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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 분별에 관한 계시
3.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보이는가? 그리고 그가 말할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가?
대구에서 제가 완전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서 나의 모습이 보이느냐? 그리고 그가 말할 때 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느냐?"
그러고 나서 제가 원장을 보니 주님의 형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도 전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영 분별의 매우 중요한 원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 속에서 주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고 그가 말할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무슨 계시를 받고 무슨 기적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두 가지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의 표식이 될까요?
그 이유는, 오직 주님을 만난 사람만이 주님의 형상을 이루게 되며,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만이 주님의 음성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에 대해 먼저 알아봅시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형상을 이루려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주님의 형상을 이루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마치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처럼, 그리고 성전에서 주님의 환상을 보고 회개한 이사야처럼 주님을 만나면 변화를 받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큰 변화를 받습니다. 주님을 얕게 만나면 얕은 변화가 일어나고, 깊이 만나면 깊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자주 그리고 깊이 만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이 담기는 것에 대해 알아봅시다.
우리 말 속에 주님의 음성이 담기게 하려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평신도도 그렇지만 설교자는 반드시 그의 말에 주님의 음성이 담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설교자의 설교는 이유도 없이 별로 듣고 싶지도 않고 들어도 마음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설교자의 설교는 자꾸 듣고 싶고 마음에 깊이 와닿고 은혜가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 설교자는 주님의 음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설교자는 주님의 음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 32:1-2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닙니다. 3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말 즉 설교가 백성들에게 무엇과 같다고 했습니까? 비와 이슬 혹은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와 채소 위에 단비 같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설교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던 자였고 따라서 주님의 음성이 그의 말과 설교에 충만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주님의 음성이 담기는 것은 주의 종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학교 교사, 구역장의 역할을 잘하려면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에게 담겨야 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을 권면하고 가르칠 때에도 주님의 음성이 담겨 있어야 실효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있더라도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조금 들으면 우리 말 속에 주님의 음성이 조금 담기고 많이 들으면 많이 담깁니다. 분명한 음성을 들으면 분명한 음성이 담기고, 강한 음성을 들으면 강한 음성이 담기고, 깊은 음성을 들으면 깊은 음성이 담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을 자주 그리고 깊이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주님의 모습을 갖게 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갖게 되는 빌결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인물이 걸출한 사람입니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까? 재능이 많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모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면 주님을 닮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주님의 음성이 우리 말에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 속에 있는 주님의 형상과 주님의 음성, 이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보이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가? 이것을 주의하여 보고 정확하게 영 분별을 하여 속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4. 은사나 사역의 크기나 외양만큼 사랑과 겸손이 계속 빛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은 은사나 능력이 나타날 뿐 아니라 사랑과 겸손이 있으니 올바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분명 이것은 영 분별의 올바른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면 '몸을 가지고 있다.' 혹음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정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에 아기가 태어날 때에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상이지만, 초등학생이 갓난아이의 머리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정상이 아니고 중학생이 초등학생의 머리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정상이 아니듯, 계속해서 그 나이의 수준에 걸맞게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입니다.
빌 3:12-16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따라서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다시 한 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릭 조이너가 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책에 보면 그가 이상 중에 젊은 흑인 사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흑인 사도는 릭 조이너의 조언을 듣고 잘 전진하다가 첫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때 그는 당황하여 "제가 무엇을 하였습니까?" 하고 릭 조이너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릭 조이너가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가는 길을 멈추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가던 길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성공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눈에 보이는 성공이 아니라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갔습니다. 그는 성공하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상 받는 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상을 주십니까? 겸손한 자, 온유한 자, 거룩한 자, 사랑하는 자, 희생하는 자, 섬기는 자,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왕국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 잡힌 바 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은사와 능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계속 전도를 하고 부흥회를 인도하고 주의 일을 하고 있어도 이런 면에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 보실 때에 계속 전진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 경주를 중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퇴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적으로 볼 때 만족보다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만족은 쉽게 자만이 되고 자만은 교만으로 변질됩니다. 만족은 사모하는 마음을 파괴하고 그 결과 더 깊은 차원의 계시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래서 전진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만족하는 죄에서 벗어나 계속 사모하고 계속 은혜를 구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저에게 퍼부어 주신 계시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개념으로 아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있다고 다된것도 아닙니다. 빛 속에서 그 사랑이 계속 자라야 합니다.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것은 엄청난 약속을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이 하도 엄청나서 저는 오래전부터 이 말씀을 이해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씀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구에서 울산으로 내려오는 길에 하나님의 성령이 갑자기 손에 잡힐 듯이 뚜렷한 계시들을 저에게 퍼부어 주셨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것이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인 것도 몰랐습니다. 그 계시가 끝날 즈음 비로소 이것이 평소 궁금하게 여겨왔던 이 말씀에 대한 계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깨닫는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됩니다.
'정말 그럴까?'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거룩, 겸손, 온유 등 여러 덕목 중의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덕목 중의 최고이거나 하나가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다른 덕목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덕입니다. 그 증거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또, 로마서 13장 8-1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단순히 덕목 중의 하나이거나 최고의 덕목이 아니라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형상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며, 사랑 안에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온전히 닮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다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서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이렇게 사면으로 전보다 확장되어 가는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사랑은 확장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은사나 능력만 많이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고 대단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중량 초과로 그 자신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뿐 아니라 겸손·온유·충성 ··· 등 우리가 가져야 할 모든 덕목에 넓이·길이·높이·깊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한계는 무한합니다. 왜냐하면 이 덕목들의 한계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가지신 무한한 덕목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자라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덕이 자라는 가운데 그 덕의 성장에 비례하여 은사와 기름부음과 권위와 사역이 임하고 주어지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고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 진정한 안전한 것이 됩니다.
한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점점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피상적인 사랑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가며 계속 주님을 더 깊이 닮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하나님의 빛과 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계시 즉 신령한 빛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과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대해 새롭게 눈떠가야 합니다. 그래서 마치 주님을 본 이사야가 새로운 차원에서 자기의 부족을 발견했듯이 새롭게 차기의 사랑의 부족을 인식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계속되어야 하며 계속 그 깊이를 더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를 해도 더 깊은 차원의 회개가 일어나야 하며, 은혜를 구해도 매일 같은 은혜가 아니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해도 더 고차원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실제로 우리가 구하는 그런 차원의 은혜가 임하게 되고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하여 주님을 더욱더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된다는 약속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각도 혹은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의 형편없음과 부족에 대해 눈을 뜨는 경험을 한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러한 경험을 한 것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즉 그런 경험을 자주 할수록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양호한 것이며, 그만큼 주님을 닮게 됩니다. 바울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아직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안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계속해서 간절한 심정으로 주의 빛과 진리를 사모하십시오. 그럴 때 주님의 빛 속에서 점점 더 자신을 밝히 보게 되고, 점점 더 깊은 회개가 일어나고, 점점 더 큰 은혜를 받게 되고, 점점 더 주님을 닮게 되며, 그 결과 점점 더 큰 지혜와 능력과 영적 권위를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은혜받을 때 혹은 성경을 모를 때는 위험하지만 그 고비를 지나고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면 영 분별은 거의 자동으로 되고 안전이 확보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로부터 속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까지 미혹이 됩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고 위험한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은사가 증가되고, 권위가 증가되고, 사역이 확장되면, 똑같은 마귀가 우리를 미혹하여 쓰러뜨리려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더 큰 마귀가 더 고차원의 전략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하고 미혹하려 듭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분별력이 자라야만 미혹을 피할 수 있고 주님이 원하는 사람과 사역자로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처음 듣는 이런 고차원적인 영 분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영 분별을 할 때 이제부터는 그 사람에게서 은사뿐 아니라 사랑이 나타나고, 그 사랑 속에 겸손이 나타나고, 그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은사나 사역의 크기에 걸맞은 사랑, 온유, 겸손 ... 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계속 증가되고 있는가? 그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영 분별에도 여러 가지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예언이나 기적 자체의 배후 세력을 분별하는 것으로, 영 분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영 분별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성령의 역사냐 악령의 역사냐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았더라도 그가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분별하는 영 분별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 겸손, 주님의 형상과 음성을 통해서 하는 영 분별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발람과 같이 은사는 바르나 실상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고 그들로부터 자신과 양떼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더라도 그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는 최선의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차선의 길을 걷고 있는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법이 있는데 그가 바울처럼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고 있는가? 즉 그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주님의 계시적인 빛 속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는가? 아닌가? 를 통해서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차이를 잘 이해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함정에는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가장 중요한 초점 두 가지를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사랑이 제일이나 사랑이 우상이 되어선 안 됩니다.
사랑이 아닌 주님 자신이 우리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에서 만족하지 말고 연인이 연인을 보고 싶어 하듯 부모가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듯 주님의 얼굴을 그리워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주님으로 만족하고 주님으로 흐뭇해하는 자가 되십시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웃사랑이 절대로 주님 사랑하는 것을 대신하거나 우선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자아의 죽음을 통해 해방을 경험하고 자기가 없어지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는 내가 높임받는 것이 목표나 즐거움이 아니요 오직 주님이 높임받는 것이 나의 목표와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전에 내가 높임받는 것으로 즐거워하고 만족했던 것처럼 이제는 주님이 높임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며, 그래서 나를 통하지 않은 주님 나라의 진흥을 나를 통한 진흥만큼 기뻐할 수 있어야 하며, 내가 아닌 주님이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행복입니다.
이렇게 될 때, 나의 일을 위해 나에게 주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위해 주님이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나의 일은 주님의 일이 되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주의 은혜로 일어나면 아무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게 되고 '무제한적인 사역'이 가능해집니다. 나도, 환경도, 사탄도, 나의 사역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만이 제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하는 일이 실제로 그리고 온전히 주님의 일이 되기 때문에 주님이 제한이 없는 것처럼 제한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므로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을 동원하고, 필요한 재물을 공급하고,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기사와 이적을 공급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무한대의 사역'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엡 3:18-21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될 때 즉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한이 없어집니다.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마치 모세가 당시 최고의 강대국 애굽을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고, 여호수아가 해와 달을 멈추게 하는 것이 가능했고, 사무엘이 기도로 적군을 도망하게 했던 것처럼, 그리고 엘리사가 적의 군대를 일시에 소경이 되게 하고 일시에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주 안에서 불가능이 없고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더 살게 하고 바울을 몇 십 년 더 살게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불가능이 없었을 것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으로 변화되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를 통해 이루기로 작정하신 분량만큼(이것이 사명인데)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의 일을 아주 제한 없이 자신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고 가는 자라야,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바울이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말한 것처럼 자기의 사명을 진정으로 다 감당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바울이 천국의 왕인 것처럼 이들은 천국의 왕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집니다. 움켜쥐고자 하면 잃게 되고 주면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면 권위를 빼앗기게 되고 섬기려 하면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공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심에서 벗어나 자기 왕국를 세우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면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그에게 주고 그와 함께 왕권을 공유하십니다. 즉 천국에서 다섯 고을, 열 고을 혹은 그 이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국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왕국을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