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올 여름 할리우드 블럭버스터 전쟁 속에서도 생존가능한 한국 영화가 기적처럼 출현한 것이 기쁘다. 올 상반기 한국 영화 좌석 점유율 47%의 경이적인 스코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라이터를 켜라]는, 확실하게 한국 영화 흥행 대박의 필수 장르인 코미디를 걸고 넘어지고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신라의 달밤]의 박정우 작가는 대중들의 감성 코드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300원짜리 플라스틱 일회용 라이터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탄생이 불가능했다. 백수인 봉구 봉구 허봉구는 왜 일회용 라이터에 목숨을 걸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초라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엘리어트식으로 말한다면 플라스틱 라이터는 허봉구 인생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허봉구가 집요하게 라이터를 추적해가는 것의 당위성을 설정하지 못했다면, 이 영화는 어떤 코미디 어떤 액션이 등장했어도 허무했을 것이다. 따라서 박정우 작가는 도입 부분부터 허봉구의 캐릭터를 살리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왜 그가 라이터 하나 때문에 목숨 걸다시피 인생을 내던지는가가 설득력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불쌍한 허봉구는 백수 생활 벌써 몇년 째, 용돈이 없다. 담배는 늘 얻어 핀다. 예비군 훈련은 가야 하는데 차비도 없고 점심값도 없다. 잠든 아버지 머리맡을 살금살금 걸어가서 지갑을 몰래 꺼내는 허봉구. 단돈 1만원 지폐 하나를 훔쳐 나오다 들켜버린 그가 너무나 불쌍하다. 지갑 속의 만언권 지폐 여러장을 놔두고 딱 한 장만 가지고 나오는 행동만 봐도 그의 품성을 알 수 있다. 그는 착한 남자다. 욕심없는 남자다.
작가는 이렇게 초장부터 허봉구의 불쌍한 인생을 리얼하게 묘사해 들어간다. 사건이 벌어지기도 전에 관객들이 우리의 주인공 허봉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허봉구가 예비군 훈련장에서 담배를 얻어피워도, 라면 사발을 들고 가다 재수없게 건달 출신 양철곤(차승원 분)과 부딪쳐 그걸 쏟아버려도, 그래서 마지막 남은 300원을 탈탈 털어 라이터 한 개를 사도 관객들은 그저 허봉구가 애처롭기만 한 것이다. 구멍가게에 들어간 허봉구는 주인에게 묻는다. 컵라면 얼마예요? 천원. 곰보빵은요? 육백원. ...는요? 오백원. 결국 그는 라이터 하나 주세요, 라며 언간생심 자신의 처지에 맞지도 않는 호화 물건의 가격을 물어봤다는듯이 체념한다.
예비군 훈련가서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맥주잔을 부딪치는 허봉구(김승우 분)의 모습에서 시작해서 비슷한 모습으로 끝나는 수미쌍관식 구성 아래, 서울발 부산행 새마을호 열차에서 라이터 하나 때문에 벌어지는 코미디를 시치미 딱 떼고 작가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서 라이터는 삶의 발화점이다. 탁 탁 몇 번 불꽃이 튀기다가 어느 순간 확하고 일어나는 저 라이터의 불꽃들처럼, 허봉구의 인생도 라이터만 켜면 언젠가는 저렇게 일어설 수 있을지 모른다.
백수와 건달이라는,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은 두 부류의 대표주자로 선택된 허봉구와 양철곤은, 현실에서 아무 관련이 없다. 아니, 있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산다. 그들이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폼잡는 건달인 양철곤 역시 실생활은 허봉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박정우 작가는 보여 준다. 양철곤은 호화 룸싸롱에서 수백만원대의 술을 거침없이 마시고 고급 승용차를 굴리는 조폭이 아니다. 데리고 다니는 아그들 밥도 제대로 못사주는 백수 무일푼이다. 백수나 건달이나 이 사회의 주류에 진입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이다. 무위도식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물론 차이점은 있다.
백수 허봉구는 카드를 돌려가며 빚을 막고 있지만, 건달 양철곤은 국회의원(박영규 분) 선거 때 한 몫 거든 후 돈을 받으려다 외면당한다. [라이터를 켜라]의 외면적 사건은 양철곤이 일으키는 것이다. 새마을호에 탑승한 국회의원을 협박해서 돈을 받아내려고 한다. 이 힘의 대립축에 백수 허봉구가 끼어 든다. 그는 넘어지고 깨지면서도 집요하게 양철곤을 향해 집중한다.
기차라는 폐쇄공간은 영화에 수직적 긴장감을 부여한다. 가령 [폭주기관차]나 [언더 씨즈2]를 생각해 보라. [라이터를 켜라]가 가장 불안할 때는 기차 장면이 나올 때이고 가장 자신감 있을 때는 예비군복을 입고 툭툭 대사를 던지는 김승우를 잡을 때이다. 아직 우리 영화가 할리우드의 이런 폼나는 물량공세를 따라가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 빈 부분을 코미디로 메꾸는 것이다. 건달들에게 접수된 달리는 기차를 둘러 싸고 벌어지는 관계기관 대책회의도 너무나 코미디같다. 왜 영화 속의 경찰들은 모두 장발인거야. 도대체 현실감이 없다. 어느 경찰이 머리 긴 사람이 있던가. 특히 모자 아래 부분은 머리카락 없이 깔끔한데 감독은 조연 단역들을 너무 안일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배우들의 화려한 개인기에 눌려 감독 이름 석자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우리는 장항준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자. 그는 썩 괜찮은 코미디를 만들 능력을 갖추고 있다. 데뷔작만 놓고 보면 절대 [돈을 갖고 튀어라]의 김상진에 뒤지지 않는다. 더구나 [박봉곤 가출사건][북경반점]의 걸출한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다.
김승우는 [예스터데이]를 보고 나서 정말 진지하게, 이제 그만 연기를 접으라고 충고하고 싶었었는데, [라이터를 켜라]를 보니까 기사회생하고 있다. 감성이 본능적으로 잘 발달된 배우는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는 집요하게 플라스틱 일회용 라이터를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살아나고 있다. 이것을 잃지 않는다면 배우 수명이 몇년 더 연장되리라고 본다.
차승원은 [신라의 달밤] 이후 망가진 캐릭터로 확실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역시 포장된 이미지보다는 이렇게 생동감 있는 살아있는 캐릭터가 가슴에 와 닿는다. 특히 콧수염과 염소 턱수염은 양철곤의 소심하면서도 가정적인 캐럭터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