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대’의 불안은 부모의 불안이다
2019년 한국의 청년들은 깊은 불안감에 전염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이 삶의 실제적 성취에 어떠한 결과를 이끌어낼지 확신할 수 없어서이다.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제 모두가 나눌 수 있는 파이가 없다고 위협한다. 극단적인 불평등 속에서 완벽한 승리자 집단과 대다수의 종속적 집단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우울한 디스토피아의 미래가 선포되고 있다. 지배 집단으로의 진입은 중세적 신분 질서와 같이 강력한 새로운 철옹성이 막고 서있어 불가능해지고 있다. 부와 권력은 성취의 대상이 아니라 세습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젠 어떤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어떤 사회학자는 청년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의식과 마음 형태를 ‘생존주의’라 칭하고 있다. ‘생존’ 그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일상의 삶에서 낙오하지 않고 사회적 흐름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최근 한 종편 방송에서 법학 전문대학원 출신들이 로펌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참여하여 경쟁하는 프로를 선보였다. 과거 ‘사법고시’로 대표되던 최상의 엘리트 진출을 보장하는 루트도 이제는 사라진 것이다. 경쟁력 있는 학력도, 다양한 자격증도, 안정된 직장도,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현재의 지위는 끊임없는 경쟁과 도전을 통해 그 가치를 증명해야 하며 그런 경우에만 미래의 생존을 보장해준다.
청년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희석시키고 낭만적인 청춘에 대한 희망과 거리 두게 하였다. 청년은 과거 청년세대가 누렸던 사회변혁의 중심, 삶의 절정에 대한 찬사 대신에 걱정의 대상으로, 때론 스스로 자조하듯이 ‘잉여세대’로까지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청년세대는 과거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부모 세대의 시선을 불편해한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도덕적 우월감과 계몽적 꼰대의 가르침이 피곤한 것이다. 반면 부모 세대는 청년들의 용기와 노력의 부족을 질책한다. 어떤 시대에도 어려움은 항상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고 성취하는 사람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결코 잘못된 인식이 아니다. 고난을 극복한 사람만이 성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모 세대의 걱정은 이중적이다. 그들은 정직하지도, 강한 확신도 갖고 있지 못하다. 청년 세대에게 던지는 부모 세대의 언어는 대부분 추상적인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한다. 즉 그들은 자신의 자녀에게는 똑같은 언어를 적용하지 않는다. 비록 도덕적인 형태로 표현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적인 행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생존주의’는 청년들만의 창작품이 아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오랫동안 ‘생존’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생존을 위한 도구를 학습시켰으며, 생존을 성공의 가장 중요한 삶의 토대로 인식시켰던 것이다.
어쩌면 ‘생존주의’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지니고 있으며 쉽게 지울 수 없는 가장 강렬한 본능인 것이다. 특히 근현대를 거치면서 한국인이 경험한 끔직한 기억은 국가에 대한 믿음도, 이웃에 대한 확신도, 동료에 대한 의리도 너무도 불완전하고 허약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결국 최소한 믿음의 단위는 개인, 기껏 확장되어 보아야 ‘가족’에 머물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나의 생존, 가족의 생존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입으로는 민주화, 사회정의, 관용의 정신과 도덕을 이야기하더라도 구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들어와서는 이익의 중요성, 물질적인 것의 소중함 그리고 어떠한 경우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생존이라는 가치를 심화시켜 주었다.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성공을 위해 부모와 함께 만든 ‘생존주의’는 이제 이 시대의 가치를 대표하게 되었다. 진보를 대표하던 사람들이 물질적 유혹에 파괴되는 경우는 이제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공직자 인사검증에 등장하는 부와 이익에 대한 집착은 이제 모두가 공유하는 내면적 가치가 되었다. 공격하는 자들도, 비난하는 자들도 자유롭지 못한, ‘생존’은 모든 행위를 변호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변모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생존주의’에 몰입했을 때, 역설적으로 생존은 점점 더 어려운 과제가 된다. 하나의 가치에 매몰될 때, 그곳은 ‘레드오션’이다. 여유의 공간도, 타인에 대한 배려도 실종된 채 경쟁과 긴장 속에서 소멸되는 비극적 무대이다. 오히려 가치의 다양성이, 존재 방식의 여유로움이, 우리 사이의 공간을 넓혀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며, 넓어진 공간만큼이나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 ‘생존’에 대한 집착이 약해질 때 사회적 공존에 대한 의식이 커지며 그것을 전체적으로 집합시킬 때 생존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청년들의 의식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부모의 태도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의존이 커질수록 부모의 영향력은 커진다. 자녀들의 의식 형성에 부모의 결정이 중요한 것이다. 이때 ‘생존주의’에 대한 불안감이 아닌 새로운 대안적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들이 많아질 때, 청년들의 불안은 감소되고,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영역도 확장될 것이다. 대다수에게 좌절을 안기는 기존의 인기 있는 분야만 강요하기보다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의 토대를 부모가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청년들의 불안과 생존에 대한 집착은 어쩌면 부모 세대의 불안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 결과인지 모른다. 자녀들은 분명 독립적인 존재이며 스스로 자율적인 선택과 판단을 통해 성장해야 하지만, 그런 존재가 되도록 도와주며 생존의 중요성보다 더 큰 사회적 존재의 가치와 가능성을 갖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더구나 1980년대 민주화와 사회정의에 대한 희망을 꿈꿨던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생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변화를 꿈꿨고 또한 꿈꾸는 사람들이 실행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또한 우리 모두의 생존 가능성을 넓히는 행위일 수 있다. 최소한 자신의 자녀들에게 생존의 불안함을 강요하지는 말아야 한다. 대신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을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첫댓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려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