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푸른사상』 2026년 여름호
【김남주 읽기 · 6】
남주 형은 정의의 길을 걸었습니다
대담 : 김덕종(김남주 시인 동생) | 맹문재(시인)
일시 : 2026년 2월 13일(금)
장소 : 김남주 시인 생가(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참석자 : 이승철(시인), 김이하(시인), 김수(시인), 김여옥(시인)
사진 : 김이하(시인)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김남주 시인 30주기를 맞이해 시인과 함께한 분들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마련해 ‘김남주 읽기’라는 꼭지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박광숙, 이강, 김정길, 박석삼, 김양현 선생님께서 함께해주셨어요. 오늘 김남주 시인의 동생이 되는 덕종 선생님을 뵙게 되어 감사합니다.
김남주 시인은 1945년 10월 16일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 사이에서 태어나요. 남자 형제로는 남식과 덕종이 있고, 여자 형제로는 남심, 유순, 숙자가 있지요. 김남주 시인의 형이 되는 남식 어른은 살아계시는지요?
김덕종 :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들이 둘 있어요.
맹문재 : 큰 여동생인 남심 선생님은 어떠하신지요?
김덕종 : 남심은 둘째로, 남주 형의 누님이 되어요. 세 살 차이예요. 해남에 삼남매를 두고 살고 있어요. 유순 동생은 서울에 살고 있고, 숙자 동생은 해남에 살고 있어요. 나와 남주 형과는 여덟 살 차이가 나요.
맹문재 : 해남에 사시는 형제자매분들이 많네요. 김남주 시인은 삼화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기존에는 삼산초등학교로 알려져 있는데, 제가 『김남주 산문 전집』을 간행하면서 덕종 선생님께 여쭈어보니 삼화초등학교로 알려주셨지요.
김덕종 : 삼산면에는 초등학교가 삼산초등학교, 삼산남초등학교, 삼화초등학교 세 곳이 있었어요. 삼화초등학교는 가장 늦게 지어진 학교로 남주 형은 7회 졸업생이에요.
김여옥 : 제 생각으로는 삼화초등학교 이름은 삼산면과 화산면이 합쳐져 생긴 것 같아요. 실제로 주소는 삼산면이지만 생활권은 화산면에 있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김덕종 :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맹문재 :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삼화초등학교의 역사가 이해되네요. 김남주 시인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해남중학교로 진학해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면 좀 들려주세요.
김덕종 : 중학교가 집에서 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남주 형은 걸어서 다녔어요. 형이 해남중학교를 구경시켜준 일이 있었어요. 나를 데리고 읍내 구경을 시켜주고, 중학교 교실에까지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아이스케키라고 부르는 얼음과자를 사주었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감동했어요. 형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패지치기를 잘했었어요. 딱지치기를 그때는 패지치기라고 불렀어요. 다마치기, 다시 말해 구슬치기도 잘했어요. 형은 치기를 해서 딴 딱지와 구슬을 나에게 주었는데, 대마바지의 호주머니가 처질 정도였어요. 나는 그것들을 장독대의 항아리 속에 감추곤 했어요.
맹문재 : 아버지와 어머니는 김남주 아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요?
김덕종 :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는 남주 형을 아주 사랑했어요. 어머니는 남주 형밖에 모르다시피 했어요. 달걀도 쌀독에 숨겨두었다가 삶아주곤 했어요. 남주 형이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지요.
맹문재 : 남식이라는 큰아들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김덕종 : 큰형님은 좋은 대학을 다니지 않아 아버지 어머니가 만족하시지 못한 것 같아요. 큰형님은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갔는데, 제대한 뒤 복학하지 않고 바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업이 잘 안되어 집안의 재산을 많이 축냈어요.
맹문재 :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어떠했는지요?
김덕종 : 아버지는 술을 안 드시면 어머니와 사이가 아주 좋았어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부엌일도 하시고, 밭에서 채소도 따오시고, 낚시로 붕어를 잡아 오면 손수 손질을 하셨어요. 그 당시의 봉건적 관습이 전혀 없었어요. 아버지가 머슴살이하는 집의 무남독녀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잘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아버지가 밖에서 술을 들고 집에 오시면 어머니가 걱정되어 잔소리했는데, 그러면 아버지도 불만으로 대꾸하셨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1964년(19세) 재수해서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해요. 명문고에 입학했으니 부모님께서 매우 좋아하셨겠어요?
김덕종 :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중학교 선생님들이 우리 집에 가끔 찾아왔어요.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고 칭찬하셨어요. 집에서는 닭을 잡아 선생님들을 대접했어요. 해남군에서 광주일고로 진학하는 학생은 한 해에 한둘이 될까 말까 했어요. 그만큼 입학하기가 어려웠어요. 남주 형이 공부를 잘해 집안에서 기대하는 바가 컸어요. 형은 하숙 생활을 했어요. 그 당시 큰형님이 광주에서 살고 있어 함께 살았는데, 큰형이 광주 생활을 정리하자 남주 형은 동명동 186번지에서 하숙을 했어요. 내가 남주 형 하숙집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돈을 전신환이나 통신환으로 해남 우체국에 가서 부치는 일을 했기에 주소를 기억해요. 남주 형은 나찬주 댁에서 하숙했는데, 그 집의 딸과과 친하게 지내었어요. 남주 형이 옥고를 치를 때 그분이 우리 집에 책을 서너 권 사 가지고 와서 영치해 달라고 부탁도 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2학년 때 학교를 자퇴해요. 왜 자퇴를 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요?
김덕종 : 아버지 어머니는 남주 형이 자퇴했는지 모르고 있었어요. 형이 집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남주 형이 자퇴한 이유는 억압적인 제도 교육에 반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러한 면이 있겠고, 다른 면도 있을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형은 자퇴한 뒤 검정고시를 합격했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1969년 스물두 살 때 전남대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해요. 이강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워낙 머리가 좋아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합격했다고 해요. 아버지와 어마니의 반응이 어떠했는지요? 공부를 잘했으니 기대가 컸을 것 같은데요.
김덕종 : 집안에서는 남주 형의 입학에 불만이 있지는 않았어요. 입학 성적이 아주 좋았다고 형이 나에게 직접 말했어요. 형의 머리가 좋다는 것은 언젠가 장기를 둔 적이 있는데, 그때 알았어요. 나는 동네에서 장기를 썩 잘 두는 편이었어요. 형이 『함성』지 사건으로 풀려난 뒤 집에 와 있는 동안 나와 장기를 두었는데, 내가 판판이 졌어요. 형이 감옥에서 장기를 배웠다고 했지만, 그 기간이 1년밖에 안 되었잖아요. 형이 어찌나 장기를 잘 두는지 깜짝 놀랐어요.
맹문재 :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남주 시인은 입학한 뒤 10월유신을 반대하는 행동으로 이강 친구와 『함성』이라는 유인물을 제작해요. 그리고 광주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고발』지를 다시 제작해 서울로 보내려다가 발각되어요. 그 일로 많은 학생이 체포되고 구속되고 기소되었지요. 그때 상황을 좀 들려주시지요.
김덕종 : 1973년 2월 밤에 남주 형이 허겁지겁 집에 와서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나에게 읽어보라고 했어요. 『함성』지였는데, 내용이 반유신 반독재 등이었어요. 형은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고는 1장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불태워버리라고 했어요. 형의 말 대로 한 부를 꼭꼭 숨겨 놓고 나머지를 처리했어요.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광주 대공분실 요원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어요. 그리고는 『함성』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대로 돌아갔는데, 다음 날 다시 찾아왔어요. 김남주가 다 이야기했다고 하면서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모른다고 끝까지 우겼어요. 그랬더니 인상이 험악해지면서 나를 체포해 대공분실로 데리고 갔어요. 상관한테 나를 잡아 왔다고 보고하니, 상관이 직접 나서서 나에게 『함성』지가 집에 있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없다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바로 취조실로 데려가 무지막지하게 고문을 가했어요. 손을 펴게 해놓고 망치로 손톱을 찍어 피가 나기도 했어요. 그래도 나는 안 불었어요. 만약에 불면 남주 형한테 안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틀 뒤에도 고문이 계속 진행되었어요. 그러더니 고문하던 요원이 “너, 형 면회할래?”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나를 접견실에 데리고 갔어요. 문이 작아 형의 얼굴은 볼 수 없었고 입만 보였어요. 남주 형은 나에게 “덕종아, 사실대로 얘기해.”라고 말했어요. 그래도 나는 형을 위해 불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고문하던 요원이 내가 답답하고 안타깝다고 여기고 왜 그러느냐고 말했어요. 그래서 내가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대로 말했어요. 그래서 사진 찍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집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저녁 아홉 시쯤 도착했는데, 아버지 하고 부르니 당신이 바로 눈물을 쏟으셨어요. 농사만 짓는 나까지 당할까 걱정이 되셨겠지요.
맹문재 :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어요. 김남주 시인은 친구 이강과 함께 재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는데, 검찰의 상고 포기로 1973년 12월 28일 석방되었어요. 그 상황을 좀 더 듣고 싶네요.
김덕종 : 2심 재판이 끝났는데 검사가 항소를 취소해 광주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그날 밤 홍남순 변호사 집에 가서 인사를 드렸고, 다음날 집으로 왔어요. 남주 형은 집에 와서 아버지한테 자신의 길을 확실하게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세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불의와 싸우는 정의의 길이고, 다른 하는 그것과 반대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엉거주춤하는 길”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형은 자신이 걸어갈 길은 정의의 길이라고, 싸우는 사람이 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나는 상당히 놀랐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대나무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쏠리는 것이 좋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 나름대로 삶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이지요.
아버지의 삶은 정말 드라마틱했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어요. 하루에 세 시간만 자고 일했을 정도였어요. 아버지는 농사 외에도 많은 일을 했어요. 가령 논도랑에 모이는 참게를 잡아 읍에 나가서 팔았어요. 삽을 메고 가다가 길에 소똥이 있으면 긁어서 거름으로 썼어요. 고무신도 남들이 보면 신고, 남들이 보지 않으면 벗고 다닐 정도로 아꼈어요. 또한 중선을 사서 배 사업을 해 돈을 벌었어요. 배 사업은 풍랑 등으로 위험해 오래 하지는 않았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시를 써서 197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투고해 실리게 되어요. 그 상황을 좀 말씀해주시지요.
김덕종 : 남주 형이 시켜서 우체국에 가서 작품을 부쳤어요. 『씨알의 소리』에도 부쳤어요. 어느 날 남주 형이 창비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면서 우체국에 가서 현금으로 바꾸어 오라고 전신환을 주었어요. 그리고 아버지께 드린다고 소주를 한 병 사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원고료가 1만 5천원인가 했어요. 그래서 됫병 소주를 사왔는데, 아버지가 좋아하셨어요. 아버지는 자주 이웃에 있는 큰집 성순이 형님네를 부러워했어요. 큰집 자식들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술과 담배를 사서 아버지께 사드릴 정도로 잘했어요. 아버지는 우리 집에는 그러한 자식이 없다고 푸념하셨던 것이지요. (웃음)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1975년 광주에서 ‘카프카’란 서점을 운영해요. 문단의 사랑방 역할을 하면서 광주 지역 운동권의 중심지가 되어요. 그렇지만 1년 만에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아요. 그리고 전남대 후배인 김정길의 집에서 칩거해요. 광주 봉선동에 있는 봉심정이었는데, 그 상황을 듣고 싶네요.
김덕종 : 나는 1976년 5월 13일 군 입대해 15일 부족한 3년 복무를 하고 1979년 3월 27일 제대했어요. 그러는 동안 남주 형은 광주에 가서 카프카 서점을 운영하고 농민회 활동을 했어요. 따라서 나는 그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몰라요. 제대한 뒤 카프카 서점에 가보았어요. 사람은 없고 헌책만 벽에 정리되어 있었어요.
맹문재 : 그렇군요. 김남주 시인은 덕종 동생이 군대 생활을 하는 시기인 1978년 광주의 녹두서점에서 『파리 코뮌』을 강독한 일이 문제가 되어 중앙정보부의 수배를 받게 되어요. 그리고 서울로 피신해 지내는 동안 박석률을 통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해서 활동해요.
김덕종 : 제대한 뒤 녹두서점을 운영한 김상윤 형을 찾아가 남주 형의 거처를 알려고 했지만, 끝내 알 수 없었어요.
맹문재 : 1979년 10월 4일 김남주 시인은 남민전의 총책인 이재문 등과 잠실의 아파트에서 체포되어요. 그리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가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1980년 2월 4일부터 공판이 시작되는데, 그 상황이 궁금하네요.
김덕종 : 내가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어 남민전 사건이 터졌어요. 어느 날 점방에 붙은 형의 수배 사진을 보았어요. 그래서 몰래 형의 사진을 찢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사건이 뒤 나를 광주의 대공분실에서 고문했던 김 모 요원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그가 남주 형을 조사하고 있다며 내복 한 벌을 사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면회는 안 되지만 감옥에 넣어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남주 형에게 줄 내복을 사서 서울 무교동인가에 있는, 신한문역회사라는 간판이 붙은 안기부에 간 일이 있어요. 내가 애걸복걸해도 남주 형을 면회시켜주지 않았어요.
맹문재 : 남민전 사건이 알려지기 6개월 전인 1979년 4월 아버지께서 별세해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김남주 시인에게 남긴 말씀이 있는지요?
김덕종 :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주야, 남주야!”하고 몇 번 불렀어요. 아버지가 남주 형을 매우 보고 싶어했어요. 그 전에 아버지는 진갤논 일곱 마지기를 남주 형한테 주라고 식구들에게 말했어요.
맹문재 : 1980년 12월 23일 김남주 시인은 대법원에서 15년 징역형을 받아요. 그래서 가족 면회가 시작되는데, 어떻게 하셨는지요?
김덕종 : 재판 중에 서울에 면회를 간 적이 있었는데, 남주 형이 광주교도소로 옮긴 뒤부터는 매월 다녔어요.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허용되었어요.
맹문재 : 박광숙 선생님은 언제부터 면회를 가게 되었는지요?
김덕종 : 1980년 가을 경기도 가평에서 박광숙이라는 분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왔어요. 여문 밤을 곱게 싸서 동봉했어요. 편지의 내용은 해남의 우리 집으로 찾아오겠다는 것이었어요. 편지를 보낸 지 얼마 안 되어 여성 두 분이 찾아왔어요. 나는 어머니하고 마당에서 콩 타작을 하고 있었어요. 그분은 형의 옥바라지를 결심하고 온 것이었어요. 면회는 직계가족만 할 수 있으니 옥중 결혼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그 일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남주 형한테 면회해서 물어보겠다고 말했어요. 그러고 나서 면회할 때 형한테 그분의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남주 형은 “어떻게 해야 할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랑하는 사이라기보다는 같이 일했던 사람으로서 하는 일이니 오해 없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그분하고 합의해서 서류를 준비하고 혼인 신고를 했어요. 그 뒤부터 형수와 함께 남주 형에게 면회를 갔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그 뒤 동생과 박광숙 여사에게 많은 편지를 보내요. 그러면서 감옥에서 쓴 시가 밖으로 전달되어 시집 간행까지 이루어져요. 어떻게 가능했는지요?
김덕종 : 남주 형은 편지로 나에게 책 부탁을 했고, 내가 살아갈 진로나 방향을 알려주었어요. 사회의 모순과 형이 왜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도 썼어요. 남주 형의 시는 가족 초청 좌담회 때 두세 번 전달되었어요. 그 좌담회는 열린 공간에서 접견이 이루어졌어요. 또 사식이 들어갈 수 있었어요. 형은 그때 써온 시를 교도관이 눈을 돌릴 때 감쪽같이 전달했어요.
형이 다 읽은 책들은 면회 때 받아왔어요. 책을 많이 읽어 받아올 때마다 무거웠어요. 한 번은 면회를 가니까 형이 『루카치 전집』을 전해주면서 책을 한번 보라고 말했어요. 일본어로 된 책이었어요. 내가 일본어를 읽을 수 없는데, 형이 그 말을 했다는 것은 분명 무엇인가 있다는 암시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집에 가져와서 아무리 살펴봐도 특별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어요. 밑줄 친 곳도 없었어요. 근동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책을 들고 가서 도움을 받으려고도 했어요. 그러다가 문득 책등에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책등을 뜯었더니 거기에 「학살」 등 7편의 시가 있었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참으로 우여곡절 끝에 「학살」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네요. 시를 소개해볼게요.
학살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이승철 : 고규태 시인이 그 시들을 시집으로 간행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시 원고가 사라질 수 있으니까 일일이 테이프로 녹음했대요. 『농부의 밤』에 실린 시들이 그렇게 모은 것이라고 해요.
맹문재 : 그 힘든 과정을 거쳐 1984년 12월 10일 첫 시집 『진혼가』(청사)가 출간되어요. 그리고 1987년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인동), 1988년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남풍) 등이 출간되어요. 옥중 시집이 간행될 때마다 교도소에서 난리가 났을 것으로 보이네요.
김덕종 : 보안과에서 사실을 캐려고 야단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남주 형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빨리 접견했으면 좋겠다, 박광숙도 함께 왔으면 좋겠다, 특별면회를 신청해라 등의 내용이었어요. 그때는 형이 전주교도소에 있었어요. 형이 부탁한 대로 교도소에 가서 특별면회를 신청했는데, 보안과장에 직접 나와서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특별면회를 허락하지 않으면 일반면회를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특별면회는 열린 공간에서 30분 정도 접견할 수 있는 반면에, 일반면회는 얼굴이 가려진 채 구멍 뚫린 데서 몇 분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차이가 컸지요. 내가 우겼더니 특별면회가 허락되었어요.
남주 형은 우리를 보더니 “요즘 시중에서 내 시집이 출판되어 서점에서 팔린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시치미를 떼고 물었어요. 그래서 나도 “형이 연필도 종이도 없으니 시를 쓸 수 없고, 가족이 시를 빼낼 수도 없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네요.”라고 답변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형이 감옥에 오기 전에 긁적거린 시들이 돌아다니다가 형의 시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낸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형도 “그래 맞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맞장구를 쳤어요. 우리의 이야기를 교도관이 다 듣고 있었어요. 그것을 형과 나는 역으로 이용한 것이지요. 형은 자신이 시집 출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일종의 알리바이를 입증한 것이지요. 형은 ‘이 자식 괜찮네, 내 동생 답네’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웃음) 형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한두 번 한 적이 있어요.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면서기가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보고 멱살을 쥐어 잡고 패려고 하니 면서기가 도망간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본 형이 잘했다고 말했거든요.
맹문재 : 1988년 12월 21일 김남주 시인이 국내외의 많은 사람의 석방 운동에 힘입어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어요. 9년 3개월 만에 형집행 정지 조치였어요. 석방된 날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김덕종 :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와 서울에서 내려온 남식 형, 그리고 내가 갔어요. 박광숙 형수도 갔어요. 모직으로 된 양복을 마련했어요. 날씨가 추운 겨울이어서 오리털 파카 등 좀 더 따뜻한 옷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미안했어요. 나는 형이 집으로 올 줄 알았는데 서울로 간다고 해서 조금 섭섭한 마음도 있었어요. 형은 문인 등에 둘러싸여 광주로 갔다가 며칠 뒤 집으로 왔어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공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사할 데가 많았겠지요. 망월동의 윤상원 열사 묘소 등 5·18묘역에 참배한 것이 그 한 모습이지요. 김남주 시인이 집에 왔을 때의 모습이 궁금하네요.
김덕종 :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잔치를 열었어요. 동네 마을회관에서도 형을 초대해 꽃다발을 안겨주었어요. 나는 그 모습에 크게 감동했어요. 참으로 고마웠어요. 남민전 사건으로 형이 구속되자 경찰들이 수시로 동네에 왔어요. 그렇게 되자 사람들이 피해가 크다고 우리 집을 좋지 않게 생각했어요. 간첩 사는 동네라고 이웃 동네 사람들도 그렇게 여겼어요.
맹문재 : 마을 분들이 김남주 시인을 환영해준 상황이 눈에 선하네요. 김남주 시인은 집으로 돌아온 뒤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요?
김덕종 : 형은 집에 오래 있지 않고 아내가 있는 서울 목동의 집으로 갔어요. 장래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맹문재 : 김남주 시인은 1989년 1월 29일 문빈정사에서 지선 스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려요. 그 상황을 듣고 싶네요.
김덕종 : 형의 결혼은 가족 잔치 차원을 넘는 일이었어요. 가족은 열외일 정도였어요. 많은 사람이 참석했고, 언론들의 관심도 대단했어요.
맹문재 : 참으로 감격스러운 잔치였네요. 김남주 시인이 결혼한 뒤에는 고향의 가족과는 사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했겠네요.
김덕종 : 형이 결혼한 뒤 목동의 집에 여러 차례 갔어요. 강화도에 마련한 집에도 갔어요. 어느 날 가족이 모여 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형이 두어 점 먹더니 안 드시는 것이었어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소화가 잘 안 된다, 백병원에서 십이지장 궤양이라고 하더라, 십이지장 궤양에 걸리면 어떠한 암도 안 걸린다고 하더라 등으로 말하셨어요.
그렇게 알고 집에 내려와 생활하는데, 어느 날 새벽, 날이 새기 전인데 이강 형한테 전화가 왔어요. 뭔가 기분이 영 안 좋은 느낌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남주 형이 췌장암에 걸렸다고 조남중 박사가 있는 병원으로 빨리 오라고 했어요. 앞이 캄캄했어요. 그래서 광주로 올라가 내가 운전해서 단식하는 데, 무주 구천동 한의원 등에 들려 목동으로 형을 모시고 갔어요. 하룻밤을 넘기고 양의와 한의를 겸한다는 경희의료원에 가서 판독하고, 고려병원에 입원했어요. 지렁이 암치료도 해보았어요. 그러다가 1994년 2월 13일 돌아가셨어요. 바로 오늘이에요.
맹문재 : 고려병원에 찾아뵈었을 때가 엊그제 같네요. 그 자리에서 제가 박민규 시인하고 김남주 선생님을 간병하기로 약속했지요. 김남주 시인이 돌아가실 때의 모습은 어떠했는지요?
김덕종 : 형님이 돌아가시는 날 몹시 괴로워하셨어요. 그렇지만 정신은 아주 초롱초롱했어요.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돌아가셨어요.
맹문재 : 제가 생각하기에는 김남주 시인의 췌장암은 고문 후유증일 가능성이 있어요. 그리고 좀 쉬셔야 했는데, 시대가 부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지요.
김덕종 : 고문 후유증이 컸어요. 등 쪽을 때리면 멍이 드는데, 잘 치료하지 않으면 암으로 된다고 의사가 이야기했어요. 장례식도 가족은 인사나 할 정도이고 주위에서 다 치러주었어요. 김대중 선생님도 문상을 오셨어요. 대단한 분이시지요. 어머니는 남주 형이 감옥에 간 뒤 항상 장독에 물을 떠 놓고 빌고, 절에도 다니셨어요. 오늘따라 남주 형이 많이 그립네요.
맹문재 : 긴 시간 귀한 말씀 감사해요. 늘 건강하세요.
■ 김덕종
1953년 출생. 김남주 시인의 동생.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의장 역임.
■ 맹문재
1993년 김남주, 신경림 시인의 심사로 전태일문학상을 받았고, 『김남주 산문 전집』을 간행했다. 공저로 『김남주 시인의 삶과 문학』, 논문으로 「김남주 시가 수용한 파블로 네루다의 삶과 시」가 있다. 김남주기념홀 건립 전문위원, 김남주 시인 개인화 음성합성 기술(P-TTS) 서비스 플랫폼 구축 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안양대 교수이다.
【발굴 자료】
[해설] 현실과의 대결 의지와 저항 의식의 투철함
김남주(시인)
1.
대한민국의 모든 교도소에는 교회당이라는 것이 있다. 교회당(敎誨堂)이란 글자 그대로 가르칠 교(敎)에 뉘우칠 회(誨)다. ‘가르침을 받아 뉘우치는 집’인 셈이다. 80년대 초에 필자가 감금되어 있었던 광주교도소에도 이런 교회당이 있었다. 어느 교회당과 마찬가지로 그곳의 교회당에서도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각 종파가 일주일에 한번씩 번갈아가면서 종교집회를 갖고 있었다.
일반 재소자들이 교회당에 나가는 목적은 각양각색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통된 한 가지 점은 거기 가면 공짜로 먹을 수 있는 빵이며, 과자며, 과일이며, 떡 따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회에 참석하는 재소자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떡신자’라고 부른다. 또 어떤 재소자들은 기독교 집회에도 가고 불교 집회에도 가고 천주교 집회에도 가서 염치 불구하고 종교단체에서 나눠주는 빵이며 떡 등을 얻어먹게 되는데 이런 자기들을 ‘기불천교도’들이라고 부른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모든 종교의 신자라는 뜻이다.
이런 실정이기 때문에 각 종파는 집회에 보다 많은 재소자를 오게 하기 위해 언제나 푸짐한 먹을 것을 준비해오기 마련이다. 만약에 먹거리의 준비 없이 집회를 갖게 되면 그 집회는 결코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집회에 참석한 ‘떡신자’들이 잡담과 헛기침 소리와 그외 다른 짓거리로 장내 분위기를 망쳐놓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종파가 집회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한 과일이며 빵이며 떡이며 과자 상자를 교회당의 단상에 쌓아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떡신자’들은 그 떡에 군침을 삼키며 ‘가르침을 받아 뉘우치는’ 예배에 다소곳이 임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광경을 보고 ‘물질은 신앙에 앞선다’며 실존주의자인 체 할지도 모른다. (그의 시 「허천병」 참조) 그러나 정치범들이 교회당에 나가는 것은 그 목적이 떡에 있지 않고 다른 데 있다. 물론 신앙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정보교환,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이다. 아니 유일한 목적이다. 정보교환이란 다름 아니고 담 밖의 정치동향이다. 정치범들은 다른 재소자들과는 달리 엄격하게 분리 수용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장소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로 각자가 수집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필자가 김하늬 시인을 처음 대면한 것도 바로 이런 곳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82년 초여름 광주교도소 교회당 2층에서 필자는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이다. 그에 대한 필자의 첫 인상은 아주 강력했다. 네모로 각이 진 큰 얼굴, 꼭 다문 입술, 약간 핏기가 도는 부리부리한 눈, 이런 것들에서 풍겨나오는 어떤 힘이 필자로 하여금 그런 인상을 받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와 나눈 대화 속에서 필자는 현실과의 대결의지가 철의 규율처럼 완강하고 불의의 세계에 대한 저항의식의 투철함이 불요불굴하다는 것을 금방 피부로 느꼈다. 그래서 필자는 신속하게 그에게로 빨려들어 갔던 것이다.
2.
유신말기인 1979년 여름에 김하늬는 20대 초반의 피끓는 젊은이였다. 그는 그때 벌써 『우리는 만나야 한다」라는 시집을 내놓고 있었다. 통일을 주제로 한 이 시집은 그 당시의 암울한 정치상황에서는 감히 용기가 아니면 엄두도 못낼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민족, 해방, 계급, 통일 등의 언어들은 그 무렵 아무도 공공연하게 입에 올릴 수 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하늬 시인은 그것을 피의 문자로써 백지에 기록했던 것이다. 이런 시인의 용기와 선구자적인 발상은 당연히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특히 70년대에 가장 촉망되는 민중, 민족시인인 김준태의 격찬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통일을 주제로 한 그의 『우리는 만나야 한다』라는 시집은 조금은 관념적이고 당위적인 데가 없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시인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대 현실로 비추어 볼때 통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시에 삶의 구체성을 불어넣기 위해 현실의 밑바닥에로의 침잠을 기도한다. 그것이 박정권의 몰락과 동시에 시인이 가족과 함께 서울로 입성하여 포장마차, 행상 등을 하며 비참한 도시빈민 삶에의 동참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때가 박 아무개 정권이 제국주의 세력의 음모와 공작에 의해 붕괴된 직후이다. 그래서 김하늬의 두번째 시집 『안개주의보』는 시인의 서울 수색동 시절의 험난하고 고뇌에 찬 삶의 결정이다. 시집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이 시집의 대부분의 시들은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상황의 오리무중을 주로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군사파쇼 정권의 계속이냐, 민주주의 정권의 새로운 창출이냐를 판가름하는 와중에서 시인은 뚜렷한 전망을 가지지 못하고 사상적인 방황을 하게 되는데 이 방황의 시적 표현이 『안개주의보』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방황은 김하늬 시인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방황의 책임 또한 그에게만 지워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방황은 시대 전체의 분위기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인이 모두 공유하는 정서인 것이다. 그의 두번째 시집 『안개주의보』가 나온지 꼭 두 달 만인 1980년 5월. 그는 서울에서 광주에서의 민주세력에 대한 군사파쇼집단의 대량학살 소식을 접한다. 그리하여 그는 절망한다. 광주로 갈 수 있는 모든 길이 완전히 봉쇄된 상태에서 그는 온몸으로, 온몸으로 몸부림치고 울부짓는다. 그것은 불의에 항거하다 희생된 민중들에 대한 시인의 죄의식이고 울분이고 분노였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자주성과 노동자, 농민 등 근로대중의 정치적인 자유에 대한 열망을 야만적으로 압살하는 제국주의 세력과 그와 결탁한 국내 반동세력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노와 절망, 증오와 적개심의 수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만은 없었다. 무엇인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절체 절명의 극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할 의무와 사명감은 시인으로 하여금 마침내 실천의 실마리를 찾게 한다. 그것은 비록 최소한의 것이긴 했지만 계엄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최소한의 몸짓은 당시로서는 최대한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소의 것이면서도 최대의 몸짓일 수도 있었던 시인의 저항은 광주 시민들의 영웅적인 저항에 대한 노래와 그것을 물리적인 힘으로 파괴하는 군부의 야만적인 학살에 대한 폭로로 나타난다. 시인은 수색 근처에 있는 인쇄소에서 저항과 학살을 만인에게 알리고 나라 전체가 벌떼처럼 일어나 오월 광주항쟁과 함께 불의의 세력을 때려눕힐 것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살포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범죄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불의의 군사집단은 이미 신문사 방송국 등 대중매체기관을 장악하고 있었고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인쇄소에도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결국 시인의 계획은 좌절되고 계엄사령부로 연행된 시인은 혹독한 심문을 받기에 이른다. 다행한 일인지 불행한 일인지 시인 자신도 판단이 잘 서지않는 상태에서 시인은 일주일만에 자유의 몸이 된다. 시인은 차라리 투옥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죄’가 경미하여 ‘훈방’ 되는 것을 부끄러워 했던 것이다.
그후 시인은 다시 방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번의 방황은 이전의 방황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전의 방황은 시에 삶의 구체성을 담기 위한 빈민생활과 소시민적 생활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는 그런 방황이었지만 이번의 방황은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 이전의 인간적인 그러니까 보다 근원적인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의 운명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 갈등하게 된 것이다. 물론 시인 김하늬가 전에는 공동체의 운명에서 자기 삶을 떼어내어 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관계가 보다 덜 치열하고 보다 덜 적극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엄청난 물리력 앞에서, 그앞에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무자비하게 파괴되는 현실 앞에서 시인은 공동체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 해야겠다는 절실한 요구를 강제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의식 이전의 실존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결국 시인은 이러한 객관적인 상황의 중압을 이기지 못하고 일단 서울 생활의 청산을 단행한다. 다음 행선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항쟁의 현장 광주였던 것이다. 광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인이 택한 광주는 과거의 광주, 그러니까 귀향으로의 광주는 아니다. 귀향이라는 언어가 담고 있는 서정적인 성격은 이미 광주에는, 적어도 시인의 광주에는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투쟁의 최전선으로서의 귀향이고 광주인 것이다. 투쟁의 최전선으로서의 광주에 내려가자마자 시인은 정력적으로 시를 쓰고 시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시낭송회와 시화전 등을 통하여 현실을 고발함으로써 광주민중항쟁의 의의와 성과를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작업을 전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의 전개 과정의 산물로서 나오게 된 것이 그의 세번째 시집 『오후의 외출』이다. 그러나 시인의 이런 자기 발전은 단선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갈등과 좌절이 중첩되고 그 와중에서 자연히 술의 힘에 자신을 의지하기도 하여 건강을 훼손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의해서 자기 삶이 규제를 받고 그런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삶의 행로가 굴절을 겪게 되기도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인간은 주위 환경을 변혁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는 것이다. 김하늬 시인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정한 정도의 규제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김하늬 시인이 역사의 구체적인 환경속에서 자기 위상을 바르게 설정해야겠다고 방황을 거듭하면서 고민하다가 급기야 어떤 행동의 결단을 내린 것은 1982년 3월 무렵이었다. 그것이 현실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5·18 광주항쟁 제2주기 기념 문학행사의 밤’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실패로 끝나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는데 이 불행은 그가 투옥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는 안전기획부 수사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서 심문을 받고 심문 과정에서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결국 4월 8일경에 이른바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터무니없는 낙인이 찍혀 광주교도소에 수감된다. (그의 시 「방」 참조) 그러나 그의 투쟁은 감옥이라고 해서 멈춰지지 않는다. 그는 당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박관현, 기종도, 조봉훈, 신영일, 임낙평 등과 교도소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반인권적인 처우에 단식으로서 저항을 계속한다. (그의 시 「단식」 참조) 이 저항으로 박관현은 옥사했고 신영일은 출소후 교도소에서 당한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그의 시 「관현 형님, 아아 박관현 형님」 참조) 이들 두 동지의 죽음은 김하늬 시인에게는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가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만기 출소할 때까지 이 충격은 조금도 치유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그를 괴롭히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결과는 결코 결과 그 자체로서 끝나지 않고 김하늬 시인에게 삶의 폭을 넓혀주었고 깊이를 더해주었던 것이다. (그의 시 「사모별곡 6」 참조) 뿐만 아니라 시인이 어떻게 현실에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까지도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김하늬 시인의 말을 빌자면 현실과 대결하는 자세에 있어서 홀로 각성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생각과 이념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의 공동연대 투쟁방식에 보다 접근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실로 중대한 발견이었던 셈이다. 그 뒤 김하늬 시인은 형량을 마치고도 계속 사회안전법에 저촉을 받아가며 보호관찰 대상자로 살아간다. (그의 시 「괴물 A」 참조) 그러다가 국문학을 전공한 여자와 결혼도 하게 되고 또 1985년 부터 본격적으로 『시문학』과 『민의』로 작품활동을 전개 하기도 한다. 그리고 『창작과 비평』 『실천문학』등이 폐간된 상황속에서 처음으로 각 현장간의 운동문학이 결집된 『해방시』 동인을 결성하기도 한다. 김해화, 김기홍, 오봉옥 등과 그는 우리들의 삶을 억압하는 각종 구조적인 모순의 틀을 벗기기 위한 해방의 문학을 실천하기로 작정을 하고 그의 네번째 시집인 『하늬바람』(1986)을 출간함과 아울러 그해 오월에 첫 동인지 『아, 그날의 꽃잎처럼』을 간행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기도 한다.
한편 그는 옥중에서 얻은 만성간염으로 해년마다 지금도 병원생활을 전전하고 있으며, 그리고 옥고의 후유증으로 오래 서 있지도 못하고 오래 걷지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창작에의 불을 끄지 않은 채 1988년도에 그의 다섯번째 시집인 『흥부타령』을 발간했을 뿐만아니라 얼마전에는 결혼식 기념으로 부부시집인 『그대에게 바치는 나의 노래』도 간행한 사실이 있다.
3.
문학이란 문학하는 주체가 몸소 겪은 삶의 반영이다.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의 사상이라는 것도 삶의 토대위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또 모름지기 그러해야 한다. 이것이 거꾸로 되어서 사상이나 관념을 가지고 현실의 삶을 설명하는 식이 되어서는 문학은 결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먼저 그 시인의 삶의 역정을 더듬는 일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이다. 필자가 김하늬 시인의 작품을 섣불리 일일히 분석하지 않고 그가 걸었던 삶의 주체적인 행로에 더 비중을 두고 그의 투철한 시 정신을 찾아 헤맨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일곱번째 시집이 되는 이번의 『희망론』 역시도 말하자면 그러한 관점에서 우선 이해 되어져야 하고 또한 새롭게 평가 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김하늬 시집 『희망론』, 자유사상사, 1991, 125∼13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