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낙서하다 / 유 병 근
1
도시 가운데서 도랑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대연동에 위치한 유엔묘지를 끼고 있는 평화공원에서 도란도란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은 흘러가는 시간이다. 흐르는 물을 따라 시간이 가고 시간이 오고 있다. 평화공원의 시간은 도란도란 귀엣말 같은 소리를 한다. 그 소리의 안쪽을 찾아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저쪽 유엔묘지에 잠든 이국병사들의 침묵의 소리도 들릴 것 같다.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자유를 위하여 젊은 나이에 생명을 바친 영령들이다. 물소리는 그들이 나직하게 입에 올리는 향수에 젖은 가락 같기도 하다.
주말을 즐기려는 시민들이 모이는 평화공원이다. 세계평화를 위해 전투에 참가한 이국병사들의 영혼도 늦은 가을 햇볕을 찾아 물소리처럼 도란도란 모여드는 것 같다. 산 자만의 공원은 아니다. 공원을 질러가는 물소리는 영혼과 함께 이야기하는 영혼의 소리다.
2
물줄기를 따라가는 마음은 어느새 어릴 적 고향마을에 가 있다. 종이배를 띄우던 때가 도랑물 속에 잠잠하게 떠오른다. 여름엔 얕은 물속에서 멱을 감았다. 작은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하게 되자 도랑물은 놀이만의 물은 아니었다. 벼논으로 들어가서 나락을 살찌게 하는 농업용수였다. 물도 나이를 먹고 큰다는 생각을 그때 한 것 같다. 갈증은 사람만의 몫이 아닌 모든 동식물이 겪는 증세다. 그것을 치유하는 물은 절실한 보약이다.
도시 가운데로 흐르는 도랑물은 도시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는 보약이다.
3
지난여름 시들시들 며칠 몸살을 앓았다. 그 전날은 상쾌한 몸으로 산을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 차디찬 얼음물을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켰다. 땀이 흐르는 몸에 갑작스런 얼음찜질을 한 셈이다.
욕탕에는 냉탕과 열탕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냉온욕은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며 한번은 냉탕에 한번은 열탕에 들앉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짓도 하지 않는다. 냉탕에 들앉고 열탕에 들앉는 움직임이 굼뜨게 되자 혈액순환도 덩달아 굼뜰 것이다. 굼뜬 혈액순환에 폐달을 밟아 굳이 가속도를 내어 무리할 일은 아니지 싶다.
등산에서 돌아와 얼음물을 몇 컵이나 한꺼번에 들이킨 것이 냉탕에 들앉은 갑작스런 속도변화를 저지른 셈이다. 몸이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그 짓이 몸살을 앓게 된 이유였다. 한 포기 풀이 시들시들 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이유에 대해서 보다 더 곰곰이 생각하기로 한다.
4
물을 다스릴 줄 아는 자가 세상을 다스린다고 했다. 물의 길은 강이다. 함으로 강을 다스려야 물이 살고 세상이 산다.
서울의 청계천이 살아나고 부산의 동천(東川)이 푸르게 살아났다. 동천은 코를 찌르는 악취로 똥천이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그 강이 살아나서 이제는 고기떼가 노는 강이 되어 동천(東天)으로 간다. 이 완벽한 상전벽해(桑田碧海), 어느 날은 낚싯대가 꽂혀 있었다.
세상을 푸르게 하는 힘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강에 있다.
5
물속에 내가 있고 물속에 구름이 있다. 나는 구름에게로 가서 구름이 된다. 물속에 내가 있고 물속에 산이 있다. 나는 산으로 가서 산이 된다. 산새가 우는 물속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