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영혼과 태양의 우화' 중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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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작은 영혼에게 말했다.
“너는 원한다면 신의 어떤 부분이라도 될 수 있다. 너는 스스로를 체험하는 ‘절대 신성’이다. 이제 너는 신성의 어떤 측면을 자신으로 체험하려느냐?”
“ 제가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작은 영혼은 신에게 되물었다.
“그렇다. 너는 신성의 어떤 측면이라도 너에게서, 너로서, 너로 하여 체험하길 선택할 수 있다.”
“ 좋습니다. 그럼 전 용서를 선택하겠습니다. 저는 완전한 용서라는 그런 신의 측면으로 나 자신을 체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를 일으켰다. 아무도 용서받을 이가 없었던 것이다. 신이 창조한 것은 오직 완벽과 사랑뿐이었다.
“ 용서받을 이가 아무도 없다고요?”
작은 영혼은 다소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 아무도 없다.”
신은 되풀이 해서 말했다.
“네 주위를 둘러봐라. 너보다 덜 완벽한 영혼, 너보다 덜 멋진 영혼을 찾을 수 있느냐?”
이 말에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던 작은 영혼은 하늘의 모든 영혼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하늘 왕국도처에서 몰려온 영혼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작은 영혼이 신과 놀라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 나보다 덜 완벽한 건 하나도 찾을 수 없어요! 그럼 전 누굴 용서해야 하죠?”
작은 영혼이 이렇게 외치는 순간, 다른 영혼 하나가 무리에서 앞으로 걸어 나와 말했다.
“ 날 용서해 주면 돼.”
“ 뭘 용서한단 말이야?”
작은 영혼의 반문에 그 상냥한 영혼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내가 네 다음 번 물질생으로 들어가서 네가 용서해줄 일을 할게.”
“ 하지만 뭘로? 이토록 완벽한 빛의 존재인 네가 어떻게 내가 용서해줄 일을 저지를 수 있겠어?”
“ 아, 우린 틀림없이 뭔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상냥한 영혼은 웃으며 대답했다.
“ 하지만 너는 왜 그렇게 하려는 거니?"
작은 영혼은 그토록 완벽한 존재가 사실상 '나쁜'일을 저지를 정도로 자신의 진동을 떨어뜨리고 싶어하는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 간단해. 난 널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 거야. 너는 자신을 용서로 체험하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너도 날 위해 같은 일을 했으니까.”
상냥한 영혼의 설명에 작은 영혼은 놀랐다.
“ 내가 그랬다고?”
"물론이지. 기억 안나니? 우리는, 너와 나는, 그 모두였어. 우리는 그것의 위와 아래였고, 오른편과 왼편 이었어. 우리는 그것의 여기와 저기였고, 지금과 그때였어. 우리는 그것의 크고 작음이었고, 남자 여자였으며, 좋고 나쁨이었어.
우리는 모두 그 모두였어.
게다가 우리는 서로간의 합의로 그렇게 한 거야. 서로가 자신을 신의 가장 장대한 부분으로 체험할 수 있게 말이야. 왜냐하면 우리는 ….. 자기 아닌 것이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거든.
차가움 없이 너는 “'따뜻함'일 수 없어. 슬픔 없이 너는 '행복'일 수 없고, 이른바 '악'없이는 소위 '선'이란 체험도 존재할 수 없지.
만일 네가 뭔가가 되기를 선택한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립하는 뭔가나 누군가가 네 우주 어딘가에 나타나야 해.”
그런 다음 상냥한 영혼은 그런 사람들은 신의 특별한 천사들이고, 그런 상황들은 신의 선물임을 설명했다.
“ 이번엔 내가 너한테 딱 한가지만 부탁할게”
“ 뭐든지! 뭐든지 말해봐.”
자신이 신의 모든 신성한 측면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안 작은 영혼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는 이제 계획을 이해했던 것이다.
“ 내가 너를 때리고 괴롭히는 그 순간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못된 짓을 네게 저지르는 그 순간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못된 짓을 네게 저지르는 그 순간에, 그런 순간에 ….. ‘내가 진짜로 누군지’ 기억해줘.”
“ 그럼, 절대 잊지않아! 나는 지금 네게서 보는 완벽 그대로 너를 볼 거야. 그리고 ‘네가 누군지’ 기억하겠어.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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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줄여서 신나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신성한 이분법'이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확 줄여서 이야기하면 사람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다 신의 뜻이라는 거지요.
여러 영성책이나 불교책을 보면 이원성, 이분법, 분별이라는 것을 모두 허상이라하며 부정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분법을 갖게된 것을 '신성한 이분법'으로 이해하면 세상의 있는 그대로를 긍정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깨침은 마치 아인쉬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과 같은 사고의 역전이라고 제겐 느껴집니다.
빛이 항상 똑같은 속도라는 사실을 바로 시간이 느리게 간다라는 식으로 거꾸로 문제를 해결한 생각의 전환 말입니다.
이분법으로 고통받는 이유를 이분법을 초월해서 해결해야한다는 논리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그 이분법을 인정하고 왜 이분법이 생겼나 생각하면 고통의 문제를 달리 해결할 수 있다는거지요.
제게는 이게 코페르니쿠스적 생각의 혁신같아서 세계관의 점진적인 확장이 아니라 확 도약하는 무엇으로 다가왔습니다.
막연히 내 눈에서 빛이 나와 물체를 본다고 생각했던 초등학교 시절에, 본다는 것은 빛이 그 물체에 반사되어 내 눈에 들어와서 이루어진다라는 알게되었을 때처럼요.
반사된 빛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 '본다'라는 사실을 아니까 인간의 초라함, 한계,객관성 같은 것이 느껴져 아마 최초로 '생각'이라는 걸 그때부터 한 것 같습니다. 현상과 사실을 거꾸로 보면서 말이지요.
호랑이굴에 안들어가고 다른 길을 가는 게 답인데 왜 굳이 거기들어가서 살아돌아오는 법을 궁리하나 싶지만
오늘은 신성한 이분법을 소개해드리며 갑진년 첫날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