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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시편 123:1-4
오늘 말씀을 나누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벌써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회계의 결산은 12월 31일까지 하지만, 신앙의 결산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에 한다. 그래서 교회력 마지막 주일은 가리켜 모든 죽은 자의 주일, 그리스도의 왕 주일, 영원한 주일이라고 부른다.
다음 주일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이고, 추수감사주일이다. 한 해를 돌아보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감사와 기쁨의 결실을 마음의 창고에 거두어들이길 바란다.
우리 교회는 대림절 첫째주일에 설립예배를 드린다. 여러분 모두가 이른바 ‘창립멤버’이고, ‘설립위원’이다. 교회력의 시작과 함께 색동교회를 시작한다는 의미 때문에 이 날을 고집하였다. 우리 교회는 더 큰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해 11월 20일부터 25일까지 대림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한다. 주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이다.
동탄에 있는 시온감리교회는 365일 새벽기도회로 유명하다. 거의 천 명에 이르는 전 교인이 새벽마다 기도회에 참석하고, 믿음 안에서 하루의 출정식을 한다. 담임 목사는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자는 마음으로 전교인 새벽기도운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교회 표어는 ‘인사만 잘해도 먹고는 산다’이다. 그 보기를 든 성경의 인물이 바나바이다. 그의 삶을 본 받는데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시편 123편은 순례자의 노래이다. 이 시는 간절한 탄원과 기도의 내용이다. 바벨론 포로로 사로 잡혀 간 사람들의 아픔을 담고 있다고도 하고, 포로에서 귀환한 느헤미야 시대에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담고 있다고도 한다.
1절에서는 기도의 주체가 ‘나’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로 바뀐다. 즉 개인의 탄원시에서 공동체의 탄원시로 변화한다. 마치 대표기도가 우리 모두의 간구를 담아내는 것과 같다. 겨우 4절로 된 시편 123편은 그 내용은 아주 단순하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를 모두 담아낸다.
순례자는 하나님께 나아와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한다. 그는 괴롭게 하는 자들의 비웃음과 멸시 속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은혜를 바라는 것이다. 교회의 전통 가운데 키리에(Kyrie) 송이 있다. 기도를 하는 사이사이에 이 기원문을 반복하거나, 노래로 부른다. ‘키리에 엘레이손’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이다.
1) 키리에 엘레이손
여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마치 홀로 임금님과 독대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몸을 낮추고,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고 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고대 근동에서는 눈, 곧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였다고 한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신분의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호의의 표시였다. 눈을 맞추는 일(Eye to Eye)은 신뢰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내가 눈을 든다’는 표현은 강한 신뢰를 나타낸다. 기도를 드리는 순례자의 시선은 절실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는’ 기도자의 시선은 얼마나 간절한가? 순례자는 인생의 고단한 길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였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 121:1).
그는 자신을 긍휼히 여김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주님을 향해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는 행복하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감히 자신을 불쌍히 봐주실 분을 쳐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세상에, 어디 감히 지존하신 분의 얼굴과 마주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그 분의 긍휼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얼굴을 쳐다 볼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축복의 의미이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6).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삶의 근원적인 것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내 인생의 제자리인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를 가엾이 여기실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기도자가 향한 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그는 땅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어 하늘의 보좌를 향해 눈을 들었다. 이 땅에서 안전과 평안을 찾지 못하면, 시달리고 괴로움을 겪으면, 자연스레 하나님을 의지하게 마련이다.
현대인의 위기는 자주 물질적인 기반을 상실하는데서 온다. 사람들은 편리하게 살려는 욕망을 거부하기 어렵다. 그런데 물질 경쟁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다보니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삶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를 따져볼 새도 없이 산다. 바쁜 일상은 자주 나를 잃어버리고 산다. 이렇듯 더 큰 위기는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은 채, 표류하는데서 온다.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볼거리 속에 살아가는가? 요즘 핸드폰이 더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니 시선이 산만해지고, 문제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다. 하루의 대부분은 이러한 자잘한 신경전의 연속이다.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은 인류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이지만, 후대에 본이 된 훌륭한 신앙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고백을 하였다.
“나는 과학자로서 늘 천체 망원경을 통해 하늘의 별들을 관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자주 골방에 들어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그 어떤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하는 내 영혼의 망원경입니다”.
오늘 우리는 당장 기댈 데도 있고, 의지할 데도 많기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러나 신앙을 지녔으면서도 그 영적 순수함, 그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 그 역동성을 잃어버린다면 그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눈을 맞추어야 한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우리가 눈을 하나님께 향한다는 것은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맞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분명한 신앙적 결단이다.
2) 키리에 엘레이손
특히 순례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분의 손을 지켜본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시인은 순례자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실감나게 설명한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2).
그 간절함이 마치 종들이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것 같고, 여종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 사이의 관계 차원, 즉 당시 상전과 종, 여주인과 여종의 관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인의 손이 무엇을 어떻게 하도록 지시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손 안에 해결의 방안이 있기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은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고, 무엇을 공급해 주고, 보호해 주며, 판단도 하고,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 손이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6).
만약 주인에게 잘못한 일이 있어 용서를 받으려면 무엇보다 주인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드라마를 보면 ‘통촉’해달라는 말이나, ‘성은’을 입게 해달라는 표현이 같은 맥락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 긍휼히 여김을 받는 존재요, 불쌍히 여김을 받는 존재임을 분명히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힘있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간구’이다.
프랑스 엠마우스 공동체를 만든 피에르 신부가 있다. 그는 사람을 신자와 비신자로 구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로 나누어 이해 한다.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과 공감하는 자’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럼으로써 남을 향해 은혜의 창을 열 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사람은 여호와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
그는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내 생명이 지금 살아있고, 그의 은혜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내 삶의 존재감을 누리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삶을 상상해 보라. 나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애초부터 이 땅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출생하였고, 그 은혜로 순간순간 살아간다. 내가 누려온 삶 그 어느 시간도 하나님의 은총과 무관한 때는 없다. 무지하고 교만해서 이러한 은총을 부정하거나,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자기 인생을 정직하게 돌아본다면 나 자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 안에 있음을 실토하게 될 것이다. 은총의 빛 가운데 살아왔고, 살아가며, 살아갈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선을 지닌 존재이지만,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종의 눈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을 눈과 눈을 맞대고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3) 키리에 엘레이손
순례자가 탄식하는 것은 심한 멸시와 박해와 조롱 때문이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3).
그가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래 그가 겪는 고통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탄식한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4).
이제 순례자는 자유인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왔다. 그러므로 종의 눈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더 큰 힘을 의지한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할 때에 진정한 변화가 시작됨을 알고 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3).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 자신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온갖 질병과 상처와 가난과 심지어 죽은 사람의 문제까지 가지고 나아왔다. 그들은 단순히 이런 말로 호소하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20:30).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은 자신을 가엾게 여기도록 예수님께 사정을 아뢰었고, 또 응답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얻으면, 은혜를 입게 되면 반드시 회복될 것임을 확신하였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한 채, 종종 마음의 독재자로 살아가지 않는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집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을 미루지 않는가? 안일한 자와 교만한 자의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라. 내 시선을 임금님과 독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라.
안소니 드 멜로의 예화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나요? 그럴 때마다 똑같은 답을 들었다.
“갈망함으로써!”.
제자가 푸념하였다. 스승님이 보시듯 저는 온 마음을 다해 갈망하지 않습니까?
하루는 스승이 제자와 강에서 목욕을 하던 중, 갑자기 제자의 머리를 물 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제자는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렸지만 스승은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풀려났다.
다음날 스승이 딴청을 부리며 제자에게 물었다. 어제 내가 자네 머리를 물속에 들이 밀었을 때, 왜 그리 심하게 몸부림을 쳤는가?
“숨이 막혀 죽을 뻔하였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바로 그걸세. 그렇게 하나님을 숨 막히도록 간절히 찾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걸세.
사실 아무런 시달림 없이, 고난의 시간 없이 하나님을 진실로 의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말하는 조소와 멸시와 같은 고통이 나를 몸부림치게 하고, 하나님과 더 긴밀히 결속하게 한다. 하나님을 절실하게 묶어주는 도전이요, 자극이 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는 모든 기도의 으뜸이요, 기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은 내가 살아가는 길이다.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라.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한 가장 좋은 것들을 차지하라.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
하나님의 눈길이 은혜를 바라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도우심으로, 평화로, 기쁨으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