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남사모카페
 
 
 
카페 게시글
남사모의 역사 이야기 스크랩 숭례문(崇禮門)
니브 추천 0 조회 21 10.09.20 08: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숭례문(崇禮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서울숭례문

 


귀공포와추녀

 

 


공포와편액

 


천장

 

 

 

《 (1) 숭례문의 건축 연혁 》

숭례문은 현재 국보 제1호로서 가장 중요시하는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도성 8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인데 그것은 문화재적 가치에 의한 것 이외에도 수도의 위치상으로 경복궁의 남쪽에 있어 도성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교통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남대문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은 태조 5년 1월 도성을 쌓을 때부터이다. 월단(月斷)과 문루는 모두 기술과 시일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대체로 완성한 것은 동년 9월이었다. 그런데 1962년 남대문을 중수할 때 남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대들보셋이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 당시의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 당시의대들보이다. 태조 때 창건 당시의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註]이라고 묵서되어 있다. 홍무 29년은 태조 5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조 5년 도성의 제2차 공사를 완료한 것이 9월 24일이니 축성공사를 끝낸 지 12일 후인 10월 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을유)에 준공하였던 것이다.[註]따라서 숭례문은 태조 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개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조 7년(1398)에 개건한 남대문은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개축한 이유에 대하여 세종 15년(1433) 7월에 세종이 영의정 황희(黃喜)와 좌의정 맹사성(孟思誠) 및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권진(權軫)을 불러 여러 가지 국사를 의논할 때 세종은 다음과 같이 남대문 개축의 의사를 표현하였다.

「경복궁의 오른 팔의 산세는 낮고 확 트여서 포국(抱局)이 없는 까닭에, 남대문 밖에 못을 파고 문안에 지천사(支天寺)를 세운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남대문이 저렇게 낮고 평평한 것은 처음에 땅을 파서 편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땅을 높게 돋우어서 산맥에 연(連)하게 하고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떤가.[註]」

이에 의하여 세종은 남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에 구애되어 남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의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자는 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황희 이하 모든 대신들이 다 찬성하므로 곧 공사를 착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남대문 공사 뿐만 아니라, 강녕전의 개축, 경회루의 보첨 개수, 궁성의 북문 건축, 누각(漏刻)의 관후실(觀候室) 조성, 소격전동의 착지(鑿池), 혜정교천의 이착(移鑿), 가각고(架閣庫) 서변 개천의 석축(石築), 장의동의 착지, 내사복(內司僕) 오지(汚池)의 개착(開鑿), 남대문 외지(外池)의 석축 등 수많은 공사를 병행하게 되었으므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일시에 기공하는 것을 반대하고 풍년이 들 때에 하나씩 기공하여 민력을 휴양할 것을 청하므로 남대문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다.

이 때의 공사는 좌참찬(左參贊) 정분(鄭蓬)이 담당하였는데, 남대문의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

그러므로 실록에도 ‘신작숭례문(新作崇禮門)’[註]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공사는 세종 29년 8월에 시작하였으나, 그 해 11월에 일기가 매우 추우므로 사헌부의 계(啓)에 의하여 일시 공사를 중지하고,[註]이듬해 즉 세종 30년 봄에 다시 공사를 계속하였는데, 1962년에 발견된대들보가운데 ‘정통십삼년무진삼월십칠일손시입주상량(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巽時立柱上樑)’[註]이라고 묵서한 것이 곧 이 때의대들보로서,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준공일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세종 30년(1448) 5월 12일 (병신)에 한재(旱災)로 모든 공사를 혁파할 때 남대문 공사는 이미 완성을 고하게 되었으므로 혁파하지 아니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써 이 해 5월에 준공된 듯하다.[註]

요컨대 남대문은 태조 5년에 창건한 뒤 그 지대가 낮아 볼품이 없고 또 풍수지리설에 구애되어 세종 15년 (1433)에 그 지대를 돋우고 문을 높게 건축하려다가 여러 가지 공사로 곧 착수하지 못하고, 세종 29년 8월에 비로소 착공하여 겨울에 공사를 쉬고, 다음해 즉 세종 30년 봄에 공사를 계속하여 3월 17일에 상량하고 5월에 준공하였다.

그 후 32년을 지나 성종 10년(1479)에 이르러 남대문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개축하였다. 세종 30년에 남대문의 기지를 흙으로 높게 돋우고 그 위에 석문과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기울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종 9년 (1478) 3월 20일의 야대(夜對)에서 우승지 박숙진(朴叔?)이 아뢰기를

「고인이 말하기를 백성을 부릴 때에는 시기를 가려야 한다고 하였으며, 춘추에도 불시에 백성을 부리는 것을 비방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농사가 한창인데 남대문을 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문이 크게 기울어지지도 아니하였으며, 또 공사를 일으킬 때도 아닙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다만 이 문이 심히 기울어졌기 때문에 개작하라고 한 것이다. 명일 다시 조사하여 만일 심히 기울어지지 아니하였다면 정지하겠다.[註]」

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성종 9년(1478) 3월에 남대문이 크게 기울어졌으므로 바로 개작을 명하였으나, 우승지 박숙진이 농시(農時)를 이유로 반대하고 또 다른 공사도 있으므로 마침내 개작을 중지하고,[註]이듬해 즉 성종 10년(1478)에 개작하였는데, 실록에는 이해 1월 17일 동부승지 채수(蔡壽)의 말 가운데 근일 장차 숭례문을 중수한다는 말이 있을 뿐이고,[註]착공 및 준공에 대한 기사는 없으나 1962년 발견된대들보가운데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것이 있음으로써 성종 10년(성화 15년) 4월 2일에 입주(立柱) 상량한 것이 확실하니 준공은 5월쯤 될 것이다.

이 때 채수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등이 남대문을 중수함과 동시에, 중국의 예에 의하여 남대문 밖에 옹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아니하였다.[註]

성종 10년에 건축한 남대문은 1961년까지 약 500년 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500년을 지나는 동안 월단의 석재 가운데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것이 많이 생기고 목재도 썩은 것이 많아 무너질 위험이 있으므로, 1962년 문루와홍예(虹霓)를 헐어서 중수하였다. 그러나 부서진 석재와 썩은 목재만 새 것으로 갈고 다른 것은 모두 옛날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옛날의 설계 그대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숭례문은 도성 8문의 가장 중요한 문의 하나였던 그 옛날의 숭례문은 아니다. 그것은 이 문의 서쪽에 연결되어 있던 도성이 일제 침략자들에 의하여 1907년부터 헐리기 시작하였고 그 후 도시계획이라는 이름하에 문의 서쪽의 성곽을 완전히 헐어버리고 넓은 도로를 개설하였으므로[註]숭례문은 도로 한가운데 양날개를 잃은 새 모양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문은 폐쇄된 채 그 옛날과 같은 도성의 남쪽 관문의 기능은 찾아볼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에는 현대식 고층건물이 하늘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은 국보 제1호라는 문화재적 가치를 의심케 한다.

그러나 그 문화의 척도는 외형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정신세계에 있는 것이니 1936년 10월 준공 이후 몇 번의 개축을 하였으나 오늘날까지 590년을 지켜 온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특출한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좀더 완전하게 보존하여 자자손손 영원히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 (2) 숭례문의 건축 양식 》

숭례문의 건축 양식은 정면(하층) 5칸(70척 5촌), 측면 2칸(25척 6촌 5분)의 중층(重層)우진각지붕의다포(多包)집으로 건평 53.79평이다. 그리고 현존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건축 구조는 성벽보다 일단 높게 화강석으로 육교를 만들어 성로(城路)를 잇고 그 아래로 홍예를 틀어 대문을 내어 출입하게 하고 장방형(長方形) 육교 상면에 중층루(重層樓)를 세워 완성하였다.

중층 목조건물의 일종의 기단인 육교는 내외벽을 큼직한 선단석상(扇單石上)에무사석(武砂石)을 쌓아 홍예 기석을 받고 홍예 기석상으로부터 홍예석을 쌓아 올린 홍예 좌우로 크고 작은 무사석을 층층히 쌓아 이룩하였다. 이 무사석의 뒷몸은 길고 짧아적심(積心)과의 연계를 꾀하고 적심과 무사석은 칸칸이 서로 중첩하여 상호연계를 한층 더 견고히 하였다.

누는 이러한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상층이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평면의 구성은 하층이평주(平柱)14개와고주(高柱)4개로 되고 상층은 근정전(勤政殿)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층우주(隅柱)내곽에 따로 세운우고주(隅高柱)와 하층으로부터 올라오는 4개의 고주 그리고 병연주로 이루어졌다.

초석은 모두 융기부(隆起部)가 있는 원형이나 고주의 그것은 판석형(板石形)이고 우고주의 그것은 방주형의 것을 윗몸으로부터 말각(抹角)한 모양의 것이다.

아래층 축부(軸部)의 짜임은 기둥 아랫도리에 높직한 하방(下枋)이 있고 벽은 없이 기둥 윗몸에창방(昌枋)과평방(平枋)을 놓고주두(柱頭)를 놓아 내2출목, 외2출목의공포(慊包)를 조성하였다. 상층도 하층과 같으나 주간에 중방을 끼우고 조그만 판문을 연속하여 쭉 돌려 낸 것이 첨가되었다. 공포는 마찬가지의 내2출목, 외3출목, 공포의 세부 짜임은두공(頭工)위로삼제공(三提慊)이 겹쳐 놓이고 주간에서는 그 위에 바깥쪽으로 삼분두된 살미첨차가 놓여 외목도리를 받게 되었고, 기둥 위에서는 제공 위에 바로대들보가 놓이게 되어 그것이 외목도리를 받게 되었다. 보머리도 역시 삼분두로 의장하였으며이제공(二提慊)의 안쪽머리도 그렇게 하고 살미첨차의 뒷머리는 운각하여 변화를 주었다. 행공첨차는 두 끝으로 직절(直絶)하고 바닥을 둥글려 소위 고형 수법을 썼고 소로와 살미첨차 사이의 윗몸도 바닥에 따라 만곡부(彎曲部)를 넣어 당시 유행하던 수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형첨차는 여말다포(多包)집의 유례 이래 각 건물에서 일반적인 통성(通性)으로 보이는 것인 바 이것 여하에 따라 시대의 설정을 추정하기도 하는 중요한 부재(部材)인 것이다.

쇠서의 곡선은 비교적 강직한 편이나 개성 남대문의 그것보다는 훨씬 곡선미가 짙고 홍화문이나 돈화문보다는 한결 경직(頸直)한 편이다.

가구(架構)는 상하가 동일한 방법이나 하층의 그것은 마루를 깔기 위한 수단에서 그쳤고 상층은 지붕을 구성하기 위하여대량(大樑) 위에 높직한동자주(童子柱)를 세워종량(宗樑)을 받고 종량에 중도리를 짜고 종량 위에 동자주형의대공(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얹었다. 이러한 수법은 개성 남대문과 동일한 것이나 개성 남대문의 동자주는 위가 좁아져 간 것이고대량아래에 따라 귀밀이한 방주(方柱)를 세워 보강을 한 것이 다르며 서울 남대문에서는대량과 종량 사이에 각재형(角材形)덧보를 이중으로 놓고 거기에 따로 뜬창방을 짜돌려 중도리를 보강한 것과고주(高柱)위로 동자주를 더 받쳐 종량을 보강하고 나아가종대공(宗臺工)을 힘있게 받도록 한 것이 그와 다르다.

양의 단면은 심원사(心源寺) 보광전이나 후기 홍화문 등에서 볼 수 있는 어깨는 그냥 두고 바닥만을 굴리는 수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같은 시대로 보여지는 봉정사(鳳停寺) 대웅전 · 환성사(環城寺) 대웅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명정문(明政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귀천장이 없고 하층의 그것도 홍화문 등에서와 같은 우물천장이 없고귀틀이 그냥 내보이도록 되어 있다. 2층의 마루는 장마루를 깔았다. 아래층은 모두 토간(土間)이나 중앙문 즉 홍예문의 천장 부분에만은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은겹처마, 각추녀마루에는용두(龍頭)와잡상(雜像)이 놓이고 양성한용마루끝에는취두(鷲頭)가 있다. 그런데 1961년도 중수공사시 여러가지 명문이 발견되고 고단청(古丹靑) 문양 등이 검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숭례문은 당초 팔작지붕이었던 것이 후에우진각지붕으로 고쳐졌음이 밝혀졌다.

건물 주위에는여장(女墻)이 쌓였고 그 좌우 측면의 한쪽으로는 각기 통용문이 개설되어 있으며 여장내로 떨어지는 물은 석루조(石漏槽)를 통하여 모두 배수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가치는 조선 초기의 성문 건축을 대표한다는 데 있다. 이 대표한다는 뜻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으니 하나는 시대적인 가치이고 또 하나는 건축사상의 가치이다. 전자는 서울에만도 대소 성문이 있으나 그초루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조선 초기의 것은 이 건물이 유일한 것이어서 받는 각광이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개성 남대문을 본떠 지은 집이나 개성 남대문에서 이루지 못한다포(多包)집 성문의 표본을 여기에서 비로소 개화하였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시 성내의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불과 몇 개의 건물이 잔존하게 된 것 가운데 이 건물이 비교적 상세히 여말 이래의 다포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특별기고]‘개발’에 혈안 … 우린 문화민족인가
입력: 2008년 02월 11일 17:52:17
 

필자는 지난 밤 뉴스 속보에서 밤새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연기가 솟는 부분을 정확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는 멘트를 들으며 그게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에 붉은 화마가 건물 전체를 삼키는 모습을 보고 통탄해마지 않았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자랑하는 나라의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진 현대판 변고이다.

국보 1호 숭례문의 역사적·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새삼 말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국보 1호’가 문화재 가치의 등급을 매기는 기호는 아닐지라도 그것 자체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간단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

필자는 역사학자로서 전국의 유물·유적을 돌아보고 다닐 때마다 늘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곳곳에 있는 유적의 관리가 너무나 소홀했고, 설명의 글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심찮게 문화재급 목조건축물에 화재가 났다는 보도를 접할 때면 어느 때에는 대형사고가 나리라는 예감으로 몸을 떨었다.

우리나라는 무수한 외침을 받아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런데 숭례문은 창건된 뒤 600여 년을 버티면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시기에도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식민지 시기에도 헐리지 않고 지켜냈다. 그리하여 서울의 관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출입하면서 삶을 꾸려왔다. 종묘는 왕조의 상징물이었으나 ‘남대문’은 서울의 얼굴이었다. 경복궁과 창경궁, 덕수궁은 원형을 잃었으나 숭례문의 건축물 자체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얼마나 소중한 유산인가. 그런데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우리 역사와 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는 유물·유적을 함부로 다루어 왔다. 엄청난 돈을 퍼부어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으면서도 문화재 관리 복원에는 돈을 아끼려 들었다. 성장주의·개발주의에 파묻혀 이부자식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면서 문화민족임을 자랑해왔다.

숭례문 화재사건은 총체적 괴리현상의 결과이다. 저녁 8시 이후 감시원만 배치되어 있었더라도 발화부분을 알아내 소방대책을 세울 수 있지 않았겠는가. 또 초동단계에서 화재의 전개를 알지 못해 소방요원들이 내부에 진입하지 못한 일도 석연치 않다.

이제 냉철하게 현 상황을 돌아보고 방비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한번 사건이 일어나면 야단법석을 떨다가 곧장 시들해지는 짓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원형 관리만을 내세우는 문화재보호법도 예방을 위한 합리적 조항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며 조명 등 전기시설도 과학적 검토를 거쳐 설치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시민의 접근을 막는 폐쇄적 조치는 하지 말아야 한다.


 

화재로 완전 붕괴된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이 11일 잿더미로 변한 채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숭례문 1층 누각은 불에 탄 기둥들로 2차 붕괴 가능성까지 우려되고 있다. 서성일기자

우리는 오늘의 비극적인 숭례문 화재사건을 계기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를 가다듬고 인식 변화의 시점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 문화를 사랑하고 아낄 줄 모르는 민족은 영원할 수 없으며 민족역사의 발전도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숭례문 보수공사에 참여한 대목장 신응수옹은 이번 화재를 보고 가슴을 치며 자식을 잃은 듯이 통탄해마지 않았다. 어찌 그뿐이랴. 국보의 처참한 모습은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이 아픔을 잊지 말고 재발 방지를 위해 지혜를 짜야 한다.

〈 이이화 / 역사학자   〉

 

 

숭례문의 변천사

 



1910년 무렵 촬영된 남대문(南大門. 숭례문). 이미 양쪽 성벽은 헐려져 도로가 나 있다. 사진 출처는 '한국병합' 관련한 1910년대 일본측 사진자료집인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 有樂社. 도쿄). 사진 타이틀은 '경성 남대문'이며 그 설명은 "원래 양쪽에 성벽이 있고 중앙의 굴로 왕래했던 것으로 동물의 분뇨가 길에 넘쳐나 발을 디딜 곳이 없었으나 지금은 성벽을 허물고 따로 도로를 내서 이와 같이 멋지게 보존하고 있다"라고 했다. (서울=연합뉴스)



설 연휴 마지막날인 10일 저녁 국보 1호인 숭례문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큰 불이 나 1,2층 누각이 전소돼 무너져 내리는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사진은 1963년 5월 14일 중수 준공식 때 모습. (서울=연합뉴스)



지난 1983년 신축중인 고층빌딩들 사이에 싸여있는 국보1호 숭례문 모습. (서울=연합뉴스)



지난 2006년 숭례문광장 개장에 맞춰 대폭 개선한 숭례문의 경관 조명시설.(

 

 

‘국보 1호’도 못 지킨 대한민국

610년 된 숭례문 5시간 불타다 무너져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다. 10일 오후 8시40분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가 발생한 뒤 4시간35분이 지난 11일 오전 1시15분 불길이 점점 커지면서 2층 누각이 화염에 휩싸인 채 무너져 내리고 있다. 경찰은 화재 직전 “짧은 머리에 항공잠바와 검은색 등산바지를 입은 50대 남자가 숭례문 옆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는 목격자의 진술에 따라 방화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화재 원인을 수사 중이다. [사진=김태성 기자]

대한민국의 국보 1호인 숭례문(崇禮門)이 화재로 붕괴됐다. 화강암으로 쌓아 만든 기반(육축)을 제외한 누각과 지붕이 모두 탔다. 숭례문은 조선시대인 1398년에 창건됐다. 서울에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됐다.

10일 오후 8시40분쯤 숭례문 현판 좌측 부분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다.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 불은 11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초기 화재 진압에 실패해서다. 소방 당국과 문화재청의 안이한 대응 때문에 국보 1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때 불길이 잡히는 듯했다. 그러나 11일 0시부터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뒤늦게 소방 당국은 지붕을 걷어내고 물을 뿌리려고 했으나 불길이 숭례문 전체를 뒤덮자 포기했다.

출동한 소방차 50여 대와 소방관 150여 명이 고가 사다리와 소방 호스 등을 이용해 물로 진화 작업을 벌였으나 화재 발생 4시간 만에 붕괴가 시작됐다.

11일 0시40분 누각 2층과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뼈대만 남기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붕괴가 진행됐다. 소방 관계자는 “지침에 문화재청과 협의하에 진화 작업을 하도록 돼 있다”며 “이에 따라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친 뒤에야 기와를 걷어내는 바람에 불길을 잡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인택시 운전사 이상권(44)씨는 “오후 8시40분쯤 짧은 머리에 항공잠바와 검은색 등산바지를 입은 50대 남자가 종이 쇼핑백을 들고 숭례문 옆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씨는 “1~2분 후 숭례문 현판 왼쪽의 1층 누각과 2층 누각 사이에서 빨간 불꽃이 피어 올랐다”며 “숭례문에 올라갔던 남자는 불꽃이 인 직후 계단을 내려와 남산 쪽 길로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목격자들의 진술로 미뤄 방화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숭례문(국보1호) 개장 모습 동영상

 

 

 

이명박 당선자 서울시장 재직시 숭례문 개방 축하 북치는 모습

 

2006년 3월...이명박 서울시장 재임시절 국보 제1호 숭례문을 개방했다..

 

개방이 문제가 아니라.안전요원 철수 시키고 무인경비 시스템에 용역을 줬다는거다.


이점이 숭례문을 붕괴시킨 핵심이다.이 시장이 지난 3년 동안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청앞 잔디광장 조성, 서울시 교통체계 개편, 숭례문 개방,
 
청계천 복원 등 가시적 성과물을 꾸준히 내놓은 것이 지지율 상승의 원인으로 분석되
 
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숭례문 화재는 노 대통령 때문' 이라 비난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자행하고있다. 방귀 낀 놈이 성낸다는 말은 이런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8년 02월 10일 오후
 8시48분쯤 - 화재 발생
 8시55분쯤 - 소방당국 화재 진화 시작
 10시30분쯤 - 화재 진압 판단, 잔불 진화작업
 10시40분쯤 - 2층 현판 5m 안쪽 지점에서 다시 살아남
 11일 0시40분부터 지붕이 붕괴...

 

 

 기독교는 왜 이러는가?

불난집에 부채질이 따로 없구나.

 

  
▲ 황평우 문화재전문위원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재연구소장(자료사진)
ⓒ 여의도통신 한승호 기자

지난달 10일 화재로 인해 형체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진 숭례문.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연구소장은 그러나 9일 화재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황 소장은 전날(8일)에 이어 주말 연휴를 화재 현장에서 보낸 셈. 

 

그의 눈에는 숭례문 복구부터 문화재 관리 체계 점검까지 할 일이 곳곳에 눈에 띄지만, 여론은 어느새 숭례문을 잊었고 언론은 '한 달'이라는 이유로 그의 휴대전화를 울렸다.

 

황 소장은 이날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숭례문과 같이 타버렸다"고 지난 한 달을 되짚었다, 속도 마음도 머리도 타버렸단다. 그에게 자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머릿속도 탔다.

 

이날 서울시는 "주요문화재 20%에 안전시설이 전무하다"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황 소장은 이 소식에 "나머지가 제대로 됐을지는 알 수 없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한 달 전에는 100여명 정도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라고 말을 잇지 못한 황 소장은 "냄비처럼 들끓다가 썰렁하게 빠져나간 것을 보면 시민들의 '냄비 근성'은 알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 때처럼 인파가 몰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면서도 관심 밖의 숭례문을 바라보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이 10일 오전 중구청 소속 공무원 3명을 불구속 입건하는 것으로 수사를 매듭지을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황 소장은 "숭례문은 죽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고 개탄했다. 그는 또한 "문화재 보존을 위해서 방재 시스템 구축도 중요하지만, 평소 문화재 관리를 누가 할 것인지, 관리 주체를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황평우 소장과의 일문일답.

 

 

숭례문 화재현장 보수작업을 위한 가림막 설치가 진행중인 가운데 검게 불타버린 숭례문을 찾아 아쉬움을 달래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 남소연
숭례문화재

"대통령 취임식 전 숭례문 화재 기사 사라져"

 

-어제(8일) 숭례문 화재 현장에 갔었다고 들었다. 한 달 전과 비교한다면.

"지금도 와있다. 한 달 전에 비해 와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한 달 전에는 100여명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예상했던 것 아니냐. (여론이) 냄비처럼 끓다가 지금처럼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 이후 며칠간 여론이 냄비처럼 끓었던 것도 문제지만,  지금 썰렁하게 빠져나간 것을 보면 시민들의 냄비 근성은 알아줘야 한다. 물론 그 때처럼 인파가 몰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쉽다."

 

-불탄 숭례문이 남긴 것이 있다면.

"내일(10일) 수사결과 발표인데, 결국 경찰 3명만 불구속하고 끝날 것 같다. 문화재가 이렇게 됐는데 왜 책임지는 사람이 없나. '숭례문'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죽을 고비에서 응급처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왜 책임지는 사람이 없나. 오히려 이런 데 대해서 특검을 통해서라도 책임 소재를 밝혀내야 하지 않나. 화재 당시 진압을 못한 것, 평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등에 대해 서울시·중구청·소방재청 등이 책임을 져야지.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숭례문은 죽었다."

 

-숭례문 화재 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달라진 게 전혀 없다. 숭례문을 사라졌고, 정부 당국이 관리 주체를 규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문화재를 관리할 것인가에 대책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 과거를 어떻게 잘 기록하고 남길 것인가에 대해서도 후진성이 드러났다. 여론도 당시에는 흥분하다가 지금은 이렇다. 문화재를 보는 총체적인 수준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

 

"총선 이후에도 '문화재 관리제도 개혁특위' 계속돼야"

 

-차벽 설치 등 화재 이후 정부 대응도 논란이 있었다.

"설치한 벽을 빨리 철거해야 한다. 창피하면 어떤가. 있는 그대로 치부를 보여줘야 한다. 한편 벽을 설치했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욕할 자격이 있나. 한 달만에 이렇게 관심 속에서 벗어났는데, 가림막 갖고 비난할 수 있나.

 

문화재 관리에 대한 정부·관공서·공무원·공기업 등의 총체적 부실이다. 환경 문제의 경우 기업체가 후원 등을 하지만 문화재는 그런 것이 없다. 일부 시민단체 사람들만 뛰어 다녔다. 문화유산과 관련해 시민운동이 활발해야 하는데, 전문성을 갖고 공부한 사람들도 문화재 관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활동을 하는 것 같아 아쉽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언론도 반성할 부분이 많다. 대통령 취임식(2월 25일)이 있기 3일~4일 전부터는 숭례문 화재에 대한 뉴스가 거의 사라졌다. 또 한달 됐다고 할 보도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05년 낙산사 화재도 있었다. 문화재 방재 시스템 구축은 어디서부터 해야 하나.

"방재 시스템 구축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문화재를 관리하는 주체, 권한 위임부터 재점검해야 한다. 문화재 관리를 국가가 해야 하는 것인지, 혹은 중앙 정부가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하는 것인지 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정부 차원의 개선책에는 변화가 있나.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국회에서 '문화재 관리제도 개혁특위'를 만들어서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는데, 7차 회의를 열었고 중간보고서 지필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것마저 총선 체제로 들어가면서 힘들게 됐다. 그래도 총선 이후 다시 시작할 것이다. 특위를 통해서 문화재 관리 예산 및 조직, 관련법 등을 뜯어고칠 계획이다."

 

10일 숭례문 화재 수사 종지부... 문화재 관리 허술 여전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10일 오전 중구청 소속 공무원 3명을 불구속 입건한다는 내용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수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숭례문 경비 계약을 둘러싸고 담당 공무원과 KT텔레캅 직원 간 금품 로비 등이 조사 대상이었지만, 특별한 혐의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지난 한달간 밝혀낸 사실은 중구청 소속 공무원들이 화재 당일 근무일지 등 관련 공문서를 허위로 작성했다는 것이 전부다. 

 

한편 숭례문 화재 당시 문화재 관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았음에도 이에 대한 재정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가 지난달 18~29일까지 흥인지문(동대문) 등 관내 문화재의 안전 관리 실태를 조사한 결과 주요 건조물 문화재 24곳(20.3%)에서 경비 인력이나 방범시설 등이 미비했던 것.  

 

서울시는 이에 따라 "경비인력이 없었던 중요 건조물 문화재에 경비 인력을 긴급 배치하고, 문화재 안전 점검 결과를 토대로 인력을 추가 배치할 계획"이라며 "또한 문화재별 특성에 따라 방재 및 방법 시설을 설치하겠다"고 9일 밝혔다.

 

서울시는 시 직원, 문화재위원, 소방직원, 전기안전공사 직원 등이 팀을 구성, 국가 지정 문화재 55곳과 시 지정 81곳 등 총 136곳을 조사했다. 이들은 야간경비인력 배치 유무, 화재탐지기·스프링클러·소화전 등 방재장치와 CCTV·경보기 등 방범시설 설치 여부를 점검했다.

 

서울시는 "현장 점검과 동시에 흥인지문, 사직당 등에 경비 인력을 즉시 배치했고 경희궁과 운현궁 등에는 소방 훈련을 실시했다"며 "문화재 경비 및 관리인을 기존 51명에서 126명으로 추가 배치했다"고 밝혔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