의 말 듣고/…새 주인 따라갔네/…(밤이면) 몰래 옛 주인집으로 돌아와/…차마 옛 주인 보지는 못하고/다만 주인집의 문만 지켜주다 가네…. 』
그는 장시 「한구편(한구편)」에서, 팔려갔으나 밤마다 옛 주인의 집에 돌아와 그 문을 지켜주고 돌아가는 충직한 개를 그리고 있다. 원악(원악)의 귀양길에서조차 나라 사랑으로 눈물 뿌렸던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일까.
이건창의 죽음을 접하고 멀리 전라도 장수(장수)땅에서 「북으로 팔백 리」를 달려와 통곡하며 시인 매천 황현(매천 황현)은 이렇게 제문(제문)을 썼다.
『공(공)의 돌아가심은 커다란 구슬이 (소리내며) 부서짐 같습니다. 사람들이 들에서 통곡하고 잠자리에서 웁니다. …공을 모함하던 자들도 오히려 슬퍼하거늘, 하물며 나같이 외로운 자는 그 눈물이 어찌 강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이제 풍상우로(풍상우로)에도 내가 목숨 부지하려 함은 오직 공을 통곡하기 위함입니다…. 』
그러나 그 황현 또한 이건창 사후 십여년 만에 한일합병 소식을 접하고 절명시를 남긴 채 음독하고 만다.
-- 글 /그림: <김병종․서울대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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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선비론]寧齋(영재) 이건창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浪人)의 손에 시해되고 시신이 불태워지는 처참한 변고가 있은 뒤 친일내각이 구성되고 국왕은 왕비를 폐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1895년 음력8월20일 그 사변이 있고 나서 달이 바뀌었어도 상복을 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강화도 큰사골 집에 칩거하던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은 홍승헌(洪承憲) 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궐하에 엎디어 폐비의 칙명을 거두고 죄인을 잡아 처형하라고 주장하였다.
강한 이웃을 두려워하여 왕비의 상도 치르지 못하는 우리 조정이 못내 한심했던 것이다. 이보다 더한 변고가 있다면 그것은 조국의 멸망이다. 9월5일 이건창은 이렇게 ꡐ청토복소(請討復疏)ꡑ의 상소문을 올렸으나 고종의 눈을 거치지 않고 반송되었다. 13일에 다시 올렸으나 역시 내각에 의해 내쳐졌다. 그러나 그의 상소를 전후하여 민심은 하나로 합해졌고 의병들도 일어났다.
이건창은 청나라 리훙장(李鴻章)이 개국을 주선할 때 이미 ꡒ스스로 지키는 것 없이 그 자만 믿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나라가 팔리고 말리라ꡓ고 시정소문(時政疏文)을 지어 우려하였다. 수호통상(修好通商)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개항을 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그 방법을 허(虛)가 아니라 실(實)에서, 이웃나라가 아닌 아(我)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고 허명으로만 개화를 외치는 시류배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건창은 불의와 부정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로 충청우도 안렴사(忠淸右道 按廉使), 말하자면 암행어사가 되었을 때 충청우도 감사 조아무개의 은닉 재물을 찾아내고 숱한 비행을 밝혀냈으며 그의 행동을 과민하다고 의심하는 국왕 고종 앞에서 탐관의 만행을 조목조목 낱낱이 알렸다.
서른두살에 경기도 안렴사가 되었을 때는 연안 13개 고을을 진휼(賑恤)하고 광주 수원 개성의 세금을 실정에 맞게 덜어주었다. 서울 부시장격인 한성소윤(漢城少尹)으로 있을 때는 외국사람이 가옥과 토지를 범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때문에 청나라 공사의 간섭으로 자리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함경도 안핵사로 나가서는 그곳 감사의 비행을 낱낱이 밝혀 파면시켰다. ꡐ지방관이 올바른 행정을 하지 않으면 이건창이 찾아간다ꡑ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이건창은 법률의 문구만을 좇는 도필리(刀筆吏․아전을 얕잡아 일컫는 말)가 아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글귀나 아로새기는 조고가(문필가)로 그치지 않았다. ꡐ참된 도리(實理)ꡑ를 내심에서 파악하여 ꡐ참된 일(實事)ꡑ을 실천하려는 강화학(江華學)의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남의 아픔을 내 고통으로 느끼는 그의 마음가짐은 양명학자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이후로 강화학이 지켜왔던 실천내용이었다. 또한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은 조부 이시원(李是遠)의 가르침이었다.
충청우도를 암행할 때 죄인을 신문하고 쓴 시 (녹수작․錄囚作)에서 이건창은 ꡐ피맺히는 고통을 모르고 돈 먹는 달콤함만 말하다니 너희들도 사람이거늘 살가죽이 어찌 견디랴ꡑ라 하고 ꡐ채찍 하나 회초리 하나에도 혹 상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관대하다는 잘못이 있을망정 내 마음은 본디 이와 같도다ꡑ라고 하여 탐욕에 눈먼 인간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측은해 하였다.
그 시기에 태안반도의 안흥에서 수군(水軍)과 어촌의 실상을 기술한 시와 모진 흉년에 관교들의 횡포로 초주검이 된 산골 사람을 그린 시, 경기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환곡(還穀․농민들에게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제도)의 문란과 농민의 고통을 목도하고 쓴 시, 황해도 관찰사로 가다가 연평도 조기잡이의 삶을 노래한 시 등은 우리나라 사실주의 문학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다. 기층민의 애환에 동정하고 조국의 자주적 부강을 염원하는 뜻에서 나왔기에 그 말이 절실하고 그 사상이 온화하면서도 강건했다. 그는 결코 문학가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그의 산문은 구한말의 문학가인 김택영(金澤榮)이 고려 조선의 대문장가 아홉을 꼽은 선집에 최후의 인물로 선별되어 있다.
1898년 귀양지인 고군산도에서 돌아와 마흔일곱의 짧은 생을 마친 뒤에도 그의 시문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을 비롯한 여러 불꽃같은 지식인들의 손으로 베껴져 전하다가 1917년 중국에서 ꡐ명미당집(明美堂集)ꡑ으로 간행되었다.
이건창은 당색(黨色)의 제한 때문에 그의 정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서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는데는 붕당정치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한 그는 ꡐ당의통략(黨議通略)ꡑ을 집필하였다. 윗대의 이긍익(李肯翊)이 ꡐ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ꡑ을 엮었던 사학 연구의 맥을 이은 것이기도 하다.
이건창의 자는 봉조(鳳鳥 혹은 鳳藻), 호는 영재이다. 1852년에 태어났고 죽은 해는 1898년 광무(光武) 2년이다. 당호(堂號)는 조부가 병인양요때 순국하면서 남긴, 시대의 소임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명미당(明美堂)이라 하였다.
노성인(老成人․노련하고 성숙한 사람)은 갔어도 그 전형은 남았다. 아우 이건승(李建昇)은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뒤 강화도 사기리에 남아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저우(滿洲)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건창이 굳게 지켜낸 강화학의 정신과 민족자주이념은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에게 계승되어 큰 줄기를 이루었다.
--- 심경호(고려대교수․한문학)
[약력]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일본 교토대에서 박사학위 △저서 ꡐ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ꡑ ꡐ한시로 엮은 한국사기행ꡑ ꡐ다산과 춘천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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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연소 급제자[만14세] 이건창
조선시대 20세 미만 급제자는 30명이며 그중 최연소 급제자는 1866년[고종30년] 강화도
별시문과에서 6명중 5등으로 뽑힌 만14세의 이건창[전주이씨]이다.
이건창은 판서 이시원의 손자로 강화출생이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조정에서도 너무일찍 급제하였다하여 4년뒤인 만18세가 되어서야홍문관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건창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으로 암행어사때는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낱낱이 들쳐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여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당의통략]을 저술하는 등 조선말기의 대문장가로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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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읽는 책] 김호기/ '강화학 최후의 광경'
마음이 쓸쓸할 때면 가끔 찾아가는 곳이 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 아닌 섬 강화도다. 강화대교를 건너 전등사 옆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사기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평범한 이 바닷가 작은 마을이 바로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1852~1898)이 태어난 곳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건창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과 함께 구한말 한시 3대가이자 유명한 ꡐ당의통략(黨議通略)ꡑ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강화학(江華學)이라 알려진 조선 후기 양명학자 가운데 한 분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우국충정에 분노해 자결했던 이시원(李是遠)이 다름 아닌 영재의 할아버지였으며, 영재는 이런 정신과 의리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내 전공은 아니나 커다란 감동을 받았던 책 가운데 하나가 조금은 이색적인 제목인 ꡐ강화학 최후의 광경ꡑ(우반, 1994년 출간)이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이뤄진 민영규 선생의 글 모음집 중 첫째 권으로, 강화학 관련 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양명학에 대해 아는 바 거의 없지만, 이 책 1부에서 다뤄지는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강화학자들의 삶은 흥미로우면서도 한없이 가슴이 아프다. 그 가운데 특히 ꡐ강화학 최후의 광경ꡑ은 단연 이 책의 백미(白眉)다. 강화, 개성, 구례, 서울, 그리고 만주와 블라디보스톡을 무대로 강화학자들이 기품 있게 견뎌왔던 삶은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이 땅의 지식인들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길이기도 했다.
민영규 선생에 따르면,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이 양명학의 가르침이라 한다. 결과의 대소고하(大小高下)를 물을 바가 아니라, 질(質)의 참됨만이 지식인이 갈 길이라 한다. 매천이 남긴 절명시의 한 구절인 ꡐ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날을 생각하니 글하는 사람 갈 길 헤아리기 어려워라ꡑ도 이와 뜻을 같이 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것은 지식인은 과연 자기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지식사회학적 질문이다. 굳이 푸코를 떠올리지 않아도 담론에 내재된 권력을 성찰해야 하는 것은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지식인의 당연한 의무이며, 그리고 이것이 강화학의 현재적 의미이기도 하다.
사기리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계속 가다 보면 역시 바닷가 마을인 건평리가 나온다. 그곳에는 영재의 무덤이 있다.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서해의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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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좋아함과 다름은 크게 차이가 나겠지요.
제가 한때 명미당을 좋아하여 책으로 만들까하여 준비해 둔 것이 있어 일부를 보냅니다. 어쩌면 명미당이야야말로 제가 추구하는 상(狀)인지도 모릅니다. 당대의 명문이자 신영복 선생의 칼날 같은 글입니다.
하일리의 저녁노을
-- 글․신영복 1995년 12월26일【7회】
강화도의 서쪽 끝 하일리(霞日里)는 저녁 노을 때문에 하일리입니다.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립니다. 그러나 하일리의 저녁노을에서는 하루의 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적(赤)과 흑(黑)으로 확연히 나누어지는 산마루의 일몰과는 달리 노을로 물든 바다의 일몰에서는 저 해가 내일 아침 다시 동해로 솟아오르리라는 예언을 듣기 때문입니다.
하곡(霞谷) 정제두(鄭濟斗)선생이 당쟁이 격화되던 숙종 말년 표연히 서울을 떠나 진강산 남쪽 기슭인 이 곳 하일리에 자리잡은 까닭이 바로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강화까지 걸어서 이틀길이었습니다.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으려고 하곡은 강화의 서쪽 끝인 이곳 하일리로 들어왔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손돌목의 세찬 물길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칼처럼 자르고 떠나온 그의 강한 결의가 지금도 선연히 느껴집니다. 하곡이 정작 자르고 왔던 것은 당시 만연했던 이기론(理氣論)에 관한 공소한 논쟁과 그를 둘러싼 파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곡이 이 곳에 자리잡은 후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많은 인재들이 강화로 찾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석천(石泉) 신작(申綽),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등 하곡의 맥을 잇는 학자 문인들이 국학연구 분야에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의 산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등 조선후기 실학(實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이른바 강화학의 전통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문을 영달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일색의 허학(虛學)을 결별하고 경전(經典)을 우리의 시각에서 새로이 연구하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탐구하는 한편 인간존재의 본질을 사색하는 등 다양하고 개방된 학문의 풍토와 정신세계를 이루어 내었던 것입니다. 곤궁을 극한 어려운 생활에도 개의치 않고 25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이러한 실학적 전통을 연면히 지켜 온 고장입니다. 이른바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 온 곳입니다.
강화학이 비록 봉건적 신분질서와 중세의 사회의식을 뛰어 넘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곳이야말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준엄한 지식인의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인간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학파라고 생각됩니다. 민족과 인간과 진리에 대한 믿음을 이 강화학의 사람들만큼 굳건히 견지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ꡐ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거운 물 사태(沙汰)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鹽澤)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서 장장 8천 8백리 황하를 이룬다ꡑ
이 이야기는 강화학을 이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이 해방직후 연희대학에서 가진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인의 환영식에서 소개한 한대(漢代) 장건(張蹇)의 시적 구상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화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큰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강화로 찾아 든 학자 문인들이 하일리의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던 것이 바로 이 황하의 긴 잠류였으며 일몰에서 일출을 읽는 내일에 대한 확신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황하의 오랜 잠류를 견딜 수 있는 공고한 신념, 그리고 일몰에서 일출을 읽을 수 있는 열린 정신이 바로 지식인의 참된 자세인지도 모릅니다.
강화에는 참된 지식인의 자세를 묻는 준엄한 사표가 곳곳에서 우리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이 병인양요를 맞아 자결한 곳도 이 곳이고, 1910년 나라의 치욕을 통분하여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ꡐ지식인이 되기가 참으로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ꡑ이란 그 유명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곳도 이곳입니다. 가난한 어부들에 대한 애정과 나라의 치욕을 대신 짊어지려는 헌신과 대의로 그 길고 곤궁한 세월을 견디어 내며 박실자연(朴實自然)의 삶을 지향하였던 그들의 고뇌가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저기 아름다운 러브호텔이 들어서고 수많은 횟집의 유리창이 노을에 빛나는 강화에 이들의 묘소와 유적들은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려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당대의 가장 냉철한 지식이었던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묘소에는 어린 염소 한 마리만 애잔한 울음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고 만주로 떠나는 독립지사들의 성지였던 계명의숙(啓明義塾)터는 곡식도 없는 텃밭으로 묵어 있다.
마니산의 도토리나무는 지금도 강화벌판을 내려다보고 풍년이 들면 적게 열리고 흉년이 들면 많이 열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곤궁한 이들의 생계를 걱정하여 그 부족한 것을 여투어주려는 배려였는지도 모릅니다.
ꡐ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ꡑ
당신이 읽어준 이 간결한 글만큼 지식인의 단호한 자세를 피력한 글을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서슬 푸르게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이 곳 하일리로 찾아오는 당신의 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모의 바닷가에서 새해의 시작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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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이 韓國學은 없다 -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에 대하여..
< 그가 없이 韓國學은 없다 >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
한국 불교학의 태두, 서지학의 권위자, 근세 儒學史의 증언자이자 嫡孫, 게다가 기독교 신학에 대한 파천황의 문제제기까지…. 말이 좋아 갖다붙인 공허한 수사가 아니다. 비록 제자를 기르는 데는 실패해 묻힌 이름이 되었지만 그가 없이 진정한 韓國學은 없다. 西餘 閔泳珪옹. 그의 학문 여정과 못다 이룬 아쉬움을 듣는다.
먼저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5월13일 송광사에서 받은 예견하지 못했던 충격이었음을 밝힌다. 무슨 시끌벅적하고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경천동지할 사건이 벌어졌던 것은 아니지만, 현장을 지켜본 사람인 필자와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곰곰이 되씹게 만들면서 긴 여운을 남겨준 인상깊은 장면이 하나 있었다. 내남없이 부박하고 용렬해진 요즘 시절에 한 노학덕(老學德)으로부터 받은 뭉클한 감동의 실체를 스스로 풀어보고 싶다는 판단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스스로의 자문자답을 통해 반세기를 훌쩍 넘게 불교학과 기독교 신학, 그리고 조선조 양명학의 한 갈래인 강화학(江華學)을 두루 연구하면서 파천황의 문제제기와 함께 진정한 학문의 자세를 보여준 우리와 동시대의 한국학 연구자가 대중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도 실은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적지않이 무거운 주제임이 분명하지만, 요즘처럼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시대에 진정한 학문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한 학덕의 아름답고 높은 수준의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記)가 오히려 더 역설적이면서도 의미있고 생산적이지 않을까 하는 판단도 재우쳐 해본 길이다.
밝히자면 그분은 우리 시대 한국학 연구의 한 큰 이름인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87․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 학술원 회원) 선생이다. 내년으로 미수(米壽)를 맞는 학계의 큰 어른이면서도 동시대인 중 그를 기억하는 이 많지 않겠지만, 그 연세의 학자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학문적 긴장감, 그리고 그분의 학문함의 행위를 일관하는 열쇠 하나를 필자는 그날 송광사에서 정말 운 좋게 지켜볼 수 있었다. 귀띔하자면 그것은 깊은 학문적 함축과 당신의 삶을 전해 주는 ꡐ시적(詩的)운치의 기조강연ꡑ 혹은 선문답이었다.
그날 송광사 사자각에서는 문화관광부에 의해 ꡐ5월의 문화인물ꡑ로 선정된 고려 때의 보조지눌 선사를 기리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그 전날 제자인 한양대 조흥윤(문화인류학) 교수 등 제자 몇 분과 필자의 동행으로 노구를 이끌고 송광사로 내려간 서여 선생은 기조강연을 맡기로 돼 있었다. 기자 신분인 필자는 1990년대 초반에도 송광사와 해인사 등에서 서여가 간헐적으로 행한 강연을 취재한 인연이 있었고, 그러저러한 인연 속에 서여 선생을 사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ꡐ이런 좋은 공부의 기회가 따로 있겠나ꡑ싶은 마음으로 성큼 동행하기로 했다.
2001년 5월 송광사에서의 충격
서울에서는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내려갔는데 조흥윤 교수가 굳이 필자를 뒷자리 서여 옆에 앉게 한 배려 덕분에 한갓지게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우선 조심스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물어보았다.
ꡒ선생님 절에 가셔서 무슨 얘기를 하실 것인지요?ꡓ
운전석 앞자리의 조교수가 스승의 어두운 귀를 염두에 두고 두어차례 복창하자 그제서야 서여가 운을 뗐다.
ꡒ글쎄 무슨 말을 할까 고민이야. ꡐ인간의 발견ꡑ에 대해 말할까 생각중이요. 당나라 선불교는 한마디로 인간을 넘어서려 했던 ꡐ인간 초월ꡑ ꡐ인간 초탈ꡑ의 역사 아니겠어요? 그래서인지 다소간 말장난에 빠진 감이 없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 신라 불교는 달랐어요. 중국과 달리 진정한 ꡐ인간의 발견ꡑ을 말하고 있거든? 그걸 말하면 어떨까 싶은데….ꡓ
선문답 비슷한 한두마디를 던지고 서여는 내처 입을 닫았다. 무슨 말일까? 나름대로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그날 저녁 송광사에서 필자와 같은 요사채를 쓰게 된 조교수가 불쑥 말을 던졌다.
ꡒ인간의 발견이란 서양 르네상스 시대 이야기인데 조금 핀트가 안 맞는 것 아닐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ꡓ
동행 모두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 돌아와 ꡒ서여문존ꡓ(西餘文存, 우반 간행, 1994년)이라는 이름을 단 서여의 전집 두 권 ꡒ강화학(江華學) 최후의 광경ꡓ ꡒ사천강단ꡓ(四川講壇)을 다시 읽어보고 난 뒤 보다 확연해진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불교학․유학․기독교 신학을 포함해 서여 선생 당신의 학문행위의 평생 화두이기도 했다. 그렇게 믿는 근거는 많다.
우선 당신은 1970년대 전후 한우근․천관우 같은 분들의 사학계가 너무 좁게 해석한 공리적이고 실용학문 중심의 조선조 실학 연구 경향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이의제기를 하기도 했다.
도올 김용옥도 주목할 만한 최한기(崔漢綺)의 기학(氣學) 연구서인 ꡒ독기학설ꡓ(讀氣學說, 통나무, 1992)을 통해 비슷한 지적을 했던 것을 필자는 기억한다. 실학이란 조선 후기에 실체가 있었다기보다 근현대사의 현재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라는 식의 비판이었다. 이와 또 달리 서여는 양명학에 영향을 받은 조선조 후기의 신 지식사회집단은 서양 근대와 닮은 꼴의 공리주의적 멘탈리티보다 양명학의 원조인 왕양명의 말대로 동기의 순수성과 이를 통한 주자학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더 중요시했다는 식의 지적을 해왔다.
생각 끝에 서여가 양명학의 또 한 갈래인 강화학 250년의 내력에 대해 ꡐ시작과 끝을 오직 진실과 양심에 호소했을 뿐, 성패를 묻지 않은 것이 강화학의 가르침ꡑ이었다는 것, ꡐ모진 핍박과 갖은 곤궁 속에서 성취한 인간의 존엄과 인간 발견의 역사ꡑ라고 쓰셨던 대목이 기억났다. 따라서 ꡐ인간의 초탈이 아닌 인간의 발견ꡑ이란 말에 묻어 있는 뉘앙스란 그런 강화학 연구 방향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동시대의 민초들의 삶을 끌어안으려는 박애주의적 자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가늠해 봤다.
또한 ꡐ인간 발견ꡑ의 메시지란 그의 선불교 연구에서도 거듭 메아리로 확인되고 있지 아니한가? 무엇보다 그의 선불교 연구란 지금까지 상식으로 통하던 제1조 보리 달마 이후 6조 혜능의 승리를 상식으로 알아온 것을 뒤집는 작업이고, 선가(禪家)의 무수한 공안과 선문답의 번쇄함과 말장난을 지적하려는 작업이다.
흔들릴 수 없는 계보학으로 통하던 ꡐ교과서적 인식ꡑ을 뒤집어 보이는 작업의 결과로 서여는 불교에서 요구되는 진정한 수행이자 사회봉사활동인 두타행과 보살행의 실천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8년전, 그러니까 지난 1993년도에 필자가 모시고 갔던 송광사에서도 그 비슷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시 강조하려 함이겠지 하고 속으로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국내 스님들 가운데 한학(漢學)에 그중 밝다는 송광사 주지 현봉 스님은 서여와 제자 일행을 정겹게 맞았다. 현봉 스님은 서여의 중국 사천성 답사에도 동행해 오면서 오랜 인연을 맺어온 분이기도 했다. 서여는 식사시간에는 매우 흔쾌한 표정이었지만, 그날 저녁 요사채에서는 다시 무거운 표정으로 가라앉았다. 골똘히 무언가를 거듭 생각하는 표정이어서 그가 기조강연에 임하는 자세의 진지함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어쨌거나 다음날 현봉 스님은 서여를 가리켜 ꡐ불교학의 태두(泰斗)ꡑ라고 소개하면서 기조강연의 마이크를 넘겼다.
단상에 오른 서여가 말문을 열었다 싶었는데 40, 50대 연배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 흥미로웠다. 한데 서여는 불과 30여초만에 기조연설을 마치고 내처 연단을 내려서 버렸다. 순간적으로 너나 없이 모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메모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기조연설을 끝내버린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으면 이렇다.
ꡒ우리의 국화인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 저녁이면 집니다. 한번 피었다 시들거나 지지 않으면 꽃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한번 피었다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그것을 새겨보고 싶었습니다. 제 강연은 이상입니다.ꡓ
세상에 이런 선문답 아닌 선문답이 어디 있고, 강연 아닌 강연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얼핏 생각해도 무서운 주문임이 분명했다. 비록 몇 마디였지만 그 의미는 고사하고 서여의 표정이나 말에 묻어 있는 긴장감부터 보통의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훅 하고 체감으로 전해졌다. 그 넓은 사자각에 모여 있던 스님 100여명과 신도 수십명은 전혀 예견할 수 없었던 사태의 의미를 깨닫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지만, 다음 주제발표가 시작되자 서여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이내 사자각을 빠져나왔다.
어쨌든 굉장한 긴장감이요, 서여다운 행동이다 싶은 생각과 함께 얼떨떨하기는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교수와 함께 서여를 모시고 대웅전 옆의 휴게소로 들었다. 뒤이어 현봉 스님이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고 휴게소로 들어왔다. 필자가 농담을 던졌다.
ꡒ스님, 기조 강연이 너무 짧아 어디 본전이라도 뽑을 수 있었던가요?ꡓ
필자의 말을 받는 현봉 스님의 말이 걸작이었다.
ꡒ아무 문제 없습니다. 서여 선생님이 항용 하시던 말씀의 녹음 테이프가 돌아가 이류중행(異類中行)에서 피모대각(皮毛戴角)이 나오고, 두타행(頭陀行)이니 하시는 말씀, 그리고 신라의 무상 선사에서 구산선문, 고려시대 일연 스님, 조선시대 설잠(雪岑) 김시습 얘기를 되풀이 하실 줄 알았더니만…짧으니 좋습디다.ꡓ
현봉 스님 역시 고수임이 분명했다. 나중에 그날 학술대회에 참석했던 분으로부터 말을 들으니 현봉 스님은 학술대회의 마지막 멘트를 ꡒ서여 선생님이 제기한 무궁화 론(論)을 오늘 학술대회의 화두로 삼자ꡓ며 모양새있게 마무리했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서여와 필담을 나누면서 다시 물었다.
ꡒ선생님 기조강연을 스님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까요?ꡓ
왠지 필자는 미심쩍었기 때문이었다. 쪽지를 본 서여는 망설임 없이 흔쾌하게 말했다.
ꡒ아 물론이지요. 알아들었을 것입니다.ꡓ
글쎄다. 따라서 이 글은 문자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필자가 결국 문자를 통해 그날 서여가 던진 화두를 풀어보는 작업이겠고, 속으로 서여의 학문함에 대해 품어온 의문과 알음알이를 정리해 보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이를 통해 앞에서 던졌던 바람, 즉 인문학의 죽음이 거론되는 와중의 빈사의 한국학에 서여의 삶과 학문이 갖는 풍부한 함축까지 음미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첫댓글 무엇보다.. 일몰이 보고 싶다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