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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에서설악까지 * 28째구간이야기 |
(부제 : 지옥의 러셀산행길 석두봉-화란봉) |
보슬보슬 봄비에 젖고 싶었다. |
소곤소곤 봄이 웃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
아장아장 봄이 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
온갖 무지개색으로 단장한 봄을 느끼고 싶었다. |
이미 와있을 것만같은 봄을 찾아 나섰다. |
그 곳 ! 고루포기산으로 향했다. |
그러나 겨울은 서운해 하고 있었다. 봄을 질투하고 있었다. |
그 곳엔 엄청난 눈이 우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
2월19일 18:40에 강남터미날에서 후배 세명과 강릉행 버스에 올랐다. |
찜질방에서 토끼잠을 잔 후 택시타고 삽당령에 도착하여 5:25에 산행을 시작했다. |
내 계획은 삽당령에서 석두봉-화란봉을 넘어 닭목재를 경유 고루포기산을 오른 후 |
49산우회와 합류할 오목골로 하산할 예정이었다. |
그러나 |
산행 시작부터 생각 밖의 엄청난 아주 엄청난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 |
처음에는 눈이 많이 쌓여 즐겁고 재미가 있었다. 더욱이 3명의 후배들은 내가 전혀 |
걱정할 일 없는 배테랑들이었다. |
엄청 쌓인 하얀눈은 우리를 황홀케 했고, 능선상의 경관은 알프스와 견줄만 했다. |
4인은 교대로 러셀작업을 하며 전진 전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
러셀작업은 고도의 체력을 요하는 행위라 쉬 피로해지고 속도는 거북이 보다 못한 |
지렁이 수준 이었다. 체력소모를 보충하기 위해 라면으로 보충을 하는 중 20여명의 |
산행팀이 우리가 만들어 놓는 길을 따라 아주 쉽게 왔다. 무려 7시간 30분 걸린 거리를 |
그들은 단 2시간30분만에 온 것이다. 라면을 먹는 동안 그들이 우리가 아직 가지 못한 |
앞 길에 러셀작업을 해주길 바랬다. 그리고 우리는 라면을 먹은 후 쉽게 아주 쉽게 |
흥얼거리며 걸었다. |
그러나 |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은 잠시 뿐 모두가 탈출을 했고 더 이상의 러셀작업은 다시 |
우리 몫이 되었다. 고된 작업이 계속되는 동안 앞 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걸어 온 길을 Back하여 탈출을 하느냐 아니면 계속 진행이냐? 놓고 각자의 의견을 |
내놓았다. 결국은 나의 설득으로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결론은 엄청난 오판이었다. |
후배들에게 미안했다. 분위기는 살짝 맛이 갔다. 그래도 서로를 존중하며 계속 |
진행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허기져 왔다. 충분치 못한 행동식, 절대량이 부족한 |
부족한 식수, 피로감등으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
잠시 산비탈에 자리잡고 생존을 위한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버너를 켜고 눈을 녹여 더운 |
물을 한모금씩 마시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겨우 하나 남은 라면스프국물을 만들어 |
나누어 마셨다. 그 맛은 지금까지 먹어본 국물 중 최고의 것이었다. |
한켠에서는 잔나무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
法은 금했지만, 法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다. 온 몸에 온기를 받고서 다시 |
출발을 했다. 그러나 오래 가질 못했다. 후배 둘이 상태가 좋지를 못했다. |
오랜시간 러셀작업에 무릎을 다치고, 추위에 오한이 오고, 굶주림에 허기가 졌다. |
게다가 등산로 표지기는 좀 처럼 찾기가 힘들었다.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
우리는 다시 진행을 중지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모닥불을 피우고 기다리기로 했다. |
모닥불에 몸을 녹이고 잠시 졸기도하면서 6:30에 다시 출발을 했다. |
이젠 평소 쌓아놓은 몸 속 에너지를 사용해야했다. 더 이상의 비상식도 없었다. |
곧 다다를 것만 같았던 화란봉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비슷비슷한 봉우리 |
서너개가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결국 화란봉이라고 굳게 믿을만한 봉우리에 |
올랐지만 이름표는 없었다. 눈 때문에 하산로를 찾을 수도 없었다. |
능선길을 피하여 계곡을 택했다. 눈의 깊이는 점점 심해져 허리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
길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며 즐김없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
초조함은 없었다. 조급함도 없었다. 그냥 삶의 본능적 행동만이 있었다. |
얼마나 오랜시간 눈과 싸우며 내려갔을까. 드디어 근거리에 도로도 보이고 주차된 |
차들도 보이고, 오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사찰이나 관광지 같았다. 幻視였다. |
마지막 절벽이 나왔다. 절벽아래 가까운 곳에 일주문도 보이고, 안내소같은 하얀 건물도 |
보였다. 너무도 뚜렷해 보였다. 이젠 안심이다. 그러나 겨우겨우 절벽을 내려서 보니 |
역시 幻視였다. 밤잠 못자고 30시간째 눈밭을 걸은 결과물 이었다. |
또 다시 눈을 헤친다. 맞은편 거대한 산이 보인다. 고루포기산 줄기다. |
이젠 정말 끝인가보다. 멀리 도로가 보인다. 이번엔 幻視가 아니었다. |
드디어 30시간 20분에 걸친 지옥의 러셀산행을 마감했다. |
무사귀환에 후배들에게 감사했고, 탈출시점을 놓친것에 대해 미안했다.(11:40)
2010.02.21 我無之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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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엄청나게 고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저려왔는데 산행기를 읽으니 고행의 강도가 생각보다 너무 크네요. 무사하게 산행을 마쳐서 정말 다행입니다.
꼭 한 번은 할만한 그러나 두 번은 하고싶지 않은 산행이었지요.
수고 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짜르르+이슬+주마가 함께 했기에 가능했었네. 고맙다. 덕분에 큰 일 했다.
아주 힘든 상황이었군요! 저희 정기산행팀도 매우 걱정을 하였답니다. 어려운 경험을 통해 또 한단계 성숙하였으리라 믿습니다. (편안하게 보는) 눈사진은 진짜로 멋있네요!
능경봉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응원소리 덕분에 힘을 얻어 무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유~ 글읽어보니 정말~ 헛것을 두번씩이나 보고.. 글이 실감나네요. 눈과 추위와 공포와의 초인적인 사투가 눈에 훤히 보입니다.우리 대장님 걱정 많았는데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엉덩이까지 빠지는 눈을 오랜시간 헤쳐나가는 산행 또하지 마세요.
보다 up-grade된 경험을 살려 49산우회의 안전산행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봄을 맞이하려는 마음이 너무 성급했나봐요. 님이 하얀 설국을 쫓아내려하니 어찌 마음이 편하리요. 심술이라도 한번 부려야지요. 그리도 좋아하던 설국이니 좀더 머물러 있으라고 했나봐요. 님을 남기고 떠나야하는 연인처럼....
그래도 봄날은 오는데 밀려가는 아쉬움을 천천이 보내고 천천이 새 봄을 맞이 하세요. 수고 많이 많이 하셨습니다.
겨울이 눈 속 깊은 곳에 봄을 안고서는 내놓지를 않더군요. 하지만 볼 수는 없었어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계절에 대한 편애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올 봄의 색갈이 궁금했습니다. 푸르름과 벌나비가 노니는 야생화들이 보고팠습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참기로 했습니다. 봄을 재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응어리는 겨울 눈 속 깊은 곳에 파묻고 왔습니다. 그리움이란 단어도 가능한 잊기로 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먼저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앞서 많이 응원답글을해서 쓸 얘기가 빈약합니다만..고생 했고, 이 경험을 또다른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팟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