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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의 법칙인가
청주인들이 내게 항의한다 해도 아랑곳 없이 할 말이 있다.
백두대간 첫 종주때도 청주를 거쳐 간 적이 있는데, 그 때나 한남
금북정맥 종주를 위해 다시 찾고 있는 지금이나 똑 같은 느낌인데
이것이 늙은 이의 선입감이나 편견 탓이라 해도 고의성은 없다.
도저히 우연으로 돌릴 수 없겠기에 그러는 것이니까.
길에서 그랬고,버스 안에서도 그랬다.
식당에서건 찜질방에서건 모두 그랬다.
난 왜 하나같이 모르는 분들에게만 뭘 물었을까.
어쩌자고 화가 잔뜩 나있는 이들만 골라서 그랬을까.
본전치기도 못하는 짓들만 한 셈이니 말이다.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꼭 잘못된다는 이른 바 머피의 법칙
(Murphy's law)으로 설명이 될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수록 일어난다는 검퍼슨의 법칙일까.
아뭏든 청주에서는 누구에게 뭘 물어서 도움이 된 적이 없다.
지난 주의 버스 기사가 떠올라 특별히 조신하며 묻고 물었건만
머구미 가는 버스 타기가 쉽지 않았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 첫 버스편으로 청주에 도착은 했으나 또
헤매다가 예상보다 훨씬 늦게 머구미에 당도했다.
정맥이 끊긴 마을 이름 머구미가 몹시 궁금했으나 그 때는 알려고
하기를 포기하고 정맥에 들었다.
물어보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이다.
많이 묻는 자가 많이 안다지만 청주에서만은 금을 사랑하기로
(침묵)하고 종주 후에 자료를 뒤져 궁금증을 풀었다.
관정리 머구미는 한자로 墨井(묵정)이다.
마을 우물의 색깔이 먹물처럼 검게 보여 붙여진 먹우물(墨井)이
머그미(머구미)로 변음되었다는 것.
지금의 관정리(官井里)는 백제때 낭비성(娘臂城) 고을터였다는
관기(官基)와 묵정이 묶인 것.
法住寺와 무관한 法住里
32번 도로상의 머구미고개를 이즈음은 추정재라 한단다.
(왜 관정리, 묵정 땅에 저 아래의 추정리를 끌어다 붙였을까)
남쪽에 솟은 국사봉을 겨냥하고 머구미 도로를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힘 쫌 쓰라는 정맥은 청원과 보은의 군계가 되면서 곧 587m
국사봉으로 오른다.
남서로 달리듯 나아가 살티재에 도착했다.
잘 나있는 길과 제법 큰 성황당 돌무더기는 양쪽 자락인 청원군
가래울과 보은군 염둔, 산막 등의 주민들이 뻔질나게 넘나들며
돌 위에 돌을 올려 놓았다는 증거리라.
오늘의 최고봉인 604m 봉을 지나 목장의 낡은 철조망을 따르며
안부로 떨어졌다가 올라 섰으나 맑은 날씨에 반해 훼방을 많이
받는 시계라 답답했다.
그래도 잡목들의 잎이 떨어져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왼쪽의 안온하고 예쁘게 보이는 법주리 양지말에 눈주며 얼마쯤
진행해서 나타난 콘크리트 길 이후 법주리와 쌍암리를 통과하는
571번 지방도로에 섰다.
보은군 회북면 쌍암리와 내북면 법주리가 만나는 고개를 지금은
쌍암재라 한단다.
그러니까 청원군은 이미 한참 전에 정맥과 작별한 것.
법주리가 아직 많이 떨어져 있는 속리산 법주사와 동명인 것이
궁금하여 백방으로 알아 보았으나 신통한 대답이 없다.
구룡산 아래 큰 골짜기가 되기 때문에 법줄, 법주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법주리라 하고 회북면에 편입했으며
1946년 2월 내북면으로 재편되었다는 기록뿐이다.
법주고개에서는 인삼밭 때문에 애먹으며 진입했다.
우측에 비켜 있는 구룡산에 눈 한 번 주기를 바라는 듯한 정맥은
그동안 너무 건조했음을 미안해 하는 듯 475m 봉 이후 한 차례
바위와 씨름하게 했다.
그리고는 19번 국도상의 대안리고개로 이어졌다.
해 안에 도착한 고개마루에서 도로따라 얼마쯤 걸어 휴게소를
겸하고 있는 주유소로 갔다.
보은읍에 찜질방 유무를 알아보기 위해서 였다.
있을 꺼라는 막연한 대답을 믿고 보은으로 갔다.
활기찬 정맥길의 상쾌한 출발
그러나 속리산 들머리라 있을 법하다고 생각되었던 보은땅에는
찜질방이 아직 없어서 청주길을 서둘어야 했다.
이 정맥에서는 고집스럽게 찜질방만 찾고 있는 늙은 이는 결국
대안리고개 ~ 보은 ~ 대안리고개 ~ 미원 ~ 청주, 이런 버스놀이
끝에 남은 정맥 접근에 안성마춤 찜질방을 끝내 찾아냈다.
상당구 석교동 대중교통이 아주 편한 육거리 지근의 약수탕이다.
청주의 목욕재벌이 인수하여 학천랜드 계열이 된 후 성황이라니
역시 목욕탕 경영 귀재의 Know how인가.
쌀쌀한 새벽 공기를 녹이는 화톳불이 등장한 육거리시장이 어둠
속에서도 바뻐지는 시각이었다.
시장 옆 참한 24시간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김밥 1줄을 샀다.
평소엔 아침을 먹지 않는데 간밤의 식사가 허술했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식당 안을 포근하게 하는 은은한 찬송가와 주인녀의
잔잔한 친절이 늙은 이의 새벽 기분을 맑게 했다.
첫 버스편으로 도착한 미원의 인상은 꽤 발전된 느낌이었다.
작년 3월 23일 밤중에 백두대간 늘재에 가기 위해 여길 경유해서
괴산군 청천면으로 갔었는데 그 때에 비해.
그 밤에도 두번에 걸쳐 고마운 분들의 도움을 받았는데(백두대간
14회 글) 이 이른 아침에도 그랬다.
전광 M&P(각종 금형 설계 제작)의 조용범 과장.
그는 미원에서 출발하여 자기의 목적지를 지나 대안리고개까지
다녀가는 호의를 내게 베풀었다.
간밤의 약수탕, 새벽의 식당, 이른 아침의 호의 등 일련의 일들이
오늘의 활기찬 정맥길을 보증하는 듯 상쾌한 출발이었다.
더구나 506m 구봉산 이후에는 종종 나타나는 속리산의 자태에
고무되어 더욱 힘찬 전진이었다.
간헐적으로 출현하는 바위들에 의한 긴장도 양념 정도였다.
마치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시루산을 넘은
후로는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만 그만한 봉들이 수시로 나타나서 좌우로 흔들어 대듯 하여
시야는 막았으나 전진까지 저지하지는 못했다.
유난히 많은 묘들에 대해서도 오늘만은 관대했다.
구티에서 만난 박흥수
오늘 하루가 그러했어도, 그래서 사모곡을 더욱 힘차게 부르는
시간이었다 해도 대간과 정맥, 산을 타는 것 자체는 고생임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많은 고생을 했다면 그 책임은 산에 있는 게 아니고
몽땅 사람에게 있다.
준비에 소홀함으로서 자업자득인 경우도 있긴 하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과 횡포에서 예외 없이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이 산의 선물인데 반해 고통은 자기네의 업보다.
오늘도 그 연속선상에 있었지만 마치 미리 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와 거의 동시에 구티에 당도한 사람 이름은 박흥수.
다만 내가 한금정맥을 타고 내려왔다면 그는 보은읍쪽에서 차를
몰고 고개로 올라온 것이 다르다 할까.
보은군 탄부면 덕동1구에 집이 있다는 그.
경기도에서 옮겨와 목각과 분재, 유원지 사업 등을 하고 있단다.
그는 초면인 내게 자기 집에서 유하고 정맥에 들어가라고 떼쓰듯
막무가내기 식이었다.
해가 중천에 있으나 더 진행하면 끊을 데가 마땅치 않아 오늘은
마치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는 나를 태운 박흥수의 1톤 트럭이
북으로 달려갔다.
자기 집에 가지 않겠으면 낮 시간이라도 함께 하자는 것이다.
그가 마냥 달려 도착한 곳은 괴산군 청천면 화양구곡.
거기에서 장소를 옮겨 가며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운전 때문에 그의 몫까지 거의 다 내가 마셔야 했다.
홀린 듯 끌려 다니듯 하는 새에 어느덧 몇시간이 갔고 해가 뉘엿
거릴 때 비로소 정신이 퍼뜩 났나.
정맥 타다 말고 이게 무슨 짓인가.
박흥수를 설득해서 청천면 버스정류장까지 나왔다.
다시 청원군 미원면으로 이동, 아침에 내렸던 장소에서 청주의
약수탕으로 돌아갔다.
정말로 도깨비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그가 왜 내게 그랬을까.
그의 말을 액면대로 믿는다 해도 단지 도인의 풍채라는 이유가
그를 그처럼 극성스럽게 했대서야. <계속>
구티의 늙은 山나그네(상)와 박흥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