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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함 스크랩 카톨릭(가톨릭) 교회의 개혁과 신, 구 교도의 갈등
AceRed 추천 0 조회 28 09.12.30 14: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카톨릭(가톨릭)교회의 개혁과 신, 구 교도간의 갈등                   이길상

 

가. 종교개혁과 로마 교황청

 

(1) 카톨릭개혁(Counter Reformation)

 

시스티나 성당 벽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최후의심판(Last Judgement), 구원과 파멸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교황 바오로 3세의 청탁으로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전면에 6년(1535 ~ 41)의 세월에 걸쳐서벽화를 그렸습니다.

세상의 종말에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여 세상의시작부터의 전 인류를 심판하여 그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실행한 자를 구원하고,그를 믿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은 자를 멸한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敎義)중하나인 이 "최후의 심판"을 미켈란젤로는 성난 그리스도가 거인처럼 군림하여, 천국으로 오를 자와 지옥으로 떨어질 자들이 좌우로 회전하는 군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이들 나체 군상들을 살아 움직이는 것 처럼, 장엄한 바로크풍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에 관련된 내용들이 신약성서 여러 곳에 실려 있고, 다음 글은그 내용 중 일부를 추려 본 것입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하느님께서 곧 일어날 일들을 당신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리스도에게 계시하셨고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당신의 종 요한 에게 보내어 알려 주셨습니다.....(요한의 묵시록 1 : 1 )
나는 또 한 천사가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것을 보았습니다....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목을 잘리 운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요한 의 묵시록 20 ; 1~ 5)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데로 심판을 받았습니다....그리고 죽음과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입니다....(요한 의 묵시록20 ; 13 ~ 15)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하고말씀하셨습니다. 아멘 , 오소서, 주 예수여! (요한 의 묵시록 22 ; 20)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한 것이다....그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태오 복음13 ; 37 ~ 43)

사람이 죽으면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눈에 보이는육신은 지역마다 다른 장묘(葬墓) 문화의 차이에 따라 땅에 묻히기도 하고(埋葬),불에 태워지기도 하며(火葬), 날짐승의 먹이(鳥葬)가 되기도 하여 사라지지만,육신을 잃어버린 마음(영혼)은 묻을 수도, 태울 수도, 짐승의 먹이도 될 수 없으니어떻게 되는가?라는 의문이 남게 되지요. 그래서 이런 영혼은 육신이 죽은 후에도다른 세상에서 살아 간다는 내세관(來世觀)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런 내세관도 받아들이지 않는 쪽에서 보면 그야말로 혹세무민,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세상을 어지럽힌다 하여 그 자체가 처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 보면, 이를 따르지 않는 것이 처벌의 대상,...이래서 박해와 순교와 처벌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는데, 당장의 증명이나 경험이 불가한 이런 문제는, 불용과 수용에 따라 그 의미는 정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내세를 긍정하고 수용하는 입장에서, 이런 문제에 대답은 종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근본적으로는 두 가지. 죽어서 좋은 세상(천국, 천당, 극락 등)과, 나쁜 세상(지옥,연옥, 아귀 등)으로 각각 나누어 들어 간다는 2분법적인 해석이 그 첫 번째이고,누구나 좋은 세상에 들기를 원하지만 생전의 행하였던 성적표(業)에 따라, 신이 이를엄격히 심사 분류하여 정한다는 것이 두 번째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적인 심판외에, 인류전체에게 신이 행하는 공적인 심판을 기독교에서는 최후의 심판이라고하는데, 종말에 이르러 의인(義人)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태양처럼 빛나지만, 악인은불구덩이에 던져진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카톨릭이란 용어가 보편을 의미한다고 하니까, 보편이라는전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믿고 따라야 된다는 해석으로 귀착시킬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교의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고(313) 천년(千年)을 지나는동안, 유럽의 공통 신앙이 되었고, 또한 개인 신앙이 아닌 국가신앙으로 자리잡으면서이를 따르지 않으면 그것이 곧 반역으로 연결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톨릭교회의 수장이자 로마의 주교인 교황(Pope)의권능이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도 이런 종교 우위의 사상적 기저에서 출발하여,세속권력의 종교적인 박해에 대항하였고, 교회제도를 비롯한 교회의식의 확립, 교리의해석과 집행, 선교(宣敎)와 이단의 개종(改宗)과 처벌 등을 동시에 행하면서, 끊임없이그 세력을 확장, 로마 제국의 몰락 후 한동안 고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교황권은점차 세속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13세기 초 이노켄티우스(이노센트) 3세 시대에는절정에 도달, 많은 군주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이렇게 위상이나 역할이커지자 이에 대한 의혹과 불만도 동시에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불만이나 의혹들이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종교개혁이라는이름으로 폭발, 프로테스탄트가 성립되고, 그 세력이 커지자, 그에 대항해서 카톨릭은자체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를 우리 나라에서는 반 종교개혁(反宗敎改革),반동 종교개혁(反動宗敎改革) 또는 대항 종교개혁(對抗宗敎改革) 등으로 번역해서부르다가, 아무래도 반(反), 반동(反動), 대항(對抗)이라는 용어에서 풍기는 어감이좋지 못하다 하여 지금은 카톨릭의 개혁이라고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의 자체 개혁은 이미 루터 이전부터 끊임없이추진되어 온 것이 사실이고, 특히 이 시기의 개혁은 신교 파의 등장으로 이에 대항해서생겨났다고 보고 역어(譯語)의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반, 반동, 대항 등 용어들이사용된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던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바오로3세(Paulus III / 1534∼49)로서, 그는 개혁적인 인물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그들중심으로 교회 악폐 일소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케 하였는데, 이 위원회는 1537년교회를 바로잡기 위한 권고 안(案)을 제출, 여기에서 악폐의 근원은 성직매매에 있다는것을 지적하고 이것을 바로잡을 것과, 에라스무스의 저서가 학교에서 더 이상 교재로사용되어서는 안된 다는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임 교황 때부터 골치 아픈 현안이었던 영국왕헨리 8세의 이혼 문제, 그가 행한 수도원 해산과 그 토지 몰수, 수장령(首長令) 발표등을 심리한 교황청은 모두 로마교회에 유해한 행위로 규정(1535), 파문칙서를 공포(1538)하였으나, 영국교회가 분리되어 교황청의 수입이 2/5로 줄어들었고, 이런 마당에서성직매매가 금지되면 교황청의 재정을 감당할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교황 바오로3세의 교황청 기구개혁은 중도에서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542년 이들 개혁파의 제 2권고에 의하여, 우선가능한 이단 심문소를 로마에 설치, 종교재판(inquisitio : inquisition)을 실시하기로하였는데, 이 이단 심문소가 이 때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고, 이미 13세기 초(1203)에설치되어 많은 이단운동을 탄압하다가, 중세 말기에는 각지의 사교들에게 위임, 분산시켜그 효과가 신통 치 못했는데, 이를 다시 설치한 것은 에스파냐의 영향이 컷다고 합니다.

1480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등의 국왕은 이슬람을 축출하는과정에서 이단 심문소를 설치, 그 진가를 발휘했는데, 이것은 다른 곳과는 달리 국왕이행하는 종교재판으로서 악명과 함께 큰 효과를 올리고 있었고, 교황은 이런 이단심문소와 종교재판으로, 권위를 높이고자 교황청 내에 검사성성(檢邪聖省 / 聖廳)을설치하고, 카톨릭교회의 모든 이단 심문소를 이곳으로 통합했습니다.

다음으로 행해진 것이 이른바 금서목록(禁書目錄)의작성(1559), 여기에는 종교개혁자들의 저서 외에도 에라스무스의 저서처럼 이단이냄새만 풍겨도 금서의 목록에 올리고, 몰수 소각하였는데, 이것 역시 그 원조(元祖)는에스파냐의 이단 심문관 토르게마다, 그는 이미 1490년 살라방카에서 이단이라는이름으로 6천 여권의 책을 태워 없앴다고 합니다. 기원전 진나라의 시황제가 저질렀다는분서갱유(焚書坑儒)와는 규모면 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사건이라고도 할수 있겠지요.

이러한 사상통제가 일시적인 효과를 거두어 교회 안정에는도움을 주었겠지만, 학문과 사상의 발달에는 찬물을 끼얹는 결과로 연결될 수도 있겠지요.문제의 종교재판이 알프스 이북은 물론, 이탈리아에서조차 에스파냐처럼 혹독하게행해지지는 못했고, 그러면서도 브루노를 화형에 처했고,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취소되었으며,르네상스의 기운도 이탈리아에서 기운을 잃어가게 되었는데,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쇠퇴한 원인을 교황청의 이런 사상 통제가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2) 트리엔트 공의회 개최(1543 ~ 63)

중세의 신학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이상, 프로테스탄트에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장을 누를 수 있는 확실한 정통(正統) 신학의 정립이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른 정통신학, 즉 새로운 교의(敎義)를 세우고 결정하기 위해서는공의회를 열어야 하는데,...

교회의 대분열, 교회개혁 주장 등을 해결하기 위해열린 제 16회 콘스탄츠 공의회(1414 ~ 1417)에서, 로마 교황을 정통으로 하여 교회의대분열을 종식시키고, 후스를 처형하는 등 업적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교황 위에공의회가 군림, 공의회 지상주의(至上主義)가 채택되었기 때문에 교황으로서는 공의회를열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오로 3세는 결국 1545년 말, 북이탈리아의트리엔트(독 : Trient , 영 : Trent, 이 : Trento) 공의회를 소집하였는데, 교황은신교파에 대항하기 위해서 곧 교의(敎義)의 결정을 주장한 반면, 독일 황제 카를5세는 신교파를 카톨릭 교회에 복귀시켜 크리스트교 재 통일을 모색, 양측의 의견이맞서는 가운데, 1545 ~ 47, 1551 ~ 52, 1562 ~ 63, 이렇게 3차례에 걸쳐 단속적(斷續的)으로진행되어 시작에서부터 결과까지 무려 18년을 소요, 이 기간 중 교황은 다섯 번,독일 황제도 카를 5세에서 페르디난트 1세(1558 ~ 64)로 바뀌면서 1563년 겨우 결말을보았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의 사정을 좀더깊이 들어가 보면, 프로테스탄트 측은 슈말칼덴 동맹전쟁 중이었으므로 불참, 로마카톨릭측과 독일 황제측이 참가,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서 제후의 지지가 필요했던황제측에서는 신, 구 양파의 성찬이나 승려의 결혼을 다 승인하자는 제안과 함께,아우크스틴파의 승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 예정설도 인정할 것을 제안하여 루터파의주장을 관철코자 했지만, 결과는 둘 모두 거부되었고, 강경하고 선명한 반루터적인입장을 택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신앙 의인(義認 :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문제에서도, 루터가 주장한 "신앙은 구원의 단서이고, 그것 없이는 신을 기리는것도 불가능한 의인의 근원"이라는 것은 인정,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행과숨겨진 행적(秘蹟) 역시 구원의 실현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베드로 성당의 원형 돔이 외에도 베드로 성당의장려한 위엄을 상징하듯 교황의 지상권(至上權)이 다시 확인되었고, 일곱 가지 성사(새크라멘트),성인 존중, 교회개혁의 필요성 등이 채택되어 반(反) 종교개혁의 성과는 거두었으나결과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 이 후 혹심한 종교전쟁을예고하였고,

한편 카톨릭에서도 신교파에서 하고 있던, 교의문답서를만들어 민중 교화에 나서게 되었고, 각 사교구에 승려학교를 세워 승려들을 교육하는등, 교회재건에 힘을 모았으나, 이런 일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이그나티우스 데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활동, 그 왕성한 추진력에 의해서 다시그 위상을 우뚝 세우고,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고 일부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 새로운 남자 수도회 예수회의 활동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 1491~1556)는프랑스와 접경 지역인 북(北)에스파냐의 바스코 지방의 성주(城主)의 아들로 출생,전형적인 스페인 기사의 길을 걷고 있던 중, 1521년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중상(重傷)을입고 치료 중 심심풀이로 읽은 예수전과 성인전에 감동, 성 프란체스코가 행한 것,성 도미니쿠스가 행한 것을 나도 한 번 해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니다.그러다가 1522년 당시 수도사들의 고행과 수행 장소였던 세랏트산(Montserrat)으로가서 그곳의 마을 만레사(Manresa)에서 기도와 고행에 몰두하기를 1년, 고행과고뇌 사이에서 많은 영동(靈動)을 얻으면서 신비주의를 체험하고, 이런 체험을 모아예수회의 고전이 된 심령수련(Exercitia  spiritualia)을 썼으며, 1523년 다시예루살렘을 찾아가 그곳에서 일생을 이교도 개종에 몸 바칠 것을 결심하고 성지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예루살렘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여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그 이듬해인 1524년에 귀국,명상(冥想)이나 묵상(默想)의 뜻을 가진 영조(靈操)를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그들을종교적 진리에 인도코자 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심도 높은 학문이 필요했고,그래서 그는 그해 서른 셋의 나이로 만학(晩學)의 배움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처음에는 국내 대학에 다니면서 사람들에게는 영조를 베풀다가 이단으로 의심받기도하였고, 1528년 다시 파리대학에 유학, 몬테규 기숙사에서 8년간 공부하였는데, 이기간에도 틈만 있으면 속인들을 상대로 영조를 베풀었고, 이것으로 많은 여성 지지자를확보하였으며, 특히 사비에르, 파베르 등 6명의 친구를 사귄 것이, 후일 예수회의근간이 되었습니다.

로욜라는 이들 친구 6명과 함께 몽마르트르의 성당에모여 예루살렘에 가서 이교도 개종에 몸을 바치거나, 교황이 명하는 어떤 일에도성실히 받들기로 굳게 서약하고, 파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 이때는 투르크의세력이 지중해를 석권, 사정은 10년 전 로욜라가 혼자 갔을 때 보다 더욱 악화되어,베네치아까지 갔다가 배를 타보지도 못하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이들은 계획을 수정, 이들만의 독립된 수도회를만들기로 하고 ".... 성스러운 신의 깃발 밑에서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과,신 혹은 신을 대신하는 자에게 기꺼이 봉사하려는 사람들로 구성되고,...신의 말씀과영조 및 자선활동에 의한 선교, 자식 없는 사람과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선교,..교황과그 후계자에게 충실히 복종하는 전사(戰士)로서 봉사한다....." 라는 내용이담긴 청원서를 교황에게 제출, 드디어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1540년 "예수 그리스도의 반려(伴侶)"라는뜻을 담은 예수회가 파리에서 탄생하였고, 로욜라는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회원을양성하고 회헌(會憲)을 만듦으로써 그 기반을 다졌는데, 교황에게 절대복종하고,신과 교황의 전사로 선교(宣敎)에 주력한다는 것이 주된 사명으로, 금욕과 청빈을중시하면서도, 중세의 수도원이 속인들과는 폐쇄적 이였는데 반하여, 예수회 회원은세속적인 생활을 하면서 금욕을 엄수하고, 결혼은 하지 않으며, 기도와 고행으로하느님의 능력을 받고, 예수처럼 봉사하며 살아가기를 노력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회원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 입회부터 엄격한 심사를하였고, 입회를 허락한 후에도 장기간에 걸쳐 연구와 시련으로 시험하고, 정식 회원으로받아들이는 등, 세속에 쉽게 물들지 않고 신에게 충실히 봉사할 수 있는 강력한 교단을만들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는데, 따라서 정식 회원은 고사하고 입회조차 할 수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나왔으나,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1556년 로욜라가 죽을 무렵에는회원수가 1천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제수이트 교단이라고도 부르는 이 남자 수도회가 한국에서는중국식 음사(音寫)대로 야소회(耶蘇會)라고도 하는데, 로욜라의 1차적인 목표는 가난하고무지한 사람들과 이교도를 개종시키는 일, 그 방법은 학교를 세우고 강요가 아닌자연스러운 교육과정(敎育課程)으로 먼저 어린이를 교화시키고, 다음으로 이 어린이들을통해 어른들까지 교화시킨다는 것이 계획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계획이가장 성공을 거둔 곳이 독일,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남부독일을 비롯해서 많은지방이 카톨릭으로 회귀, 교세 만회에 한 몫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 신교가 들어오는것을 막을 수 있었고, 아시아와 신대륙에는 훈련된 선교사를 파견, 생명의 위험을무릅쓰고 이교도를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힘썼는데, 이때 마태오 리치 등은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중국에서 활약하였고,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일본에카톨릭을 전파, 일본 인들은 이를 기리시탄(折支團)이라고 불렀고, 한 때 교세가번창하기도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금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교세가 현저히약화, 중국의 도교나 일본의 신도 등 토착 신앙의 일부로 흡수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에 예수회가 들어온 것은 1954년, 그 후 서강대학교(1960)와광주에 대건신학대학(1962)을 설립 운영하는 등 여러 가지 종교사업도 병행하고 있는데,이와는 사정이 다르긴 하나, 중국에 와있던 마태오 리치가 중국인들에게 포교용으로만든 천주실의를 이수광은 그의 지봉유설에서 소개하였고, 병자호란(1636) 때 볼모로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귀국후 그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으며, 그후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익의 제자들에 의해서연구되다가,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1784),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예배를 시작(1785)한 것이 한국 천주교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사제(司祭)없이 신도들만으로시작된 이 한국 천주교는 그 후 수많은 박해를 받았고, 국토가 분단된 지금에도 북한에서는박해가 계속되는지 그 사정은 잘 알 수 없지만, 남한에서는 1954년 6개 교구에 신도약 19만명, 다시 40년이 지난 1994 말에는 15개의 교구에 신도 350 여만 명, 학교,병원 등 운영하는 기구만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 계속 번창......

종교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까 한 두 가지 더 곁들이면,어느 순복음 교회는 등록된 신자 수만 70 여만 명을 넘어선 것이 이미 오래 전, 단일교회로서는 세계 최대,... 불교는 조계종을 비롯한 18개의 등록된 종파에 딸린 사찰이5,700 여 개소, 승려 수 약 2만 여명, 신도 수 1300 여만 명,... 개신교의 한 교파신도 수가 140 여만 명, 교회 수 4800 여 개, 교역 자 수 6300 여명,....예수교 대한장로회는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모으려고 웹 사이트를 검색하다 정말 저도 놀랐습니다. 어느 분의 글을 빌리면, 잘생겼다 싶어 산이라도 오르면, 스님들의 스피커 독경소리 계곡을 울리고, 언덕에올라 도시의 밤하늘은 쳐다보면 공해에 찌들어 별은 잘 보이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면붉은 빛 십자가가 별보다 더 많이 눈에 뜨이고.....왕성한 선교활동은 종교의 본고장으로역수출.....

나. 신, 구 교도간의 갈등

(1) 에스파냐의 구교(카톨릭) 옹호

16세기 중엽의 종교 분포도이베리아반도는 9세기이래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그들을 축출하고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면서,이들 이슬람인 을 비롯한 비기독교도를 처벌할 목적으로 국왕은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국민 모두에게 이교도를 고발할 의무를 강제로 부과, 부모형제간에 고발해도 정의라는이름으로 칭찬했으며, 피고에게 유리한 증언은 불허, 불리한 증언만을 허용하는 등악명을 떨쳤는데,

최초의 심문관이었던 토르케마다(Tomas de dorquemada? ~ 1498)는 18년간 11만 명을 고발케 하여, 그 중 1만 여명을 화형에 처했다고 전해지고있습니다. 국왕 직속의 이단 심문과 종교재판은 이후 약 백년동안 무려 1백만 명이회생되었다고 하는데, 무어 인 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유럽인 들이라 할지라도이단의 냄새만 풍기면 가차없이 처벌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살벌한 가운데서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마젤란의 세계 일주가 이룩되었다는 것은 경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이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저질은 만행(?)은 코르테스와 피사로에 의한 아즈텍 문명과잉카문명 파괴에서 너무나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콜럼버스 일행이 신대륙에서 저질은만행이나, 마젤란 자신은 필리핀에서 전사하였지만, 그가 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에스파냐왕의 신 종례를 요구하였고 카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코르테스나피사로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유럽의 수도원이나 교회가 부패되어있을 때, 에스파냐에서는 이런 종교적인 영향으로 이상하게도 매우 청렴하였고, 이런배경에서 로욜라가 태어나 예수회를 조직하고 구교부활에 공헌했다는 것이 이런 것과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에스파냐의 구교 옹호 운동은 드디어 영국과도 충돌,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가 출동하였으나 엘리자베스 1세에게 패배하고 에스파냐의국운은 극도로 쇠퇴, 역사의 전면무대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어쩌면 신의 뜻이 였는지도모릅니다.

(2) 영국과 에스파냐의 싸움

영국의 북쪽에 있는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5세가죽고 그의 딸 메리(Mary / 1542 ∼ 87)가 생후 1주일만에 즉위, 1548년 6세 때 프랑스황태자와 약혼한 후 카톨릭 적인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다가, 16세가 되어 결혼식을올리고(1558), 이듬해 황태자가 왕위에 올라 프랑수아 2세가 되었고 메리 스튜어트(같은 시기 영국왕 메리 1세와 구분하기 위해서 가문을 표시함)는스코틀랜드의 왕이면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으나, 결혼 후 1년만에 프랑수아 2세가병사하였기 때문에, 1561년 과부가 되어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제네바에서 칼뱅 파의 열렬한 설교사가되어 돌아온 존 녹스(John Knox)와 그 일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장로 파에 의해서,종교개혁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돌아온 메리는 1565년 구교도인사촌동생 단리와 재혼하자, 신교파가 이에 대한 반감을 보였으며, 이번에는 남편단리경이 보스웰에게 암살되고, 그녀는 다시 단리를 암살했던 백작 보스웰과 재혼하자신교파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은 메리에게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들 제임스6세(영국왕 제임스 1세)에게 양위(讓位)케 하고, 메리를 로크리븐성(城)에 감금,그러나 이듬해 탈출에 성공하여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영국에 피신하여 엘리자베스1세의 보호를 받으려 했습니다(1568)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으로 망명해 오자 입장이 난처해진것은 엘리자베스 1세, 국민저항이 거세어 결국 그녀를 체포 구금하였는데, 메리 스튜어트가헨리 7세의 증손녀에 해당하고, 모계로는 프랑스 구교 파의 우두머리 기즈가와 연결되었기때문에, 이런 메리 여왕의 처리문제를 두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몹시 고심하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무렵 에스파냐와 프랑스에서 취해진 신교도의 탄압으로 많은신교도들이 영국으로 망명해 왔고, 영국에서는 이들을 따뜻이 맞아들이자, 구교측에서는에스파냐를 충동 해서 이를 응징코자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 프렌시스 드레이크같은 자들에게 특허장을 주어 신대륙에서 귀항하는 에스파냐 보물선을 약탈하기도하였고, 1580년대에는 국내에서 구교도를 마구 잡아 처형하고, 반 에스파냐 운동을전개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원조하여, 에스파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는데,이 무렵 배빙턴 음모사건(Babington Plot)이 발생하여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이 음모사건은 배빙턴을 중심으로 런던에서 예수회를 지지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엘리자베스 여왕을 암살하고 메리를 영국 여왕으로 추대하여 카톨릭의 세력을 만회하려고시도하였던 것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이들은 처형되었고 결국 영국 국민들의 격분은메리에게까지 화살이 미치어 그녀 역시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1587)

이에 이르자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그의 무적함대(ArmadaInvincible)를 영국에 보내어 버릇없는 여왕을 체포해 오라고 명령, 이미 레판토해전(1571)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을 격파한 무적함대의 위용은 글자 그대로 무적(無敵),군함 130척, 대포 2천 5백문, 해군 7천명, 보병 1만 6천을 1588년 5월 28일 포르투갈의리스본에서 출발시키고, 다시 네덜란드 육군 1만 8000 명을 중간에서 합류, 영국으로향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상선(商船)을 개조하거나드레이크 등의 해적선(?)으로 편성된 80척의 전함과 8,000명의 병력을 동원, 모든것이 열세였으나 기동력이 뛰어나고 선원들은 잘 훈련되고 용감하여, 무적함대가플리머스 연해에서 영국함대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8월 7일 대륙과 가장 가까운도버해협의 칼레 연해에서 영국군의 화공(火攻)에 의한 야습으로 큰 타격을 입었으며,그라블리느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그들의 위용은 온데 간데 없이 겨우 54척만이허겁지겁 본국으로 달아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전쟁으로 영국은 해상국가로 급 부상하게 되었고,에스파냐는 역사의 중심무대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스튜어트 사이는 우리 식의 촌수로 따지면 7촌 숙질 간, 펠리페 2세와는 형부와 처제사이,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어 영국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대략이런 것들이 당시 유럽 왕가의 집안 사정이었습니다.

(3)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 1562~ 1598)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신교파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1540년대 이후, 이는 칼뱅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한 것과 때를 같이 하고있는데, 칼뱅은 그의 조국 프랑스의 신교도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고 필요한 지시를때 맞추어 내려서 앙리 2세(Henri Ⅱ / 1547 ~ 1559) 때 이미 칼뱅파 신교도의 숫자가프랑스 인구의 1/6에 육박, 그들을 위그노라고 불렀는데 왜 위그노라고 했는지 그어원은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당시의 프랑스 국왕 앙리 2세(Henri II)는 강직하고기사의 풍모를 지닌 자로서, 부왕 프랑수아 1세 때부터의 외교정책을 답습하여 독일황제카를 5세와 그의 아들 에스파냐왕 펠리페 2세와의 싸움을 계속, 그러다가 1559년국내 신교도를 억압하기 위하여 에스파냐와 카토캉브레지화약을 맺었고 이를 경축하기위해서 1559년 7월 신하인 몽고메리 백작과의 토너먼트(기사들의 마상경기) 시합에서눈에 창을 맞고 부상당하여 이로 인해 파리에서 죽었습니다.

앙리 2세가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가 출신의 카트린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 1519 ~ 1589)와 결혼하여(1533) 10명의 자녀를두었으나, 20세의 연상인 정부(情婦) 디안 드 푸아티에를 사랑하였고 총신 기즈공을신임하였기 때문에 정치는 그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왕비는 소외당하고 있었는데,이제 그의 아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등이 잇달아 프랑스 왕위를계승, 모후로서 프랑스 정치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앙리 2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메리 스튜어트의남편인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였으나 일 년만에 죽고(1560) 차남 샤를 9세가 열 살의나이로 즉위, 이때부터 카트린은 모후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였는데,그의 출신이 피렌체였고, 따라서 그는 철저한 마키아벨리스트(군주는 목적을 위해서어떤 수단과 방법도 용납)로서, 종교를 위해서 정치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위해서 종교를 이용, 그의 정적인 구교파 기즈가(家)의 전횡을 억제할 필요에서 때에따라서는 신구 양 교도의 충돌을 부채질하였고, 때로는 조정하여, 종교전쟁하의 동란중에서도 왕권 유지와 신장에 진력, 신교도에게 관용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경우에따라서는 피비린내 나는 탄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1562년 동부 프랑스의 프왓시(Poissy)라는 작은 도시에모여있던 신교도들을 구교파의 우두머리 기즈공 일파가 습격, 300 여명을 살해하면서37년간(1562 ~ 98)의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내란이 종교전쟁 이전에 귀족들간의 권력 투쟁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혹은 신 항로의 개척과 무역의 확대로 화폐경제가진전되고,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순들이 종교적 대립 항쟁과아울러 나타났다고도 보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구교파의 우두머리는 기즈가(Guize 家)였고이에 맞서 신교파의 우두머리는 프랑스 왕가의 방계에 해당하는 나바르 왕국을 지배하고있던 부르봉가(Bourbon 家)와 그에서 파생된 명문 콩데가(Conde 家) 였는데, 이들은각각 독일과 에스파냐 혹은 영국의 원조를 바랐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외세의 개입을초래, 프랑스의 분열과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위그노 전쟁이 37년간 쉴 틈 없이 계속된 것은 아니고,중간에 화의가 성립되어 중단되기도 했다가 다시 일어나는 등 단속적(斷續的)인 양상을보였는데, 그러면서도 불행한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피해를보는 것은 수적으로 열세인 위그노쪽, 카트린 역시 구교의 옹호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그 피해는 더욱 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그노의 피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이른바"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사건으로서,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전야(前夜)인 8월 22일 밤부터 이튿날까지 있었던 이 사건으로 파리에서 학살된 신교도는약 2만, 다른 지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숫자의 신교도들이 학살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이 사건의 발단은 2년전인 1570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이 때 신 구교간의 화의가 성립되었고, 다시 양측은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신교파의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후일 앙리 4세)와 카트린의딸 마르그리트(Marguerite de Valois / 1553 ~ 1615)와 정략 결혼이 이루어졌는데,이때 신교파는 국왕 샤를 9세를 포섭, 구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에스파냐와싸울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알게 된 모후 카트린은 이를 막기 위해서, 그의 숙적이었던기즈와 다시 결탁, 자기 딸의 하객으로 참석하기 위해서 파리를 찾아온 신교도들을무차별 학살하였습니다.

이렇게 위그노의 대량 학살로 신교파는 굴복할 줄알았으나, 이때 신랑으로 갔다가 궁정에 연금되어 구교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던 문제의주인공 앙리 드 나바르는 4년 뒤인 1576년 2월에 탈주에 성공, 고향인 베아른으로돌아온 뒤 다시 신교도의 수령으로 활약하면서, 신교파의 나머지 세력들을 모아 다른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농성으로 버티기도 하였으며, 샤를 9세(Charles IX /1560∼74)는 이 죄책감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결핵으로 죽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것이 카트린의 셋째 아들 앙주공, 이때 그는 폴란드 왕으로 있다가, 프랑스로 돌아와앙리 3세(Henri III / 1574 ∼ 89)가 되었는데, 그는 23세의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모후 카트린의 섭정도 끝났고, 여성적인 성품으로 총신들을 총애하고, 네덜란드를지원하여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루기도하였으나, 그는 1582년 신교파에 화의를 제의,프랑스는 한 때 평온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1588년 구교동맹의 세력이 강한 파리시민은신교파에 이런 미온적 태도를 보인 앙리 3세에게 반기를 들었고, 다시 기즈를 중심으로에스파냐의 원조를 얻어 앙리 3세를 파리에서 추방하자, 앙리 3세는 블루아에서 삼부회(프랑스의신분제 의회)를 개최하고 기즈공을 암살,... 이에 격분한 구교동맹이 반격하자 신교도영수인 앙리 드 나바르에 접근하여 그를 왕위계승자로 정하고(앙리 3세에게는 자녀가없었음) 함께 파리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도미니크파의 광신적인 수도사 클레망의칼에 찔려 죽음으로써(1589. 8) 1328년 필리프 6세 이래의 발루아왕조(1328 ~ 1589)의직계는 이로써 단절되었습니다.

앙리 3세의 죽음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자는 부르봉가의앙리 드 나바르뿐이었고, 이때를 기다려 그는 즉시 즉위하고 앙리 4세 (Henri IV/ 1589∼1610)라 하였으나, 구교측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에스파냐의펠리페 2세의 딸을 프랑스 왕으로 추대코자 했습니다. 이에 다급해진 앙리 4세는그의 종교적인 신념을 포기,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도유(塗油)의식을 행하고 카톨릭으로개종, 구교파가 인정하는 국왕으로 파리에 들어갔습니다(1594) 그런 후 1598년 4월13일, 낭트칙령 (Edit de Nantes)을 발표,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므로써, 공식적으로 신교의 예배가 인정되고 신교파 도시 200 여 개에 자치권이 부여되는등 외견상 신구교도의 차별을 없애고 지루한 종교 내란은 일단 막을 내렸지만 내용상으로국교를 카톨릭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신, 구 교도간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4) 네덜란드(Netherlands)의 독립전쟁

네덜란드의 상징 풍차. 지금은 관광용으로 전시신대륙과인도항로가 개척되고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 쪽으로 옮겨지면서, 이탈리아의도시들이 쇠퇴한 반면, 이를 대신해서 대서양 연안국가들이 부상하기 시작하였는데그 가운데 중심에 우뚝 선 것은 중세이래 유럽에서 가장 상공업이 발달했던 네덜란드. 지금은 꽃과 풍차(현재는 관관용으로 몇 개만 보존)로 대변되는 이 네덜란드가, 당시는유럽경제의 심장과 다름없었던 관계로 자연적으로 이를 노리는 세력들이 도처에있어서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에 따라 네덜란드는 홀란트가(家)를비롯한 몇몇 봉건국가의 영유지가 되었으며, 13세기말에는 부르고뉴가의 필리프 선공(善公)이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전역을 지배, 그러나 이들 지역은 정치적인혜택을 받지 못하고 한자동맹에 가입,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면서 상공업을 발전시키고있었는데, 1477년 부르고뉴가의 상속자 샤를 용담(勇擔)왕의 딸 마리아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家)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후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아들 (에스파냐 왕 펠리페 1세), 손자 (카를 5세)의 지배를받았습니다.

1516년 카를 5세가 에스파냐의 펠리페 1세의 뒤를이어, 혈연관계로 (그의 어머니가 에스파냐 상속녀 후아나) 에스파냐 왕위를 차지하였고,다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경합, 1519년에는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에카를 5세가 지배했던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속령(屬領)이나 다름없이 되었는데,그러나 네덜란드의 17개 주는 이미 15세기이래 자치권을 획득, 지배자가 누구이든정치적으로 별로 속박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자치권이 침해당하지 않았다면 큰문제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16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루터파가 들어오고뒤이어 칼뱅파가 들어와 신교도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등 전반적인 변혁의 고비를맞고 있었습니다.

이에 카를 5세는 네덜란드의 신교도를 압박, 그가은퇴한 1556년까지 처형된 신교도의 숫자는 1천명을 넘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서곡에 불과, 프랑스 앙리 2세의 지원으로 독일의 신교도가 우세한 가운데 아우크스부르크종교화의(1555)로 신교도를 승인하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황제자리는 동생에게 에스파냐국왕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자 이제 네덜란드는 펠리페 2세가다스리는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그의 신교도 탄압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으며,자치권은 손상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그의 의매(義妹) 파르마공 마가렛(Margaretof Austria, duchess of Parma / 1522 ~ 86)을 네덜란드 총독에 임명하고, 그를 통해서에스파냐식 종교재판을 강화, 정치적 종교적 압박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하자, 이에맞서 네덜란드측에서는 1565년 320 여명의 귀족이 단결, 에스파냐의 압정에 반기를들게 되었고, 1566년에는 신교도의 탄압과 종교재판의 중지를 총독에게 청원하였으나,총독은 이들을 거지(Goizen, Goisen)의 무리로 매도하고 거절 하였는데, 이후 네덜란드의칼뱅파에게 고이젠(거지)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원이 거절되고 에스파냐 상류 층으로부터 거지소리를듣게 된 일부 과격한 신교도들이 교회에 난입, 성상(聖像) 등을 파괴하고 폭동을일으키자, 민중들이 여기에 가세, 삽시간에 폭동은 확대되었고, 펠리페 2세는 알바공(duquede Alba. Don Fadrique de Toledo)에게 1만명의 군대를 주어 네덜란드에 파견, 더욱가혹하게 탄압했는데, 67년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부임해온 알바공은 "혈(血)의평의회(評議會)"라는 심문소(審問所)를 개설하여 그가 총독으로 머문 6년간,지도자인 에그몬트와 호른 등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宗敎裁判)으로 처단하였고,이를 피해 10만명 이상이 영국, 독일 등 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 사이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력한 귀족 오라녜공빌렘(영; William 1, prince of Orange / 1533 ~ 84)은 네덜란드 인의 자유와 자치권회복을 위한 독립전쟁의 막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러나 서전(序戰)에서 계속 패배하였고,총독 알바공은 전쟁비용을 조달하려고 네덜란드 인에게 중세를 부과(1569), 모든동산과 부동산에 대해서 1 %, 상품매출 10%, 부동산 매각 5 %의 세금을 물게 하자,대부분 상업에 의존하고 있던 네덜란드 인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되고 경제는 급속도로하강 곡선을 긋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1572년부터는 종교투쟁에서 독립전쟁으로 양상이바뀌었는데, 그후 에스파냐에서는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불하지 않자, 이에 병사들은봉급 대신 안트베르펜 시가지를 마구 약탈, 이 과정에서 시민 7천여 명이 회생되었으며,삽시간에 도시는 유령 화되고 말았는데(1576) 안트베르펜(Antwerpen)을 영어에서는앤트워프(Antwerp), 프랑스어로는 앙베르(Anvers)라고도 하며, 지금도 벨기에의 땅으로번영되고 있지만 당시는 유럽 제1의 무역항으로서 동시에 금융업의 중심지가 되어있었고, 세계 최초의 주식거래소가 생긴 곳으로(1531), 이런 안트베르펜의 약탈이있고 나서 네덜란드 17개 주는 공동의 독립투쟁을 결의, 간의 협약(브뤼셀동맹)을체결하고 공동으로 에스파냐에 대항, 독립전쟁을 본격화 시켰습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종교적으로 대립해 있는데다가, 경제적으로도이해관계를 달리한 남, 북 간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고, 여기에 새로 부임해온 총독 파르마공(公)의 이간 책으로 1578년 남부 10개 주(벨기에)는 에스파냐와화평하고, 독립전쟁에서 이탈, 그러나 북부 7개 주는 더욱 단결을 강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결성하고, 항전을 계속, 81년 7월 독립을 선언하고 빌렘(윌리엄)을 초대 총독으로하는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설립하였습니다.

1584년 빌렘(윌리엄)이 카톨릭 교도에게 암살되었으나,이후에도 항전을 계속, 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되어 국제적 지위가하락되고 재정적으로 궁핍한 데다 펠리페 2세가 사망함으로써(1598), 네덜란드의독립전쟁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 펠리페 3세가 즉위한 이후 1609년 에스파냐와12년간의 휴전조약(休戰條約)을 체결, 휴전이 만료된 이후 전쟁은 재개되었으나,결국 15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국제적 승인을 얻음으로써 독립전쟁도 막을 내리게되었습니다.

이후 유럽의 종교 전쟁은 독일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 1648)으로 함축 혹은 확대 종결되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기겠습니다.

다음 이야기  - 몽골의 후예 티무르와 무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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