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아나키(무정부 상태)를 예술의 규범으로 전화하는 것이 현대예술의 기본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다.
좋은 시는 그 카오스를 곧장 코스모스로 전화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최대한 드높은 질의 카오스에로 밀어붙여 열며, 그 과정 혹은 순서를
아예 ‘끝나지 않는’ 미학의 뼈대로 삼는다. 이 시의, 아나키스트적이기에 상상력이 자유롭고 풍부할 뿐 아니라 카오스-규범적인 성취가, 정치를
정치적으로 극복한다. <김정환·시인>
의사는
입원을 권유했지만 여자는 입원을 거부했다. 일용직
남편은 아침마다 오렌지주스에 약물을 탔고 여자는 온종일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상복을 입고 상여를 따라 간다. 자운영이
핀 논둑길과 귀신이 나온다는 상엿집을 지나 엄마를 묻고 의붓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오던 날, 실눈을
뜬 송충이가 낄낄거리며 아이를 더듬고 아이는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천둥
번개 소리에 잠에서 깬 여자가 유리창을 보며 파랗게 질려 우흐흐 짐승처럼 떨고 있다. 낄낄대며
유리창을 오르는 송충이들 여자가 연장그릇을 찾는다. 죽어죽어
여자가 창문에 탕탕 못을 박고 있다.
2.
여자가
빨리 오라고 빠르게 손짓을 한다. 풀뿌리에
채인 아이가 구렁텅이에 빠진다. 똬리를
틀고 있는 수십 마리 뱀들이 아이를 칭칭 감고 아이가 발버둥을 친다. 엄마
어디 있어, 엄마. 남자가
여자를 흔들어 깨운다. 땀에
젖은 여자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떤다. 남자가
오렌지주스에 3일분의
약을 쏟아 붓는다. 수전증처럼
떨며 여자가 주스를 마신다. 돌아섰던
남자가 주스잔을 뺏어 화장실에 쏟아 붓는다. 남자의
눈에서 오렌지 같은 노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3.
아이와
남자가 보육원 울타리의 쥐똥나무 열매를 따고 있다. 아빠, 엄마
지금도 자고 있어. 나
집에 갈래 집에 가고 싶어. 지금은
안 돼 엄마 병 나으면 데리러 올게. 아자, 아자, 남자와
아이의 손바닥은 자꾸 엇나갔다. 가다
돌아보고 돌아보는 남자의 눈시울이 쥐똥나무열매처럼 붉다. 집에
가고 싶다고 따라가고 싶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싶지만, 무중력
상태에 빠진 아이의 방광이 팽창해진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아이는
쥐똥나무숲으로 생쥐처럼 몸을 숨겼다
4.
휑한
여자의 눈이 살쾡이처럼 번득였다. 진정제
용량은 날마다 높아갔고 무의식에 빠진 여자의 뇌는 기억을 빠르게 재생한다. 습관처럼
꿀벌 떼가 온 종일 붕붕거린 유채꽃밭이었다. 여자가
벗어든 고무신에 꿀벌이 몇 마리. 훔친
꿀이 달다. 아이는
꿀에 취해 꿀벌이 되고, 여자는
꿀벌이 된 아이를 보듬고 햇살 속으로 눕는다. 수
천 수 만 나비의 비늘에 눈이 시리다. 산허리에
산꿩이 푸드득푸드득 아이들의 보리피리 필리리필리리. 여자와
아이가 꿀 같은 단잠에 빠진다. 목련의
실밥 터지듯 투두둑투두둑 소리에 여자의 건조한 눈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
산에서
남창계곡으로
오르던 길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오직
녹은 눈 녹는 눈 공양으로 제
몸을 씻는 겨울 산
에
들어선 나도 씻어라 씻는다
해 떨어진 포구의 갈대들 소금물에
제 몸 씻으며 꼿꼿이 선채로 컴컴한
한밤을 견디다 스러지듯
겨울
산에선 나도 없다 지나온 시간도
미망도 없다 오직 영하의 차고도
깨끗한 바람
만이
문득 나의 한 생을 자작나무
가지 위에 허옇게 걸어두고 흔들어댈 뿐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적요의
순간을 스쳐 지나갈 뿐
겨울
변산
일찍이
변산이 말씀하시길 나로
인해 더 이상 상처입지 말라 그럼에도
매운 바람 온 몸에 감고 맨살로
푸른 불꽃 자궁을 찾아 헤매는 덜덜덜
한 사내의 얼굴이 튼다 지천으로
깔려있는 서녘햇살도 오들오들
살점 트는 겨울 저
세상에선 차마 버리지 못한 아픔이란
아픔 다 토해내는지 벌겋게
달구어진 한 사내가 적벽을
때리는 빛살로 무너진다
소한 ―
아버님
가시는 날
무슨
놈의 눈도
눈도 미쳤는갑다
무슨
놈의 바람도
바람도 환장했는갑다
차도
멕히고 사람도
멕히고
그래도
저승길이사 눈도
바람도 없는갑다.
문
열어라
산
설고 물 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님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제끼니 찬
바람 온몸을 때려 꼬박
뜬 눈으로 날을 샌 후
문
열어라
아버님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어젯밤에도
문
열어라.
立冬
아파트
뒷산 오르는 길 찬
바람기가 코끝을 때린다 새들의
푸드덕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운동복
차림의 낯익은 얼굴들도 줄어들었다 굴참나무
마른 잎 하나 참 먼길을 왔는지 내
발 아래에 와서 소리없이 눕는다 그
이파리 일으켜 세워 손을 꼬옥 쥐고 생각한다
시간이란 참으로 신이 거느리시는 거라고 나보다
앞서 걷는 사람들 등짝으로
눈부신 한 생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나는
바짝 다가붙지 못하고 이만큼
떨어져 걸으며 한기로 몸을 떤다 나처럼
떨리는 시간도 있는 모양이다.
북의정부
해는
짧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톡! 한
생이 끊어지듯 멈추어버린 국철
위로 왼종일 점령군처럼 시간의
살속까지 파고드는 폭설 하마
햇살 퍼지면 녹을까 해찰할
틈도 없이 저
지상의 계곡까지 흐르거나 스며들까 우리네
삶 적멸의 꿈까지 마침내
흔적도 없이 증발할까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북의정부
겨울 밤 적막은 깊어가고
허형만(許炯萬) 시인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학교
국문학과 숭전대대학원, 성신여대대학원 '월간문학' 등단 한국기독교문학상 전라남도문화상 목포대학교
명예교수 시집
'청명'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 외
빙벽을
오르듯 서툰
낯설음에 다가서 보지만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낙조는
타올라 이따금
눈이 시려옵니다
그대는
어디쯤 오고 있나요 시린
손 위에 마지막
남은 촛불 타오릅니다
겨울
연가
떠나기
아쉬워 가슴앓이하며 밤새
이별가를 불렀는지 무등산
정상에 쏟아낸 눈물 진달래
가지마다 맺혀 아름다운
눈꽃으로 피었습니다
떠나가는
겨울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눈부십니다 잠든
초록을 깨워주고 얼어붙은
강물의 길 터주어 그리운
노래 부르도록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주는 겨울은, 시린
가슴에 전해오는 따뜻한
마음이 몹시 그리웠나 봅니다
함께
나눌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더디
오는 봄만 애타게 기다리며 찬바람을
일으켜 안고 다닐 때 겨울은
홀연히 제 곁을 떠났습니다
얼마동안
그리움에 잠 못 이루어 불
밝히는 날 잦아들겠지만 어느
날, 무등산을
안은 봄 진달래
피었다는 소식 전해오면
느슨한
끈 다시 동여매고 어디
쯤 가고 있을 사라진
눈꽃을 그리워하며 무등산
정상에 올라 붉은
입술에 입맞춤하겠습니다
감기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잠시
스쳐 지나갈 거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지낸
나날들
아픔은
더 큰 아픔을 안으로
키워가며 끓어오른
열꽃 잠재
울 길 없어
곳곳에
나를 찌르는 고통자국
남기고서야 비로소
새털처럼 가볍게 일어서는
날
메말랐던
가슴에 꽃등
하나 달아둔다
감나무
무성한
잎 다 내어주고 메마른
몸으로 산자락에
기댄 감나무
그에게도
꿈은 있어 여린
잎 틔워가며 밤마다
별들을 불러 모아 향기
날리던 때가 있었지
세월의
무게 앞에 바람
잔 날 없다지만 뜨거운
입맞춤으로 가을을
부둥켜안고서
하늘
빛 곱게 담아 가지마다
메어 둔 사랑, 기약
없는 이별을 준한다
겨울
편지
- 겨울 밤
어둠
한가운데 앉아 떨치지
못해 예까지 끌고 온 가슴
시린 그리움으로 더디
가는 긴 밤 나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바라보는 곳은 항상
높이, 멀리
있었다 가까이서
낮게 흐르는 강물 소리 귀담아
듣지 못하고 조바심에
움켜진 손 내밀어 틈새에
매달려 잡으려고만 했었다 어머니
자궁에 갇힌 겨울 밤, 다독이지
못해 나부끼는 마음 고요
속에 내려놓는다
겨울
강
겨우내
울다, 웃다
마음의
벽을 두껍게 쌓던 강 긴
침묵 깨뜨리고 벽
허물기 시작하더니 채워진
만큼 비우기 위해 마침내, 누군가
힘껏 던졌을 돌멩이마저도 깊숙이
끌어 안는다
눈
내리는 날에는
눈
내리는 아름다운 날에는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자
전하지
못해 묻어 둔 그리운
마음을 눈송이에
실어 보내자
그리하여
그리운 사연들 우체통에
수북이 쌓이면 행복을
끌고 가는 사랑의 수레
기다림에
익숙해진 창가를 향해 그리움
가득 싣고 순백의
들판을 질주하며 겨울
강 거침없이 건너갈 테니
눈
내리는 아름다운 날에는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자
폭설, 그
후
눈은
얼마나 더 내려 많은
것을 덮으려는지 하염없이
성긴 눈을 뿌려댄다
시야를
흐리게 하던 끌고
다닌 어두운 기억들과 마른
풀잎의 서걱임도 눈
속에 깊숙이 묻히고
섣불리
봄을 노래하려던 초록의
작은 몸짓, 개여울의
낮은 울림도 눈
속에 잠겨 해설解雪을
기다린다
폭설에
모든 것이 잠긴다 은빛
세상에 초대받은 투박한
나의 언어마저도 눈
속에 잠겨 눈이 된다
어머니
“오메
아가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시방
몇 신디 지금까정 자고 있냐 싸게싸게
일어나 밥묵어야제” 오랜만에
찾은 친정 변함없는
안식처에 물들어
가는 꿈 길... 자식들
훈장처럼 달고 버팀목으로
살아오신 여든
넘은 노모
삐걱거리는
관절 맞춰 들고
온 밥상 앞에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내 나이 빙빙
돌다 자리잡네 당신
눈 속에 영원히
*싸게싸게: 빨리빨리의
전남 방언
5.18 공원에서
도시의
한 모퉁이 빌딩
숲 사이 길게
드리워진 오솔길로
접어들면
인고忍苦의
세월 속에 짙어지는
신록처럼 모든
생명체들의 숨소리 오월의
햇살에 제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