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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찰생태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연구소 김재일
■ 맑은 기상이 서린 강마을 / 경기도 여주
(글머리)
- 선방(禪房)의 스님네들 고요해졌는데
혼자 앉았으매 밤은 더욱 깊어진다.
고깃배가 지나감을 알 수 있나니
강 가운데 사람들의 말소리 들리누나
이 시는 중종 13년에 나온 시문집 <속 동문선(東文選)>에 나오는 이달선(李達善)의 시이다. 신륵사를 끼고 있는 여주(驪州) 남한강의 밤 정경을 정감어리게 묘사하고 있다.
(남한강)
남한강은 태백준령인 태백산과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정선 아우라지를 거쳐 영월, 단양, 충주로 내려와서 다시 양평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쳐져 서울을 가로질러 서해로 흘러든다. 경기도 여주는 이 남한강이 만들어낸 넓고 비옥한 강마을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3대 강마을로 대동강 평양과 북한강 춘천과 남한강 여주를 꼽았다. 그만큼 살기 좋다는 이야기이다.
이곳 사람들은 남한강을 여강(驪江)이라고 부른다. 최근 이 지역에 골프장 등 각종 레저시설이 속속 들어서면서 옛스런 정취가 다소 줄어들었지만, <관동별곡> <택리지> 등 옛 문헌에서 보듯이 여전히 맑은 기상이 남한강과 함께 유유히 흐르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천년고찰 신륵사를 비롯하여 영릉, 고달사 절터, 영월루, 명성왕후 생가, 여주향교 등 여주는 아직도 많은 역사유적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여주 역사)
그러나, 여주는 겉보기보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국 초기 온조왕이 북쪽에서 내려와 한강변에다 도읍지를 정하면서 원주민격인 여주지역의 부족국가들이 백제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역부족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전승지로 이 땅을 차지하고 골내근현으로 만들었다. 다시 70년 후 나제동맹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물러가고 다시 옛 주인 백제의 품에 안기지만, 그것도 잠시,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다시 신라땅으로 귀속되는 파란만장한 운명을 겪었다. 그 사이사이 말갈족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한강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를 차지한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역사의 현장이 여주땅이다.
(영월루 창하리 석탑)
신륵사로 가자면 읍내에서 여주대교를 건너야 한다. 영월루는 이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에 야트막한 야산 위에 있다. 야산에 오르면 창리․하리 삼층석탑이 부부탑처럼 서 있다. 창리탑은 고려시대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탑신 아래에 복련을 둔 탑이다. 하리탑 역시 고려시대 탑으로서 창리탑보다 덩지가 크고 보전 상태가 좋은 편이다. 둘 다 길 건너편 옛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신륵사 창건)
신륵사는 여주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풍치가 뛰어난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신륵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고구려설과 신라설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구려 때 여주 지방을 골내근(骨乃斤)이라고 했다. 이 지명은 ‘굴레끈’에서 나온 말로서 이런 전설이 있다. 여강에 흑룡과 황룡이 살고 있었는데, 황룡이 설치면 이 강에 홍수가 진다고 했고, 그 황룡을 다스리기 위해 고구려 인당대사가 강가에다 신륵사를 세웠다고 한다. 신륵사의 ‘勒’자는 곧 황룡을 다스리는 굴레끈에서 나온 말이다. 전설 속의 황룡은 말[馬岩]으로 상징되는, 이 지역의 토착적인 옛 백제세력이 아니겠는가. 이 전설에는 고구려의 내침에 반발하는 백제유민들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륵사가 고구려 절이라는 데 대해 신빙성을 더해주는 유산으로는 중원땅 고구려비와 마애불상군이 지척에 있다. 시기가 다른, 유사한 전설도 있다.
또 다른 전설로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흰 수염의 노인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는 설이다. 처음에는 연못 속의 아홉 용이 반대를 했으나 7일기도로 용들을 모두 승천시켜주고 신륵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신륵사 창건시기를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 쯤으로 잡고 있다. 통일은 했으나 아직 지방통치까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신라 정부는 이 지역의 고구려 잔존세력들에게 관직을 주어(승천시켜주고) 회유했을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삼국 통일 전후의 상당수 신라 절들이 매우 정치적인 동기에서 창건되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영릉의 원찰, 신륵사)
조선시대 들어와 이 절은 조선 세종의 능이 대모산에서 여주로 옮겨진 후 영릉의 원찰이 되었다. 그 때문에 절 이름도 한동안 ‘보은사(報恩寺)’라 하였다. 여기서 잠깐 원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원찰(願刹)이란, 스님들의 수행이나 포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사찰이 아닌, 특정한 인물의 명목을 빌거나 창건주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을 원찰이라고 한다. 또는 기왕에 창건된 절을 특정 목적의 원찰을 삼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찰에는 주로 특정 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진영(眞影)을 봉안하는데, 일명 원당이라고도 부른다. 궁궐 안에도 이와같은 원당을 지어 내불당(內佛堂)이라고 이름하였다.
내불당의 역사는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전인 소지왕 때 처음 나타나지만, 공식화된 것은 진흥왕 5년(544) 흥륜사가 처음이다. 그러나, 이 때는 특정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당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발전과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그 후 동해의 용왕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한 문무왕의 넋을 위로하고 그의 수중릉을 돌보기 위해 지은 감은사의 경우도 원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봉덕사 역시 무열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원찰이며, 팔공산 동화사 역시 민애왕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원찰이었다. 왕이 아닌 일반인의 원찰로는 순교자 이차돈의 명복을 위해 지은 자추사가 처음이다. 이와같이 신라에는 원찰사상이 팽배해 있어서 원찰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구인 원당전(典)을 두기도 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면 원찰 창건이 다소 주춤해진다. 그것은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왕후․제신들이 원당(원찰)을 창건하는 것은 크게 걱정할 일이다. 신라는 다투어 부도를 만들어 지덕을 쇠잔케하여 멸망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왕건의 이러한 지적에는 정치적인 배려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말 구산선문이 각 지방의 정치세력(호족)을 등에 업고 여기 저기 난립하여 결국은 중앙집권과 왕권강화를 가로막고 국론을 분열시켰던 사실을 왕건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통일은 했다고 하나, 지방호족들이 불만스런 자세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싸움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었기에 왕건은 정치적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왕건의 원찰 건립 반대 유언은 상당기간 지켜져 내려온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면 원찰제도는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다. 조선에 들어서면서 왕실과 귀족들을 위한 원찰들이 속속 세워졌다. 고려 고종 때 세운 강화도 선원사를 비롯하여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흥천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시대에는 역대의 능원 주변에 집중적으로 원찰을 많이 세웠는데, 조선시대의 원찰은 숭유배불의 영향으로 원찰을 새로 짓기보다는 주변에 있던 사찰을 원찰로 정하는 예가 많았다.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원찰 신륵사, 단종의 능인 장릉의 원찰 보덕사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다가 차츰 원찰에서 생기는 폐단이 심해져서 조선 정조 원년(1776)에는 법을 정해 원찰제도를 없앴다.
이러한 원찰제도는 불교의 호국적 역할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면으로는 불교가 왕권에 편향 종속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다층전탑)
또, 신륵사를 또는 ‘벽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경내에 전탑(塼塔:벽돌로 쌓은 탑)이 있다는 데서 연유되었다.
경내에 들어서면 맨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층전탑이다. 강 건너 마암과 대비되는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다. 이 바위는 남한강 홍수해로부터 신륵사를 지켜주는 수구막이 바위로서, 그 바위 위에 전탑을 세운 것은 용마(홍수해)의 입에 물린 재갈과도 같은 것이다. 절 이름을 구룡사에서 신륵사로 바꾼 것도 신의 끈[神勒 : 굴레,재갈]을 이용하여 강의 몸부림(홍수)을 막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보물 제226호인 이 전탑은 국내 유일한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재료는 전(塼)으로, 감실은 없고, 탑신의 체감비율은 거의 무시되어있다. 옥개의 너비가 좁아서 다소 기형적인 느낌을 준다. 탑신의 벽돌 사이를 넓게 면토를 발랐으나, 벽돌의 배열구조는 무질서하다. 벽돌 문양은 연주문에 당초문을 넣은 것이 대부분이다. 안동지역의 전탑과는 양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북방계 전탑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강월헌)
다층전탑 아래 물가에 강월헌이 있다. 강월헌이 앉은 자리는 전탑이 앉은 자리의 지질과 다른 회백색의 화강암이다. 화강암 암맥은 남한강 깊은 물속으로 내려가 침잠하고 있는데, 풍수가들을 이 화강암액을 봉황의 꼬리[鳳尾]라고들 한다.
정자의 이름은 나옹화상이 머물었던 회암사의 누각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한다. 강월헌 옆에 삼층망탑이 하나 서 있는데, 이 역시 풍수비보탑으로 세웠을 것이다.
(이색과 나옹)
강월헌이 올라앉은 바위 밑으로 푸른 남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관동별곡>에서는 흑수(黑水)라 하였고, 다른 문헌에서는 대부분 여강(麗江)이라고 했다. 이 강은 고려말 충신 이색이 이방원이 꾸민 계략에 빠져 뱃놀이를 하던 중 독주를 마시고 세상을 뜬 곳으로 전해진다.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목은(牧隱)으로, 고려말 충신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한산 이씨 문중을 중흥시킨 대학자 이곡(李穀)의 아들로, 이제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에 몸 담고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0년만에 귀국한 후 대제학에 이어 대사성에 올라 우리나라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공민왕이 그를 만날 때 ‘중국서도 만나기 어려운데 내 어찌 교만할 수 있으리오’하며 제자의 도를 갖추었다는 데서도 그의 덕망과 유명세는 넉넉히 짚어볼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이성계와 함께 친명정책을 지지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견제를 받아 정몽주가 피살에 이어 여러 차례 유배되었으며, 그의 제자와 아들들도 많은 피해를 입어 둘째아들이 피살되는 불운도 있었다. 조선개국 후 이성계의 종용이 있었으나 ‘망국의 신하가 살아남기 바라겠는가’ 하고 끝내 고사하였다.
그에 앞서 이곳은 나옹화상이 열반한 곳이다. 나옹과 이색은 태어난 곳(경북 영해) 같다. 한 사람은 고려 불교에 우뚝한 왕사(王師)요, 또 한 사람은 성리학으로 왕을 감동시킨 대유(大儒)였다. 고려말 정신적 기둥이었던 두 사람의 사상은 서로 달랐지만, 인간적인 친분은 사상을 초월하는 바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한 고향에서 태어나 한 곳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비운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숙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장각기비)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는 전탑 뒤쪽 산기슭에 있다. 이곳은 나옹화상과 그의 문도들이 대장경을 인출한 곳으로, 대장각비는 고려 말 충신 이색이 부모의 유언으로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이 비를 세웠다. 이색의 어머니는 경북 영해 출신으로 나옹화상과 같은 고향 같은 시대 인물로 친분이 각별했다고 한다.
대장격각비의 귀부와 이수 부분은 장방형 복련대석과 지붕돌이 대신하고 있다. 비신을 보호하기 위해 양쪽에 돌기둥을 댄 것이 이채롭다. 이것도 고려말과 조선초에 한때 유행하던 양식이다.
이 절의 큰법당은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이다. 특정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대개의 원찰에서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한다. 그리고 명부전이 거의 딸려있다. 영릉의 원찰인 이 절도 예외는 아니다.
(다층석탑)
극락보전 앞에 아담한 탑 하나가 서 있다. 보물 제225호인 이 탑은 조선 전기의 백색 대리석탑으로, 재료가 희귀석인 만큼 탑층의 부재를 모두 1매씩으로 한 소규모 탑이다. 지대의 4변 상면에는 복연화문을 조각, 하층 기단갑석은 두꺼워서 다소 중후한 느낌을 준다. 상층기단 면석에 화형과 연주문으로 장식한 우주형 모각이 있고, 그 가운데 비룡과 구름문양을 새겼다. 8층 탑신까지는 그대로이나 그 위층 상륜부는 없어졌다. 조성시기는 영릉이 여주로 이장되고 이 절이 원찰로 지정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심검당과 적묵당)
탑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심검당(尋劍堂)이한 현판이 걸린 선방이 있다. ‘不立文字’ ‘直指人心’ ‘敎外別傳’ ‘見性成佛’이라고 쓴 4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이 말은 선가(禪家)의 금과옥조같은 요체이다. 굳이 풀이하자면-. 참된 진리는 문자나 언어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不立文字), 자기의 진면목(마음)을 바로 꿰뚫어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하니(直指人心), 선(禪)이란 말이나 글로 전하지 못하므로 부득이 마음으로 따로 전하니(敎外別傳) 부지런히 수행하여 자기의 진면목(本性)을 깨달아 부처가 되게나(見性成佛) 반대편에 적묵당(寂黙堂)이 앉아있다. 심검(尋劍 : 見成)을 해서 도달하는 최고의 해탈(解脫)경지가 적묵(寂黙)이요, 적멸(寂滅)이며, 열반(涅槃)이다.
극락보전과 적묵당 사이로 빠져나가면 왼쪽으로 적묵당 굴뚝이 눈길을 끈다. 이 굴뚝은 다른 굴뚝과는 달리 벽체에 붙어있어서 답답한 느낌은 주지만, 기와조각과 진흙을 사용하여 색다른 맛을 풍기고 있다.
(신륵사와 나옹)
여주 신륵사 하면 나옹화상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
‘나옹’이라는 이름 뒤에 붙은 ‘화상’은 ‘선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도가 뛰어난 선사에게 붙이는 말이다. 나옹은 경북 영해 태생으로 본명은 원혜, 법명은 혜근, 호는 강월헌이다. 고려 충숙왕 7년에 태어난 나옹은 다른 고승들도 그러하듯이 신비스러운 탄생설화를 갖고있다. 어느 날, 어머니가 황금빛 새 한 마리가 낳은 알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옹을 낳았다. 20세 때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당하고 인생사에 의문을 품게 되어 출가하여 경기도 남양주 회암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27세 때 중국(원나라)으로 건너가 법원사에 와 있던 인도승 지공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법을 받았다. 어떻게 왔느냐는 지공선사의 물음에 나옹이 ‘12방자(房子)를 데리고 왔다’라고 한 일화는 중국에서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데, 12방자란 열두가지 인생법(제자백가의 논)을 터득하고 왔다라는 뜻이다. 나옹은 그 후 38세 때 귀국하여 오대산에 머물었다.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왕사가 된 후 회암사에 주석하였다. 51세 때 공민왕으로부터 ‘왕사대조계종 사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 풍복국우세 보제존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57세 때 와병으로 밀양 영원사(표충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 벽탑(다층전탑) 앞에서 입적. 그의 제자와 문도들이 사리를 수습하여 신륵사에 안치하였다. ‘쇠지팡이를 가로날려 휴휴암에 이르러 쉴 곳을 얻었거니 이내 쉬었네. 이제 휴휴암을 버리고 떠나거니와 사해 오호에서 마음껏 놀리라’라는 열반송과 법제자 48명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로 알려진 <서왕가(西往歌)>와 <발원문> <회심곡> 등도 그가 남긴 것들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을 세운 무학은 그의 수제자.
그런데, 신륵사에 오면 늘 나옹화상의 죽음에 대해 미스터리를 느낀다. 그는 일반에 알려진대로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어쩜 비명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나옹과 신돈)
나옹은 학승이면서도 당대에 가장 뛰어난 선승이었다. 신돈이 공민왕을 등에 업고 설치고 다닐 때 그는 깊은 산속에 은둔하고 있었다. 유림세력들에 의해 신돈이 희생되자 공민왕은 신돈을 대신하여 세속에 때묻지 않은 나옹을 끌여들인다. 나옹은 왕사로 추대받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신돈의 과오와 유림들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된 불교의 중흥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는 만백성들의 열화같은 신임을 얻고 있었고, 불교는 그에 힘입어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 신돈을 요승이라하여 역사의 뒷그늘로 밀어낸 개혁유림세력들은 나옹이 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제2의 신돈으로 등장할 것을 지레 겁먹고는 그를 상소하여 느닷없이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표충사)로 귀양을 보내버린다. 귀양길에 그는 신륵사에 들렀다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 또한 미스터리이다. 병환이 아니라 모종의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추측은 나옹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명부전과 조사전)
극락보전 뒤쪽에 명부전과 조사당 건물이 한갓지게 앉아있다. 명부전은 저승의 세계를 형상화한 전각이며, 조사당이란 그 절 출신의 뛰어난 스님의 영정을 모신 일종의 불교 사당(祠堂) 건물이다. 죽은 이들의 공간이기 때문에 두 건물 사이에다 잘 자란 향나무 한 그루를 분향(焚香)하듯 심어놓았다.
조사당 안에는 나옹과 그의 스승 지공(指空), 그리고 나옹의 제자인 무학(無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초기의 목조건물로, 다포계 팔작지붕 단칸집으로 천정에 대들보를 놓지 않았다. 간살이가 넓은데다가 공포를 많이 두는 바람에 평방과 창방 가운데가 휘어졌다.
(나옹 부도)
큰법당 뒤 둔덕으로 올라간다. 거기 보물 제228호인 그의 부도와 보물 제229호인 석종비, 석등이 있다. 좌청룡 우백호가 반듯하여 한눈에도 아늑한 명당임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그의 이름을 딴 보제존자 부도는 신라의 전형적 팔각원당형 모양을 벗어난 라마계 부도이다. 인도의 복발탑을 연상케 하기도 하는 이 부도는 금강계단 형식을 딴 사각형 기단 위에 봉안된 것이 특징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이런 예는 양산통도사의 적멸보궁과 모악산 금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도탑의 정상부는 보주로 장식하였다.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높이 1.9미터.
(나옹부도탑비)
나옹의 부도 옆에도 부도탑비가 서 있다. 높이 2.1미터인 이 부도탑비는 이수와 귀부 대신 지붕돌(각진 지붕돌 : 비첨석)과 네모난 복련대석을 하였다. 비신 양쪽에 돌기둥을 댄 것은 대장각기비와 흡사하다. 이 탑비는 그러한 양식의 초기의 것이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이 비를 세울 때 도와준 이들의 이름과 직함도 들어있다. 무학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과 최영 장군 등 내노라 하는 당시의 관리들 이름이 나온다.
(나옹석등)
그 앞에 앙징맞도록 아담한 석등 하나가 있다. 보물 제228호인 나옹의 석등이다. 원래 석등은 법당의 탑 앞에 세웠으나, 고려에 들어오면서 부도 앞에도 석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는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라는 선불교의 사상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고려 후기에 들어오면 일반 능묘 앞에도 장명등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에 영향 입은 바일 것이다.
나옹의 석등은 장식성이 돋보이는 고려말 작품으로 높이는 1.9미터. 지붕돌과 기단부분은 화강암을 재료로 하였고, 화사석은 섬세한 조각에 알맞는 납석(연석)을 재료로 하였다. 기록을 보면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팔각원당형 부도 양식을 빌린 이 석등은 8각 지대석 위로 복엽복판을 조각하여 우아를 더했다. 간주석이 짧고, 화사석 받침 표현 없이 그대로 놓았다. 각 면마다 화창을 뚫고 비천상을 조각한 점이 여느 석등과 크게 다른 특징이다. 특히 재질이 납석이라 조각된 비천상에 생동감이 넘친다.
(비천상)
비천, 곧 천녀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이다. 천녀는 물과 춤의 요정인 압사라(Apsaras)와 팔부신중 가운데 음악의 신인 간다르바(Gandharva)를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압사라는 매혹적인 눈과 율동적인 허리와 육감적인 엉덩이를 가진 춤의 신이며, 건달바(乾闥波)로 표기되기도 하는 간다르바는 향을 먹고 노래를 부르는 음악의 신이다. 압사라와 간다르바는 혼자가 아닌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 복수명사이다. 이들은 모두 수미산의 계곡이나 연못 주변에 살면서,더러는 혼자서 더러는 부부가 되어 신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동양의 천녀와 서구의 천사는 비슷한 개념의 존재들로 모두가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문화양상으로는 서로 다르게 표현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서구의 천사는 여인의 몸에 새의 날개가 덧달려서 어색하다.
비천상은 범종․석탑․석등․부도․막새․탱화 등에 약방 감초처럼 흔하게 등장한다. 대개의 비천상은 흰구름을타고 하늘로 오르내리거나 허공중을 날아다니는 동작을 하고 있다. 천녀들은 구름 위에서 차나 향을 공양하기도 하고, 즐거이 노래하고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고달사지)
이제 고달사 절터로 간다. 역시 문화기행은 사지(절터:寺址)에서 답사의 깊은 맛을 느낀다. 사라짐의 미학이랄까...
고달사 절터는 신륵사에서 양평 쪽으로 20분 정도 달려 간 곳에 있다. 요즘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어수선하지만,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뭔가를 짚어볼 생각이라면 고달사 절터는 꼭 한번 들러보는 것이 좋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고달사 절터는 혜목산 산허리 수십만평이 넘는 허허벌판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 벌써부터 경주 황룡사와 익산 미륵사의 규모에 버금가는 대찰로 알려지고 있다.
(고달사 창건)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창건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역사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산파의 개산조인 심희와 그에게 선법을 전수해준 현욱 등이 이 산에다 고달선원을 열면서 비 선종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신라 경문왕 9년(869)에 출생하여 고려 광종 9년(958) 이 절에서 입적한 원종국사 찬유도 고달사를 중흥시킨 선승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는 이 절을 선종에서 천태종으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천태종)
이 땅에서 천태종(天台宗)이 처음 발아된 것은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으로 건너가 천태교관을 배워온 후부터이다. 그는 귀국한 지 12년만에 중국 천태종찰인 국청사의 이름을 따서 개성에다 국청사를 창건하고 본격적으로 천태학 전파에 나선다. 1101년 국가의 주관 아래 천태종 승과(僧科)라고 할 수 있는 천태선(天台選)을 거쳐 공인된 후 천태종은 큰 걸음으로 발전하여 선종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선다. 대각국사의 비문에 보면 그 당시 선종사찰에서 천태종사찰로 변신한 다섯 곳의 절이름이 나온다. 합천 영암사․원주 거돈사․지곡사․신광사를 비롯하여 우리가 지금 찾아가는 고달사이다.
그러나, 이 절이 그 후 언제 무슨 까닭으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말 위정척사의 기수였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의 연보에 따르면 그가 28세 때인 1819년 ‘高達山寺’에 들어가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수유와 억새풀 더미 사이에 고달사 절터 부도와 석불대좌, 원종국사탑비, 주초석 등을 비롯해 갖가지 유물들이 잡초더미 속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석공 고달)
이 절터에 들어와 누구나가 공감하고 놀라는 것은 여기저기 흩어진 석물들의 뛰어난 석공예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절의 석공은 고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함흥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제유라는 노모와 달여라는 아내와 유달이라는 딸을 고향에 두고 홀로 이곳에 와 일을 하고 있었다. 오래동안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가족들이 함흥에서 이곳까지 천릿길을 내려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추위와 굶주림으로 노모와 딸은 죽고 아내 달여만이 간신히 고달사로 왔다. 그러나, 절이 완성될 때까지는 만날 수 없다는 남편의 전갈을 받았다. 그러나, 달여는 절이 멀지 않은 마을(대신면 보통리)에서 그만 병고로 죽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고달은 고달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속죄하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석불대좌)
절터에 들어서면 먼저 4각 석불대좌를 만난다. 외형이 보기드문 사각형인 것만으로도 이 대좌가 고려 때의 것임을 안다. 아깝게도 불상은 어디 가고 대좌만 남아있다. 추측컨대 석불이 아닌 철붏이었을 가능성을 점쳐본다. 그것은 당시 철불이 크게 유행한 데다가 남한강 유역에 철이 생산되고 야철되었기 때문이다. 대좌 상하대에 6잎의 복엽앙복련이 조각되어 있는데, 조각이 마냥 일품이다. 중대(간주석) 역시 4각으로서 큼직한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 높이만도 1.6미터에 이르니 그 위에 앉아계셨던 부처님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대좌 주위에 흩어져 있는 주춧돌로 보아 당시 불상을 모신 거대한 전각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혜진탑비)
석불대좌가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 뛰어 잡초더미 속에 보물 제6호인 원종국사 혜진탑비가 누워있다. 탑비의 비신은 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다. 귀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남성적이고 진취적이다. 금방이라도 땅을 딛고 일어설 듯한 힘찬 앞발, 부릅뜬 두 눈, 치켜올라가서 한결 험상궂게 보이는 눈꼬리, 꽉 다문 입, 막 뛰쳐오를 것 같이 한껏 움츠린 목덜미... 귀부라면 분명 거북이일진대, 생김새 하나하나가 용호상박하는 용의 형상이니, 어찌 여느 귀부와 느낌이 같겠는가. 느낌이 다르기는 이수도 마찬가지다. 골을 깊게 파서 입체감이 뛰어나서 한낱 돌에 새긴 용인데도 생동감이 넘친다. 좌우 2마리씩 모두 4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붙어 격동을 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유물은 감탄사를 절로 불러일으킨다.
(혜진탑)
원종국사의 부도인 혜진탑을 보기 위해 수풀을 헤치고 산자락으로 올라간다. 가다보면 여기저기 뒹구는 석조물의 부재들을 만난다. 비신도 이수도 잃어버린 거북이 한마리가 터밭 가운데 납작 엎드려있다. 거북이라기보다 차라리 뭍으로 올라온 개구장이 남생이 모양이다. 남생이가 짊어지고 갈 비신과 이수는 어디에 파묻혔는지...모르긴 해도 이 절터 묵밭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보물 제7호인 혜진탑은 기단 위에 탑신을 안치하고 지붕돌을 덮은 일반형 부도이다. 높이 2.5미터인 이 부도탑은 4매로 짜여진 지대석 위에 얹혀져 있다. 하대에는 복련이 조각되어있고, 중대는 권운문과 함께 거북이 조각되어 있다. 거북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부리부리한 사실적 조각이 뛰어나다. 귀부를 중심으로 4마리의 용이 또 꿈틀거리고 있다. 상대석은 8각이며, 4면에는 문비형이 조각 되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8각 지붕돌 끝으로 귀꽃이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다.
(고려부도탑)
혜진탑 건너 골짜기에 또다른 고려시대 부도탑이 하나 서 있다. 누구의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예술적인 가치로 보면 혜진탑을 웃돈다. 그래서 국보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가 3.4미터인 이 팔각원당형 부도탑은 혜진탑과는 달리 기단석 하대가 8각으로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도 이 부도는 원종국사 혜진탑보다 조성시기가 앞선 것으로 보인다. 중대석은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과 권운문을 대담하고 힘있게 조각하였다. 8면 탑신에 우주를 조각하고 문비와 사천왕상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유난히 큰 귀꽃을 달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지붕돌을 줄여놓은 듯한 보개가 있다. 그 위에 찰주(피뢰침 모양의 쇠막대)를 꽂았던 원공이 있다. 전체적인 느낌이 장중하면서도 화려하다.
그런데, 최근 중앙박물관 소재구 씨가 원종국사 혜진탑과 국보 제4호 부도탑이 뒤바뀌었다고 주장해서 눈길을 끌었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소씨는 원종국사 탑비의 양식과 국보 제4호 고려 부도탑의 양식이 한 세트로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