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당선작 '나비' (1)
엄마 머릿속엔 나비가 자란다
알을 깐 기생충 죽은 자리에…
'나비' - 한순영.
우리 엄마 머릿속에는 나비가 산다. 작고 검은 나비다.
나비는 내가 엄마 뱃속에 들어오기 전부터 살고 있었다.
그 나비는 지금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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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하루 종일 꽃 그림을 그린다.
사회 시간에도 국어 시간에도, 다른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에 가고
숙제를 하는 동안에도.
엄마 머리 속의 나비를 불러 낼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엄마를 내 곁에 붙들어 둘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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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온 지 한 달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방 한쪽에는
이삿짐을 담은 상자가 그대로 쌓여 있다.
이곳저곳으로 집을 옮기는 엄마와 나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이삿짐을 풀지 않는다.
어느 때에는 상자 속의 물건들이 다시 이사 간 집에서야 정리되기도 한다.
맨 아래쪽에 있는 상자는 몇 번의 이사 끝에 뭉개지고 너덜너덜해져 있다.
아빠의 물건이 들어 있는 상자다. 하나뿐인 방이 좁고 불편해도
엄마는 오래 전에 죽은 아빠의 옷상자를 버리지 못한다.
그 상자 속에는 엄마의 머리 속을 찍은 엑스레이 필름도 들어 있다.
검은 나비가 찍힌 필름. 나는 가끔
엄마 몰래 상자 속의 필름을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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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이사 올 때는 짐이 하나 더 늘었다.
엄마는 그 짐을 버리고 갈까, 잠깐 고민을 하기도 했다.
바로 외할머니다. 외할머니는 두 달 전쯤 우리 집에 왔다.
외삼촌이 업고 온 할머니를 짐 부리듯 내려놓았을 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삼촌 손에 들린 할머니의 보따리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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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모양 요 꼴로 살라고 에미 버리고 동생 놔두고 도망쳤냐,
이년아. 이 독사 같은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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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 년 만에 만난 딸에게 외할머니가 처음 한 말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외할머니는 오지 않았고
내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사 같은 년.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는 갑자기 왼발을 싸쥐며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엄마의 왼쪽 발등이
다시 시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 나이 아홉 살이었을 때 외할머니가 엄마의 발등을
돌로 찍으며 말했다고 한다.
독사 같은 년.
포플러나무의 시커먼 그림자 아래로 덤불이 무섭게 뻗어나가던 여름 저녁,
신작로에서였다. 외할머니는 도둑질하다 들켜서
밤도망을 놓는 중이라고 했다.
외할머니를 따라가겠다며 외삼촌은 그악스럽게 울어댔고,
그 곁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서 있는 엄마가 미워서였을까.
외할머니가 엄마의 발등을 내려찍었다.
그 뒤로도 외할머니의 도둑질은 끊이지 않았고 매번 동네가 잠잠해질 때까지
외삼촌만 데리고 도망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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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왜 그랬을까. 늬 외할머니와 삼촌이 신작로 너머로 사라진 뒤에야
눈물이 나더라. 발등이 아파서인지,
술 취한 외할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혼자 돌아갈 일이 무서워서 그랬는지.
나도 데려가, 나도 데려가 하는 말은 입 안에서만 맴을 돌고.
한 번은 늬 외할머니가 동네 어른들 손에 끌려 조리돌림을 당한 적이 있었어.
그 날도 외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늬 외삼촌이랑 나는 탱자나무 울타리 뒤에서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
탱자나무 가시에 온 몸을 찔린 것처럼 며칠을 앓았으니까.
그래도 늬 외할머니가 나만 신작로에 두고 갔을 때처럼 무섭지는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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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잔뜩 취한 엄마는 다 큰 딸에게 하는 것처럼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엄마의 나쁜 꿈에는 늘 포플러의 시커먼 그림자와
희부윰한 신작로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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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저 늙은이 얼른 데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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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 할머니의 보따리만 바라보고 있던 엄마가 삼촌에게 말했다.
하지만 삼촌의 대답보다 먼저 나온 것은 할머니의 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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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쳐 쥑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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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성한 한쪽 손이 어느새 엄마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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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그렇게 왔다.
당뇨병 때문에 몸은 누렇게 떠있었고 참빗이며 비녀며
남의 집 헛간에 걸어둔 마늘까지 훔치던 날랜 손은
자기 옷에 달린 단추 하나 맞추지 못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며칠 후에 외삼촌이 다녀가기는 했지만 외할머니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그 날도 역시나 삼촌은 꼭 코 푼 휴지 같은 모습으로 왔다.
삼촌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날은 엄마에게 돈을 뜯어 가는 날이다.
외삼촌은 신기하게 멀리서도 엄마에게 있는 돈 냄새를 맡았다.
엄마는 전세금을 올려 주기 위해 모아놓은 돈과 집주인에게
얼마간 돈을 빌려서까지 삼촌에게 주었다.
다음 달 말일께 갚을게. 그때는 꼭 돼. 삼촌은 늘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삼촌이 이번에는 좀 더 멀리,
좀 더 오랫동안 사라져 주기만 바랄 뿐이다.
결국 전세금을 올려주지 못한 엄마는 개똥이 더 많은 동네로 이사한다.
개똥같은 집으로 개똥같은 외할머니와 나를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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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조금 전부터 사탕 하나만 달라고 조르고 있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몇 번 더 조르다가 욕을 할 것이다.
입에 늘 먹을 것을 달고 사는 할머니는 입안의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마자 또 조른다.
할머니 입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본드로 몇 번 땜질한 틀니와
과자 부스러기와 욕밖에 없다.
그것이 할머니의 전부다. 비녀 바깥으로 빠져 나온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다.
오랫동안 염색을 하지 않아 머리카락은 귀를 경계로 검정과 흰색이 반반이다.
언뜻 보면 귀까지 내려오는 흰 모자를 눌러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머리카락 사이로 눈곱이며 흘러나온 침 자국도 보인다.
나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방 귀퉁이에 있는 네모난 깡통이 눈에 들어온다.
일회용주사기가 들어있는 깡통이다.
나는 아침마다 할머니 허벅지나 엉덩이에 인슐린 주사를 놓아야 한다.
가느다란 주삿바늘이 할머니의 살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내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 일은 버캐가 낀 할머니의 요강을 비우는 일보다 더 싫다.
엄마와 외할머니 사이가 조금만 좋았다면 내가 맡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엄마가 외할머니를 미워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만약 엄마가 외할머니를 미워하지 않았다면
나라도 외할머니를 미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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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시랄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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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입에서 욕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엄마와 나는 모가지가 비틀어지고
눈알이 빠지고 가랑이가 찢어진다.
어쩔 수 없다. 엄마가 욕먹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나는 부엌 찬장에 숨겨 둔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온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뽑기로 뽑은 사탕이다.
엄마에게 금색 실반지를 뽑아다 주고 싶었지만 재수 없게
막대사탕이 나와 버렸다.
나는 사탕을 좋아하지 않는다.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다니는 철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연탄불 갈 시간을 챙겨야 하고 할머니 요강에 낀 버캐를 없애야 하고
엄마 머릿속의 나비를 불러낼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러느라 구구단 외울 시간을 놓쳐버렸다.
4학년이나 된 내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 엄마만 빼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나는 구구단을 외워야 할 시간에도 엄마 생각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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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 온 동네는 그전 동네와 많이 다르지 않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개똥이 좀 더 많아진 것뿐이다.
우리 집은 늘 산언저리에 있었다.
처음에 살던 집은 시내버스가 다니는 길에서 멀지 않았고,
그 다음 집은 간신히 마을버스가 닿는 곳에,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는 한참을 내려가야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
우리 집은 이사할 때마다 조금씩 산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이러다가 언젠가 우리 집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에서 본, 눈보라를 뚫고 캠프를 옮겨가며 산을 오르는
히말라야등반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아저씨들은 산 정상에 깃발을 꽂고 감격스러워하지만
우리는 꽂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일년에 한 번 꼴로 캠프를 옮긴다.
우리의 잦은 이사가 엄마의 머리 속에 든 나비 때문인지
외삼촌이 엄마에게 뜯어 가는 돈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의 새 집은 늘 먼저 집보다 높았고
개똥이 많은 골목 어디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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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방학이 가까워진다. 오늘도 나는
개똥이 많은 골목을 지나 학교로 간다.
땅바닥을 안 보고 싶지만 그러다가 언제 개똥을 밟을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골목 안의 개똥 하나하나를 다 살피며 가야 한다.
외할머니에게 주사를 놓을 때마다 바늘자국이 없는 곳을 고르기 위해
할머니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야 하는 것처럼 기분 나쁜 일이다.
골목길을 빠져나와서야 크게 숨을 쉬고
나는 언덕 아래로 구르듯이 뛰어간다.
목에 매단 열쇠가 딸랑거리며 소리를 낸다. 지난번에 살던 집에서는
열쇠를 잃어버려 밤늦게까지 밖에서 엄마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엄마는 열쇠를 줄에 매달아 내 목에 걸어 주었다.
이제는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못 들어가는 일은 없다.
그 일로 엄마가 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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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밤늦게까지 문 밖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날, 엄마는 엄청 울었다.
나를 안고 운 것이 아니라 소주병을 붙들고 울었다.
엄마 입으로 들어간 소주는 모두 눈물이 되어 나왔다.
김정호 아저씨랑 함께 울었다.
엄마는 술을 마실 때면 늘 김정호 아저씨의 노래를 듣는다.
엄마 나이 열여덟이던 해 가을에 죽은 그 가수를
엄마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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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을.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임인데. 음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는.
음 어디로 갈까요. 님 찾는 하얀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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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물처럼 술을 마셨다. 엄마 한 잔, 김정호 아저씨 한 잔,
엄마 또 한 잔, 하얀 나비 한 잔. 돌아누워 자는 척 하며
나는 속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다가 노래 때문인지 엄마의 눈물 때문인지
나도 눈물이 났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귓속으로 들어가
귓속이 간지러웠다.
그래도 자꾸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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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에는 나처럼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니는 아이들이 몇 있다.
그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도 그랬고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권총 모양의 열쇠를 목에 걸고 있는 아이의 집은 옥탑방이다.
엄마 아빠가 야근하는 날이면 바람에 샤시 문이 덜컹거려 무섭기도 하지만
전철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좋다.
저녁 무렵, 환하게 불을 밝힌 채 지나가는 전철을 볼 때마다
아이는 어디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꽃을 좋아하는 아이의 엄마가 옥상 가장자리마다 주워온
스티로폼 상자를 놓고 그곳에 씨를 뿌린다. 과꽃이랑 채송화,
맨드라미가 피고 진다. 아이의 엄마는 잦은 야근 때문에
꽃을 보지 못한 날이 더 많다. 일년에 한 번씩은 구청에서
단속을 나오는 무허가 옥탑방. 단속이 시작되면
집주인은 벽을 깨고 옥탑방 옆에 있는 노란 물탱크를 방안으로 들이민다.
아이네 식구는 며칠동안 물탱크 옆에서 불편한 잠을 잔다.
구청에서 나온 공무원이 사진을 몇 장 찍고 간 후에야
물탱크는 밖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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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끝, 지하 작은 방에서 불빛 하나가 켜진다.
은색 열쇠를 목에 건 아이의 집이다.
창문이 땅바닥에 붙어 있어 멀리서 보면 불빛은 앉은뱅이 꽃처럼 보인다.
집안의 풍경도 꽃 속 같았으면.
하지만 지난여름 물에 잠겼던 집안은 아직도 눅눅하다.
장판 밑에 깐 신문지는 늘 젖어있고 한쪽 귀퉁이에서 피기 시작한 곰팡이가
온 방으로 번지고 있다. 아이의 마른기침이 멈추질 않는다.
아이의 얼굴은 아이의 목에 걸린 열쇠처럼 창백하다.
물에 젖은 장롱이랑 방문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늘 푸석푸석한 아이 엄마의 얼굴처럼 방안의 물건들이
조금씩 부풀어 있고 얼룩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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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이들의 열쇠구멍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아이의 집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반 담임선생님에게도 그런 힘이 있다.
전학 오던 날, 나는 그것을 알아챘다.
선생님은 교실 문 앞에서 쭈뼛거리는
나를 발견하고 누굴 찾아왔니? 하고 물으셨다.
언니나 오빠에게 볼 일이 있어 온 하급생으로 아셨던 것이다.
하기야 내 키는 4학년 치고 너무 작은 키다.
나는 어디서든 너무 작아서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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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 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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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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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가 아침에 준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전날 교무실에서 받은 종이에는 내가 지정 받은 교실호수와
담임선생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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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 혼자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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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선생님의 눈길이 내 목에 걸려있는 열쇠에 와서 꽂혔다.
선생님은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열쇠를 본 순간 선생님은
그 구멍 속으로 우리 집 방 안을 모두 들여다 본 것이다.
방문 옆에 놓인 버캐 낀 요강도 보셨을까.
신체검사 날 손톱 밑의 새까만 때를 들켰을 때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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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는 덩치가 큰 아이의 뒤쪽이다.
나는 아이의 뒤에 숨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전학 온 날을 빼고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다.
처음 며칠은 내 키 때문에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받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너무 작아서 그들 눈에 띄지 않는다.
나랑 친구가 되어줄 아이는 없다. 아이들에게는
모두 단짝이 있고 새 친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쉬는 시간에도 꽃만 그리고 앉아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
방학이 되면 나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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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카드 만들기에 정신이 없다.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은 나는 큰 아이 뒤에 숨어 머리만 긁고 있다.
언제부턴가 자꾸만 머리 속이 가렵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가만 손끝으로 머리 속을 더듬어 본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빨간 색종이로 산타할아버지 모양을 접던 아이가 자기 집 마루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금색 빤짝이 풀을 손에 쥔 아이도 끼어든다.
나는 머리를 긁으면서 아이들의 집 마루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를 상상해본다.
나뭇가지마다 눈처럼 얹힌 하얀 솜, 금색 종과 여러 색깔의 방울들.
산타클로스의 썰매가 그려진 빨간색 카드.
사실 나는 한 번도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나보다 더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가진 아이는 없을 거다.
밤늦게 엄마를 기다리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면 도시 전체가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된다. 빽빽한 붉은 십자가와 가로등,
간판의 불빛들. 밤마다 엄마는 크리스마스트리 숲을 지나 내게로 온다.
손님들이 남긴 술을 한 잔 한 잔 마셔 비틀비틀한 걸음으로,
하얀 나비를 부르며. 엄마의 하얀 나비는 겨울이 되어도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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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가 다 되어가지만 엄마는 아직도 자고 있다.
오늘은 둘째 주 일요일이다.
엄마가 일하러 다니는 식당은 둘째, 넷째 주에는 쉰다.
이렇게 엄마가 쉬는 일요일이 나는 좋다.
나는 조용조용 아침 설거지를 하고,
대문간에 있는 공동화장실에 할머니 요강을 비우고 연탄불을 간다.
할머니는 그 사이에 몇 번이나 니 에미 년 깨워라,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할머니에게 길게 눈을 흘긴다.
엄마는 잠잘 때 빼고는 집에 붙어있질 못한다.
외할머니는 내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성화다.
결국 나는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또 그 방법을 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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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엊저녁에도 사탕 먹은 것 엄마한테 말 해버린다.
" 할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할머니가 사탕 먹은 사실을 엄마가 알게 되면 그때는
나도 죽고 할머니도 죽는다. 보건소에서 할머니의 약을 탈 때마다
의사는 단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왜 안 되는지 모르지만 의사가 안 된다고 한 건 엄마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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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시랄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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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내뱉고 할머니는 잘 닫혀 지지 않는 입을 이죽거린다.
외할머니는 언제부턴가 은근히 엄마를 무서워한다.
외할아버지를 닮은 엄마는 화가 나면 뭐든지 집어 던지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자기가 엄마 같은 딸을 낳은 것은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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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 저런 에미년을 만난 거여."
.
눈곱이 잔뜩 묻은 눈을 가늘게 뜨며 외할머니는 말한다.
외할머니의 비뚤어진 입에서 나온 말대로라면 엄마는
외할머니와 내가 전생에서 지은 죄 때문에 우리를 벌주러 온 사람이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좋다. 내게 와주어서 좋다.
엄마는 나에게 아주 커다란 선물이다. 가끔은,
엄마에게 나도 선물이 되는지 궁금하다.
.
이젠 외할머니도 잠이 들었다. 나는 외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엎드린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절대로 나란히 눕지 않는다.
두 사람은 잠이 들어도 사이가 좋지 않다.
외할머니의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온 침이 베개에 스며든다.
외할머니의 얼굴은 잠 잘 때도 비뚤어져 있다.
그런 외할머니의 얼굴을 오래 보고 있으면 자꾸만
내 얼굴도 비뚤어지는 것 같다.
내 입에서도 침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훔치곤 한다.
나는 엄마 쪽으로 다가간다.
조심스럽게 엄마의 머릿속에 코를 묻고 엄마 냄새를 맡는다.
엄마의 머리에서 숯불 냄새가 난다. 숯불 속에서
고깃점이 익어가고 마늘이 탄다.
갈비집 주방에서 일하는 엄마한테서는 늘 매캐한 숯불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엄마의 머리카락과 손톱 밑
그리고 엄마의 속옷에까지 배어있다.
하루 종일 지글거리며 타는 고기냄새를 맡다보면
엄마는 미칠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나비를 키우는 사람을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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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책을 펼쳐든다. 엄마를 오래오래 재우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를 잠들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며칠이고 엄마를 재울 수도 있다.
엄마 곁에 엎드려 하루 종일 연필로 무엇인가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된다. 엄마는 종이 위에서 연필이 내는 소리를 좋아한다.
사각사각. 엄마는 그 소리가 꼭 누에가 뽕잎을 갉아대는 소리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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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누에 키우는 철만 되면 늬 외할머니 손버릇이 사라졌어.
누에고치는 바로 돈이 됐으니까. 그러니 외할아버지랑 싸울 일도 없었지.
채반에서는 누에가 뽕잎을 먹고, 늬 외할머니는 또 연한 뽕잎을 따러가고.
채반이 가득 찬 방에 누워 있으면 풀밭 위에 있는 것 같았어.
자꾸만 잠이 쏟아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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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리를 만들어내는 동안 엄마는 번데기처럼 오그리고 고른 숨을 내쉰다.
엄마의 잠 속에서 누에는 뽕잎을 갉아먹고, 누렇게 살이 오르고,
입에서 실을 뽑아낸다. 흰 고치 속으로 몸을 숨긴 누에처럼 어쩌면
엄마도 어디론가 꼭 꼭 숨어버리고 싶을지 모른다.
나는 엄마에게 희고 단단한 집을 지어주고 싶다.
외할머니나 외삼촌이 열려고 해도 절대로 열리지 않는 단단한 집을.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이사이 엄마 머리에 얼굴을 묻고 엄마 냄새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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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외할머니''삼촌' 그리고 '아빠'.
꽃을 그리고 난 여백에 글씨를 써나간다.
까만 글씨가 이제 막 알에서 깬 새끼누에 같다. 엄마, 아빠, 외할머니,
삼촌. 나는 '외할머니'와 '삼촌'을 지우고 그 위에 내 이름을 크게 써넣는다.
그리고 낭미충. 나는 엄마의 머리에 가만히 귀를 갖다댄다.
숯불냄새 저편으로 무엇인가 사그락대는 소리가 나는 것도 같다.
나는 더 바짝 귀를 갖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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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엄마는 외할머니가 훔쳐온 돼지고기를
날로 먹은 적이 있다고 했다.
술 취한 외할아버지는 잠들었고 외할머니는 또
도둑질하러 나가고 없는 밤이었다.
엄마와 삼촌은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듬성듬성 털이 있는 생비곗살을 썰어
소금에 찍어 먹었다. 얼마만큼이나 먹었을까.
맞은편에 수그리고 앉아 먹던 외삼촌이 입술에 묻은 피를 쓰윽 닦을 때에야
엄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날비곗살 깊숙이 박혀 있던
기생충이 엄마의 핏줄 속으로 흘러들었다. 외할머니가 외삼촌만 데리고
신작로로 달아나고, 술만 마시면 무엇이든 던지는 외할아버지가
저수지에 자신의 몸을 던져버리고, 김정호가 죽고.
그러는 사이에 엄마 머릿속에 있는 기생충은 알을 낳기 시작했다.
알에서 머리와 꼬리가 생기고 다시 알을 낳고.
한살이를 마친 낭미충은 엄마 머릿속에 누에처럼 집을 짓고 죽는다.
엄마의 머릿속은 낭미충의 집이 되고 무덤이 된다.
.
벌써 공책이 다 되어간다. 새 공책을 꺼내려 일어서던 나는
텔레비전 위에 놓인 달력을 집어 든다. 달력을 앞쪽으로 넘겨본다.
달력에는 드문드문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내가 표시해 둔 것이다.
마지막 동그라미는 두 달 전쯤에 표시되어 있다.
엄마 머릿속에 사는 검은 나비가 움직인 날이다.
나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불쑥 나타나 돈을 뜯어 가는 외삼촌처럼
엄마 머릿속의 검은 나비도 언제 움직일지 모른다.
나는 얼른 새 공책을 꺼내 들고 꽃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 머리 속의 나비를 불러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공책 가득 넓은 꽃잎을 그리고 암술 수술을 그려 넣는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꽃을 그리고 싶다.
긴 꿀주머니가 달린 꽃, 꽃대궁에 꿀이 가득 찬 꽃.
마법사가 쉬지 않고 외우는 주문처럼 나는 쉬지 않고 꽃을 그린다.
어느새 공책은 향기 나는 꽃밭이 된다. 개똥 위에도 할머니 요강 속에도
꽃이 내려앉는다. 꽃밭은 넓은 정원이 되고 마을이 되고 온 세상이 된다.
그러다가 꽃향기에 취해서 일까. 슬슬 졸리기 시작한다.
나는 공책을 엄마 머리맡에 활짝 펼쳐놓고 잠이 든다.
꿈속에서도 세상은 온통 꽃 천지다.
끝없이 펼쳐진 꽃길 사이로 엄마랑 내가 걸어가고 있다.
길도 꽃도 끝없이 이어진다. 그 꽃길 한 가운데서 갑자기 엄마가
머리를 싸쥐며 쓰러진다.
엄마 머리 속에서 검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나비가 팔랑거릴 때마다 검은 가루가 떨어져 내린다.
길이 지워지고 꽃이 사라진다. 엄마와 내가 검은 가루에 파묻힌다.
꿈이 사라진 자리에 외할머니의 머리 긁는 소리가 들어찬다.
외할머니는 상처가 날 정도로 머리를 긁어댄다.
손톱 밑으로 피 묻은 때가 낀다. 나도 잠이 든 채로 머리를 긁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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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눈이다. 한 아이가 외치는 소리에 교실 안은 눈 내리는 바깥보다
더 수선스러워진다.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몇몇은 슬금슬금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창가로 간다.
칠판에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던 선생님도 그대로 멈추어서 창 밖을 바라본다.
호랑이를 닮은 지도는 등줄기 중간쯤에서 멈추어졌다.
흰 나비 떼처럼 몰려오는 눈이 땅 위에서 이리저리 흩어진다.
사실 나는 조금 전부터 알고 있었다.
공책 한 귀퉁이에 꽃을 그리다가 무심히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순간 엄마 얼굴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술을 마실 것이다.
지나가는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리기라도 하면 몇 번이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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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같은 공장에 다니던 아빠가 엄마의 방 창문아래에 서서
밤을 지새고 했던 것은 김정호 아저씨가 죽던 그 해 겨울이라고 했다.
창문을 두드려볼까, 망설이면서 속절없이 발밑의 그림자만
지우고 또 지우던 밤이 이어졌다. 창문이 열리지 않아도 아빠는
엄마의 방 창문 아래에 서면 행복했다고 한다.
만약 그 날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아빠는 다른 날처럼 발밑의 그림자 위에
애먼 동그라미만 그리다 돌아갔을 것이다.
똑. 똑. 똑. 첫눈이 창문을 두드리게 했다.
하얀 나비를 김정호 만큼 잘 부르던 사람.
공장 야유회 때마다 그 노래를 불러 가슴 젖게 만들던 남자가
푸지게 내리는 눈 속에 서 있었다.
누래진 옥양목 커튼 뒤에서 엄마의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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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내리던 날 엄마에게 왔던 아빠는
커다란 삼나무에 깔려서 스물넷에 죽었다.
염색공장에서 버는 돈으로는 엄마의 병을 고칠 수 없어 아빠는
아는 사람을 따라 벌목 일을 시작했다.
아빠한테서는 늘 나무 냄새랑 풀 냄새가 났다고 한다.
엄마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엄마 몸에 송진 냄새며
풀 냄새를 묻혀놓고 산으로 간 아빠는
그 냄새가 희미해질 즈음 돌아오곤 했다.
돌아온 아빠는 엄마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우주 전체가 쓰러지는 것 같아.
그래서 오래 할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렇게 말한 아빠는 엄마 몸속에 나무를 심듯 나를 심어놓고 간 뒤 죽어서
산을 내려왔다. 나는 아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아빠가 밟고 지나가는 수풀소리며
톱밥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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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선생님은 우리나라 지도를 다 그리고
그 안에 산맥을 채워 넣고 있다.
마식령, 낭림, 마천령, 태백, 차령…
산맥은 호랑이 몸속에 박힌 단단한 뼈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이제 눈 따위는 잊어버리고 지도를 그리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칠판에 그려진 지도를 한참동안 바라본다.
벼락처럼 쓰러지는 나무에 아빠의 몸이 꺾인 산은 어디쯤일까.
눈 내리는 숲으로 들어가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공책에 지도대신 마저 그리지 못한 꽃을 그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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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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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짝꿍이 소리를 지른다.
지도에도 없는 산맥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목소리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내 짝꿍에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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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예요. 선생님, 얘 머리에 벌레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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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꿍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내가 짝꿍의 이름을 알지 못하듯 짝꿍도 내 이름을 모른다.
잠깐 멈칫하던 선생님이 티슈 한 장을 뽑아들고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머리 속이 아득해진다. 나는 꼼짝 할 수가 없다.
선생님 손끝에서 흔들리는 티슈만 눈에 가득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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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많이 바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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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지에 싼 이를 슬리퍼로 뭉개면서 선생님이 물으신다.
톡. 삼나무에 꺾인 아빠의 몸에서도 저런 소리가 났을까.
선생님은 내 목에 걸린 열쇠를 힐끗 쳐다보고는 뒤돌아선다.
이제 아이들은 내 작은 키 대신 머리에서 나온 이로만 나를 기억할 것이다.
투두 둑, 공책에 그려진 꽃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꽃잎이 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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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다닥다닥 붙은 지붕 위에,
허물어진 담벼락에 그리고 골목길 여기저기 있는 개똥 위에도 내린다.
개똥을 보지 않고도 언덕길을 오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다. 멀리 엄마와 나의 집이 보인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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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앞에서 나는 습관처럼 숨을 죽이고 문에 귀를 댄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늘은 정말 할머니가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나빠진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다.
나는 죽은 할머니가 다시 살아날까봐 가만가만 열쇠를 돌린다.
문틈 사이로 오줌 냄새며 아침에 차려놓고 간 반찬 냄새가 새어나온다.
어쩌면 그 속에 할머니의 몸이 썩는 냄새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을 열고도 나의 기대가 깨질까봐 방 안을 보지 못한다.
고개를 숙인 채 문고리만 잡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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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아, 이년아. 바람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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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틀니에 들러붙은 껌을 떼느라 정신이 없다.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에 틀니를 끼고
성한 손 하나로 떼어낸다.
찬장에 숨겨 놓고 간 껌을 또 용케도 찾아냈다.
나는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할머니를 노려본다.
아침에 내가 빗겨 주고 간 머리는 다 헝클어져 있고,
비녀대신 꽂혀 있던 플라스틱 젓가락은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할머니는 늘 도둑질을 했어도 늘 가난했다.
플라스틱 젓가락 때문에 잠깐,
할머니가 불쌍해지다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보자 다시 미워진다.
엄마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어했다.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도 엄마와 할머니는 몇 번인가 크게 싸웠는데
모두 할머니 머리 때문이었다. 혼자서 간수하지도 못할 머리는 길러서 뭐해.
이제는 비녀 도둑질도 못할 텐데. 엄마가 악을 쓰듯 소리를 질러도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차라리 내 모가지를 잘라라, 이 육시랄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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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을 떼는 사이사이에 할머니의 손은 머릿속이며 몸 여기저기를 긁어댄다.
내 몸도 여기저기가 가려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꾹 참는다.
할머니와 똑같아지는 건 죽기보다 싫다.
할머니의 손이 틀니에 머무르는 동안 정수리 부근의
흰 머리카락 위로 까만 점 하나가 생겨난다. 그 점이 조금씩 움직인다.
순간 내 몸에 소름이 돋는다. 할머니의 더러운 피를 빨아먹고
통통해진 저 이는 밤이면 내 머릿속에 알을 슬 것이다.
엄마가 바쁘시니? 내 손에 잡힌 이처럼 새까만 선생님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나는 이를 방바닥에 놓고 손톱으로 꼭 누른다.
할머니가 오기 전에는 내 머리에 이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으깨어진 이를 몇 번이고 짓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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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어도 눈은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나는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 언덕 중간쯤에 서 있다.
아빠가 엄마에게로 왔던 그 밤에도 이런 눈이 내렸을까.
불빛이 번쩍이는 언덕 아래 동네는 흰 눈에 덮여서인지 조금은 순해 보인다.
언덕 아래쪽에서부터 노랫 소리가 들려온다. 하얀 나비다.
나는 가풀막을 뛰어 내려간다. 엄마는 눈길 위에서 자꾸만 미끄러지고 있다.
나는 엄마를 일으켜 세우고 엄마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낸다.
엄마 몸에서 숯불 냄새에 섞여 희미하게 송진이랑
톱밥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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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디로 갈까요. 길 잃은 작은 새는. 음 어디로 갈까요.
님 찾는 작은 나비… 할머니는 끙 소리를 내며 돌아 누워버린다.
집에 와서도 소주 한 병을 더 마신 엄마는 울다가 쓰러진다.
잠이 든 엄마는 꼭 빈 술병 같다. 나는 엄마의 올 풀린 스타킹을 벗기고
눈물에 얼룩진 싸구려 화장품을 지워낸다.
그리고 엄마 옆에 눕는다. 할머니의 머리 긁는 소리가 먼 곳,
수풀 위에 내리는 눈 소리처럼 들린다. 나는 잠이 든다.
밤새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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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아빠와 엄마에게는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결혼식을 올리지 못해 결혼사진도 없다.
사진 비슷하게 남아 있는 거라곤 엄마의 머릿속을 찍은 X-레이 필름뿐이다.
나는 지금 그 필름을 보고 있다. 아빠가 나무를 자르고
받은 첫 월급으로 찍은 사진이다.
엄마를 난생 처음 병원이라는 곳에 데리고 간 사람은 아빠다.
의사는 엄마 머릿속의 검은 얼룩을 가리키며 낭미충의 흔적이라고 했다.
낭미충은 엄마의 머릿속을 석회처럼 굳어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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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본 순간 엄마는 자신의 머릿속이 썩은 호두 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겐 낭미충의 군락지가 검은 나비처럼 보인다.
한 번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엄마의 몸을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검은 나비.
나는 지금 3일째 학교에도 가지 않고 검은 나비만 보고 있다.
골목 한 귀퉁이에 숨어 있다가 나보다 늦게 출근하는 엄마가 언덕을 내려가면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와 문을 잠근다. 외할머니의 입은
사탕 몇 개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오늘도 내가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을 숨겨주기로 한 대신
나는 외할머니 손에 사탕을 쥐어준다. 인슐린 주사도 다른 날보다
조심스럽게 놓아준다. 외할머니와 나 사이에 비밀이 생겼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나와 외할머니는 공범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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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곁에 두고 나는 꽃을 그리기 시작한다.
엄마 머릿속에 든 나비보다 더 큰 꽃을 그리고 싶다.
하지만 머릿속을 긁느라 꽃송이는 더디게 완성된다.
할머니는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가요무대 재방송이다.
번쩍거리는 옷을 입은 여가수가 노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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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 년들은 좋겄다. 노래 부르고 돈 벌어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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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손을 까닥거리며 장단을 맞추던 할머니가 말한다.
노랫소리 때문에 할머니와 나는 문 밖의 발소리를 듣지 못한다.
누군가가 세게 방문을 두드린다. 할머니의 비뚤어진 얼굴이 무섭게 지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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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눈에 보이는 대로 물건을 던지기 시작한다.
버캐 낀 요강이 날아가고 치우지 못한 점심 밥상이 엎어진다.
할머니와 나는 방 한쪽에 오그려 붙어 떨고만 있다.
X-레이 필름 위로 김치 국물이 튄다.
엄마는 왜 학교에 나가지 않았느냐고 악을 쓴다.
나는 이 때문이라고 울며 말한다. 선생님의 까만 눈동자까진 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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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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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엄마가 멈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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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머리에서 이가 나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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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음 끝에 걸린 사래 때문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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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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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목소리가 어두운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처럼 낮게 깔린다.
엄마의 머릿속에 사는 나비가 펄럭일 징조다.
나비가 움직이기 전에 엄마는 소름이 돋도록 차고 낯선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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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가위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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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울부짖는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나비의 한쪽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엄마의 손에 가위를 쥐어준다.
엄마에게 머리채를 잡힌 할머니는 머리를 세게 흔들며 버둥거린다.
가위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잘라낸다.
뭉텅뭉텅 잘린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엄마의 가위질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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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쳐 쥑일 년. 이 독사 같은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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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입에서 새된 소리가 나온다.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나비의 나머지 한쪽 날개도 펄럭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가위를 든 엄마의 손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린다.
가위가 엄마의 발등을 찍으며 떨어진다.
먼 곳에서 삼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엄마가 거품을 물며 쓰러진다.
경직된 엄마의 입은 녹슨 가위처럼 잘 벌려지지 않는다.
나는 간신히 벌린 엄마의 입에 수건을 밀어 넣는다.
엄마의 허옇게 뜬 눈 속으로 외할머니가 훔쳐온 핏물 밴 날고기가,
자꾸만 엄마를 밀어내던 흰 신작로가 스친다.
나는 무릎을 꿇고 내 뺨으로 엄마의 눈을 덮는다.
엄마는 지금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얼마만큼 건너 왔을까. 삼나무 숲에 내리는 어둠처럼
나비가 검은 날개를 접고 엄마의 머릿속에 내려앉는다.
엄마의 눈에서 뜨듯한 것이 새어 나온다.
터널을 빠져나온 엄마의 모습은 무척이나 피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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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온다. 머리카락이 잘린 할머니는 순한 아이 같다.
욕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얼굴을 한 채 엄마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다.
엄마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까맣게 염색해 나간다.
깨진 반찬 그릇이랑 요강 따위는
할머니의 아무렇게나 잘려진 머리카락과 함께 말끔히 치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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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과 딸기 웨하스 사이에서
잠깐 고민하다가 딸기 웨하스 하나를 먼저 집어든다.
바스락, 할머니가 딸기 웨하스를 깨물 때마다 할머니의 머리에서
염색약 냄새가 풍긴다. 까만 머리를 한 할머니가 조금은 낯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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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린다. 엄마가 일하는 식당에서 걸려온 전화다.
식당 주인은 엄마를 찾지만 나는 바꿔주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식당은 바빠질 시간이다.
식당 주인 곁의 누군가가 전화기 너머에서 화를 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이제 엄마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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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을 마친 엄마는 나를 엄마의 무릎 위에 눕힌다.
엄마가 내 머릿속을 더듬기 시작한다. 사그락 사그락.
산을 넘는 아빠처럼 엄마의 손이 내 머리를 타고 넘는다.
내 머리에서 뽕잎을 갉아대는 누에소리가 나고,
아빠가 밟고 지나가는 수풀 소리도 들린다. 톡. 톡. 이가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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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꽃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언제까지나 내 머리에서 이만 살아준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엄마를 내 곁에 붙들어 둘 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이제 내 머릿속을 더듬느라 검은 나비 따위는 까맣게 잊을 것이다.
이 한 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는 얼른 그 이를 감춘다.
그리고 내 머리 깊숙한 곳, 엄마의 손이 찾지 못할 깊고,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알을 슬어라.
겨울이 되어도 죽지 않는 엄마의 하얀 나비처럼 영원히 죽지 않을 알을 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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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 삼나무 숲을 지나 개똥같은 골목에 다시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