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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증기선이 캐나다의 10번째 주인 뉴펀들랜드 래브라도(Newfoundland and Labrador)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는 짙은 안개로 인해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선장을 찾아온 한 승객은 배가 토요일 오후까지 퀘벡(Quebec)에 도착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선장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승객은 다시 자신은 평생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며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선장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지만 당장은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승객은 즉시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를 이상하게 생각한 선장은 짙은 안개가 보이지 않으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내 눈은 안개가 얼마나 짙은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을 움직이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대답한 승객은 “하나님, 당신의 뜻에 합당하다면 이 안개를 5분내에 걷어주십시오. 하나님이 저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퀘백에서의 약속을 아시지 않습니까? 바로 돌아오는 토요일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안개가 걷히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때 기도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죠지뮬러(George Muller)였습니다. 당시 교회 집회를 위해 퀘백으로 가고 있던 그는 기도를 통해 안개까지 걷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는 어떻게 수많은 역경들을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그 용기와 믿음에 대해서 묻는 저드슨(Adoniram Judson, 미얀마 선교사)을 정원의 한 쪽 구석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는 “여기가 바로 나의 예배 장소이자 기도와 묵상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닥쳐온 고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매일 새벽 5시마다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저 꽃들을 바라보며 묵상을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6시경에 들어가서 아침을 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저녁이 되면 밥을 먹고 나서 손에 성경을 들고 다시 이 자리로 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을 방문할 때면, 꼭 찾아 뵙기 위해 애쓰는 부부가 있습니다. 현재는 예전의 명성을 다 잃어버린 채 정말로 가난하게 살고 계시는 그들은, 봄이면 집에서 기른 닭들이 낳은 알들을 모아 한 소쿠리씩 가져다주시곤 하셨습니다. 언제든지 들러 허기진 배를 채울 수도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빈 지갑을 채워주시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기력(氣力)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면 누구보다 먼저 비싼 한약을 지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심방 하다 지치면 일부러 그들을 찾아 뵙기도 했었습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며 힘과 위로와 용기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친할아버지와 할머니 같이 느껴지는 그 분들을 찾아 뵙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하는 도중 문득 그분들이 생각났습니다. 이곳에 오기 얼마 전, 그들은 오랫동안 시계 없이 다니는 것을 지켜보셨다는 말씀과 함께 제게 정말로 귀한 시계를 선물하셨습니다. 그분들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감사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오게된 저는, 당시 제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시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죄송하고 아쉬운 일이지만 제 시계를 누군가에는 주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으로부터 또 시계를 선물 받았지만 그것도 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 곳을 들르면서 시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잠깐 기도하고 곧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저를 만나자마자 손목부터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곤 가방을 뒤져 시계 하나를 꺼내더니 제 손목에 채워주시면서, “이 시계의 주인이 어디 있나 했더니 바로 여기 있구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저는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도 들으시는 하나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뿐만 아니라, 간절한 기도까지 모두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모든 환난과 시험을 이길 힘과 능력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윌리암 케리는 일개 구두 수선공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그는 자기 자리 앞에 세계 지도와 “큰 비전을 가지라(Great Vision), 큰 기도를 하라(Great Pray), 큰 기대를 걸라(Great Expect)”는 표어를 적은 종이를 붙여놓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고비를 딛고 일어나 현대 선교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난과 시험이 닥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당시 시인은 매우 곤고하고 궁핍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곤고하고”(아니 : awnee')는 “억압된, 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고통받은, 겸손한, 비천한, 빈궁한, 가난한”등의 뜻으로, 본 절에서는 크게 침체되고 압박 받는 상태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궁핍하오니”(에브욘 : ebyone')는 “결핍한, 궁핍한, 가난한” 등 물질적인 면에서 결핍된 상태를 뜻하지만 본 절에서는 비천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인은 자신이 왜 궁핍하고 가난한 상태까지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상태에 빠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이 한없이 낮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곤고하고 궁핍한 때에도 경건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경건하오니”(하씨드 : khawseed')는 본래 “인자한, 종교적으로 경건한, 거룩한, 자비로운”등의 뜻으로,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사람 또는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곤고하고 궁핍한 상황에서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어떤 환난과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겨운 때에도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기를 소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당신 한 분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 곧 자비와 호의를 사모하며 하루종일 부르짖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4-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유(赦宥)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 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표준 새 번역은 4절을 “주님, 내가 진심으로 주님을 우러러보니, 주의 종의 삶을 기쁨으로 채워 주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되, 자신의 삶을 기쁨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기쁨은 기도입니다. 기쁨은 힘입니다. 기쁨은 사랑입니다. 기쁨은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랑의 그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쁨이 충만하면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기 원한다면 웃는 것을 배워야한다고 권고한 심리학자 아치발트 하트는 “웃음은 많은 것을 치료한다. 웃음은 분노를 치유한다. 웃음은 사랑을 만든다. 웃음은 인생에 대한 관점을 회복시킨다. ‘즐거운 마음은 병을 낫게 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뼈를 마르게 한다.’(잠17:22)는 말씀은 이것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 우리의 면역 체계를 자극하는 놀라운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유머와 행복이다. 이것은 높은 콜레스테롤과 궤양, 두통에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웃자. 아주 크게 웃자. 웃으면 당신의 건강에 좋다. 웃는 것은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2)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 역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사66:10)고 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기쁨의 근원이시라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성도들의 행할 마땅한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회개하는 당신께 돌아오는 모든 자들을 다 용서하십니다. 무엇보다 당신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리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콜레스테롤과 궤양과 두통은 물론 각종 질병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참된 기쁨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陰府)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8-11)라는 시인의 고백은 진실입니다. 또 하나님 같은 신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8-14절입니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가 일어나 나를 치고 강포한 자의 무리가 내 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은 세상 어떤 우상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셨습니다. 누구도 주께서 하신 일을 흉내낼 수 없습니다. 세상 어떤 신도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바다를 가르거나, 하늘에서 떡과 고기를 내리거나, 반석을 열어 물이 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적들의 손에서 건지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친히 행하셨습니다. 당신 한 분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만드신 모든 나라가 주를 경배하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죄와 저주와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건짐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쁨으로 하나님의 도를 배웁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걷습니다.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높이고 존경합니다. 영원히 온 맘을 당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진실로 그렇게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하나님의 종인 시인을 가만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상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미워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교만한 자들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안중(眼中)에도 두지 않았던 원수들은 시인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모두 연합하여 시인의 생명을 사냥꾼이 짐승을 추적하듯 추적했습니다. 바로 그때 시인은 하나님을 생각해냅니다. 그리고 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15-17절입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그러나 주여”, 무슨 말입니까? 비록 원수들이 자신의 생명을 찾고 있는 급박한 순간이지만, 자신은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인은 원수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찾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원수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힘이 있는 존재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습니다. 시시각각 위협을 가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약하고 슬퍼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긍휼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당신을 격노케 하던 자들에게 베푸시는 오래 참으심과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인자하심과 시련을 당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진실하심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한번만 돌이켜 주신다면 자신의 어두운 밤이 곧 낮으로 바뀌게 될 것을 확신한 시인은 또 자신이 원수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나님께로 향한 것처럼, 하나님도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의 종인 자신에게 환난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더해 달라고, 날 때부터 하나님의 소유였던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또 “당신의 은총의 표징을 보여주소서. 내 원수들이 이 표징을 다 보게 하소서. 그들로 혼돈에 빠지게 하시고 내 위로와 도움이 당신에게서 오는 것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래서 자신을 대적들이 꾀하던 일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마침내 실망과 함께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견디기 어려운 환난과 시험의 때에, 곤고하고 가난할 때에, 원수들이 생명을 요구할 때에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십니까? 환난과 시험을 만났을 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하나님, 우리 영혼을 기쁘게 하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죄와 죽음과 저주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벨기에 출신의 근육질 배우 쟝 끌로드 반담(Jean-Claude Camille Francois Van Varenburg)이 주연한 “서든 데쓰”(Sudden Death)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감동적입니다. 아버지, 누나와 함께 결승전이 열리고 있던 아이스하키 경기장을 찾은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라는 당부를 받습니다. 아버지는 심지어 경기장이 무너진다 할지라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통령과 그의 누나를 납치하여 감금하고 있는 테러리스트들과 아버지 사이에 긴박한 대결이 벌어지는 내내 자리를 지킵니다.
전광판이 폭파되고 관중들이 술렁이며 밖으로 대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킵니다. 결국 아수라장이 된 경기장의 텅 빈 관중석에는 아이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테러리스트들과의 혈전 끝에 부통령과 딸을 구하는 것에 성공한 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에게 달려오자, 마주 달려가 안긴 아이는 “난 아빠가 올 줄 믿었어. 그래서 무서워도 앉아 있었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아이로 하여금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자리를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물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사막에도, 여우같은 짐승들은 물론 뱀이나 개구리, 풍뎅이 같은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풍뎅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물을 구하는 모습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풍뎅이는 자기 등에 내린 이슬을 먹기 위해서 머리를 땅으로 최대한 낮춥니다. 그렇게 해서 등에 내린 이슬이 머리 쪽으로 흘러내리면 그것을 핥아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풍뎅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가져야할 낮은 자세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86편에는 “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무려 각각 서른 세 번, 네 번, 다섯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삶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심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환난과 시험의 때를 만나면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꿇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도우심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겸손히 자신의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리십시오. 모든 것을 믿고 맡기십시오. 환난과 시험의 때에는 지체지 말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십시오. 간절히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우리를 죄와 죽음과 저주와 환난과 시험에서 구원하실 하나님, 원수들을 부끄럽게 하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