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경주읍성의
감옥터
정조 22년(1798) 이후 어느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읍내전도'
경주읍성 안쪽 네 구역 중 서북쪽에
'獄'(옥)이라고 해서 감옥 건물이 표시돼 있다
조선시대 감옥의 위치
조선시대 경주읍성 모습은 정조
22년(1798) 이후 어느 무렵에 제작됐다고 추정되는 '경주읍내전도'(慶州邑內全圖)로 대강이나마 알 수 있다.
경주읍성은 고려 초에 축조된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차례 증,개축과 함께 임진왜란
때에는 치열한 저투가 벌아진 곳이기도 하다. 이후 일제강점기애 도시를 개발하고 도로를 개선한다는 구실아래 성문과 성벽이 철거되고 북부동에 일부만
남아 현재 사적 96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사각형의 읍성은 동서 및 남북을 각각 관통하는 대로(大路)에 의해 4구역으로
나뉘었다. 현재 명사마을이 들어서 있는 지역에는 양무당(養武堂),
진고당(鎭鼓堂), 감옥(監獄)등 관청관련시설이 있었으나 근대에 들면서 성벽철거와 함께 이관되거나 폐관이 되었다
경주읍내전도에 의하면,
읍성 내 서북쪽 논밭이 펼쳐진 들판 가운데 '獄'(옥), 즉, 감옥이 나타난다. 감옥은 원형 담장에 남쪽으로 정문이 있고 동서편에
마주 선 건물 2채가 자리잡고 있다.
해방
이후 이곳
에는 1945년 설립된
문화중ㆍ고교가 있었으나 1996년 학교가 시 외곽으로 이전함에 따라 이곳에는 5층 규모 총 380세대 주거용 건물 신축이 추진되었고 199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경주읍성(慶州邑城. 사적
제96호) 안에 있던 조선시대 감옥 터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발굴하고 있는 부분 전체가 옛 문화중고등학교 자리이다
우방명사마을 아파트 단지내 둥근 선부분이 감옥터이다. 건물을 짓지않고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지도에서 동서로 마주본 채 남북으로
길쭉하게 선 두 건물터도 조사결과도 역시 지도에 그려진대로였다. 크기는 조금 달라 서편 건물(동서 8m, 남북 12.5m)보다 동편 건물(동서
11m, 남북 15m)이 약간 컸다. 이들 두 건물이 죄수가 수감되던 곳이다.
담장은 '凸'자
모양으로 강돌을 사용해 쌓았다. 즉, 폭 2.5m 가량 되는 기단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폭 1.2m 가량의 담장을 올렸다. 담장은 지도에는
원형이지만 실제 발굴에 의하면 사각형에 가까운 타원형(동서 33.5m, 남북 23.5m)이었다.
감옥은 방형에 가까운 원형 담장 안에 2개 동의 옥사(獄舍)와 1개
동의 부속건물 및 출입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감옥의 건물터
이 감옥 터를 발굴한 결과 사각형에 가까운 타원형으로 담장을 둘렀으며
그 바깥으로는 해자를 두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주목할 대목은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표시가 없었지만 담장 주위로 물을 채운 도랑
겸 연못 시설인 해자(垓子)가 완연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해자는 남쪽 정문
부근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구역에서 확인됐는데 규모는 폭이 3.8-4.7m로 제법 넓은 편인데 반해 깊이는 80㎝로 예상보다는
얕았다.
감옥터에서 발견된 우물
담장에서 발견된 '天主寺小標'라는 글자를 새긴 신라시대 금석문
이곳 출토 유물 중에는 담장 기단에서 출현한 사각 기둥 모양 돌 하나가 비상한관심을
끌고 있다. 여기에서 '天王寺小標 日文太任ㆍㆍㆍ至北五ㆍㆍㆍ'라는 명문이확인됐기 때문이다.
내용을 보아 선덕왕이 창건한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이 절 구역을 표시하기위해 그 경계 부근에 세웠던
비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돌은 감옥을 만들면서어디에선가 담장 기단석으로 쓰기 위해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래쪽이 잘려나가면서 여기에 적힌 명문 일부도
사라졌다.
지금까지 경주 고고학은 신라시대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조선시대 경주의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하나의 발굴이라고 볼 수 있다
감옥터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
이곳에서는 삼국초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이르기까지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현재 이곳은 '우방 명사마을'이라는 아파트촌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