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혼과 혼 생명과 자아에 다하여(6-1)/ † 자아(自我)란 무엇인가?(구약의 예표)
<이 부분의 진리는 아직도 닫혀진 부분이다. 가끔 심리학의 일부 용어들을 도입하여 쓰기도 하지만, 그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서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따라 이의 정확한 이해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경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부분을 여러 각도에서 수시로 비교 설명해 왔다. 당신의 분발을 기도드린다! 아멘!>
<죄와 자아(自我)>
레위기 14장 2-9절은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병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淨)한 살아 있는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7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8 정결함을 받을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9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고 말한다.
<죄와 세상과 양심과 과거 일소의 처리>
레위기 14장 2-9절은 나병 환자를 정결케 하는 말씀인데, 이 구절은 우리의 외적인 문제와 우리 자신의 문제에 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처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표이다. 성경에서 나병 환자는 언제나 타락하고 죄 많은 사람을 상징한다. 곧 외적인 더러움과 불결함은 물론 내적인 질병의 독성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우리 타락한 죄인들에게 있어서 주된 문제는 사실 외적으로 죄짓는 행위 보다는 사탄의 악한 생명에서 비롯된 우리 안의 죄 있는 본성에 있다. 그러므로 문둥병의 예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 있는 상태를 아주 정확하고 철저하게 묘사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에 기록된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는 방법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되고 처리 받는 방법이다.
문둥 환자를 정결케 하기 위한 첫 번째 요구사항은 그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는 것이다. 여기서 제사장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제사장은 진영 밖으로 나가서 문둥 환자를 진찰하는데“ 이는 문둥 환자는 진 안에 들어갈 수 없고 밖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우리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사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들어갈 수 없다(2-3).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본래의 위치를 떠나 자신을 비우시어 죄인들에게로 다가오심을 의미한다(마8:1-3). 주 예수님께서 나오셔서 우리를 살피셨다(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만일 우리가 진정 마음으로 회개했다면 문둥병이란 질병은 하나님 보시기에 치료된 것이다.
그 병이 치료된 후에 “4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淨)한 살아 있는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7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4-7)”.
치료받은 문둥 환자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되기를 구해야 했다는 것은, 그가 비록 속에서는 생명으로 치료받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결점과 더러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처리 받아 정결케 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정(淨)한 산 새(living clean birds)”는 유일하게 정결하시며 하늘에 속하며 생명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피를 뿌리는 절차는, 두 마리 새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그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음을 나타낸다. 나머지 살아 있는 새는 주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상징하며, 흐르는 물은 우리 주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상징한다.
백향목(cedar wood)과 우슬초(hyssop)는 주님의 높은 인성과 사람의 모양으로 낮추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홍색실(scarlet)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지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존귀하고 고귀한 왕이 되심을 상징한다.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셨다“(5).
이 예표를 히브리스 9장 14절과 함께 묵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죽임당한 새)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분은 그분의 인성(질그릇) 안에 계셨으나 그분 안에는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의 살아계신 성령(살아 있는 물)이 있음을 본다. 그분을 채웠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
더욱이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흘리신 보혈과 그의 영원하신 생명은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안에서 효력을 발하게 되었다.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주님의 피로 정결케 하는 것이 완전함을 나타낸다. 문둥 환자의 더러움은 하나님 앞의 죄이다. 그러므로 피를 뿌려 정결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죄 있는 본성을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온갖 죄의 기록을 제하기 위한 것이다. 잡은 새는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죽임 당하심을 상징하고, 살아 있는 새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상징하고, 흐르는 물은 우리 주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상징한다.
”산 새는 피를 찍어 뿌린 다음, 들에 놓아 자유롭게 했다(6)“. 이것은 사람이 자기 죄를 대신한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주님의 피가 그 사람에게 효력을 발하게 되고,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그 사람에게 나타나 그를 해방시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람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부활되고 해방될 때 그 사람은 구원받는다. 이 시간 후로 그 사람은 모든 더러움을 씻고 그의 안팎의 어려움을 처리해야 한다.
<자아의 처리>
”정결함을 받을 자는 그의 옷을 빨고(8)“. 옷은 사람의 몸에 입는 것인데 우리의 생활과 행위와 행동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옷을 빤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 모든 부적합하고 그릇된 행위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다음 문둥 환자는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게“ 해야 한다. 털은 사람의 몸에서 자라난 것인데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어려움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털을 민다는 말은 자기 자아의 어려움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일은 우리를 처리하는 십자가의 일이다. 사람이 십자가의 처리를 받은 다음에는 그 전체가 실제적으로 정결케 된다. 자아의 처리는 영단번에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루어지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되풀이 되어야만 한다.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9)”고 말한다. 이러한 계속적인 처리는 철저하고도 세부적이다. 왜냐하면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은 계속적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또한 세부적인데, 일반적으로 털을 미는 것일 뿐만 아니라 머리털, 수염, 눈썹, 온몸의 털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역은 하나씩 하나씩 처리되어야 하며 점차 온몸의 털을 다 밀어야 한다. 성경에서 각기 다른 종류의 털은 그 자체가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 당신도 당신의 영으로 이 부분을 읽고 또한 영으로 기도하면서 이 부분을 묵상해 보라. 놀라운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머리털은 사람의 영광을 예표하고, 수염은 사람의 명예를 나타내며, 눈썹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온몸의 털은 사람의 타고난 힘을 나타낸다. 누구나 다 어떤 영역에 있어 자신의 자랑, 곧 자애가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문벌을 자랑하고, 어떤 이들은 교육을, 어떤 이들은 덕성을, 어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열심을 자랑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며, 자신 안에 과시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이것을 머리털로 예표했다. 더욱이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족보 배경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은 항상 남들 보다 높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수염이다. 또한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연미, 곧 타고난 좋은 강점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함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출생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눈썹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에게는 타고난 힘, 곧 타고난 방법과 의견 또는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이것 저것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충만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온몸에 걸쳐서 매우 긴 털을 가지고 있으며 밀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이 모든 것은 외적인 오염이 아니라 타고난 출생의 문제이다. 외적인 오염은 다만 물로 씻기만 하면 되지만 우리 자신의 타고난 문제는 십자가의 처리를 의미하는 면도날로 밀어야만 한다. 이러한 처리는 깊고 철저하여 우리 속을 상하게 하고, 많은 고통을 당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털을 미는 것”, 곧 우리 자신의 자아 문제를 처리하는 체험에 관한 것이다. 영적으로 사람의 자아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사탄이다. 사탄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일 뿐 아니라 우리 자아 속에 있는 선한 의견이다. 우리가 대적을 대항하려면 죄를 대항해야 하며, 한층 더 자신의 의견을 부인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란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의견에 강조점을 두는 혼적인 생명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아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혼과 혼생명, 혼과 양심, 혼생명과 자아, 영과 혼을 비교하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죄와 자아를 구별하지 못한다. 도전의 시간들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