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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사단 청성 전우회 휴계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주(84.07.11~86.10.16)
5. 북한군 작전기도 : 제4사단이 영산, 밀양을 점령하여 대구-부산간 병참선 차단
6. 아군 방어계획 : 산제리에서 지연전 실시하면서 철수하여 52km의 광정면 방어
7. 작전경과(상황도 보기)
【보충1】洛東江 突出部 攻防(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1995년)
1. 북한군 제8월공세(소위 '낙동강돌출부작전)
낙동강방어선의 형성시 대구 서측방 현풍에서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점 남지에 이르는 하천거리 60km, 직선거리 37km 방어정면은 미 제24사단이 담당하였다. 이 일대의 지형은 낙동강이 하폭 300~400m, 수심 2~4m로 S자 모양으로 흐르고 있어 여러 곳에 돌출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창녕과 영산 부근에는 서측으로 보다 크게 반월형으로 돌출 되어 있어 전사에서 이곳을 낙동강돌출부라 칭하고 있다. 합천-진주 서측에서 이곳으로 이르는 도로는 남지교를 제외하고는 교량이 없어 연결되지는 않으나 도섭장과 도선장은 여러 곳에 있었다. 그 중에서 부곡-창녕, 박진-영산에 이르는 도로는 창녕, 영산을 지나 대구-부산 축선의 밀양으로 진출하기에 대단히 양호한 접근로가 될 수 있었다.
사단은 8월 2일~3일에 산제리 부근에서 지연전을 마감하고 낙동강을 도하하여 제34연대가 영산, 제21연대가 창녕으로, 배속된 국군 제17연대가 현풍지구로 이동하여 강변고지를 중심으로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단의 전투력은 40%에 불과한데다 광정면을 담당하여 부대간격이 4~5km나 되었고, 따라서 하천 및 도로의 정찰이 강조되었다.
처치 장군은 적 병력이 합천 일대에 집결해 있는 점이나 또 지형상 영산 쪽보다 창녕이 도섭가능지점이 많고 공격에 유리하다고 보아 적의 주공은 창녕정면으로 지향될 것이라 판단하고 이 일대로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사단수색중대와 마산에서 3일 복귀한 제19연대를 창녕에 집결시켜 예비대로 삼았다.
사단장은 주민과 피난민에 의해 작전에 지장을 받는 경우가 빈번하였기 때문에 지역 내의 주민들을 소개하였으며 피난민의 도하도 엄격히 제한하였다. 정면의 적 제4사단은 군단으로부터 돌출지역을 돌파하여 신속히 대구 후방을 차단하면서 경부간 도로를 따라 부산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합천 일대에 집결하여 도하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8월 5일 자정 무렵 적 제4사단이 탐색을 마치고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사단장의 판단과는 달리 적 제16연대는 주력이 영산 정면 오항나루터로, 일부가 그 북쪽 부곡 일대로 적색 및 녹색 신호탄과 함께 기습적인 도하를 개시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옷을 벗어 장비와 함께 머리에 이고 어깨까지 미치는 강물을 건넜으며 일부는 뗏목을 만들어 피복과 장비를 운반하기도 하였다. 부곡 일대로 도하한 적은 제21연대의 기관총 및 야포사격을 받아 격퇴되었으나, 오항으로 도하한 적은 제34연대 제3대대 방어중대의 간격을 따라 침투하여 박격포진지를 유린한 다음 후방침투를 기도함으로써 제3대대 본부가 위협을 받아 철수하였고 오봉리의 포대도 적에 노출되었다.
이에 연대장의 역습명령에 따라 다음날 연대예비 제1대대가 즉시 클로버고지에 침투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대대 지휘부와 먼저 공격에 나선 C중대가 기습을 당하는 등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으며, 일부 병력은 도로를 따라 계속 전진하여 강변진지로 진출하였다.
사단장은 이날 오전 적의 주공방향이 영산 정면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사단예비 제19연대로 하여금 오항 일대로 공격하게 하고 정오경에는 사단수색대로 하여금 부곡-창녕간 도로를 차단하고 I중대와 함께 부곡리의 적을 격퇴하도록 명령하였다. 제19연대(B중대)는 오항 동쪽으로 진출하여 적 300여 명을 포위격멸하면서 적을 저지하였으며, 제34연대 제1대대도 역습을 계속하여 클로버고지의 일부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사단수색대는 부곡리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물러나고 말았다. 적의 후속부대가 박진, 오항, 부곡리로 계속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야포와 항공기의 집중사격에 의해 저지되었다. 적은 오항과 부곡리일대에 여전히 공격거점을 확보하면서 야간에 후속도하로 2개 대대의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8월 7일 아침 제19연대와 제34연대 B중대가 계속적인 역습을 실시하였으나, 혹심한 더위에 식량과 식수마저 부족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유엔 공군기의 오인사격을 받아 실패하고 말았다. 적은 오히려 클로버고지를 점령한 후 오봉리 능선으로 진출하였다. 이 고지 일대는 영산 주보급로를 감제함은 물론 밀양까지도 관측이 가능하였으므로 쌍방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편, 이날 미명 적의 일부가 현풍 정면으로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국군 제17연대의 도하저지사격으로 격퇴되었다. 이날 국군 제17연대가 국군의 재편성계획에 따라 대구로 이동함에 따라 미 제24사단장은 하이저(Hyzer)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진지를 인수하게 하였다. 한편, 이 지역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이날 밤 제8군 예비 제2사단 제9연대 제1대대가 워커 장군의 명령에 따라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어 6일 밤 창에 도착한 데 이어 제9연대(-)가 8일에 도착하였다.
처치 장군은 즉각 제9연대장 힐(John G, Hill) 대령에게 돌출부의 적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제9연대는 사단의 지원포격하에 16:00 제1대대가 클로버, 제2대대가 오봉리 능선을 목표로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연대는 밤새의 행군으로 피로해 있었으며 적정이나 지형에 익숙하지 않고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서둘러 투입되었기 때문에 많은 손실을 입고 실패하였다. 한편, 이날 밤 강변 중앙진지를 맡고 있던 제34연대 A, L 양개 중대가 적의 공격을 견제하며 철수하였다.
10일에 사단은 제9연대와 제19연대 제2대대로 공격을 재개하여 적과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제19연대 제2대대가 오항 일대의 고지를 한때 탈환하고, 제9연대는 클로버의 일부 고지를 탈환하였으나 다시 적에게 통제권을 상실하였으며, 이 전투의 결과 제19연대의 소총중대는 병력이 100명 이하로 격감되었다.
사단장은 공격부대의 진출이 진전을 보지 못하자 10일 저녁 제9연대장에 돌출부작전의 지휘권을 부여하는 한편, 제9연대, 제34연대, 제19연대, 제21연대 제1대대 및 기타 배속부대 등으로 힐(Hill)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돌출부지역내의 적을 격퇴하도록 명령하였다. 한편 적 제4사단은 그 동안 야간을 이용하여 오항, 박진나루터 일대에 수중교 가설작업을 완료하고 다음날 새벽까지 대규모의 병력과 함께 전차와 박격포 및 야포를 도하시켰다.
힐부대는 11일 아침 공격개시선에 대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적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포병지원사격까지 동반한 예기치 못한 이 공격으로 제21연대 제1대대가 집결지에서 와해되는 등 힐특수임무부대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힐부대의 공격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사단장은 즉시 계획을 변경하여 진지확보를 명령하였다.
이 무렵 적은 주력으로 고지정면을 압박하면서 제18연대를 좌측방으로 우회시켜 영산으로 후방침투를 기도하고 있었다. 이날 남지교가 피탈되고 영산이 적의 포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사단수색대가 영산 남쪽으로 우회한 적과 조우하였다. 처치 장군은 즉시 제14공병대대를 영산으로 투입하였으며, 워커장군은 즉시 예비로 있던 제27연대 제2대대를 남지교로 투입하였다.
제27연대 제2대대는 피난민 대열 속에 잠복한 게릴라의 습격으로 인해 오후 늦게서야 남지교에 도착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이 무렵 정면의 적과 공방전을 수행하던 힐부대는 고전하고 있었으며, 또 영산 동쪽의 주보급로가 적에게 차단되어 보급차량이 기습을 받았다.
힐 대령은 다음날 12일 아침 즉시 제9연대 1개중대와 박격포소대를 투입하여 적의 차단부대를 격퇴하도록 하였으나 오히려 역습을 받아 실패하였다. 한편 밀양의 사단본부에서는 본부중대장이 전차 2대, 행정병, 취사병, 헌병 등 135명을 지휘하여 영산-밀양간 심곡리에 진지를 구축하여 침투한 적을 격퇴하는 한편, 전투부대에 필요한 식수, 식량, 탄약 등을 장갑차로 추진해 주었다.
워커 장군은 영산 남쪽과 동쪽 일대의 적이 약 2개 대대 병력이라 판단하고 예비인 제27연대 주력을 투입하여 소탕하도록 하였다. 이날은 각 전선이 악화되어 어느 지역에서나 예비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돌출부지역이 가장 위기를 맞고 있었다.
연대 주력이 도착하기 전날 제2대대가 먼저 항공기의 지원하에 영산 동쪽의 적의 차단부대를 공격하였고, 다음날 연대 주력이 합류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제27연대는 영산에 집결한 제14공병대대와 또 증원된 제2사단 제23연대 제1대대와 함께 영산 주변의 적을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였다.
처치 장군은 영산 일대의 위기가 해소되자 14일 아침 다시 힐부대에 총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힐부대는 일기불순으로 최초 계획된 전투기 100여 대 지원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강행하였다. 힐부대의 주공인 제9연대가 클로버고지 일부에 도달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다음날까지 수차례 뺏고 빼앗기는 백병전을 거듭하였다. 이 전투에서 각 중대의 대부분의 장교가 전사 또는 부상당하였으며, 오봉리 남쪽의 제21연대 제1대대는 적에게 포위되어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철수하였다
힐부대는 근접전에서 너무 많은 손실을 입어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34연대 제1대대 콜린스(Roy E. Collins) 중사의 소대 35명은 오봉리능선상에서 수류탄전을 전개하여 25명의 손실을 입으면서도 고지로 돌입하는 용감성을 보였으며, 또 적의 역습을 받아 철수할 때 흑인병사 클리본(Edward 0. Cleaborn) 일등병은 최후 순간까지 엄호사격을 가하는 감투정신을 발휘하였다.
8월 15일에 처치 장군과 힐 대령은 당분간 전투력이 회복될 때까지 공격을 중단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워커 장군이 즉시 밀양으로 달려와 계속 반격을 실시할 것을 강조하면서 강력한 예비대인 해병여단을 제24사단에 배속시키기로 하는 어려운 결정을 하였다. 당시는 아군전선의 도처에서 위기가 조성되어 각부대가 예비대를 필요로 하고 있을 때였다. 이날 "해병여단은 8월 17일 일책공격을 개시하여 돌출부 내의 적을 낙동강 서안으로 구축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마산에서 밀양-영산으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반격이 계획된 전날인 16일 힐부대는 다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 제9연대가 클로버고지에서 많은 손실을 입고 철수하였으며, 제19연대와 제34연대도 격전 끝에 오항고지를 잃었다. 또 이때 사단 우일선 현풍 정면에는 전날부터 새로이 적 제10사단 제29연대의 2개대대가 도하하여 강변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위기가 고조되었다. 워커는 적 제10사단의 향방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이들은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있었다.
처치 장군의 반격계획은 제1해병여단이 좌에서 오봉리 능선 정면으로, 제9연대가 중앙에서 클로버고지로, 제34연대와 제19연대는 우에서 클로버 우익과 오항고지를 공격하되 제9연대는 목표점령 후 적을 축출하도록 하였으며, 공격개시시간은 함재기의 지원이 가능한 8월 17일 08:00로 결정하였다. 이 계획의 핵심은 해병연대와 제9연대의 협조된 공격으로 오봉리 능선과 클로버고지를 우선 확보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해병연대장은 해병이 먼저 공격을 하여 오봉리 능선을 점령한 후, 이를 공격개시선으로 하여 본 작전을 전개하자고 주장하였다. 처치 장군은 제5해병연대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계획을 변경하여 먼저 해병대로 공격하게 하였다.
07:35 49문의 야포가 공격준비사격을 개시하였고 해병대 함재기 코르세어(Corsair) 전폭기 18대가 오봉리 일대를 강타하였다. 곧 이어 해병 제2대대가 전진하여 5부능선에 진입하면서 클로버고지 남단 두곡부락과 오봉리부락으로부터 적의 사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전진부대 중 신카(Michael J. Shinka) 소대의 20명만이 고지정상에 진입하였으며, 이들도 고지 측방과 후사면의 적으로부터 기관총 및 수류탄 공격을 받아 철수하였다. 코르세어 전투기의 폭격 후 해병대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신카 소위는 소대원 9명과 더불어 재차 점령하였으나 역시 적의 공격으로 정상을 확보하지 못하고 후사면으로 내려갔다. 이때 소대장은 부상자를 구출하기 위해 고지정상으로 또 기어올라가다가 적탄에 얼굴과 팔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해병 제2대대는 7시간의 전투에서 병력 60% 손실을 입었다. 해병연대장은 제1대대로 부대를 교대하여 재공격 준비를 시켰다.
이 전투 후 처치 장군은 최초 계획대로 전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오봉리와 클로버고지에 공격준비사격이 집중되었으며, 후사면 참호의 적을 살상하기 위해 일정한 지상 높이에서 폭발하는 VT신관이 사용되었다. 16:00 공격이 개시되어 제9연대가 클로버고지를 포병화력의 효과로 무난히 점령하였고, 해병연대는 제9연대의 측방 지원사격하에 우측방으로 적진을 공격하여 차례로 오봉리 능선상의 고지를 탈환하였다. 이 무렵 한국인 노무자들이 오봉리 능선에 보급품을 추진하고 사상자들을 후송하는 등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적 제4사단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전차 4대를 투입하여 오봉리와 클로버고지 사이의 도로를 따라 전진하였다. 오봉리 북단의 해병대는 즉시 항공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M26 퍼싱전차를 전방진지로 추진하고 75mm 무반동총과 3.5"로켓포를 도로가와 애로지점에 배치하였다. 전투기 3대가 즉시 출격하여 적 전차에 기총소사를 하였으나 그 효과는 어둠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적전차에 대한 공격은 3.5"로켓포, 75mm 무반동총, 퍼싱전차순으로 시작되었으며, 3대는 이들에 의해 파괴되고 네 번째 전차는 항공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날 황혼 무렵 제19연대도 항공기와 포병의 지원하에 공격하여 오항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이날 전투에서 제19연대와 제34연대가 다 같이 많은 손실을 입었다. 결국 제24사단과 해병대는 다음날까지 전 지역에서 소탕전을 전개하고 낙동강에서 합류하였다.
이 무렵 적은 완전히 궤멸되어 패잔병들이 포격과 폭격을 받으며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낙동강을 건너 철수하고 있었다. 결국 적 제4사단은 돌출부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끝내 인원과 장비를 회복하지 못하고 다시는 낙동강전투에 참전할 수 없게 되었다. 제1해병여단은 19일 작전이 종료되자 창원으로 이동하여 군예비가 되었다.
2. 북한군 9월공세간 昌寧∼靈山의 固守
낙동강 돌출부 창녕-영산에서는 미 제2사단이 인민군 제1군단 예하의 제2공격집단과 결전을 벌였다. 미 제2사단은 8월 하순 제24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의 부곡리에서 남지까지, 제23연대를 창녕 정면, 그리고 제38연대를 현풍정면의 강안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진지편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반면 적 제1군단 예하 제2공격집단은 제9사단(-)이 8월 말경부터 제9연대 영산 정면에, 김천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적 제2사단이 창녕정면에, 적 제10사단이 현풍 정면 낙동강 대안에 집결하였으며, 이들은 8월 31일 22:00를 공격 개시 시간으로 정하여 최후공세를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미 제2사단장은 제8군으로부터 정찰명령을 받고 31일 제9연대장에게 즉시 증강된 중대규모의 전투정찰대를 편성하여 적정을 파악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만주특수임무부대로 명명된 정찰대가 일몰 후 도하준비를 갖추고 있던 중 적의 대규모 기습공격을 받았다. 대안에 집결하고 있던 적 3개 사단이 영산·창병 ·현풍 정면으로 일제히 기습도하공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영산 정면의 제9연대는 적 제9사단의 기습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많은 손실을 입은 채 강안진지가 돌파되었으며, 특히 정찰대의 일부로서 박진도선장에 배치된 중화기소대는 거의 저항도 못한 채 생포되고 좌일선 진지도 기항 일대에서 도하한 적의 공격을 받아 유린되고 말았다. C중대의 철수과정에서 화기분대장 스토리(Story)상등병은 부상을 입고도 마지막까지 남아 엄호사격을 가하는 용맹을 보여 주었다.
상황을 보고 받은 사단장은 정찰계획을 취소하고, 제9연대장이 정찰대로 편성한 E중대를 즉시 클로버고지와 오봉리 능선을 봉쇄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고지일대의 주요거점은 적에게 장악된 뒤였다.
한편, 창녕 정면에 배치된 제23연대도 거의 같은 시간에 적 제2사단으로 부터 공격을 받았다. 방어진지는 순식간에 돌파되어 많은 병력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퇴로마저 차단되어 철수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사단장은 즉시 제38연대 제3대대를 포병과 전차, 항공기의 근접지원 아래 창녕에서 모산리로 투입하였다.
현풍 정면에서도 적 제10사단이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제38연대 제1대대는 현풍 일대로 물러나면서 적을 저지하다가 다음날 야간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이 무렵 제8군은 제10사단의 향방에 관해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다행히 적은 현풍 부근에서 소규모 정찰전만을 수행하였을 뿐 15일까지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있었다. 적의 작전문서나 포로심문에 의하면 적 제10사단은 적 제2군단이 대구를 점령할 때까지 현풍 일대에 집결해 있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다.
9월 1일 아침 무렵까지 미 제2사단은 거의 전 지역이 적에 의해 돌파되었으며, 사단장은 방어지역이 창녕과 영산으로 양분되자 지휘통제상 창녕과 현풍일대의 부대는 사단포병사령관 하인즈(Loyal M. Haynes) 준장이, 영산 정면은 부사단장 브래들리 준장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워커 장군도 직접 제2사단 전선에 나와 작전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예비대의 투입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그 동안 영산 정면에서는 만주특수임무부대가 고립된 상황에서 공중보급을 받아가며 3일까지 적을 저지하고 있었으며 수차례의 근접전에서 부대장 슈미트(Edward Sohmitt)중위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병력이 희생되어 22명만이 철수하였다.
당시 사단장은 제9연대의 예비가 없는 점을 감안하여 영산에 보병 1개 중대, 공병대대, 제72전차대대, 수색중대를 배치시켜 두고 있었다. 영산 북쪽도로에 배치된 공병대대는 적의 공격을 받았으며, 동시에 영산 남쪽도로에 배치된 전차대대와 수색중대도 적과 교전하고 있었다. 적은 전차 4대와 1개 대대를 선두로 영산을 장악하였으나 외곽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다음날 제9연대장은 영산 동쪽 지휘소에서 철수부대로 재편성한 800여 명의 병력과 전차를 이끌고 영산을 공격하여 오후 무렵 탈환하였다. 전폭기 편대가 적의 증원을 차단하였으며, 공병대대가 영산 서방에서 적 전차 3대를 격파하면서 공격을 함께 하였다. 이로써 잠시나마 밀양으로의 적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돌출부의 위기는 여전히 심각하였다.
이에 앞서 9월 2일 13:15 워커 장군은 극동군사령부의 승인을 받아 미 제1해병임시여단을 제2사단에 배속시켜 제2사단과 협조된 공격으로 반드시 낙동강선을 확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9월 3일 08:00 해병대가 중앙에서 영산 서쪽으로 공격하며, 해병대 북쪽에서는 제9연대(제72전차대 1개중대와 고사포대대 1개포대 배속)가 북서방으로 진출하여 제23연대와 연결하고, 남쪽에서는 제9연대 1대대 잔존병력·공병대대·제72전차대대(-)가 공격하여 제25사단과 연결하기로 공격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와 아울러 제8군은 또 하나의 예비 미 제24사단 사령부와 제19연대를 마산 남쪽 수산리로 이동시켜 투입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해병대는 공군기 편대와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으면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도로 남쪽의 제1대대는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였고, 도로변의 제2대대는 적과 치열한 교전을 하여 적 전차 4대를 파괴하였으며 제3대대가 제2대대를 초월하여 타격을 계속 유지하였다. 한편, 제9연대도 영산 남서쪽으로 해병대와 협조된 공격을 수행하였다. 4일 아침 무렵 해병 제2대대는 영산 서측 116고지를 장악하였고, 제1대대는 적 제9사단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지역을 탈환하였으며 그곳에 유기된 전차 2대를 노획하였다
한편, 창녕 정면에서는 강진나루-창녕 접근로를 방어하고 있던 제23연대 제1대대의 퇴로가 차단되었는데, 대대장은 고립방어로써 적의 진출을 차단하겠다는 각오로 3일간이나 적과 대치하였고, 다른 한편 사단에서는 제38연대의 1개 대대를 투입하여 이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펴고 있었다. 결국 연결작전에 성공한 다음 하인즈 장군은 이 도로를 제38연대가 방어하도록 하고 제23연대는 부곡-창녕도로 축선만으로 방어책임지역을 조정하여 창녕정면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이 무렵 제38연대도 약 1개 대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연대본부가 공격을 받자, 연대본부 요원·박격포중대·전차중대·방공포대 등 지휘소 주위의 병력으로 이들을 구축하기 위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영산 정면에서는 역습을 개시한 지 3일째인 5일 폭우에도 불구하고 전진을 계속하여 해병대가 오봉리 능선을 점령하였으며, 곧 이어 제9연대가 클로버고지까지 전진하였다. 전방고지에는 적이 집결해 있었다. 오후 무렵에는 두곡 일대에서 전차를 앞세운 적 300여 명의 공격을 받았으나 적 전차 4대를 파괴하면서 격퇴하였다. 작전이 거의 마무리되자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에 가담하기 위해 워커 장군의 명령에 의해 9월 5일 00:01부로 제2사단에서 배속해제됨과 동시에 오봉리에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9월 5일부터 대체로 적의 공격은 중단되었으나, 창녕 정면의 적 제2사단이 8일 미명 마지막 공격을 재개, 미 제23연대를 돌파하고 본초리까지 진출하여 창녕을 약 5km 남겨 두고 있었다. 연대는 본부중대 및 특수지원 병과부대까지 임시 예비대에 편성하여 여기에 투입하고 항공기의 지원폭격을 받아 적을 저지하였다. 교전은 다음날까지 지속되었으나 9일 낮부터 적의 공격이 중지되었다. 이후에도 적 제2사단은 중대규모의 부대를 후방 창녕까지 침투시켜 교란작전을 전개하였으며, 미 제2사단도 매일같이 정찰을 강화하였다.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적 제2사단 제17연대 군의관의 진술에 의하면 적 제2사단은 그 동안 전사 1,300여 명, 부상 2,500여 명의 손실을 당하여 공격력을 상실하였으며, 반면 미 제2사단도 제1해병임시여단을 포함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가장 손실이 큰 미 제23연대의 전투력은 38%로 감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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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사단 청성 전우회 휴계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주(84.07.11~8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