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들의 부활인가?1
남 대 극
(신학박사, 삼육대
명예교수)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고 어디로 가는가? 많은 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거나 믿는 것처럼 의인이
죽으면 곧바로 천국으로 가고, 악인이 죽으면 지옥으로 직행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의 사후 상태와 행방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 불과한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에 포함될 만큼 중요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만큼 중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또한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론(anthropology), 즉 인간의 본질과 운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옳은 답을 추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종말론(eschatology), 즉 세상 역사의 끝에 일어날 사건들의 과정과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참된 이해를 탐색하는
것이다.
1. 인간 존재의 구성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 할 사항은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그 존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매우 명확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성경은 사람의 재료가 흙이라고 말하고, 그 사람이 타락하여 죽게 되었을
때는 “네가 …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받았음이니라.”(3:19)고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nišmat ḥayyim, “생명의 기운/호흡”)는 “전능자의 기운”(nišmat šadday, 욥 33:4) 또는 “전능하신 분의
입김”(「공동번역」), 즉 “생명의 섬광”(the spark of life)이다. 이것은 마치 전기 또는 전류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에 전기를 넣으면 전류가 그 속에 있는 각 부품으로 흘러가면서 무채색의 화면을 천연색의 화면으로 바꾸고,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로
채워준다. 전기는 죽은 물체에 소리와 색깔과 움직임을 부여한다. 그러다가 텔레비전에서 전기를 끊어버리면 그것은 다시 아무런 소리도 색깔도
움직임도 없는 물체로 돌아간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기”도 꼭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생기가 끊어지면 사람은 원래의 물질인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이 죽으면 “흙은 여전히[as it was,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신[숨, 호흡]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12:7).
성경은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에 “생령”(nepeš ḥayyāh)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령”은
“살아있는 영혼”(“a living soul”)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존재”(“a living being”, NIV, NRSV, NASB) 또는
“생명체”(「새번역성경」)를 의미한다. 이 용어[nepeš ḥayyāh]는 인간을 가리킬 때만 사용된 것이 아니고, 다른 “생물”(창 1:20,
24; 2:19), 즉 수중동물, 파충류, 그리고 짐승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생령”이란 번역은 적합한 번역이라 할 수 없고, “살아있는
존재” 또는 “생명체”가 더 적절한 번역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형체에다 생기를 넣음으로 생명체 즉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을 수학적 등식으로 표현하면 흙+생기=생명체(“생령”)가 된다. “생령” 또는
“살아있는 존재”(창 2:7)라는 말의 히브리어 구절 가운데 포함된 네페쉬(nepeš)는 인간 개인 속에 거하는 독자적인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 자체 또는 그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많은 경우에 “사람”(창 14:21; 민 5:6; 신
10:22; 시 3:2 등), “스스로”(“자신”, 레 11:43; 왕상 19:4), “자기”(사 46:2 등) 등으로 번역되었다.
한편,
“내 혼”, “네 혼”, “그의 혼” 등과 같은 말은 인칭대명사 “나”, “너”, “그” 등을 가리키는 관용어(慣用語)로 사용되었다(창
12:13; 레 11:43, 44; 19:8; 수 23:11; 렘 37:9). 네페쉬(nepeš)는 구약에 총 755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100회 이상을 「제임스왕역」(KJV)은 “생명”(“life”)으로 번역하였다(창 9:4, 5; 삼상 19:5; 욥 2:4, 6; 시 31:13
등).
네페쉬와 비슷한 뜻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는 히브리어 루아흐(rûaḥ)는 구약에 377회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영”, “바람”,
“호흡” 등으로 번역되었다. 루아흐는 인간의 영적인 능력 또는 신적인 에너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것 역시 육체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활동하는 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가지는 정신/활력/용기(수 2:11; 삿 15:19), 마음/성향/도덕적 특성(사 54:6; 겔
11:19), 감정이 자리 잡은 곳/마음(삼상 1:15), 노/분노(삿 8:3) 등을 의미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인간의 루아흐는 “호흡”이란
의미에서 동물의 루아흐와 다르지 않다(전 3:19). 인간의 루아흐는 사망 시에 육체를 떠나서(시 146:4)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12:7;
욥 34:14). 루아흐는 자주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었다(창 1:2; 사 63:10). 그러나 구약에서 루아흐는 사람의 몸을
떠나서 별개의 개체로서 감각을 가지거나 지성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신약의 헬라어 프쉬케(psychē)는 구약의
히브리어 네페쉬(nepeš)와 흡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도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동물의 생명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었다(계 16:3).
이 단어는 “목숨/생명”(마 2:20; 6:25; 16:25 등), “마음/감정”(막 14:34; 행 14:2; 엡 6:6; 빌 1:27) 등을
뜻한다. 그리고 이 프쉬케는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 있고(계 16:3), 파멸될 수도 있다(마 10:28).
2.
성경이 말하는 죽음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 관하여 논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죄의 삯”(롬 6:23) 즉 “죄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善惡果]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경고하셨으나
인류의 시조는 그것을 따먹음으로 죽었고, 그들의 후손들도 모두 죽게 되었다. 사람은 그가 지은 죄로 인하여 “네가 …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는 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 선언은 인간의 죄가 그의 생명의
단절을 초래했음을 분명히 하고,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그에게 약속된 영생 또는 불멸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상실되었음을 말해준다. “아담과 하와”는
그 당시의 “모든 인류”였고, 그들의 범죄는 전 인류의 범죄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 5:12).
그렇다면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경은 일관되게 그리고 오해할 여지없이 죽음을 “잠”이라고 일컫는다. 현세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멸절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부활할 때까지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이다. 구약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들이 조상들과 함께 자는 것으로 묘사하였다(왕상 2:10; 11:43; 14:20, 31; 15:8; 대하
221:1; 26:23). 욥(욥 14:10-12), 다윗(시 13:3), 예레미야(렘 51:39, 57), 다니엘(단 12:2)은 하나같이
죽음을 “잠”이라 일컬었다.
신약도 동일한 표현으로 죽음을 묘사한다. 야이로의 죽은 딸의 상태를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셨고(마 9:24; 막 5:39), 죽은 나사로에 대해서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1:11-14). 마태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날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기록했고(마 27:52),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를 기록하면서 그가 “자니라”(행 7:60)고 기술하였다. 바울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고 하였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죽은 자들에 관하여 말하면서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그들의 상태와 향후
그들에게 일어날 일을 자세히 기술하였으며(살전 4:13-18), 베드로는 조상들의 죽은 상태를 잠자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벧후
3:4).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죽은 상태의 특성들이 잠자는 상태와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상태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죽은 자와 잠자는 자는 둘 다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전 9:5).
(2) 죽은 자와
잠자는 자에게는 사고활동과 계획하는 일이 없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3) 일상의
모든 활동이 중단된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4) 정서적인 활동은 모두 중단된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전
9:6a).
(5) 깨어 있는 자들과 그들의 활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전 9:6b).
(6)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한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7) 장차 깨어날 것이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
26:19).
3. “영혼불멸”과 “조건적 불멸”2
“불멸”은 헬라어 athanasia (不死 또는 不滅)와
aphtharsia (不朽 또는 不腐)를 번역한 말이다. 이것을 영어로는 immortality (不滅) 또는 incorruptibility
(不朽)라 하고, 독일어로는 Unsterblichkeit (不死)라고 한다. 이 단어들을 인간의 사후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할 때,
일반적으로 그 앞에 “영혼”을 붙여서 “영혼불멸”이라 일컫는다. 그래서 “영혼불멸”이란 용어는 영어의 immortality나 독일어의
Unsterblichkeit보다도 더 확실하게 인간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고, 모든
의식과 활동을 계속한다는 의미를 더 확실히 나타내게 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불멸(不滅)과 죽지 아니함[不死]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성이요
그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선언한다. “오직 그[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딤전 6:16a). 그분만이
영원불멸의 생명을 가지셨고, “스스로 있는 자”(출 3:14) 곧 자존자(自存者)이시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시는 분 곧
초월자(超越者)이시다.
반면에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사람—또는 그의 “혼”(soul, nepeš)이나 “영”(spirit, rûaḥ)—이
본질적으로 불멸 또는 불사의 특성이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네페쉬(nepeš)와 루아흐(rûaḥ)라는 단어들은 성경에
1,600회 이상 사용되었지만, 이 단어들이 “불멸” 또는 “불사”의 개념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신약의 헬라어
프쉬케(psuchē)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범죄 후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음을 그의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사람은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시
78:39)이고, 인간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14)이다. 인간은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한다(욥 14:2).
그러나 인간은 창조 때로부터 죽기 위해 창조된 것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생기” 즉 “생명의 기운”을
부여받았다(창 2:7). 그러므로 생명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소유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다(참고 행 17:25, 28; 골
1:16-17). 따라서 사람의 생명은 그의 선택에 의하여 계속 유지될 수도 있었고,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상실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조건 아래 인간의 불사 또는 불멸을 약속하셨다. 인간이 만약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것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롬 5:12; 6:23).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지시를 지키는
조건으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조건적 불멸”(conditional immortality)이라 일컫는다. 이 용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인간의 운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매우 잘 표현⋅요약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 사후
상태에 대한 오해
인간의 죽음은 잠과 같고, 그 후의 상태는 모든 의식과 감각과 활동이 중단된 상태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그토록
분명하고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 역사에 영혼불멸설이 매우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자리를 잡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
이유는 매우 초기부터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헬라 철학 때문일 것이다. 헬라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고, 육체는 악한
것이고 영혼은 선한 것이며, 육체를 괴롭게 함으로써 영혼을 더욱 선하고 순결하게 한다고 한다. 인간 구성의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라 일컬어지는 이 철학은 중간사(中間史) 시대와 신약 시대의 지배적인 문명이던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도 유입되었다.
그리하여 이 철학은 세월이 흐르면서 특별한 저항 없이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양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원론을 지지하는 듯한
소수의 성경 구절들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학자들에 의해서도 이원론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되었고, 이른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한 행악자에게 하신 말씀(눅 23:43) 등은 그런 오해를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오해되고 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경 전체의 사상과 가르침에 조화되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 성경해석학의 기본원칙이다. 그리스도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성경의 전반적인 사상과 그리스도의 일관된 가르침은, 사람이 죽으면 아무 의식도 감각도 활동도 없이 부활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인데, 일부 구절이 이것과 상치되는 듯한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일 때는 그 본문의 문맥과 화자(話者)의 의도를 자세히
살펴서 성경의 전반적인 흐름에 저촉되지 않는, 올바른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10:28은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인
“몸”[sōma, 肉身]과 “영혼”[psuchē, 心靈, 생명, 마음]을 언급하면서, 한 인간의 프쉬케(“영혼”, 심령, 생명, 마음]은 다른
인간이 지배하거나 멸할 수 없으니, 그런 제한된 능력을 가진 인간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인간의 몸과 프쉬케(“영혼”, 심령, 마음)를 온전히
지배하고 멸할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프쉬케는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멸절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14절)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교훈, 즉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돈을 잘 써야 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사실을 비유로써 가르치신 것이지,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아브라함의 품(눅 16:22)에 들어가거나 음부(23절)에 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다. 비유는 어떤 교훈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고, 교훈의 효과를 크게 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정한 상황이다. 비유에는, 일부의 사람들이 믿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사실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생각을 토대로 하여 윤리적 교훈을 가르치는 인용적(認容的) 화법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하고 죽어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살아있는 동안에 가난한 자들을 잘 돕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의 핵심이요 목적이다. 이 비유를 천국과 지옥의 상황을 가르치는 교리로 해석하는 것은 말씀하신
분의 취지가 아니다. 요컨대, 비유에서 임시로 설정된 상황을 실제적이고 영구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이거나 그것에 기초하여 중요한 교리를 수립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법이 아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이지 실제가 아니다.
예수께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행악자와 나눈 대화는 심각한
오해를 유발하고 있다. 행악자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지체 없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고 대답하셨다. “낙원”은 “하늘” 또는 “천국”과 동의어이다(고후
12:4; 계 2:7). 우리말 번역대로라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날에 바로 낙원 또는 하나님의 면전에 가셨어야 하고, 행악자도
그랬어야 맞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부활하신 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 나아왔을 때, 그분은 “나를 만지지(haptō,
‘붙들지’「개역개정판」)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에 낙원에
올라가지 아니한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분이 부활하신 날 새벽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6)고
한 말을 보면 더욱 더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 행악자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날에 함께 낙원에 가시는 것처럼
번역한 번역본들은 예수의 의도를 올바로 전달하고 있는가? 누가복음 23:43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헬라어 원문의 어순과 구두점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기의 헬라어 사본들에는 단어들 사이에 간격이나 구두점이 없었다. 후대의 학자들이 본문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단어들 사이에 간격을 두었고, 여러 가지 구두점들을 삽입하였다. 그들이 고도의 조심성을 기울이고 면밀히 연구하여 단어들 사이를 띄어 쓰고
필요한 구두점을 찍기는 하였겠지만 그 모든 것이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또는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누가복음 23:43의
경우, 그들은 다음과 같이 구두점을 찍었다.
Amēn soi legō, sēmeron met’ emou esē
en tō paradeisō.
Truly I say 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
구두점을 이렇게 찍어 놓으면 이 문장은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번역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누가가 기록할 때의 의미라면 예수께서는 그 날에 그 행악자와 함께 낙원에 가셨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신 날
새벽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그때까지는 아직도 하늘의 아버지를 가 뵙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을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야 할까?
그것은 본문에 찍은 쉼표(,)의 위치를 옮김으로써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 문장에서 sēmeron (오늘)이라는 단어 앞에 찍혀 있는
쉼표(,)를 그 단어 뒤에 찍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Amēn soi legō sēmeron, met’
emou esē en tō paradeisō.
Truly I say to you today, you shall be
with Me in Paradise.
이렇게 하면 이 문장의 의미는 “내가 오늘 네게 말하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가 된다. 여기서 “오늘”(sēmeron)이란 부사는 매우 강조되어 있다. 그 “오늘”은 “너와 내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오늘”이며, “그와 같은 참담한 운명의 날”이다. 바로 “이와 같은 비운과 치욕의 순간인 오늘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예수께서는 그 행악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바로 그 날이 아니라 그분의 재림의 날에 다른 모든 죽은(잠자는)
자들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이 문장에는 이렇게 쉼표를 찍어야 그 의미가 예수께서 하신 다른 말씀과 조화되고, 성경의 전반적인 사상과도
일치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께서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셨거나 성경의 다른 부분과 배치되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봐야 하는데, 그럴 리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약 원문인 Nestle-Aland Novum Testamentum Graece의 편집자들이
신약 사본에다 구두점을 삽입할 때 이미 영혼불멸설의 영향을 받고 있었거나, 사람이 죽으면 바로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성경 본문에 쉼표(,) 하나를 잘못 찍으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시 한번 간추리면, 성경의 전반적인 사상과 그리스도의 일관된 가르침은, 사람이 죽으면 무의식, 무사고, 무활동 가운데서 깊은
잠을 자다가 언젠가는 한번 깨어나서—부활해서—자신이 생전에 행한 일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거나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5. 부활의 목적과 종류
“부활”은 인간의 죽음 다음에 있는 것으로서, 완전한 개체와 개성을 지닌
생명의 회복을 의미한다. 사람은 다 죽기 마련이기 때문에 무덤 저편에 있는 생명을 경험하려면 부활이 있어야 한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이
부활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였다(욥 14:13-15; 19:25-29; 시 49:15; 73:24; 사 26:19; 고전 15). 인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부활의 보증과 기초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극히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떤 일들이 생기게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선언하였다. (1) 복음의 전파가 필요
없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고전 15:13-14). (2) 그리스도교의 신앙도 헛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17a절). (3) 죄의 용서가 없다. “…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7b절). (4) 죽음에서 일어나는 일반적
부활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 (5) 죽음 저편에 대한 소망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7-18절). (6)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불쌍한 자가 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19절).
이토록 중요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여준 가능성과 방법에 따라 사람들은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설파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전 15:20-23).
그렇다면 부활의 목적은 무엇이며, 부활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인간의 사후에 심판이
있고, 그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시행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재림 때에 사람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5-29).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라는 부활의
종류까지 분명히 언급하셨다. 바울도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을 것을 말하면서 그것을 “의인과 악인의 부활”(행 24:15)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부활 사이에는 1,000년이라는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은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 “첫째 부활”은 의인들의 부활로서
“생명의 부활”이라 일컬어지고, 이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한” 사람들이다(계 20:5-6). 그들은 천년기 끝에 있을 “둘째
사망 곧 불못”(14절)에 참여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 곧 불멸을 입게 될 것이며(요 5:29; 고전 15:52-53), 이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게 될 것이다(고전 15:22-23; 살전 4:15-18). 그들은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다시 죽을 수도
없는” 존재로 변화할 것이다(눅 20:36).
반면에, “둘째 부활” 곧 악인/죄인들의 부활에 참여하는 저들은 천년기 동안에 무의식 상태인
죽음에 처해 있다가 그 후에 모두 부활하여 정죄의 심판을 받아 “둘째 사망 곧 불못”(계 20:14-15)에 던져질 것이다. 그들은 이 끔찍한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니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0-32).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b)고 약속하시면서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고 보증하셨다. “첫째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둘째 사망” 곧 영원한 멸망을 면한 의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할”
것이며(계 20:6), 천년기가 끝난 후에는 악인들이 부활하여 사탄과 더불어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이다(7-10절).
성경은 분명한 음조로
죽음은 잠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지금 죽어 있는 사람들과 앞으로 죽을 사람들은 예외 없이 부활을 경험할 것인데, 의인들은 “첫째
부활”인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악인들은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난 후에 “둘째 부활”인 “심판/정죄의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오해할 여지없이 확실하게 선언하고 있다.
미주(尾註)
1. 이러한
제목으로 일찍이 오스카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이 한 편의 소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세계의 신학계와 종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처음에 그는 카를 바르트(Karl Barth)의 70세 기념논문집인 Theologische Zeitschrift 12/2
(1956): 126-156에 “Unsterblichkeit der Seele und Auferstehung der Toten: Das
Zeugnis des Neuen Testaments” (“영혼의 불멸과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약의 증거”)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고, 이것을
1962년에는 Unsterblichkeit der Seele oder Auferstehung der Toten?: Antwort des
Neuen Testaments (영혼의 불멸인가, 죽은 자들의 부활인가?: 신약의 대답)라는 제목으로 73쪽의 단행본을 Kreuz-Verlag
출판사를 통하여 간행하였다. 그는 성경 주석을 통하여 영혼불멸 사상이 비성경적인 교리임을 증명하였다. 필자는 신학 포럼 주최측의 요청에 의하여
쿨만의 책자의 제목과 같은 제목으로 본 기사를 작성하였으나 쿨만의 논문을 요약하거나 그 내용을 본 따서 쓴 것은 아니다. 필자가 주로 참고한
책들은 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 . . : A Biblical Exposition of Fundamental
Doctrines (Boise, ID: 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 2005)과 Seventh-day
Adventists Answer Questions of Doctrine, Annotated Edition, Notes with
Historical and Theological Introduction by George R. Knight (Berrien Springs,
MI: Andrews University Press, 2003)이다.
2. 여러 세기를 통하여 루터교, 개혁교회, 영국교회(성공회),
침례교, 회중교회, 장로교, 감리교 등 많은 교파들의 학자들과 신자들이 “조건적 불멸”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연구하여 이를 지지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인물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6세기—Martin Luther, William Tyndale, John Frith, George
Wishart; 17세기—Robert Overton, Samuel Richardson, John Milton, George Wither,
John Jackson, John Canne, Archbishop John Tillotson, Dr. Isaac Barrow; 18세기—Dr.
William Coward, Henry Layton, Joseph N. Scott, M.D., Dr. Joseph Priestly, Peter
Pecard, Archdeacon Francis Blackburne, Bishop William Warburton, Samuel Bourn,
Dr. William Whiston, Dr. John Tottie, Prof. Henry Dodwell; 19세기—Bishop Timothy
Kendrick, Dr. William Thomson, Dr. Edward White, Dr. John Thomas, H. H. Dobney,
Archbishop Richard Whately, Dean Henry Alford, James Panton Ham, Charles F.
Hudson, Dr. Robert W. Dale, Dean Frederick W. Farrar, Hermann Olshausen, Canon
Henry Constable, William Gladstone, Joseph Parker, Bishop John J. S. Perowne,
Sir George G. Stokes, Dr. W. A. Brown, Dr. J. Agar Beet, Dr. R. F. Weymouth, Dr.
Lyman Abbott, Dr. Edward Beecher, Dr. Emmanuel Petavel-Olliff, Dr. Franz
Delitzsch, Bishop Charles J. Ellicott, Dr. George Dana Boardman, J. H.
Pettingell; 20세기—Canon William H. M. Hay Aitken, Eric Lewis, Dr. William Temple,
Dr. Gerardus van der Leeuw, Dr. Aubrey R. Vine, Dr. Martin J. Heinecken, David
R. Davies, Dr. Basil F. C. Atkinson, Dr. Emil Brunner, Dr. Reinhold Niebuhr, Dr.
T. A. Kantonen, Dr. D. R. G. Owen. Cf. LeRoy E. Froom, The Conditionalist Faith
of Our Father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65,
1966), vols. 1 and 2. 이 명단은 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 . . : A Biblical
Exposition of Fundamental Doctrines, 397-398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