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과거제도와 음서
고려시기 관료 진출의 주요 통로는 과거와 음서였다. 과거제도는 시험을 통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므로 능력에 따른 등용이라 할 수 있으며, 음서제도는 부조(父祖)의 음덕으로 관직에의 진출이 가능한 것이므로 세습적인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전에 고려 관료지배층의 성격을 둘러싸고 귀족제와 관료제라는 서로 다른 주장이 있었는데, 이것은 과거와 음서가 이처럼 상호 모순되는 성격을 갖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제가 고려에서 처음 도입되어 시행된 것은 광종 9년(958)이었다.
후주(後周) 출신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실시되었는데 이 제도는 당시 훈신세력을 억제하고 신진세력을 등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이후 과거제도는 제도적 정비과정을 거치면서 관인을 배출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자리잡았다.
과거제도가 실시된 처음에는 고시 절차가 비교적 단순하여 국학생이나 지방출신의 향공(鄕貢)을 막론하고 예비고시없이 곧바로 본고시(本考試)에 응시하였다.
이후 예비고시라 할 수 있는 국자감시(國子監試)가 설치되어, 중앙의 국자감 학생이나 지방의 향공 등이 모두 거쳐야 하였다.
국자감시에 합격한 진사(進士)들은 본고시인 예부시(禮部試 : 東堂試)를 거쳐야 급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부시 급제자를 대상으로 국왕이 친히 시험하는 복시(覆試)가 있었는데, 이것은 간헐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급락(及落)과는 관계없이 급제 순위를 결정할 뿐이었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정비를 본 고려의 과거제도는 공민왕 18년(1369)에 이르러 변혁을 보게 되었다.
원의 제도를 따라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제도를 채용하였다. 이리하여 과거지망생은 누구나 제1단계인 향시를 각자의 본관지 해당 도에 가서 응시해야 했으며, 이어 향시 합격자들은 중앙의 예부에서 주관하는 회시에 응시하여야 했다. 회시 합격자는 다시 전시를 치러야 했다. 전시가 강화됨으로써 과거시험에서 왕권의 영향력이 한층 커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거삼층제(科擧三層制)는 우왕 2년(1376)에 폐지되었다가 창왕 즉위년(1388)에 부활하였다.
시험과목을 보면, 제술과의 경우 예경(禮經) 육경의(六經義) 사서의(四書疑) 등의 경학과 시·부·송 등의 문예, 그리고 시무책·책문·대책 등의 시무 등을 시험보았다.
명경과는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春秋) 등 5경을 고시과목으로 했다.
잡과는 전문분야에 따라 율업(律業 : 明法業)·산업(算業 : 明算業)·서업(書業 : 明書業)·의업(醫業)·주금업(呪業)·복업(卜業)·지리업(地理業)·하론업(何論業)·삼례업(三禮業)·삼전업(三傳業)·정요업(政要業) 등의 11종류로 나누어 치렀다.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자격은 중요한 문제인데, 과거의 대표격인 제술업과 명경업에는 향리층 가운데서도 일정한 선 이상의 자손만이 응시가 가능하였고, 일반 양인과 향 부곡인들이 응시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잡과(雜科)의 경우는 일반양인 이상에게 개방되어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그들이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극복하고 잡과에 응시 급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보인다.
제술과의 급제자는 초사직(初仕職)으로 중앙의 권무 내지는 8·9품에 해당하는 일반직을 제수받기도 했지만 주로 권무 내지 9품에 해당하는 문한 학관직과, 그리고 각급 지방행정 단위의 7·8품직을 보임받았다.
중기이후는 급제후 상당한 기간 동안 대기했다가 초사직을 받는 예가 많아져 갔다.
명경과 급제자는 제술과에 비해 동정직을 제수받는 비율이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잡과의 급제자들은 대개 하급관료나 이속직에 취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고시인 예부시의 책임자는 지공거(知貢擧)와 동지공거(同知貢擧)였다.
이들은 제술과의 경우 문제를 출제하고 시험을 감독하며 채점과 과차(科次)를 정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과거를 통해 좌주와 문생의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양자는 공고한 유대를 맺고서 학문의 전통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음서는 조상의 음덕에 의하여 그 자손이 관리가 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음서제는 목종 대에 최초로 시행한 기록이 보이며, 성종대 이후 정비되었다.
음서는 규정에 따르면 문무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 대한 일반적인 음서, 공신자손에 대한 음서, 그리고 조종의 묘예(苗裔)에 대한 음서 등 세가지로 나누고 있다.
이 가운데 공신자손 조종의 묘예에 대한 음서는, 그 음서의 성격상 특수한 경우, 즉 국왕의 즉위나 복위, 왕태후와 태자의 책봉, 기타 다른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고 이해된다.
문제는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하여 시행된 음서 즉 문음(門蔭)이다.
문음은 앞의 2종류 음서와는 달리 연중 어느 달이나 제수된 것으로 나타나 어느 때나 시행될 수 있는 항례적인 제도였다.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연령은 18세 이상으로 한정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 규정은거의 지켜지지 않아 최저 5세에 음직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부터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과거에 여러 차례 응시한 뒤에 음직에 나아가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음직으로 처음 제수된 관직은 실직이 아닌 산직(散職)인 동정직(同正職)이었으며, 그 관품은 정8품과 정9품의 품관 동정직과 이속동정직이었다.
부음(父蔭)을 받는 경우에는 주로 품관직을 받았지만, 부음 이외의 음서를 받을 때에는 대체로 이속직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관리들은 5품 이상의 직위를 가짐으로써 자손에게 음서의 혜택을 줄 수 있었지만, 2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된 이후에 탁음자(托蔭者)가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며, 사망한 뒤에 탁음자가 된 관리도 상당수 보인다.
결국 음서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하여 모두가 강제적이고 의무적으로 택해야 하는 입사로가 아니라 탁음자 또는수음자가 필요할 때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입사로였다고 추정된다.
공신의 자손에게는 동일 탁음자에 의해 여러 차례에 걸쳐 음서를 받을 수 있었지만, 문음의 경우는 통상 한 사람에게만 음직을 수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음(再蔭) 삼음(三蔭)의 사례도 나타나고 있어, 여러 명이 음서를 받는 것도 드물지 않았던 것 같다.
음서는 일정한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어 문벌귀족 계층에게 유리한 입사로가 된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음서를 통해 조기에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한품의 제한없이 누구나 고위관리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음서 출신의 인물 가운데 41.9%나 되는 인물들이 과거에 다시 급제한 것으로 나타나, 과거의급제가 당시에 선호하는 바였으며, 관리생활을 하는 데도 유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과거와 음서 두 제도는 원리상 충돌하는 것이었지만, 서로 보완하면서 고려의 관인(官人)을 배출하는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역시 당시 관인에게 가장 중요하였고 선호되었던 것은 과거였다. 관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과거에 급제하여 관인이 되고자 희망하였다. 이러한 과거를 통해 새로운 관인이 끊임없이 공급되어, 고려 관료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새로운 활기를 유지하였고, 그것이 왕조를 오래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