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단절성과 연속성에 대한 바른 이해에 의한 올바른 주일 생활과 헌금 생활'이란 다소 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교회 제도'라고 말하게 되면 상당히 포괄적 개념으로 다루는 범위가 넓고 다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일성수와 헌금으로 한정했습니다. 이는 이 두 가지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으로서 교회 제도의 하나들이기 때문입니다. 본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할 수만 있으면 주일성수와 헌금의 총체적인 이해를 가져나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 주시는 인내를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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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의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사상의 흐름
우리 나라 교회가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어떻게 해서 신자들에게 강조하여 말하고 신앙의 당연한 의무로 하도록 가르쳐 왔는가를 알기 위해서 먼저 한국 개신교의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사상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지고 그 결실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 온지가 어언 100년이 훨씬 넘어섰습니다. 우리 나라에 선교사로서 첫 발을 디딘 분이 독일 선교사인 구츠라프 목사이며 그때가 1832년이요 그후 30여년이 지나서 또 한 분의 다른 선교사가 있었으니 영국 선교사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입니다. 그는 1865년에 우리 나라 땅을 밟았습니다. 그 후에도 몇 몇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나라에 공식적인 선교의 문이 열려진 때는 1885년입니다. 북장로교회로 불리우는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파송되어 온 첫 선교사가 있었으니 그는 언더우드(Horce G. Underwood) 목사입니다. 그는 한국으로 오는 중에 들른 일본에서 미 감리교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아펜셀라(Henry G. Appenzeller) 목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니 벌써 100년을 훌쩍 넘어서 110주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온 100년이 되었을 때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행사이니 무엇이니 하며 한창 시끄러웠었습니다.
글의 시작을 굳이 우리 나라의 기독교의 전래로부터 끄집어 내는 것은, 지금 개신교가 100년을 훨씬 넘어선 이 시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단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예배 모범의 한 조항과 관련해서입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은 이분들이 속해 있는 신학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행히 개혁주의 신앙을 지녔고 또한 청교도적 정신 속에 있었던 것은 그래서입니다. 고신교단에서 장로교회(고신) 50주년 희년 기념으로 발행한 '한국장로교회사'에서는 미 북장로교 외지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이 1911년까지의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 관하여 언급한 것을 소개하기를 "나라가 개방된 이후 첫 25년간의 선교사는 전형적인 퓨리탄형의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1세기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잉글랜드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춤과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에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과 성경비평에 관해서는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천년의 견해를 없어서는 안 될 진리라고 주장했다.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되었다"고 하였습니다.(한국장로교회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2002, p.70)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안식일'은 우리 나라 개신교단의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중요하고도 철저하게 다루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안식일 준수의 가르침은 그들이 성경관에 철두철미한 '오직 성경'이란 개혁주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언더우드 목사 자신은 장로교를 전하기 위해서 한국에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복음을 공포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을 뿐입니다(Ibid, p.73). 이렇게 그는 처음부터 교파적 이해 관계에 의하지 않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잇는 초기 선교사들의 성향은 개혁주의 입장에 있으며 청교도적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로 교회가 형성되었는데, 노춘경은 1886년에 언더우드 목사에 의하여 세례를 받은 첫 세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해에 계속해서 솔내교회에서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1887년에 서울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 자택에서 14명의 세례교인들이 모여 조직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조직교회의 설립은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로 그 기록이 남습니다.
언더우드 목사에 의하여 시작된 한국의 교회는 장로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신앙에 신실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 신앙에서 이방 종교적이고도 이방 풍속적인 삶에서 떠나는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미신인 제사 생활을 금하고, 술과 담배를 끊는 절제와 경건 생활을 가져왔습니다. 고신 교단에서 발행한 '한국장로교회사' 에서는 이를 "처음부터 주초가 죄가 되기 때문은 아니었고, 이것들이 바른 생활과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면 술은 없이할 물건이었다"고 하고 있으나(Ibid, p.97) 실은 필자가 어렸을 적부터 듣고 배우며 경험한 바로는 주초는 제사와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죄악으로 가르쳐졌습니다.
이러한 것은 장로교회(고신)가 주초를 하는 사람에게 권징을 시행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916년에 이은 제 5회 총회에서 술로 인한 권징건이 있었는데 "치리:금년 책벌 467인이요 출교가 189인이온데 혼인 위반죄와 주일 범한죄와 술취하는 죄가 많사오며 해벌은 133인이오며"라고 회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Ibid, p.97)
초기 선교사에 의한 가르침으로 인한 '안식일'은 '안식일 성수' 곧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성수'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주초문제보다 더욱 철저하였습니다. 주일성수에는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걸었으니깐요. 필자는 한국예수교장로회 총공회의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6.25 전쟁 때 거창 지역에 있은 한 사건을 자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거창 지역에 사는 집사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이름은 배추달입니다. 이분이 주일에 북한군이 마당을 쓸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함으로 인해서 총살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일에 마당을 쓸라는 명령이 주일성수에 대한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주일성수를 위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순교를 당했다는 내용은 어렸을 당시 필자에게서는 큰 감동과 감명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성수에 의한 순교자적인 신앙 정신을 더욱 갖게 했습니다. 그에 따라서 주일에 시행되던 각종 시험(자격증 시험)이나 학교 행사 동원에서도 주일성수를 위해 받는 해(害)를 무릎 쓰고 애를 썼습니다. 주일성수를 위해 고난의 해를 받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사례는 찾으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필자의 경우에서 주일성수는 곧 구약의 안식일 성수였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개념으로서의 주일이었으며 따라서 안식일 성수로서의 개념으로서 주일성수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교단 헌법의 예배 모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바입니다. 필자가 소유한 교단 헌법에서 예배 모범을 보면,
제1장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
1.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대로 그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2.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찌니, 공동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금할찌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3.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4.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5.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일이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성경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사랑으로 교제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일에 어떻게 지내야 잘하는 것이며 성수하는 것이냐 하는 것은 논외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다만 주일성수를 왜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본 글의 중심이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의 1항에서 3항은 그 근거가 구약의 안식일 규정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이런 규정에 따라서 이렇게 지켰으니까 신약시액에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그 안식일 규정에 따라서 주일 또한 이렇게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며 또한 지배적입니다.
사실 주일성수는 안식일 규정에 의한 성수 개념으로 가르쳐져 왔고, 그래서 그에 따른 주일성수를 해 왔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시내산 언약의 체결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적 관계를 맺으면서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의를 이해하고 순종으로 살아야 할 것으로서 율법을 수여하셨습니다. 이때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떤 사상과 정신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종교법인 십계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는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사회법과 그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맺어주는 제사와 관련한 제사법, 그리고 제사 보존을 위해서 필요한 절기법, 그리고 절기를 좇아서 제사를 드려 가는 일을 위해서 성전법을 주셨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십계명의 제 4항이며, 1-3항과의 연계 속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안식일 규정은 신명기에서 다시 한번 다루어지고 있는데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 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라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갖는 애굽의 종으로부터의 구원과 관련하여서 주어집니다.
교단 헌법의 예배 모범에서 '주일을 거룩 지킬 것'은 바로 이러한 안식일 규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인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에 관한 율법 조항을 충실히 지키는 것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배모범의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은 율법의 문자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 법의 조항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소교리문답을 통해서 교리적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제4계명인 안식일에 관하여 질문하고 답하는 것에서 말입니다(참조, 소교리문답 제57-61문답)
그렇다면 말입니다. 여기에는 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서 올바르게 지켜야 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그에 따른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에 올바른 이해 속에서 올바르게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해석과 설명이 없이 단지 안식일법[안식일 규정]이 이러니까 이를 좇아서 주일을 이렇게 성수하라는 식입니다. 여기에서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서 율법주의에 관한 불필요한 논쟁이 생깁니다.
주일성수 문제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에 관한 것입니다. 헌금에 관해서도 필자가 소유한 교단 헌법의 예배모범에서는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이,
제 18장 헌금
1. 교회의 각 신도는 주께로부터 받은 재물을 가지고 정칙(定則)대로 헌금하는 일을 배양할찌니, 이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하신 대로 복음을 천하 만민에게 전파하는 일을 도움이 옳을찌니, 주일마다 이 일을 위하여 회중으로 헌금하는 기회를 정하는 것이 합당하고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 성경에 가르치신 대로 이와 같이 헌금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엄숙히 예배하는 일부분으로 한다.
(이하 생략)
라고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가 소유한 교단 헌법이 장로교회(대신)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장로교회의 교단 헌법도 유사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주일성수와 함께 십일조는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도의 본분이요 의무로서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세례를 베풀기 위한 학습 과정에서 세례문답에서 가르쳐지고 있는데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공용으로 나온 '학습세례문답'(성광문화사, 1981)에 보면, 세례(입교)교인의 의무와 권리로 공동예배 참석의무와 함께 헌금할 의무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례인은 모든 수입에 대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性別)하여 진실하게 드리고, 감사헌금, 일반헌금, 특별헌금 등을 정성껏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에 인색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교인의 의무와 권리로서 십일조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교회 생활로 "십일조와 감사헌금 등 교회의 천국 사업을 돕고 축복을 받는 헌금 생활에 힘써야 한다"라고 말하여서 십일조 헌금 생활을 천국 사업을 돕는 선한 일이요 축복을 받는 생활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십일조는 교인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권리요 이 헌금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요 축복을 받는 비결로 인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십일조 헌금 생활을 구약시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 규례를 주신 것에서 말하여 신약시대인 오늘날에서도 좇아야 할 것으로 가르치는 한에는 그 누가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를 고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일과 십일조 헌금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는가?
그러면 말입니다. 이제는 이 문제를 성경에서 풀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일과 헌금 생활을 성경에 의한 신앙으로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네 교회가 전통있게 그래서 제도적으로 지켜 나가고 있는 주일과 십일조 헌금은 과연 성경적입니까?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서 신앙으로 하고 지켜 나가는 것입니까?
1. 구약에서의 안식일에 대한 살핌
(1)창조 사역에서 계시하여 주시고 있는 안식 개념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6일 간에 걸쳐 창조하신 사역의 내용을 각 날을 통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2장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대략을 언급하십니다. 천지와 만물은 6일 간에 걸쳐 창조되었습니다. 각 날마다 하나님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여섯째 날에 이르러 마지막 창조 사역을 하시고 마침내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안식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바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안식하심은 구약의 율법에서의 '안식'이나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에는 '안식'한다고 하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안식한다고 하는 것을 어떤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휴식', '휴면', 또는 '휴양'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쉰다'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동작을 중지한 상태에서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편안한 쉼'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교회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였었는가 하면 "주일은 안식하는 날로서 편안하게 휴식하여 몸을 회복시키는 날인데 성도들이 예배 외에도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므로 실은 안식하기보다는 파김치가 되어 주일 저녁 때만 되면 나가 골아 떨어지니 이는 주일을 잘못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성도들이 예배 후에 참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여 주일 예배 후에 가족 간에, 또는 성도 간에 야외에 나가 거닌다든지 레저 스포츠를 즐기는 것을 허용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권장하였습니다.
우리가 안식을 잘못 이해하면 이런 실수나 잘못을 범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하심'을 잘 이해를 하여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안식하심 속에서 함께 안식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두 번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하시던 동작을 중지하고,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셨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식하심은 그냥 '안식하시니라'란 말만 보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앞의 말씀과 반드시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식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하셨고, 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면 말입니다. 그동안 창조 사역이 행해진 여섯 날은 하나님 안에 들어 있습니다. 창조 사역에서 등장하는 처음의 이 여섯 날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 창조 사역을 시작하고 마치실 때마다 '아침'이 되며 또한 '저녁'이 되는 날의 개념을 가졌습니다. 이는 여섯째 날에 이를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 날에 안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번째의 날이 되어서, 그래서 그 날이 와서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한 후에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물에 씻으며 두 팔과 두 다리 쭉 뻗으며 '아이구, 이제 좀 쉬겠구나!. 이제 살만하다'고 하는 그런 인식 속에서 이제 '모든 일을 마쳤으니 이제는 쉬자'고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평안히 쉬셨다는 의미에서 안식을 하셨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모든 사역이 마쳐지고 그래서 여섯째 날에 이어서 일곱째 날로 불려질 그 다음 날이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갖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또한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식하셨다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안식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여서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있는 피조물인 천지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존재'의 관계에 놓여 있는 '날'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또한 '(그)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하나님의 안식 개념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는 일을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게 복을 주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과는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성이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특별히 '거룩히' 여겨지는 것은 그날에 복을 내리시는 일이 있기 때문이며, 이는 천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관계에 있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주이십니다. 천지 만물은 자신들의 주이신 하나님의 복 속에서 존재합니다. 일곱째 날은 이런 관계성이 확인되는 구별되는 특별한 은총이 베풀어진 날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앞서의 엿새와는 확실히 다른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만물의 주로서 복 있게 다스려 가시는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천지 만물에게 복을 내리신 것 그 성격은 다름 아닌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데서 찾아집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안식'과 그분 안에서 천지 만물이 누리는 '안식'은 어떤 의미에 의한 것일까요? 먼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곱째 날이 갖는 날의 의미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일곱째 날은 창조 사역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대로 순서상으로는 여섯째 날 다음에 오는 일곱째 날입니다. 그러나 이 일곱째 날은 그 다음에 다시 첫째 날로 이어지고 그래서 다시 둘째 날이 되고 셋째 날이 되고…해서 또 다시 일곱째 날을 맞이하고 하는 그 일곱째 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하나님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에서 자연스럽게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였으나, 여섯째 날 이후에는 다시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는 더 이상 언급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인 일곱째 날은 창조 사역을 마친 이후에 천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복을 누리게 되는 '안식하는 날'로서 날의 총체적 개념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은 새로운 시작의 날입니다. 창조의 사역은 여섯째 날로 마쳐졌습니다. 일곱째 날이 창조 사역이 마친 끝 날이 아닙니다. 엿새간에 걸친 천지 만물의 창조 사역이 마쳐지고 이제 그 천지 만물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복을 누리는 날이 주어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째 날은 천지 만물에게는 안식하는 시작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은 일곱 번째의 날이요 그래서 다시 여섯 번의 날이 지나고 나서 일곱 번째에 맞이하는 그런 날이 아닌[이때는 하루, 이틀...이 지나서 며칠 째이고 하는 개념이 없다. 날이 사시와 연한을 이루지만 창조 당시에는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외에는 날수를 세고 연수를 세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천지 만물이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복을 누리는 날을 살아가는 날의 총체적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안식, 그리고 천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안식은 어떤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용어인지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을 이루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창조 사역을 마치셨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만족해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의 극치를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만족하심과 그로 인해서 갖는 기뻐하심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창조의 뜻대로 되어진 것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만족하심과 기쁨을 그때만 갖는 것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복 주어 그 창조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해져 가는 것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가지십니다.
여기에서 날의 거룩성이 있습니다. 날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날이 '거룩한 날'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한 천지 만물에 복을 내리시는 날을 삼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곱째 날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히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에 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히 여기시는 것인데, 그것은 곧 안식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식 속에 천지 만물을 안식하게 하는 복을 내리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될 때까지 그 날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내리신 복인 안식 속에서 존재를 합니다. 이것에 의해서 천지 만물은 복 있는 존재로 다루어지며, 이렇게 하나님이 내리신 복을 받아 복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날들은 함께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일곱째 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안식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일곱째 날과는 서로 연결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셋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식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물인 천지 만물은 자신을 창조하신 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복을 받음으로써 이러한 복을 누리는 날을 살아가는 복 있는 존재인 것이요 그런 날로서의 날은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관계 속에 있게 하는 것으로서의 날에 있을 때에 비로소 날은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한 날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창조 받은 천지 만물은 안식하는 날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의 상태에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 안식하는 이 안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날에서 안식하시는 하나님과 그가 지으신 피조물의 관계를 맺어주는 안식은 단순히 그냥 있는, 그러니까 단순히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분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이 존재하는 목적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해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입니다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서 있으며, 그 안식일의 주인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날이 의미를 지니고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에게 안식하게 하는 것으로서 날을 주신 것은 천지 만물로 하여금 안식하는 그 날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것의 이해는 우선 첫 번째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날에 복을 주셨다든지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든지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 아주 만족스러워서 대단히 흡족해 하시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적 묘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해 되어진 창조가 온전한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하여 드러냄을 의미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것이요 이러한 창조 상태를 지속해 나가시는 것으로 일곱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데서 찾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신 그 기쁨을 주는 일을 천지 만물은 이제 날에서 해 나갑니다. 날이 사시를 이루고 일자를 이루고 연한을 이루는 그 속에서 말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는 그 이해를 다음 두 번째로 창세기 1장 26-30절에서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히 만족스러워하시고 흡족해 하시는 기쁨을 가지신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상태에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다른 피조물이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는 말씀을 하신 위치에 있으면서 본성을 발휘해 나가는데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표한 존재요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는 대리자로서 만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것에서, 그리고 모든 자연 만물은 그의 다스림을 받아 각각의 위치에서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것에서 안식합니다. 사람에게서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는 것을 금지하는 말씀에 의해서 나타났습니다. 사람은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지키는 한에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관계성이 성립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한에는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도 정상적으로 성립된 상태에 있었고 이런 세상은 행복이 극치에 이르는 세계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존재하는 데서, 곧 하나님이 주신 복에 따라 각각 그 존재 목적대로 본성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데서 하나님께서 심히 만족스러워하시며 흡족해 하시는 안식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평안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과 자연 만물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선포되어 온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선양됩니다. 그 세상은 평화로 충만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이 평화를 기뻐하시고 또한 충분히 즐기십니다. 그러한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기뻐하고 즐거움을 갖는 사람과 자연 만물의 행복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그 안식 안에서 함께 안식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렇습니다.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이랬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특별히 사람이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과 관련하여서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으로 자신을 안식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시고 또한 그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사람을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사람이 안식을 하게 하신 것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본성으로 지니고 있는 종교성을 자신을 창조하신 주 하나님을 향하여 표현하며 발휘해 나갈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 사역을 마치신 하나님은 이제 모든 피조물들과 교통하시는 가운데서 자신의 거룩한 속성을 나타내시고 친히 영광을 받으실 일을 하시므로 영광을 받으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경배]하는 것에서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적 개념에서 안식은 휴식이나 휴면이나 동작의 중지와 같은 정적(靜的)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동적(動的)이며 진행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이제 그 일을 행하신 목적에 따른 결과를 계속 누리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신 데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즐기고 하나님을 공경하여 높이며 받들어 섬기는 예배[경배]적인 삶을 사는 것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으며 그 하나님께서 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래서 사람이 날을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함께 안식한다는 것은 이런 질적인 것입니다.
(2)십계명의 제4계명으로 제도화된 안식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인해서 안식이 제공해 주는 축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고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로 있는 한에는 그들에게 안식을 충분히 맛볼 수 있도록 일련의 조치를 취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을 말씀하셔서 제도적으로 이러한 안식일을 가져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차지하게 하시는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나가는 삶의 내용으로 있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안식일 규정은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체결하고 율법을 주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에 준행하여서 살 것을 명령하실 때 십계명을 선포하신 것에서(출 20:1-17), 그리고 가나안 입성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가운데 가나안을 차지할 새로운 이스라엘 세대와 언약의 재확인을 시켜 주시며 십계명을 선포하게 하실 때(신 5:1-21),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서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다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있어서 이런 저런 금지의 규정을 두어서 규제하는 말씀을 두신 것은 사실 그런 어떤 것으로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일에 훼방을 받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뜻의 강한 의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규정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앎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죄를 짓는 일로 나가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 백성을 그 악으로부터 지켜 가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성실함으로 지키는 모습을 통하여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그러한 신실한 자들이 있지만,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규정에 의해서 제도적으로 하나님의 배려를 받아 나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어떻게인줄 아십니까?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에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안식일 규정을 제도적으로 어기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은 그들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매주 지키는 국가와 민족적인 절기이니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만이 아니라 이와 연관되어 있는 각종 절기를 철저하게 지켜나갔습니다. 안식월, 안식년, 희년을 지켰으며, 삼대 명절로 불리우는 큰 절기를 지켰으며, 대속죄일을 지켰습니다. 그외 이스라엘은 1년 전체가 절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절기 생활이 이스라엘의 생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도적으로 지키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규정을 주신 하나님의 배려를 저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왜입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1장 1-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탄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지 않은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하는데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각종 절기를 성회로 모여 지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를 받지 않고 물리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름지고 살진 가축들!, 다 필요 없다고 손을 내저으십니다.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이런 것 저런 것을 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귀를 막고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입니까? 그런 그들에게 정작 있어야 할 것들, 그러니까 성회로 모이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을 외면하는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멈추고 의를 행하며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고 말입니다. 이것 없이 기름지고 살진 가축들을 매번 성회로 모일 때마다 가져온다 한들 그들의 검은 속내만 뻔히 드러낼 뿐입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탐욕으로 가득찬 그들의 속내에 하나님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드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이 없이 나간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십니다. 기름지고 풍요한 축복!, 전혀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수를 붙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이 산당 제사에서나 취급되는 그런 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에는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맺어지는 관계성 속에 있는 것인데 그 확인을 율법 준수를 통해서 해 나가십니다.
(3)안식일 제도와 예수 그리스도
그런 까닭에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탐욕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제도를 그대로 두십니다. 다른 절기와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절기가 있는 한에는 제사 또한 존재하며 성전도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그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 안식을 모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체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형으로 하고 있고 예표하고 있는 내용을 성취하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과 절기의 주인으로 계시며 자신의 몸으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신 후에는 더 이상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도와 관련한 율법은 폐지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성전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시오 그 성전 안에 모든 자신의 백성들이 성전의 각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불러모은 자들로 성전을 이루게 하고, 이제는 더 이상 천막이나 돌로 지은 성전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게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게 하여서 그 몸의 한 부분으로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로 계십니다. 곧 주이신 것이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룬 관계성에 의해서 이제는 '교회'란 용어로 말씀하십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그렇다면 말입니다. 성전 제도가 없어진 것은 이것을 필요로 하게 하였던 절기가 없어졌기 때문이며, 절기의 폐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려 하나님에게 화목제물이 되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의 제물이 필요하지 않게 하신 데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 계시며 그분의 몸으로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섬김에서 직접 제사와 절기와 성전이 갖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누립니다. 그에 따라서 안식일 제도는 더 이상 날의 의미를 갖지 않으며 따라서 안식일을 성수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안식일 성수의 개념에서 주일성수한다고 하는 것은 주일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주일을 아직도 안식일로 여긴데 따른 잘못된 것입니다.
2. 구약에서의 십일조에 대한 살핌
이제 구약에서의 십일조 헌금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제일 처음 언급된 십일조는 창세기에서의 아브라함 때이며 야곱에게서 다시 한번 언급이 됩니다. 그런 십일조가 제도화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율법을 받으면서부터입니다. 그것은 십일조가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십일조의 시작을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거론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그러기에 여기에서부터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1) 아벨의 제사에 사용된 가축의 첫 새끼
구약 시대에서는 처음부터 십일조 헌금이 명령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벨의 제사에서 언급되는 짐승의 첫새끼를 십일조와 연관하여서 말하는 이도 있으나, 사실 아벨이 드린 짐승의 첫새끼는 십일조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그가 형인 가인과 함께 드린 제사에서 언급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제사의 시작이 된 것은 아닙니다. 아담의 제사부터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인 아담이 드리는 제사에 어렸을 적부터 참여하면서 그 제사가 갖는 의미를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추측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명령과 규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에 의해서 드려진 것입니다. 이 제사가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의한 타락 후 하나님의 심판에 이어 구원의 약속(원시 복음; 창 3:15)을 주신 것에 의한 믿음의 표현이었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제사를 드려라!"고 하는 명령이 주어져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순전한 마음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제사를 드린 데 따른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사용된 제물에 하나님의 평가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 여기서 '믿음으로'라는 말을 그 앞의 3절에서 설명하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믿음으로 압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아벨은...'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곧 하나님께서 가인이 드린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린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물을 열납하심으로써 그가 의로운 자라는 사실을 중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론의 제사가 믿음으로 행해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것은 그가 행한 이 보이는 일은 보이지 않는 일로 말미암습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로 나타나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믿음으로 그는 제사라고 하는 현상적 행위를 통하여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이러한 믿음은 형인 가인과 함께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인 아담에게서 하나님과 교제의 필요성과 그 생활을 교육 받아온 데 따른 것이었을 것이며, 아담은 이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기 직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원시 복음과 함께 하나님께서 한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입히신 사건에서 하나님과 화목[화평]을 누리는 계시적 의미를 깨닫고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하나님이 보이신 방식인 짐승의 희생의 방식으로 그대로 가져 나갔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담의 삶은 가인과 아벨에게서 교육적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곧 세월이 흐른 후 독립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때도 각기 제사를 드리는 것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로 보이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다 같이 이렇게 제사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가져 나간 것은 제사가 이 두 아들이 우연히 생각해 낸 것이 일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카일·델리취(Keil and Delitzsch)의 창세기 주석에서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를 가죽 옷, 즉 짐승의 가축으로 만든 옷을 두 사람에게 입히심으로써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옷을 지으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손으로 옷을 깁으셨다는 식으로 순전히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단지 '사람의 처음 옷은 필요한 재단 방법과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할 뿐이다. 이 옷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수치의 감정에 각성된 양심의 가견적 징표를 또한 벗은 몸을 덮으려는 필연적인 필요성에 죄인에게 적합한 훈련의 높은 사역을 부여하셨다. 첫 사람의 옷을 위해 짐승의 가축을 선택하심으로서 따라서 그 목적을 위해 짐승을 죽이심으로써 하나님은 어떻게 그 들이 그들 자신의 선을 위해 동물들이나 인간의 보존을 위해 희생 동물의 생명에 대해 소유하였던 주권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행동은 비록 첫 옷이 우리의 궁극적 '덧입는 것'(고후 5:4)을 예표하거나 가죽 옷이 의(義)의 옷을 예표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희생 제사에 대한 근거를 놓았다"고 말한 것은 일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는 처음부터 짐승이란 특정한 것으로 제물로서의 인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보는 대로 제물은 그들이 생활해 나가기 위하여 갖는 노동에서 자연스럽게 취(取)해져 사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마음은 아벨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의 형인 가인에게도 있었으며, 이것의 믿음에 의한 행함인 제사는 아벨은 가축을 기르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가축에서, 그리고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곡식에서 취했습니다. 게다가 모세의 율법에서 제사에 비로소 속죄의 의미를 나타내시기까지는 속죄의 의미 또한 담고 있지 않았기에 반드시 희생 제사여야 한다고 하는 규정을 띠고 무언적(無言的)으로도 띠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아벨과 그의 형인 가인은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에 하나님을 힘입으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에 사용되어진 제물[예물]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감사의 헌물의 성격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벨과 가인이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제사였으며 거기에 사용되어진 제물은 가축과 곡식 등 종류가 구분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가인의 제사가 서로 다른 제물이 동원되고 사용되었을지라도 그 차이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안 하시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그 기준은 그 제사가 '믿음으로' 드려진 것이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제사를 열납하신 기준인 '믿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벨이 믿음으로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지금 가축을 사용하여 제사를 드리는 일로 보여 나간데 있습니다. 아벨은 제사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표현해 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로 섬기는 하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나갔던 것입니다. 아벨에게서 제사의 행위로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는 제사의 행위로 제물을 드리는 것에서 경건의 모양을 가져나가기는 하였으나 그야말로 종교적인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를 드리는 행위에 집착하였지 제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상에 말해 나가는 '의로운'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제사에 바친 제물이 아무리 풍요한 곡식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은 것은 그 까닭에서입니다.
이렇게 아벨의 제사에 사용된 짐승, 그리고 그 짐승으로 사용된 양의 첫 새끼는 십일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 제물인 가축의 첫 새끼를 십일조의 근거로 삼다니요?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의 표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원과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벨의 제사 이후 제사는 창세기 4장 26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한 대로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116편 17절에서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한 그 '감사제'였습니다.
(2) 노아의 제사에서 감사제는 구원의 언약의 성격을 띰
더욱 세월이 흘러 노아 시대에서 노아가 행한 제사를 볼 수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의 심판에 의한 멸망에서 구원얻고 1년 17일 만에 방주에서 나와 땅을 밟고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창 8:20-21)의 제사를 드린 일이었습니다. 이 제사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의 행위였는데 여기서는 제사의 성격이 좀더 의미를 담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심판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제사가 자원과 자발적인 면에서의 제사였다고 하면 노아의 제사는 한층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하심을 본 가운데 자발적으로 드려진 (감사)제사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바친 제물의 향기를 맡으시고 기뻐하시면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십니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치해 나가실 것으로 무지개를 표징으로 하여서 노아와 생명의 보존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이렇게 노아의 시대까지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제물의 '첫 새끼' 또는 '첫 곡식단'이 십일조라고 하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2) 아브람[아브라함]의 십일조
성경에서 십일조란 공식 용어가 등장하기는 아브라함 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말하면 헌금[연보]의 형태가 비록 특정한 때에 있은 한 차례의 일에 불과하지만 표면화 된 것은 아브람의 십일조 사건에서입니다. 아브람의 조카인 롯이 소돔에 거하는 중 당시 시날왕 아므라렐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연합한 군대에게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왕이 연합한 군대가 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소돔이 노략 당할 때 롯도 사로잡혔었습니다. 아브람은 그 소식을 도망쳐 나온 사람을 통하여 듣고서는 가신인 용병 318명을 거느리고 나가 네 나라의 왕이 연합한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기고 모든 빼앗겼던 사람과 재물을 되찾아 왔습니다. 돌아올 그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에 나와 아브람을 영접하였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19-20)라고 축복하여 말하니 아브람이 전쟁에서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취하여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하자 아브람은 소돔왕에게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을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창 14:22-24)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십일조 사건이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표현으로 말하면 헌금을 드린 것이 표면화된 처음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의 십일조는 제도화된 십일조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축복하여 말하기를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하여 "아브람 당신의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승리를 준 것이다"라고 하는 데에 대한 "과연 그렇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과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십분의 일을 떼어서 멜기세덱에게 드려서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소돔왕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할 때 그가 하나님을 멜기세덱이 말한 그대로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한다"고 말하여서 자신의 승리가 자신의 힘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품 중에서 실오라기 하나 취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것으로 치부하였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며, 이는 그가 자기의 힘으로 싸워서 이겼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으로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서 대적을 자기의 손에 붙여주셔서 승리하게 하신 데 대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니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람을 만나 복을 빈 자인데 그 이름을 번역하면 의의 왕, 평강의 왕으로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히 7:1-3). 멜기세덱은 왕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예표로 보내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에 대하여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만 그가 아브람에게 복을 빎으로써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 주심을 깨닫게 하였으며, 그 일은 훗날에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있을 사단에서의 승리와 그로 인한 구원을 예표로서 보여주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장래 있을 그 일의 의미를 그때는 알지는 못하지만 당시 전쟁에서 승리하고 롯과 그리고 그와 함께 포로가 되고 탈취당했던 물품을 되찾아올 수 있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물품의 십분의 일을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의 십일조에서 나타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요 자원과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4) 야곱의 십일조
아브람의 십일조에 이어서 그의 손자인 야곱에게서도 십일조가 언급이 됩니다. 창세기 28장 10-22절의 벧엘 노숙 사건에서 야곱의 십일조의 언급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인 에서에게로부터 장자권을 팥죽을 사고 형으로 위장하여서 아버지로부터 형이 받을 축복을 빼앗은 사건으로 인해서 형의 미움을 받아 화(禍)를 면하기 위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야곱은 도망 중 벧엘에서 하룻밤을 지나는데 이곳은 아브람이 단을 쌓던 곳으로서 야곱이 이곳에서 노숙하던 중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하시는 꿈을 본 후 돌을 취하여 단을 쌓고 기름을 부으면서 벧엘이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벧엘의 본래의 이름은 루스였습니다.
야곱이 벧엘에 이르러 밤이 깊어 노숙하게 되었는데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야곱과 함께 하여 주시고 그가 복을 받을 것이며 모든 자손이 야곱과 그의 자손으로 인하여 역시 복을 받을 것이며, 야곱이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계시하여 주었습니다. 야곱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지금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 벌써 그의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맺어온 약속이요 부친 이삭과도 더불어 맺은 약속으로서 이제 너에게 약속을 맺는다는 것을 상기키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조부 때부터 맺은 허락한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한다, 곧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며, 조부로부터 하나님의 백성 삼은 것을 이제 너와 네 모든 자손과도 맺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너하고 맺는 이 약속에 의해 너의 모든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축복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에 근거하여서 하나님과 더불어 서원합니다. 그리고 그 서원의 증표로서 그는 기둥으로 세운 돌로 하나님의 전을 삼겠다고 하였으며, 또한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같이 감사의 뜻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을 믿고 그에 따라서 믿음으로 따르며 살겠다고 하는 서원적인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십일조 역시 어떤 명령에 의해서이거나 규정에 의해서 드려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서원한 십일조를 어떻게 드렸겠습니까? 그가 서원하는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맹세하였으나 그 어디에서도 십일조를 정기적으로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십일조는 훗날 십일조 규정에 의해서 십분의 일이라는
'분량'의 개념이 아닌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였으며 또한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의 표'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제사 생활이었다고 할 것이며 그것은 자원과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5)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십일조 제도
야곱에게서 열 두 아들이 나오고 이들은 열 두 지파를 형성하며 이들 지파가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야곱 이후로 더 이상 나오지 않다가 야곱의 후손이 애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크게 번성한 후 하나님의 불러내심으로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진행 중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명하여 십일조를 명령하여 언급하실 때에 다시 나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의 증표로 맹세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율법의 규정으로 주어져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제사장의 일을 돕는 레위인을 섬기는 일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절기를 지키는데 필요한 비용을 지는 일과 고아와 과부의 가난한 자들을 도우는 일로 지켜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열 두 지파의 대표자인 야곱의 십일조 맹세는 지켜졌습니다.
그러면 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에게, 그래서 가나안에 입성할 이스라엘에게 그와 같은 의무가 주어졌을까요?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세상 나라와 전혀 성격이 다른 한 나라를 세우십니다. 하나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되는 신정국가의 개념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왕국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제사 제도의 보존 언약'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입니다(시 50:5).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그 언약 관계에서 의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확증해 나가셨는데 그 언약의 관계를 순종과 충실을 표현하는 제사에 의하여 유지해 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시 이 제사 제도를 통하여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계시해 나가시는 방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보이시는 것을 통하여 장차 인간의 죄를 속죄할 어린양 되신 독생자의 '헌제사역'을 계시하셨습니다. 제사 방식에는 5대 제사가 사용되었는데 이들 각종 제사 규례가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어린양의 희생 사역을 통하여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드리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형적으로 예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르러 세상에 오시고 자신을 희생 제사의 제물로 드려지기까지는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대로 지속적으로 계승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헌제사역에 의한 희생 제사가 드려짐으로 제사의 마침이 될 때까지는 제사 제도가 지속적으로 계승되어와야만 했고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제사 제도가 보존되어야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제사법들이 보유하고 있는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곧 제사의 절차에 관한 규례, 제물들에 관한 규례,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기구들에 관한 규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에 관한 규례 등 부수적인 규례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절기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절기에는 가장 큰 절기로 지켜지는 유월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수장절[초막절, 장막절] 삼대절기를 비롯하여서 이 삼대절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무교절, 초실절이 있고 또한 부림절과 수전절이 있으며, 대속죄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식일, 안식월, 안식년, 희년의 절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실상 1년 전체가 절기로 되어 있어 절기 속에서 생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절기 제도 속에 두는 것은 절기를 통하여 제사가 멈추지 않고 시행되어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가 하면 절기에 이스라엘 온 백성이 집중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서 성전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a.첫 번째 십일조
이렇게 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손 대대로 제사를 유지하고 보존해 나가게 하였는데, 이때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자들이 있어야 하기에 열 두 지파에서 레위지파를 성별하여 제사와 관련한 일만을 하며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레위인은 그런 면에서 다른 열 한 지파에게 영적인 기업이 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레위지파를 제외한 다른 열 한 지파는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을 분배받아서 땅의 분배가 없는 레위인의 기업이 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역할을 십일조 제도를 통해서 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레위인들이 먹고 사는 생계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보장이 되는 속에서 오직 성전 중심의 생활에만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민 18:24). 그래서 십일조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일조 제도에서 첫 번째 십일조입니다. 그러나 십일조 제도를 지켜 나가는 것은 열 한 지파만이 해 나가야 하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은 레위인들도 마찬가지 였기 때문입니다(민 18:26). 그들도 역시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일조를 취하여 제사장들에게 하였습니다. 이는 민수기 18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그들이 '회막에서 일한 보수(報酬)'였습니다. 레위인으로서 같은 레위지파인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기업으로 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 제사장을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하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래서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민 18:26)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거제(擧祭)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라고 한 것은 모든 제물 전체를 여호와께 돌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의미에서 하라고 하셨으며, 그렇게 한 십일조를 하나님은 제사장의 양식으로 제공하여서 그들의 생명을 보살피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십일조의 준수는 열 두 지파 모두인 이스라엘 전체가 지켜 나가야 하는 민족 공동체적인 제도였습니다.
이때 십일조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레위인들에 대한 생계의 책임을 지는 '조세'로서 의무 조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에 의해서 시행되는 강제 규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하였으며 자원과 자발적으로 하게 하였습니다. 십일조 제도가 조세의 성격인 의무 조항이지만 '자원하는 마음에 의한 헌물'로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자신들의 생명이 보존되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함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의 소유물이 사용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자원적인 헌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레위기 27장 26절, 30절, 32절에서 '여호와께 돌릴 첫새끼, 곧 여호와의 것 ', '성물',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숫자, 분량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돌릴 것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따라서 이 십분의 일은 전체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십분의 일을 취하여 레위지파에게 주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따로이 기업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에게 십일조를 하여 그들의 기업의 양식으로 공궤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위하여 일하는 그들에게 응식(應食)이 되게 하였습니다.
십일조 제도에 의해서 레위인들은 일생을 제사에 종사해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 제도 또한 제사와 관계하여 있게 하신 절기 제도와 성전 제도와 마찬가지로 제사 보존을 위한 제도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십일조 제도가 제사 제도와 그 효력의 기능을 같이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제사 제도가 존재하고 시행되는 한에는 또한 십일조 제도도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의 헌제사역에 의해서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짐으로 폐지될 때는 제사 제도와 함께 해온 십일조 제도도 더 이상 시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없어 폐지가 됩니다. 제사 제도의 폐지는 절기 제도의 폐지를 가져왔고 또한 절기를 좇아서 제사를 드렸던 성전 제도의 폐지도 가져왔기에 이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담당하였던 레위인들과 여기서 다시 성별된 제사장들의 봉사의 직무도 더 이상 행하여지지 않기에 십일조 제도 또한 더 이상 조세의 성격을 띤 의무 조항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가 유독 십일조 제도의 유지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사도, 절기도, 성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십일조만큼은 존재해야 한다니요?
b.두 번째 십일조
십일조 제도에는 이외에도 다른 의미에서 드리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십일조를 두 번째 십일조라고 명명하여 말할 수 있는데, 신명기 12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물을 드리되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제물을 먹으며 즐거워하라고 하면서 그 즐거움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는 가운데서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곧 번제, 희생, 십일조,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택하여 지정한 한 곳에 가져다가 땅에 들어오게 된 즐거움에 의하여 즐거움을 함께 갖고 나누는 축제의 분위기에서 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가나안에 들어온 즐거움을 누리는데 그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 분이 누구시냐고 할 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공궤의 목적에 의해서 하기도 하지만 즐거움을 같이 갖고 나누는 누림에 의해서 하게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십일조는 절기의 축제 속에서 바칠 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공동식사를 하고 그들이 수고한 모든 일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주신 것을 기뻐하며 그 자리에 레위인들도 참여시켜서 하여 함께 기쁨을 갖게 하는데 쓰여졌습니다(신 12:4-12).
c. 세 번째 십일조
신명기 14장 22-29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드릴 십일조로 또 한 가지의 십일조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일조를 세 번째 십일조라고 명명하여 말할 수 있는데, 이 십일조는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을 구제하게 하기 위해서 명령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한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연약한 가운데 있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 보살필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며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 힘이 부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 십일조는 매3년마다 하게 하셨으니 그해 수확의 모든 십일조를 모아서 마을의 창고에 쌓아 놓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과 마을에 함께 사는 객[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신 14:28-29).
3. 신약에서의 십일조와 주일 개념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에서의 안식일과 십일조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신약에서의 주일성수와 헌금의 개념을 보겠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가져온 의식법의 폐기[개혁]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시고 장사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구속 사역으로 율법의 마침이 된 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가리킨 후손인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요(갈 3:19),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법으로 죄에서 자유하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갈 3:21-29). 여기에 있어서 이 은혜로운 일이 있기까지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작용되어 왔던 율법의 의식법들은 이제 그 기능과 역할이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벨직신앙고백서 제25장은 의식법의 폐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의식이나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끝났다는 것과 그 분명치 않았던 일들이 모두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율법의 참 진리와 그 실체는 이 모든 것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되, 이 율법의 의식을 지키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필요 없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생활을 규정해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얻은 그 모든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하는 바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19절에서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또한 살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율법을 무효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 죄를 고발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셔서 다시는 정죄를 받지 않게 하셨으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서 할례는 무의미합니다. 더 이상 먹고 마시는 일이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나 안식일과 월삭을 지키는 문제로 남의 비난을 받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다만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상징이요 그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율법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실 그 좋은 것들을 보여 알게 해 주시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뿐 실체는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될 때까지 임시로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7장 18-19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할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율법은 무력하고 무익하므로 폐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8장 6-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두 번째 언약인 하나님의 새 언약에는 더 나은 약속이 들어 있기 때문에 첫 번째 언약인 옛 언약은 이제 효력이 없다는 의미로 "첫 번째 언약이 무흠[결함이 없음]하였다면 두 번째 언약을 요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13절에서는 "두 번째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제 첫 번째 언약인 옛 언약은 낡아진다"고 하였고,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두 번째 언약으로 주어진 새 언약에서 '새롭다'를 뜻하는 '새'는 최종적인 개념입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마지막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땅 위에 아직도 제사장들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대제사장이 되시지 않았을 것이며, 땅 위에 앞으로도 성전이 있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성전을 무너뜨리며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앞으로도 절기가 계속해서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헌제제사로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절기를 지키도록 제도를 더욱 굳게 하셨을 것이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십일조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자들을 엄히 책임을 묻고 죽음의 형벌로 다스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유대교가 아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제사 제도를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성전 생활을 하고 제사장이 활동하고 하는 곳은 없습니다. 당연히 여기에 종속되어 있는 십일조 제도도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 사역을 완수함으로써 은혜로운 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는 신약 시대의 전 시대인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 왕국에 한하여 주어진 구시대의 제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새롭고 더 나은 길을 가지고 오실 때까지는 사람들은 옛 언약에 의한 이 제도를 지키며 살았습니다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제 더 나은 제도의 제사장이요 제물이요 성전이 되신 후에는 여기에 종속되어 있는 십일조란 옛 언약의 제도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십일조란 옛 언약의 제도를 고집한다면 그것이 효력을 발휘해야 하는 까닭에 다른 제도들 곧 제사법과 절기법과 성전법에 의해서 지키는 이 제도도 여전히 지켜져야 할 것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증명할 피가 계속해서 뿌려져서 제단을 피로 물들이고 흘러 내려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우리 나라의 교회는 개신교로 자신들을 말합니다. 이는 개혁파 신교라는 것으로 개혁교회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교회 됨을 구교[카톨릭]에 대항하고 구교의 잘못된 교리와 예배 의식을 개혁한 것에서 주로 찾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는 바른 교리로 믿고 따르며 바른 예배 의식을 갖는다는 것인데 정작 역사적 전통을 잇는 신조와 교리를 따르지 않으며 여기에 근거하여서 예배 모범을 바르게 가져 나가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도 그렇습니다. 앞서 벨직신앙고백서 제25장에서도 본 것입니다만 의식법의 폐기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십일조 제도를 여전히 고집할까요? 그 첫째 되는 요인은 예수님께서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였다는 것을 듭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구절은 누가복음 11장 42절에서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또 누가복음 18장 12절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지금 이 세 구절은 단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 때문에, 그런가 하면 예수님 당시에 언급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할 것을 말씀하셨으며, 또한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면서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이 구절들은 십일조 제도를 교회가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말해 주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십일조 언급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옛언약을 성취하시기까지는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자의 위치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예수님은 아직은 구속 사역을 진행해 나가는 때에 있으므로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여전히 의식법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자신도 친히 여러 절기들을 지키셨으며 또한 의식 규례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바른 준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신명기 14장 22-23절에서 명령하고 있는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는 데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렸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양념에 쓰이는 채소에 이를 만큼 십일조의 적용을 세세한 부분에까지 적용하여서 지켜나갔습니다. 그래서 박하 꿀풀과에 속하는 1m 크기의 다년초로 단맛을 내는 식물인데 줄기와 잎에서 향료를 채취한다. 유월절 축제 때 먹는 쓴 나물에 넣는 양념 중 하나이다]와 회향[미나리과의 식물로 운향이라고도 하는데 1-15m 크기의 다년초로 "궁궁이"라고도 불리우며 뿌리에서 향료를 채취하여 구충, 통경(通經) 등에 약재로 쓰기도 하고, 양념으로 쓰인다]과 근채[미나리과에 속하며 '구민초'라 불리움. 양념과 약재로 쓰인다]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십일조 생활을 인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들이 아직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해온 대로 그 모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단지 그러한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 것에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율법에 따라 바치는 그들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율법의 준수는 그야말로 작은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가장 중요한 율법의 준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정의)와 인(자비)과 신(믿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설사 십일조만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기까지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무시하고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의와 인과 신을 행하여 나가는 참으로 큰 율법을 지켜 나가고 있는데 양념에 쓰이는 채소의 십일조를 하는 세세한 규정들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의 십일조 언급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속 사역의 진행 과정에서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믿음을 책망하는 데서 있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의 외식을 지적하거나 그리스도 사역의 본질을 말하고자 해서이지 십일조 제도의 시행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3)말라기 선지자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였다는 것에 대한 반론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강력히 내세우는 또 하나의 근거는 다름 아닌 말라기 선지자가 선포한 온전한 십일조의 언급입니다. 말라기는 선포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제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0-12)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온전한 십일조를 할 것을 명령하셨으며, 이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를 시험해 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온전한 십일조'의 기준을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만일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그 십일조는 온전하지 않은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럴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온전한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 그러니까 10%를 말하는 것이 아닌 '세 가지의 십일조'[레위인의 십일조를 포함하면 네 가지의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 십일조를 온전히 하라고 선포하고 있는가 하면, 이 십일조를 온전히 해야 제사장과 그리고 제사장을 도와 성전의 각종 일을 돕는 레위인이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고, 절기에 쓰일 비용[성전에서 자신들의 가족들과 그리고 레위인의 가족들이 함께 공동식사를 하며 즐거움을 누림]을 충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자들 중에서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보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으면 제일 먼저 제사가 온전히 보존되어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생계에 위협을 느끼고 성전을 지키지 않고 일상 생활의 일터로 나가 성전 봉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황폐하게 될 것이 자명한데 과연 그러했습니다(느 13:10-11). 말라기 3장 10절의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는 다름 아닌 '너희는 수확한 십일조를 온전히 나의 성전에 갖다 바쳐서 제사장들에게 먹을 양식이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의 온전한 십일조 준수의 선포는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십일조의 양[액수]을 정확히 십분의 일을 하여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주시지 않는지를 시험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주어진 세금[조세]의 의무인 십일조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악을 행함으로써 제사장들이 성전을 지키지 않고 레위인들이 성전 봉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성전이 황폐화되는 죄를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4)구약 시대의 안식일 율법이 신약 시대의 주일이라는 견해에 대한 반론
이제 십일조와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인 주일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주의 날'인 주일(主日)을 지킵니다. 그런데 그러한 까닭으로서 구약 시대의 안식일 율법을 근거로 내세웁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십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데 따라서 합니다. 구약 시대에서 안식일 준수는 분명히 그러한데, 신약 시대에서 주일을 구약 시대에서의 안식일 준수에 맞추어서 그대로 지켜 나가려고 하는 것은 왜 입니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는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이 기독교의 안식일인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는 구약 시대에서의 안식일을 준수하는 규정까지도 그대로 주일 준수법으로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성수, 곧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데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나가는데 필요했던 규정에 의해서 주일 또한 거룩히 지켜나가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주일을 제도적으로 지켜나가는데 힘씁니다.
다른 또 하나는, 주일을 엿새가 되는 6일 다음의 날인 '제 칠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안식일 율법이 주어졌을 때 안식일은 유대력에 의해서 제도적으로 '제 칠일'에 지켜졌습니다만, 신약의 교회에서 주일은 그 '제 칠일' 다음 날인 안식 후 첫날로서 더 이상 '제 칠일'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엿새 날인 토요일 다음 날 '제 칠일'을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로 삼고 안식일 규정에 의해서 주일로 지킨다는 것은 개념상 맞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주일이 '제 칠일'이라는 개념을 갖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곧 새벽 미명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하시고 그 부활의 생명이 누리는 안식에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두심으로써 더 이상 안식일 제도에 얽매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가 주의 날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는 모임을 가져 나간 것은 그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를 기념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띠어 갔습니다만, 이때의 '주의 날'은 안식일 제도에 의한 '제 칠일'의 개념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주의 날을 가진 초기 모습은 '날마다'였습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곧 모든 날이 그들에게서는 '주의 날'이었습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하고 떡을 떼는 날은 그 날이 어떤 날이든지간에 '주의 날'이었습니다(행 2:46).
'주의 날', 곧 주일이 한 날로서 공적인 날로 자리잡아 나간 것은 이방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면서입니다. 이와 관련한 성경 구절을 우리는 세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20장 7절의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와 고린도전서 16장 2절의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에서 '안식 후 첫날'과 '매주일 첫날'에 공적 예배의 모임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방 교회에서 안식 후 첫날은 공중 예배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0장 7절과 달리 고린도전서 16장 2절은 안식 후 첫날이라는 설명이 없이 '매주일 첫날'로만 언급되고 있어서 이 날이 매 안식 후 첫날로서의 매주일 첫날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주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인 제 칠일 후 첫날에 부활하신 '그 날'이라는데 대한 확증을 갖지 못합니다. 매주간에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가졌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매주일 첫날'이 안식 후 첫날이라고 분명하게 여긴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사도들은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으며(요 20:19), 그 기억에서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삼고 공중 예배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신앙적인 모습을 가져 나갔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안식 후 첫날은 이제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날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지키는 안식일 개념으로서의 주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서 안식일 다음 날은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날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매주일 첫날'이란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매주일 첫날에 규칙적인 공중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의 일인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에서도 '주의 날'이 언급되고 있는데, 다분히 의도적인 묘사입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받고 있음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밧모섬에 유배됨으로 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을 함께 가져나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특별한 은혜를 주의 날에 받았습니다.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가 있는 시점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첫날을 규칙적인 공중예배를 드려간 때 이 후이기에 그가 '주의 날'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계시를 받은 그 '주의 날'은 단지 그가 한 주간의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삼고서 주님을 묵상하는 중에 있었다고 보기 보다는 '매주일 첫날'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의 날'[주일]은 그때의 그 날이 오늘날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구약 시대의 안식일을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럴 경우 사도들이 안식일 제도를 주일로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단지 토요일이 일요일로 전환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안식일이라고 말하는 주일은, 이 날이 구약 시대에서의 안식일과 같은 개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요일을 주일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말입니다. 토요일이니 일요일이니 하는 요일의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경험하며 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기에 '날'에 의하여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실체이시오 모든 날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든 날에서 안식합니다.
해서, 신약 시대에서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을 지키는 의무를 지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어떤 명령도 내려져 있지 않고 따라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새 언약 안에서는 어떤 법에 의해서와 어떤 방법으로 고정시켜 놓은 날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주로 모시고 섬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일생을 주의 날로 가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첫날을 주일로 삼고 규칙적으로 공중예배를 드리는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이요 자원과 자발적입니다. 구약 시대의 안식일 율법에 의한 강제적인 의무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태양력을 따르고 있으며, 일요일을 공휴일로 가지고 있는데 이 날을 매주일로 삼는 첫날로 택하여 지키는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입니다. 이 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고 이 날을 주일로 삼으라는 명령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에 그분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이 새로운 삶을 가져나가기 위해서인데 이 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연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이 날이 구약의 안식일이어서가 아니라 주의 날의 공중예배를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이기에 공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는 연합을 하여서 예배를 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으며 교회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일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정하여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모범이 되는 표준문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옛 언약의 율법입니다. 안식일 제도는 그런 면에서 주일의 모형과 그림자 역할을 합니다. 어떤 원리 속에서 주일을 지켜야 할지를 알게 해 줍니다.
'주일', 곧 '주의 날'을 그리스도인은 가졌습니다. 이것이 날마다 모임을 가졌던 초기 때와 그 후인 점차 어느 한 날을 택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 나간 때와는 모임의 성격에서 변화가 있었겠습니다만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기념을 가졌습니다. 당시 이들에게서 주의 날을 갖는 것은 의무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관계된 문제였습니다. 그러기에 주일을 기억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였습니다.
(5) 오늘날 '주일성수'의 폐단을 가져온 큰 원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7-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안식일과 그날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7절. "보통 시간의 일부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항구적인 명령으로써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여 이레(7일)중 특히 하루를 안식일로 택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날로 지키게 했다. 이 날은 창세때부터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까지는 일주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부터는 일주간의 첫날로 변경되었다. 성경에서는 이날을 주일이라고 부른다. 이날은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교도의 안식일로 지켜질 것이다. "
8절. "이 날을 신자는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미리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 날에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떠나서 거룩하게 쉬며 이 세상의 고용주나 오락에서도 떠나 쉬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쓰며 필요한 의무에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신앙고백서. 대,소교리문답]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헌법에 선언되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회선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제신조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교리적 면에서 역사적 개혁주의요, 교회사적 면에서 전통적 정통주의이며 보수주의이다." "우리는 성경 원리 면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근본주의이며, 세대주의에 비하여 개혁주의 입장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러한 장로교회가 신앙고백의 기준으로 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크게 의존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식일과 지키는 방법'에서는 이 제목 자체부터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목이 이러하기에 내용 또한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에게 적용하였던 안식일 제도법을 그대로 신약 시대의 주일에서도 적용하는 우(遇)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일은 일주간에 마지막 날에서 단지 첫날로 변경되었을 뿐이지 구약의 안식일 율법 그대로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안식일에 대하여 봅니다. 첫째, 여기서는 안식일 준수는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항구적인 명령으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안식일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까지는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부터는 일주간의 첫날로 변경되었는데 그 날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교도의 안식일로 지켜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으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법에 대하여 봅니다. 첫째, 이날을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미리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 이날에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거룩하게 쉬며 이 세상의 고용주[노동]나 오락에서 떠나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쓰며 필요한 의무에서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안식일과 지키는 방법'은 돌트 회의(1619년)에서 채택한 돌트 신조에서 안식일에 대한 진술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 안에 의식적이고 도덕적인 요소가 있다.
2. 창조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과 유대 백성들이 특별하게 지킨 그 날에 대한 엄격한 준수는 의식적이었다.
3. 그 명확하고 지정된 날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 구별되었고,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그리고 거룩한 묵상을 위하여 필요한 만큼 안식이 요구되어지고 이 요소는 도덕적이다.
4.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구별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진지하게 주일을 거룩하게 하도록 의무로 정하였다.
5. 이 날은 사대 시대 이래로 초대교회에서 항상 지켜졌다.
6. 이 날은 사람들이 자비에 의해서 요구되어지는 것과 현재적 필요들을 제외한 모든 노예적인 일로부터, 또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오락으로부터 안식하는 근거 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바쳐져야만 한다.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할 때 그 모범을 안식일 율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의식적이며 의무적인 안식일 개념에서 그대로 지키게 하고 더욱이 항구적으로 지키게 할 때 이는 분명 유전(遺傳)에 의한 형식주의에 집착하게 됩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분명 항구적입니다. 십계명이 언약의 율법인 한에는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준칙(遵則)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성을 지속해 나갈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십계명에서 다른 계명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데 4계명인 안식일 계명만이 무효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다른 계명이 그러하듯이 항구적입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법 정신이요 사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의(本意)를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두는 역할을 합니다. 안식일에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합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러니까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 여러 규례는 필연적입니다. 제도는 그래서 존재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한 큰 원칙 속에서 이런 저런 규례를 세칙으로 만들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전통을 좇을 때, 곧 유전을 좇아서 안식일 계명을 지킬 때는, 가령 안식일에 노동이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저 옛날 유대인들이 일정한 거리 이상은 걸을 수 없었으며 일정한 무게의 짐 이상은 들고 갈 수 없었듯이, 일정한 거리 안에는 차를 타서는 안 되고 걸어야 한다든지 하는 논리가 팽배하게 되며 이를 신앙 양심 문제로 끌고 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여기에는 편법이 횡행하게 됩니다. 저 옛날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일정한 거리 이상이 넘게 되면 잠시 쉬었다 다시 걷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성전을 향하여 여행하는 동안에는 음식을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이는 아무리 배고픔을 겪을지라도 금지를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에게서만이 아니라 가축에게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먹이도 주지 않으며, 암탉이 알을 낳으면 먹지 않는다든지 하였습니다. 참으로 지나친 규제이며, 심히 부정적인 규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안식일 규례는 전시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전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 나간 폐단을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율법은 유대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타국의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고 있는 특혜를 동일하게 받으려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언약 안에 들어와야 했습니다. 그 중요한 표식이 할례였습니다. 할례를 받은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안식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은 설사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좋게 여겨서 그 모습을 본 따 자기들 나름대로 안식일을 지키며 살지라도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 아닌 한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신약 시대에서는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멍에로 씌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아직도 유대주의적 사상 속에 있는 자들이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각종 율법의 규례로 이방인들을 묶어두려고 했으나 사도는 이를 금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신 후에는 율법은 더 이상 정죄의 기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네 귀퉁이에 매여 있는 보자기에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먹지 못하도록 금지한 뱀과 새 등 온갖 종류의 짐승이 들어있는 것을 보여주며 "내가 깨끗하게 하였으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잡아 먹으라"고 하시는 환상을 보여 주신 것에서(행 10:9-16)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는데 있음을 알게 해 나갔습니다. 그러기에 정결법을 폐기하셨습니다. 이제 유대인에게서는 여러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것에서 그들의 의로움이 있지 않기에 이방인에게 여러 율법의 멍에를 씌우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디옥에 있은 교회의 첫 번째 회의(바리새파에 속해 있다가 신자가 된 사람들 몇 몇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된 이상 모세의 가르침대로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일로 인해서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었다)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인 우리와 이방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시지 않았고 우리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그들도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어째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그들에게 지게 하여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제 멋대로 뜯어고치려 합니까?"(행 15:9-10)라고 하였으며, 야고보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지 말고, 음행을 하지 말고,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행 15:19-20)는 결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야고보는 유대인의 율법을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을 아무 소용이 없는 형식에 얽어매는 것은 단지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에 복종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야고보가 그럼에도 4가지의 금지 규정을 둔 것은 율법 준수의 차원이 아닌 다만 약한 양심을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거나 음행의 악행에 미혹되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시험의 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마시는 것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을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는 안식일 규례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이런 저런 안식일 규례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는 율법의 모든 규제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율법이 멍에가 될 수 없듯이 이는 유대인에게서도 율법이 멍에로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의식법에 관해서는 분명 그렇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38주일 103문답에서는 제4계명과 관련하여 가르치기를 "제4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에 "첫째로, 복음의 사역과 가르치는 일이 지속되고 특별히 내가 안식일 곧 안식의 날에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제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나의 일생 동안에 악한 행위를 중지하고 주께서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 역사하시도록 하여 이 세상의 생애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게 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4계명과 관련하여 주일에 대하여 갖는 이해는 형식에 집착하는 안식일 준수의 잘못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신중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구약에서의 안식일 규례에 의하여 지키는 안식일 준수란 뉘앙스를 갖지 않도록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라고 하여 이 안식의 날 준수를 의식적이고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라고 표현한 것은 물론 주일의 의미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나의 일생 동안에', '이 세상의 생애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여서 구별된 안식의 날이 갖는 개념을 구약 시대의 안식일과 달리 하고 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안식하면서 특별히 행하는 일은 지극히 교회 중심적이니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제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일생 동안에 악한 일을 중지하고 주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시도록 하여 이 세상의 생애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게 하는 가치와 유익을 갖고 있는 날이 우리가 한 날을 구별하여서 안식의 날로 삼는 주일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6) 제 칠일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차이에 대한 칼빈의 견해
교리와 교회 생활에서 종교개혁을 이룬 사람으로 보는 칼빈은 제 칠일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차이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를 봅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 2부 8장 3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날(제 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심판의 기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그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인 때문이라고 했다(골 2:17). 이러한 이유로서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아직도 날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인들에게 한 '수고가 헛된 것'이 될까 염려하였다(갈 4:10-11). 그리고 그는 로마인들에게 누구나 한 날과 다른 날을 낫다, 못하다고 구별을 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라고 언명하였다(롬 14:5)."
기독교 강요 2부 8장 34절에서는 주일을 지키는 신령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사람들이 안식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기로 대치한 것은 신중한 검토 없이 한 것이 아니었다. 옛날 안식일에 의하여 묘사된 참 안식은 주님의 부활로서 종국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그림자를 끝장낸 바로 그날(무일;無日)은 그림자인 의식에 집착되지 않도록 하라고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나는 또 '7'이란 수에 붙잡혀서 교회로 하여금 그것에 얽매이게 하려는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나는 만약 미신만 믿지 않는다면 축제의 날을 정한다고 해서 교회를 정죄할 마음도 없다. 그것은 그날이 단지 훈련과 잘 조성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되는 경우에 그런 것이다."
칼빈의 견해를 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안식일 계명(제 4계명)에 의하여 묘사된 참 안식은 종국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안식일은 '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의 그림자인 의식에 집착하지 않을 것을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의 실체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이제 모든 상징은 사라집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신 지금은 더 이상 그림자를 좇을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 칠일'이란 수에 교회가 붙잡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교회의 유익과 질서를 위해서 하루를 정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모일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제 칠일'에 모여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날을 절기로 지키는 미신을 타파하는 것이 적당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들이 폐기되었다고 하면서, 주일을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다만 교회 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주일을 거룩하다고 믿어 미신화 하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이라고까지 서슴없이 말하였습니다(기독교 강요 2부 8장 33절).
4. 안식일과 십일조의 단절성과 연속성에 대한 이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율법의 의식법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 헌금 생활의 준수를 강조하지만, 사실 이는 율법의 의식법에 대한 성경의 이해의 부족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생활의 준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단절성과 함께 연속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단절성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이후에는 더 이상의 구약의 안식일이나 십일조를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계명임을 내세워 안식일과 십일조의 준수를 구약 시대에서만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서도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율법의 의식법은 한시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그 역할을 끝내고 폐기[폐지]되었다는데 동의합니다. 여기서 '폐기'는 국어 사전의 의미로서는 오래된 서류 같은 못쓰게 된 것을 없애버리거나, 조약이나 법령 따위를 무효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율법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8장 13절에서는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바꾸시면서 새로운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 옛 언약은 더 이상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한 10장 9절에서는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훨씬 더 나은 제도를 세우시려고 첫 번째 제도를 폐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변역'[바꿈]으로 말해지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7장 12절에서 "제사 직분이 변역(變易)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통의 제사장을 보내실 때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율법도 바꾸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꾸는 뜻인 변개, 변경으로 쓰이는데 제도를 바꾸는 개념에서 '개혁'이란 용어로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의식법의 폐기'란 더 나은 새로운 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더 나은 새로운 법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옛것인 의식법 자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어서 없애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참된 의미는 율법의 의식법은 그 자체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법은 이제 더 나은 새로운 법으로 바뀌어서 주어졌기 때문에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새로운 법입니다. 그러니 설사 율법의 의식법을 좇아서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릴지라도 이 제도의 준수가 그에게서는 폐기 처분한 종이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제도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의식법의 단절성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속성입니다. 율법의 의식법은 문자적으로는 더 이상 지켜져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나 율법의 원리와 정신은 영구한 것으로 그 원리와 정신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정신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으면서 더욱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강조하여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지만 안식일과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拘束)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되 율법적인 의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과 모든 것을 주셨으니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심지어는 "믿음이 아직 어려서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성도에게 안식일과 헌금의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지 않고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율법의 잣대를 적용해서 정죄하거나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그 정신에 따라서 안식일[주일]과 십일조를 의무는 아니지만 해야 하며 또한 하도록끔 가르쳐야 한다는 아주 이상한 괴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율법의 원리와 정신은 영구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정신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고 적용되어서 더욱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적용과 더욱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원리'와 '정신'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리와 정신을 적용함에 있어서 구약의 안식일이 갖는 '제 칠일'과 십일조가 갖는 '십분의 일'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끌어다가 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의 의식법의 단절성에서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켜져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하면서도 구약에서의 모세 율법이 규정한 제 칠일로서의 안식일과 십분의 일로서의 십일조로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가 지닌 기본 원리와 정신을 좇아서 하나님 앞에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고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최소한의 도리와 의무는 제 칠일인 일요일은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안식하는 날로서 이 날을 주일로 구별하여 주셨기 때문에 엿새 동안은 우리가 땀 흘려 일하고 최소한 일곱째 날은 거룩히 지켜 '주일성수'하고,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소유에서 최소한의 기준인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헌금하게 하여서 교회를 섬기게 하였기 때문에 '십일조' 헌금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해진 날과 헌금」에 '최소한'이라는 제도의 기준을 갖습니다. '최소한'이란 그야 말로 가장 적은 것을 뜻합니다. 그 이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이면 더욱 좋다는 뉘앙스도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는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정신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요 이렇게 해서는 그 원리와 정신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주일이란 말입니다. 구약의 제 칠일이란 날의 안식일이 신약의 제 칠일이란 날의 안식일로 변경된 것이 아닙니다. '제 칠일'이란 날의 기준은 문자적으로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규례가 없어진 것이요 이제 그 규례에 의한 제도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엿새 동안은 땀 흘려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을 새로운 안식일로 삼는다는 것은 더 이상 제도화되고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날을 변역[개혁]하지 않는 한에는 바뀔 수 없는 그런 '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십일조도 그렇습니다. '십분의 일'이란 양의 기준은 문자적으로 없어졌습니다. 더욱이 십일조는 제사와 절기와 성전이 없어진 상태에서 여기에 종속되어 있던 조세 제도로서 당연히 함께 없어졌습니다. 제사와 절기와 성전이 없어졌는데 그 종속되어 있던 십일조 제도만 살아 남아 있어서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정신의 연속성은 신약 시대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요? 우선 구약의 안식일은 그 자체가 의식법이란 제도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기 전에 그것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경배[예배]의 종교성을 띠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의식법으로서의 안식일 규례는 그것이 표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안식을 모형하고 예표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칼빈은 십계명의 제4계명에는 모형(typical)의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으며, 안식일 계명을 예표(figure)라고 부른 초대 교부들에게 동의했습니다. 안식일에서 진정 알게 해 주려고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그 분 자신이 진리이며 그 분의 임재로 모든 모형들이 사라진다. 그가 몸체이며 그의 출현으로 그림자는 뒤로 제쳐진다. 감히 말하건데, 그는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고 말하였습니다. 제4계명에서의 안식일이 규례에 의해서 의식법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만 이것이 참 안식을 모형하고 있고 예표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마침내 참 안식의 실체가 드러나고 나타났을 때 모형적 요소는 폐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의식들(ceremonies)이 예표했던 것들의 실체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눈 앞에 제시되었다”고 말하였으며, 어떤 날들도 '그 자체로서 거룩한' 것은 아니며 날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일부'는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제4계명인 안식일이 종교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의식법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과 관련하여서 '이렇게 지키라'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이는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지 전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만고불변의 원리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식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더 나은 새로운 법이 주어지면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안식일이 갖는 의식법 자체가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연속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과 연속성을 갖는 것은 의식법이 아닌 종교성입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는 구약의 안식일에서 계시되고 있는 참 안식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이루신 구속 사역이 가져다 준 부활의 생명에 의하여서 다시는 정죄를 받지 않고 죽음 아래 있지 않으며 영원히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참 안식의 기쁨을 누리는 자로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진 더 나은 법인 새로운 법이 지닌 원리와 정신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안식일을 구약의 방식에 의해서가 아닌 교회에서 새롭게 적용하여서 가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 칠일'이란 한 주간의 한 날, 그날이 한주간의 마지막 날이든 또는 첫날이든, 그래서 매주일 마지막 날이든 매주일 첫날이든지간에 한 날[하루]을 안식의 날로 삼고서 그 날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이제 모든 날이 율법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서 자유하여 안식의 기쁨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제 칠일'이니 '매주일 첫날'이니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법인 새로운 법이 지닌 원리와 정신에 의해서 새로운 제도를 자신들에게 적용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셔서 자신들을 만나 자신이 다시 살아나신 것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자 신자들이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하며 성찬을 기념할 수 있도록 '날마다' 모임을 가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점차 이방 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면서 일정한 날에 모임을 갖고 공중예배를 드릴 필요성이 대두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이요 이 날에 주님을 만나 뵙고 기뻐하며 평안의 은혜 속에 있는 기억을 갖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 안식 후 첫날을 '매주일 첫날'로 인식하고서 '주의 날'로 정하여 정기적인 예배 모임을 가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다른 이방 지역의 그리스도 교회들도 따랐으며 그리스도 교회에서 '주의 날'은 '매주일 첫날'로 공적화 되었습니다.
'주의 날'을 '매주일 첫날'로 삼고, 그래서 '주일'로 지켜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오랜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리고 태양력에 의한 일요일을 주일로 삼고 매주일에 교회가 공중예배[공적예배]를 드리온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오랜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은 일요일을 '주일'로 부르며 그 주일을 지켜온 '그 날'[일요일]만은 아닙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날이든지간에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중예배의 모임을 가지면 그 날은 '주의 날'입니다. 가령 우리네 교회는 일요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모임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이 날을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듯이 또한 교회가 수요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모임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그 수요일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몸을 이루는 일을 위하여 모임을 갖는 날로 삼고 있다면 그 날은 주일로 지내는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주일', 그러니까 '주의 날'입니다. 이 주의 날은 다른 요일에도 가질 수 있습니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에도 말입니다. 모든 날을 주의 날로 가지면 좋지요. 그런데 그 모든 날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할 수가 없어서 일요일과 수요일에만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면 그 날은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 함께 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공적 성격을 띠게 되어서 주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주의 날'[주일]이 됩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일요일에 한하여서 '주일'로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의 날', 또는 '주일'이란 용어가 지닌 의미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곳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인데 이 표현에서 '주의'라고 번역한 단어는‘퀴리아케’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헬라어 형용사 '퀴리아코스'의 여성형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 1장 10 이외에서는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의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에만 나타나는 형용사로 그 의미는 '주님께 속한'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몸으로서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날을 뜻합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여서 그분과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지 않는 한에는 '주의 날'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예배를 위한 공적 모임을 갖지 않는 날은 '주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느 날이든지간에 교회가 공적으로 어느 날을 '주일'로 정하고서 그 날을 '주의 날'로 삼는다고 하면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이루는 실질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과의 관계성에서 보게 되는 율법의 단절성과 연속성은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의 헌금(연보; 이후의 글에서는 연보란 용어로 주로 사용한다)와의 관계성에서도 동일하게 보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지켜왔던 율법의 제도와 그에 따른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서의 십일조 이행은 없습니다. 그래서 문자적인 십일조에는 더 이상 매임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성이 곧 십일조 율법에 나타내신 율법의 원리와 정신이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원리와 정신은 십일조에서도 연속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교회 시대에서 십일조가 언급된 적은 없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십일조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언급도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기에 십일조 제도는 신약 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합니다만 이는 억지입니다. 십일조 제도의 폐지를 말했을 필요가 없는 것은 이것이 종속되어 있었던 제사와 절기와 성전 제도의 폐지가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쉽게 말해서, 수명을 다한 오래된 옛날 기차를 기차 박물관에 전시해 두었는데 이런 기차에다 기름을 넣지 말라는 말은 없었다고 하면서 경유 기름을 가득 집어넣어 채워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또한 이제 새로 도입한 기차는 전기에 의해서 가고 자기장에 의해서 달리고 하는데 그 기차에 경유 기름을 집어넣어서 달리게 해야 하겠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제 이 새로운 기차에는 여기에 사용될 수 있는 맞는 것을 갖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일조 율법에서 그 단절성과 연속성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옛 것은 지나갔으며 새 것이 왔습니다. 이 옛 것과 새 것은 전혀 별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인데 옛 것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전혀 새로운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공동체를 섬겨 가는 일을 위하여 필요해서 제도적으로 사용하셨던 십일조의 개념은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는 아예 없는 것이며 따라서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일까요?
신약 시대에서는 분명 구약 시대의 십일조 개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십일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게 하였던 봉사의 직무는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서의 십일조가 갖는 최종적인 완성이 이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말라기 3장 10절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온전한 십일조’는 장차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계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맞는가 하는 것은 먼저 ‘온전한 십일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의미의 바른 이해부터 가져야 하겠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책망하고 있는 십일조 문제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지도자로 있는 제사장들의 부패한 악과 하나된 것에서 이들의 악도 함께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와 함께 헌물을 바칠 것을 요구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십일조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일조로 바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연보에서 행하는 재물(돈)이 아닌, 오직 ‘토지 소산과 가축’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토지 소산과 가축을 바칠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이것이 땅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과 제사장,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돕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의한 십일조는 곧 그 연약한 가난한 자들의 양식으로 삼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땅의 기업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서 소출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있었던 땅을 잃고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토지 소산과 가축으로 십일조를 해서 그들을 도움으로 그것이 그 가난한 자들의 양식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양식이 되는 이 십일조는 특히 주의 성전의 일을 전무(專務)로 하는 레위인들에게는 ‘기업’의 성격을 갖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차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여 주셨는데 열 한 지파에게는 땅의 기업을 주셨습니다만,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할 레위 지파에게는 땅의 기업을 주시지 않고 열 한 지파가 땅에서 소유하고 있는 토지 소산과 가축이 그들의 기업이 되게 하여서 그 십분의 일로 기업을 삼게 한 데 따른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와 함께 헌물 생활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헌물이란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제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제물 곧 번제물과 화목제물과 십일조와 거제물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예물을 말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와 함께 이 헌물을 드린 경우, 그 드린 자는 그의 자녀와 종도 함께 레위인들과 함께 성전에서 먹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언제까지나 잊지 말고 레위인들을 돌볼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았습니다(신 12:11-12, 18-19). 그것은 그들은 토지, 곧 땅의 기업이 없는 자들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으로서 그들의 기업으로 제공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헌물은 십일조와 헌물로 구분되어 사용되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하는가 하면, 민수기 18장 24절, 26-29절에서는 십일조 자체를 헌물(개역성경은 ‘거제물’, heave-offering)이라고도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에게 바쳐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헌물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이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은 기업인 십일조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성소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에게 바치는 예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레위인들이 제사장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인 것입니다(참고. 느 13:7).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한 십일조’를 할 것을 명령받고 있는 것은 소위 말하는 “소득한 것에서 십일조 생활을 완전하게 하라, 그래서 십일조 생활에 흠이 없게 하라“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온전한 십일조’에서 ‘온전한’은 ‘모든’이라는 뜻으로 곧, ‘모든 십일조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친 것은 토지 소산과 가축인데 토지 소산으로 드려진 십일조에 해당되는 품목은 곡식과 새포도주와 (올리브)기름입니다. 즉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가축이 십일조의 품목입니다.
이 십일조를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레위인들을 위해서와 또한 절기들을 위해서 각각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드린 10분의 2 외에도 매 3년마다 가난한 자, 곧 고아와 과부들을 돕기위해서도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이렇게 십일조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십일조로 바쳐지는 품목도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인 땅에서 수확을 하고서도 하나님께서 십일조 규례로 말씀하신 대로 바치지 않았으며, 헌물도 제사장의 몫을 제대로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의 행위는 악했으며, 이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을 하고 있는 행위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들을 저희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빼돌림으로 십일조를 보관하는 성전 곳간을 비게 하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은 제사장들의 악행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제사장은 곧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자들인데, 이러한 이들의 악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 범죄와 타락을 가져오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공동으로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바칠 십일조들을 빼돌리지 말고 그 ‘모든 십일조들’을 창고에 들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본래의 목적인 레위인들의 기업으로 사용되어야 하고 가난한 자들의 양식으로 쓰여져야 하며, 절기들에 사용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온전한 십일조’는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십일조가 속죄 제사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8-9절에서 제사와 함께 예물을 언급하면서 제사와 예물이 함께 폐하여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예물은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과 함께 다른 예물들도 직간접적으로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십일조 또한 성전 예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므로 십일조가 속죄 제사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죄를 속하는 제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예물들과 함께 열거되고 있기도 하며(신 12:6, 11, 17), 십일조는 거제물에 속하는 예물이기도 하였습니다(민 18:24, 26, 28).
그런데 말입니다. 구약에서의 이 십일조는 앞서에서 말한 히브리서 10장 8-9절에서 보게 되는 대로 ‘제사와 예물’이 폐하여진데 따라서 함께 폐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의 폐하여졌음을 말하면서 오늘날에는 제사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고 있는데, 제사 제도가 지속되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던 십일조 제도가 폐하진 것은 인정하지 않고 이것의 계속적인 시행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와 함께 십일조도 폐하여진 것은 그보다 더 나은 ‘새로운 것’이 왔기 때문입니다. 옛 것은 폐하여지고 새 것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옛언약’과 ‘새언약’의 관계성에서 입니다. 옛언약은 새언약이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요 새언약이 올 때까지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옛언약의 실체인 영구한 새언약이 오면 옛언약은 새언약으로 변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말라기는 이것에 대한 예언을 4장 1-6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말라기 4장 1-6절의 예언은 말라기 1장 2-5절에 대한 성취로 있을 것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으로 로마서 9장 13절, 그리고 14-18절에서 이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할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말라기의 십일조 헌금에 대한 내용, 특히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문제에 따른 것으로 이것에 계시적 의미를 담은 메시지로써 하나님 앞에 드려질 온전한 십일조로서의 헌금, 곧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온전한 십일조는 맏물이요, 흠이 없으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밖에는 없다는 것을 증거 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지원하여 돕는 기업으로 주어진 것인 동시에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분의 일로서 구별되어 바쳐져 죄를 속하는 제사와도 관련이 있는 예물의 성격을 가짐으로써 십일조는 단지 그냥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였다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안개 사라지듯이 그렇게 폐지되어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새언약에 의한 옛언약의 폐지는 새언약으로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옛언약에 속한 종으로 있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인데 이는 새로운 언약에 속해 있어 이제는 더 이상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유한 아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새언약을 맺으시기 위하여,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새언약을 세우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헌신제사에 쓰여질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죄인을 대신한 그 흠 없는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죄인된 우리를 주심으로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믿는 자, 곧 그리스도인들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로움과 자비에 부요하신 자가 되셔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부요를 공급하여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로 하여금 평균케 하십니다. 이는 가난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의 믿음을 세워 견고케 해 나가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한 성령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자비에 부요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곧 성도를 위하여 섬기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신약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었던 연보는 이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일로 행하여 나갔던 것입니다(고후 8:1).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가셨는가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대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연보의 원칙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있는 대로 하라’, ‘미리 준비하여서 하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 ‘너희의 유여한 것을 나누는 것이다’를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자율적인 믿음의 마음을 말합니다만, 이 모든 것의 대원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 그리고 이 제사에 친히 자신의 몸을 예물로 바친 것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연보의 대원칙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고후 8:4-6).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여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같이) 저희가 먼저 그들 자신을 주께 바치고’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여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이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봉사하는 자와 그들의 섬김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있는 자와의 관계가 존재하는 데 바울은 이를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상관 관계’로 말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삼직(三職)이 존재합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입니다. 우리나라 각 교단의 교회 헌법이 이외에도 다른 직분도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는 여기서 다룰 내용이 아니므로 하지 않겠습니다.
이 삼직에서 장로와 집사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무(專務)합니다. 그럼으로써 목사는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자들의 ‘영적인’ 기업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런 생업이 없는 목사에 대하여 생업을 가진 신자는 ‘물질적인’ 기업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목사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할 수 있도록 신자는 물질로써 돕는 봉사의 직무를 또한 충성스럽게 수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봉사하는 이들을 지원할 필요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18절의 말씀은 신자들이 목사를 어떻게 잘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성경적인 원리는 목회자가 스스로 연구와 목회에 몰두 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신과 가족의 필요를 위한 세속적인 일들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자급했던 것(천막을 만드는 일)을 말하면서(행 18:3) 그가 그 자신의 사역을 직업을 가지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가 거기서 당시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내린 추방령에 의해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게 이달리야로 쫓겨와 있던 본도 출신의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만나 알게 되었는데 마침 그도 바울처럼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의 집에 머물면서 같이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의 세계에도 전하기 위하여 많은 지역을 다녀야만 했던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한 것은 그가 생계를 해결 할 길이 막막해서 그 자신 스스로 직업을 가지고 노동을 함으로써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보수를 받지 않는 만큼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고후 9:19). 그런 것이지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14절에서 그의 사역을 위해서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권리를 강조하여 주장하였습니다. 사실상 그는 자주 복음 사역을 위해서 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빌 4:10-19).
이때 목사가, 그리고 신자가 돕는 봉사의 직무는 구약에서의 의무의 법에 의해서가 아닌 ‘믿음의 법’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믿음의 법으로 해 나가는 원리와 정신을 신약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봉사의 직무는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와의 상관 관계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간에 부요한 자와 가난한 자와의 관계에서도 이 상관 관계는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연보에 의해서 부요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은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하시는 것에 주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여기에 적용되어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균’케 하는 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3-15절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 헌금을 하게 했을 때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헌금을 거두어다가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평안하게 살게 하고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곤고한 형편에 처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고린도교회가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를 알려서 공평[평균]하게 하려는 것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넉넉한 자들은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도울 수 있으므로 자신들의 여유 있는 것으로 돕고 또한 훗날 고린도교회에 어려움이 닥쳐 곤란을 겪으면 이들을 통하여 도움을 받았던 자들이 다시 어려움에 처한 고린도교회를 도움으로써 서로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설명을 출애굽기 16장 18절을 인용하여서 하였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기에 신자는 이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서 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8:9).
이런 원칙에 의해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는데 여기에 따라야 할 신앙적인 자세와 태도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연보가 십일조 규례를 통해서 의무로 주어졌는데 이스라엘은 공동체의 일원인 레위인을 책임지고 있는 자들로서 마땅히 섬겨야 할 의무를 짊어지고 그에 대한 본분을 다하여서 행해 나갈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원해서 기쁨으로 십일조를 드려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도 이러한 정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약 교회는 교회를 봉사하는 이들에 대해서나 또한 한 공동체의 일원인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을 섬겨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연보해야 할 실제적인 책임으로서 헌신적 지원의 연보가 요청됩니다. 앞서에서 언급을 하였습니다만, 이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인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연보에 대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은 “주께 먼저 자신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으로서 교회에도 헌신하는 정신을 가지고 ①힘써서 ②자원함으로 ③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④있는 대로 ⑤준비하여서 ⑥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연보라야 하나님께 헌상(獻上)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여기에서 연보 액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입니다. ‘최소한’의 연보가 정해진 기준에 의해서 하는 것도 아니며, ‘최대한’의 연보가 정해진 기준에 의해서 그만큼까지는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부’란 ‘믿음의 법’에 의하여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분량’이기에 ‘믿음의 분량껏’입니다. 이 믿음의 분량은 교회가 “우리 교회는 연보 액수의 기준이 소득의 십분의 일입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하십시오!”라고 하여서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최소한의 분량도 없으며 최대한의 분량도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은 주께 먼저 자신을 드리고 또한 교회에도 헌신하는 것이기에 이미 자신을 전부 드린 것으로 출발합니다. 자신의 생명도 모든 소유도 다 주의 것이며, 따라서 주의 뜻을 좇아서 선하게 재물도 사용합니다. 여기에 ‘백분의 일’을 자원함으로 그 마음에 정하여서 있는 대로 힘껏 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또는 ‘십분의 일’을 자원함으로 그 마음에 정하여서 있는 대로 힘껏 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또는 ‘이분의 일’을 자원함으로 그 마음에 정하여서 있는 대로 힘껏 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또는 ‘그 이상’을 자원함으로 그 마음에 정하여서 있는 대로 힘껏 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각각 그 마음에 정하여서 하든지간에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서 연보 액수는 형편 따라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매주, 매월, 매년 똑같은 십분의 일이 아니라 전에는 십분의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오분의 일을 하고, 앞으로는 그 이상이나 그 이하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보할 수 있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부요함은 언제나 십분의 일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십일조의 율법이 그를 얽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무지 십일조의 개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를 마음에 정하여서 하든지간에 그것이 믿음의 분량껏이라면 그것은 전부입니다. 이 새로운 연보의 법칙을 우리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십일조는 ‘최소한’의 연보가 아닙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십일조는 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라고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요!. 또한 율법을 외형적으로 좇아가는 율법주의에 근거하여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拘束)되어서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도 구약의 십일조 원리의 연속성에서 신약도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요!.
바울이 가르친 연보의 원리와 정신, 그리고 자세와 태도는 “너희가 연보하는 제도로 정해진 규칙이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께로부터 연보에 대한 세세한 규칙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바울이 자기 임의로 연보의 규칙을 만들어서 그것을 교회가 따르고 지켜야 할 법으로 갖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만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를 고린도교회에 하도록 권하는 데서 그들이 어떤 원리와 정신으로 신앙적으로 연보를 해야 할지를 가르쳐 나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연보의 원리와 정신으로 등장하는 기준은 언제나 그들의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드림에서 찾아집니다. 그래서 주께서 그에게 공급하신 사랑(자비)의 원천에 의해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한 그와 같이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직무’인 헌신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의 연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가르침에 의해서 교회 생활에서 연보 생활을 믿음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교회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 준수가, 그리고 십일조 준수가 신자의 책임이요 의무이기 때문에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맺는 말
이제 말을 맺겠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인 ‘제 칠일’의 준수와 십일조의 ‘십분의 일’ 준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그것이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다만 율법의 후견인의 도움을 받아서 해 나가고자 한다면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법을 알게 되어서 ‘주의 날’을 일요일에 갖고 주께 속한 자로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유에서 십분의 일을 하고자 하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십시오. 만일 일요일만이 아니라 수요일도 ‘주의 날’로 삼고 교회의 몸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유에서 삼분의 일을 연보하고자 하는 믿음을 갖습니까? 그것이 자신의 믿음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또는 그 이상이든 그 이하이든 그것이 자신의 믿음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 누구도 그러한 여러분의 믿음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
첫댓글역작입니다. 너무도 귀한 자료가 될 것 같아서 일단 퍼갑니다. 본 주제가 너무도 본질에서 왜곡된 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일진 대, 이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큰 경종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귀한 글 쓰시느라 애 쓰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참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기억도 잘 못하실 것입니다. 부산의 최용태목사입니다. 새해?라고 해야 되나요 다른 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뭏튼 다른 해의 벽두에 좋은 글을 읽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대체로 자세하게 다 읽었는데, 말라기를 언급하신 대목에 대해서는 다소 말씀드리고 싶은 어리석은? 생각이 들어서 몇 자 올립니다. 부디 오해나 불편한 심기가 없으시기를 바라면서...
말라기에 대한 마지막 언급부분인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의 온전한 십일조 준수의 선포는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십일조의 양[액수]을 정확히 십분의 일을 하여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주시지 않는지를 시험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주어진 세금[조세]의 의무인 십일조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악을 행함으로써 제사장들이 성전을 지키지 않고 레위인들이 성전 봉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성전이 황폐화되는 죄를 책망하였던 것입니다.'라는 부분이 아쉽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적어도 말라기에서 십일조에 대한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의 궁극적 계시는 1:2-5절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 해답적 결론이 곧 4:1-6절 부분이라고 봅니다. 이 1:2-5절에 관해서는 로마서 9:13절에서 동일하게 언급하면서 로마서 9:14-18절에서 설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4:1-6절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하여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고백하는 눅 1:68-79절에서 그 성취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제 소견은, 말라기의 십일조 헌금에 대한 내용, 특히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문제는 계시적 의미를 담은 메시지로써 하나님 앞에 드려질 온전한 십일조로서의 헌금, 곧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온전한 십일조는 맏물이요, 흠이 없으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밖에는 없다는 것을 증거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무례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여기시면 삭제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럼 항상 진리의 담력이 목사님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하세요 최목사님. 목사님을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기억하여 자주 생각하고 있는 중에 종종 부산에 있는 교회에서 바른 교회의 소개나 추천을 원하는 분이 있을 경우 최목사님 교회도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에 대한 이해와 성경적인 바른 교회를 이루어 나가시는 목사님을 존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을 뵌지가 참으로 오래 되었습니다만, 그 세월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을 뵈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저에게는 깊이 각인 되어 있습니다. 언제 기회가 주어지면 뵙고 목사님에게 많은 이야기를 복음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저의 졸필을 자세하게 읽어 주시고 여기에 대한 보다 성경적인 바른 해석에 의한
이해가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 지적하여 주시며 목사님의 고견을 말씀해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내용 중에 고칠 것이 있으면 고치겠으며 보충할 것이 있으면 보충하여 오석이나 왜곡에 의한 설명이 되지 않고 보다 올바른 이해 속에서 해석과 설명하는 것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리며, 주 안에서 강건하실 것과 평안을 빕니다.
안녕하세요 최목사님. 목사님께서 지적하여 주신 내용을 다시 살펴 상고한 결과 저의 글에 이해를 잘못함에 따른 설명으로 문제가 있었음을 보고 이를 수정하여 다시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수정한 부분의 내용을 목사님께 메일로 보냈습니다. 살펴주시고 더욱더 올바르게 나가아갈 수 있도록 지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의 살펴주심에 감사드리며, 이 사랑을 입게 해주신 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역작입니다. 너무도 귀한 자료가 될 것 같아서 일단 퍼갑니다. 본 주제가 너무도 본질에서 왜곡된 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일진 대, 이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큰 경종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귀한 글 쓰시느라 애 쓰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목사님!. 이곳을 찾아주시는 것만 해도 저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되는데 졸자의 글을 읽으시고 격려의 말을 남겨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탐독하시고 올바른 이해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비평과 보충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참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기억도 잘 못하실 것입니다. 부산의 최용태목사입니다. 새해?라고 해야 되나요 다른 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뭏튼 다른 해의 벽두에 좋은 글을 읽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대체로 자세하게 다 읽었는데, 말라기를 언급하신 대목에 대해서는 다소 말씀드리고 싶은 어리석은? 생각이 들어서 몇 자 올립니다. 부디 오해나 불편한 심기가 없으시기를 바라면서...
말라기에 대한 마지막 언급부분인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의 온전한 십일조 준수의 선포는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십일조의 양[액수]을 정확히 십분의 일을 하여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주시지 않는지를 시험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주어진 세금[조세]의 의무인 십일조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악을 행함으로써 제사장들이 성전을 지키지 않고 레위인들이 성전 봉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성전이 황폐화되는 죄를 책망하였던 것입니다.'라는 부분이 아쉽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적어도 말라기에서 십일조에 대한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의 궁극적 계시는 1:2-5절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 해답적 결론이 곧 4:1-6절 부분이라고 봅니다. 이 1:2-5절에 관해서는 로마서 9:13절에서 동일하게 언급하면서 로마서 9:14-18절에서 설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4:1-6절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하여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고백하는 눅 1:68-79절에서 그 성취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제 소견은, 말라기의 십일조 헌금에 대한 내용, 특히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문제는 계시적 의미를 담은 메시지로써 하나님 앞에 드려질 온전한 십일조로서의 헌금, 곧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온전한 십일조는 맏물이요, 흠이 없으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밖에는 없다는 것을 증거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무례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여기시면 삭제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럼 항상 진리의 담력이 목사님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하세요 최목사님. 목사님을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기억하여 자주 생각하고 있는 중에 종종 부산에 있는 교회에서 바른 교회의 소개나 추천을 원하는 분이 있을 경우 최목사님 교회도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에 대한 이해와 성경적인 바른 교회를 이루어 나가시는 목사님을 존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을 뵌지가 참으로 오래 되었습니다만, 그 세월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을 뵈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저에게는 깊이 각인 되어 있습니다. 언제 기회가 주어지면 뵙고 목사님에게 많은 이야기를 복음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저의 졸필을 자세하게 읽어 주시고 여기에 대한 보다 성경적인 바른 해석에 의한
이해가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 지적하여 주시며 목사님의 고견을 말씀해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내용 중에 고칠 것이 있으면 고치겠으며 보충할 것이 있으면 보충하여 오석이나 왜곡에 의한 설명이 되지 않고 보다 올바른 이해 속에서 해석과 설명하는 것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리며, 주 안에서 강건하실 것과 평안을 빕니다.
안녕하세요 최목사님. 목사님께서 지적하여 주신 내용을 다시 살펴 상고한 결과 저의 글에 이해를 잘못함에 따른 설명으로 문제가 있었음을 보고 이를 수정하여 다시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수정한 부분의 내용을 목사님께 메일로 보냈습니다. 살펴주시고 더욱더 올바르게 나가아갈 수 있도록 지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의 살펴주심에 감사드리며, 이 사랑을 입게 해주신 주님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