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본과 사람들"
경상남도 함양군 남덕유산 자락에 있는 이산 안준영 선생의 작업장은 산골의 적막함과 고요함 그리고 신선한 산 공기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천혜의 장소다. 나무를 깎아 정밀한 목각작업을 하는 그로선 이보다 좋은 장소는 찾기 어려울 듯싶다. 작업장을 열고 들어가니 작업 순서를 기다리는 각종 나무들이 창고에 쌓여있다. 산벚나무, 박달나무, 돌배나무, 은행나무 등은 직접 이곳에서 소금물과 함께 삶아 건조중이다. 나무가 단단해지고 내부의 불순물이 빠지는 삶기 과정이 끝나면 약 3년 정도 그늘에서 건조기간을 거친다. 급하게 마르면 갈라짐 현상이 발생해 목판 작업에 쓸 수 없다. 또 건조과정에서 발생하는 적당한 곰팡이도 이 같은 이유에서 필요한 존재다.
나무 외에도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선 먹물관리도 필수조건이다. 먹 제작으로 유명한 경주 유병조씨가 직접 제작한 먹에 멸균 처리된 증류수를 이용해 먹물을 완성시킨다. 물은 중성 성격이 강해야 하므로 불소가 섞인 수돗물이나 철분이 섞인 지하수, 산성비 등은 피해야 한다. 벼루 역시 정성이 가는 건 마찬가지. 보통 벼루 1개당 물 300cc를 넣어 3시간 정도 갈면 완성된 먹물이 탄생한다. 그는 “사소한 것부터 중요하고 소중하게 다뤄야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할 수 있다. 풀 역시 10년 정도 삭힌 것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보통 목판 한 장당 들어가는 글자 수는 650~700여자
손으로 당기고 찌르고 파면서 한 자 한 자 공을 들여 완성시켜 간다. 작업장을 이런 외진 곳에 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선 가족들까지도 떨어져 지내야 한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살림살이가 나아졌지만 초창기엔 밥 빌어먹기 십상이었다고. 그가 현재까지 만든 목판은 대략 손가락으로만 꼽아도 1,000여장. 하지만 특정 사찰이나 국립중앙박물관 등의 요청으로 만든 목판을 제외한 나머지는 목판을 이용한 인쇄물만 활용하고 목판은 그대로 남기 때문에 보관 중인 목판은 약 900여장에 이른다. 그는 후에 박물관이나 관계기관에서 남은 목판을 활용하기를 바라고 있다.
현재 남은 유물 중 경전 문집은 보관상태가 좋은데 완판본은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보관 상태가 좋지 못하다. 완판본 고전소설이 한글 보급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그 수많은 목판은 어디로 갔는지 찾기가 어렵고 남은 책마저 상태가 좋은 것이 없는 실정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는 지난 2008년 용비어천가 복원작업을 시작해 1권을 마친 상태다. 총5책 10권 중 1책 2권을 복원했지만 정부로부터 지원이 끊겨 연차적 복원사업은 현재로선 잠시 중단된 상태다. 개인적 욕심에 시작한 것이 완판본 심청전 복원이다. 심청전은 상하권으로 나눠 있으며 각각 앞뒷면을 합해 17판 총34판으로 구성돼 있다. 현재 상권을 끝냈고 하권을 조각중이다. 하루 빨리 작업을 마치고 싶지만 경제적 여건과 시간 문제로 조금은 미진한 상태다. 2010년부터는 국가프로젝트 일환으로 초조대장경 복원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2010년은 초조대장경이 1,000년 된 해이지만 단 한 장의 목판도 없는 게 현실이다. 총 2,300장에 현재 약 30% 진척을 보이고 있으며 3년 안에 연차적으로 복원을 마무리 할 예정이다.
그가 처음 이 길에 접어든 것은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때부터 틈만 나면 도장 파기 등에 손재주를 보였던 그는 조그마한 공방을 운영하던 중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을 본 이후 각수의 길을 걷는 것에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 조그마한 조각도로 목판에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새겨 넣는 작업. 이 작업이 주는 황홀함과 오묘함이 그를 각수의 길로 이끈 것이다.
이런 그가 전주로 이전하게 된 동기는 대가야학교를 운영하던 중 전주 지인들 소개로 지난 2007년 보금자리를 옮겼다. 전통문화 중심도시인 전주에서 자신이 할 일이 많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도 한 몫 했다. 하지만 대가 끊기고 남이 몰라주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그리 수월치 않았다. 문하생을 키우고 싶지만 생업과 관련된 것이라 덤비는 사람도 없다. 각광받는 장르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과물이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닌 이른바 굶어죽기 딱 좋은 직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마저 여기서 그칠 순 없다.
전주에서 목판 복원을 진행하며 전주목판서화체험관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지난 2009년 심청전 상권 30장(60쪽)의 목각 복원작업을 마치기에 이른다. 제대로 보관된 인쇄본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던 찰나 원광대 박순호 교수의 소장본에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작업에 들어갔다. 520여 글자가 들어가는 한 장에 양면을 새기니 목판만 해도 15장에 이른다. 정성을 다해 고른 나무에 정교하게 글자를 새기고 전주한지에 인쇄한 후 옛 책을 묶는 방법인 오침안정법(인․의․예․지․신을 상징하는 5개의 구멍에 실로 꿰매는 방식)을 이용할 만큼 모든 과정이 전통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목판 인쇄야말로 한글을 널리 알리고 세종대왕이 만든 문자를 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매개체라는 판단에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작업에 손을 내민 것이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다. 단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인 셈이다. 그는 “한글이 새겨진 한글 판본은 한글을 널리 알리는 데 가장 선구적이고 획기적인 매개체이다”며 “특히 전주는 고전소설의 대표인 심청전, 춘향전, 구운몽 등 목판 완판본을 완성시켜 한글을 전국에 알리는데 크게 공헌을 했다. 출판문화의 한 획을 그은 완판본을 지켜나가고 이어나가는 것이 후손들의 임무다”고 강조한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나라 목판 인쇄는 저 멀리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경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부터 시작된 목판 인쇄는 고려 팔만대장경으로 이어지며 조선시대에 그 꽃을 피웠다. 여기에 완판본이 당당하게 그 자리를 한 켠 차지하고 있다.
용비어천가 복각작업을 진행하면서 그의 전주살이가 시작된다. 전주야말로 조선의 발생지이며 ‘조선왕조실록’을 온건하게 지켜낸 고장에 완판본이란 걸쭉한 출판문화가 융성한 것이 아닌가. 그는 2007년 국립국어원의 ‘한글문화유산 판각 및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용비어천가 목판복원작업을 진행했다. 전체 10권의 광해본을 모본으로 했다. 이전 시대 목판은 모두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용비어천가 제1권을 판각했으며 이렇게 완성된 용비어천가는 160권이 인쇄됐으며 목판 32장 모두 시간을 거슬러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이 표기된 용비어천가 복원은 당시 한글 문헌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전주한지를 이용해 책을 간행하고 간기를 전주로 표기한 데 의미가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은 초조대장경 복원. 초조대장경은 고려가 거란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불력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염원아래 제작됐다. 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불에 타 소실되는 안타까운 운명에 처했다. 그는 우선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모으기 시작했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원형에 가깝게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활용한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기를 바라고 있다. 예전에 천리안동호회나 학교 아이들을 상대로 한 문화학교 등 기초단계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보다 심층적인 전략으로 문화고급화 전략을 꾸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한민국만의 독특한 문화복원 차원에서 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예에 강하고 아직도 판각기능이 살아 있는 전주의 경우 지역 주민이 참여하고 각 전문가들을 연계해 독특한 전통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대가들의 글씨가 한옥마을 중요한 곳에 작품형태의 현판들로 즐비하다면 이것이 바로 한옥마을만의 특화된 형태며 세계적 판화대회 유치의 밑거름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문화는 여러 부문이 합해져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글에서 출발해 판각기능까지 특화한다면 전주만의 장점이 될 수 있다” 며 “FTA시대를 대비해 목재나 한지를 부활해 농촌 살리기에도 일조할 수 있고 충분한 경쟁력도 있다. 방법론적인 부분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고민 후 아직도 잘 모르는 완판본을 활성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통문화보전 역시 어렵지만 성공만 한다면 어느 누구도 따라 오기 힘들다는 측면에서 100년 전 완판본을 어떻게 담아갈 것인가 고민할 때라는 것이다. 언제까지 작업에 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한 가지 일을 오래하다 보면 전승과 보존에 대한 고민과 책임감이 늘어난다며 시간이 두꺼워지는 돋보기를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세월이 녹아 들어간 것에 위로를 얻는다고.
그는 “아마 한평생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내가 잘하는 것이 이것밖에 없고”라며 “멋모르고 덤빈 젊은 시절엔 패기로 이 일에 몰두했고 이제는 나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아직도 조각도를 놓지 못하고 있다. 나이를 먹으니 몸은 따라주지는 않지만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은 점점 두터워지는 것 같다”며 웃는다. 평생 동안 목판 앞에 작은 조각도로 인생을 조각했던 그.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목판이 그의 손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이지 장담할 수 없지만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전주문화를 살찌우는 것이 그의 양 어깨에 달려 있음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