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려는 운동으로, 근대 유럽문화의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우리의 정신과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이뤄냈지만, 특히 예술 분야에서 이룬 그들의 성취는 다른 무엇보다도 탁월하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벽면을 가득 채운 벽화나 역동적인 조각품 등 아름다운 미술 작품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네이버캐스트 스페셜>에서는 <네이버캐스트>에서 다룬 르네상스 시대 세 명의 화가 이야기를 모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르네상스의 천재 화가들, '르네상스 3대 거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년~1497년, 벽화(회벽에 유채와 템페라), 460x880cm,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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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재능과는 다른 말이다. 천재라는 말은 새로운 영역까지도 개척해야 얻을 수 있는 영광된 명칭이라면 다 빈치는 누구보다도 이 점에서 탁월했다.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해부학, 물리학, 광학, 군사학 등 다방면의 자연과학 영역에서 굵직한 발전을 이끌어낸 초인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에 대한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집요한 관찰력으로 새 영역을 열어나갔고, 새로운 지식을 창작활동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왕성한 호기심은 책임감을 크게 초과하였다. 그는 시작한 일을 대부분 끝내지 못한 채 다른 일로 넘어가곤 했다. 오늘날 일부 심리학자는 그를 주의력 결핍증 인간의 전형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작품 [모나리자]의 경우도 배경과 인물의 세부 등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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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 당시 밀라노에 입성해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을 그려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세나콜로]로 불리는 [최후의 만찬]에는 예수의 예언을 듣고 놀라는 12제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 [최후의 만찬]이 훼손이 심했던 것은 레오나르 다 빈치가 당시 유행했던 프레스코화 대신 다양한 용매를 이용하는 ‘템페라’ 기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 역시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는 큰 몫을 하게 된다. ... 밀라노에 들어서면 도심 곳곳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그는 ‘명품 도시’ 밀라노가 아끼는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과학기술 박물관에는 회화뿐 아니라 과학, 해부학, 지리학, 천문학 등에도 능했던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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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는 미술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말 그대로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쪽지 종이에 이런 저런 글과 스케치를 남겼다. 낱장의 그 종이들은 큰 것도 있었고 5-7센티미터 정도로 작은 것들도 있었다. 그는 이 쪽지 종이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글을 적어 넣었다. … 레오나르도가 쪽지 종이에 남긴 글과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그가 쪽지 종이에 남긴 그림들 중에는 오늘날의 낙하산, 비행기, 전차, 잠수함, 증기기관, 습도계에 해당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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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인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던 피렌체인들의 예술적 욕심 덕분에 결국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아마도 이 역사적 결투에서 레오나르도 쪽이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이 더 컸을 것이다. 1452년생 레오나르도는 당시 쉰을 넘긴 나이었고, 미켈란젤로는 1475년생으로 아직 20대였다. 이미 명성은 명성대로 얻은 관록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서른이 채 안 된 젊은 화가와 한 자리에서 기량을 겨뤄야 했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부담감이 아무래도 더 컸을 것이다. ... 그러나 양측 모두에게 부담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아쉽게도 스타들의 대격전은 최종 순간을 남겨 놓고 취소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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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중 '아담의 창조'] 1511년~1512년, 벽화(프레스코화), 바티칸 미술관 소장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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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위대한 작업 앞에서 우리는 경탄하기도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의 <다윗> <피에타>과 같은 조작 작품들과 바티칸 시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림을 보면 비록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 화보일지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더군다나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가 화가가 되어 붓을 들고 고개를 위로 쳐들고 천장에다 그림을 그리고 불멸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올려다보면서, 이 천재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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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율리오 2세와 나 미켈란젤로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불화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질투 때문이었다.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들은 교황을 속여 무덤을 세우는 계획을 중지하도록 시켰다. 라파엘로도 충분히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다. 왜냐하면 라파엘로가 미술에서 이룬 모든 것은 바로 나한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일흔 살을 내다 본 늙은 미켈란젤로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것이다. 라파엘로는 이미 20년 전에 죽었지만 미켈란젤로에게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여전히 고통스럽게 기억되고 있었다. 정말 라파엘로는 그의 고향 선배 브라만테와 함께 미켈란젤로를 파멸시키기 위해 교황 율리오 2세를 속였을까? 도대체 미켈란젤로는 무슨 근거로 라파엘로의 예술적 성과를 자신의 아류라고 주장하는 걸까?
캐스트 원문보기 : 오늘의미술 - 론다니니의 피에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주도한 불세출의 조각가이자 화가,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에게 역시 ‘피에타’는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되는 일종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거의 일 세기에 달하는 생애를 통해 여러 점의 ‘피에타’를 제작했으며 그에게 최초로 로마에서의 세속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작품이나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삶을 마감하기 며칠 전까지도 정과 끌을 놓지 못하고 매달렸던 최후의 작품 역시 ‘피에타’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미켈란젤로는 어지러운 시대를 살며 감내해야만 했던 한 천재의 인간적인 고독과 회한 그리고 영광의 상념들을 이 주제를 빌어 호소하고자 했 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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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Raffaello Santi, 1483~1520)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0~1511년, 프레스코 밑면 820cm, 바티칸 미술관 '서명실'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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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재 예술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유형의 천재이다. ‘예절 그 자체’여서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던 사교적인 성품은, 신비에 싸여 있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레오나르도나, 완고하고 고독한 격정의 소유자 미켈란젤로와 당대부터 비교가 되었다. ... 그림에 있어서도 그의 재능은 혁신보다는 종합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리 길지 않은 활동 기간에 만들어진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플랑드르 풍의 정교한 세부묘사와 단단한 윤곽선, 레오나르도 특유의 구도와 명암법, 미켈란젤로와 같은 영웅적 무게감을 가진 인물, 베네치아 미술의 특징인 빛과 색채의 효과를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접촉하는 모든 것을 흡수하여 이를 그만의 세련된 언어로 종합했다. 라파엘로의 작품은 혁명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신선했다. 이 온건한 고전주의자는 반항이나 비극 없이 새로움과 진전을 성취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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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적 정신을 완전히 구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고상하고 세련된 기존의 그의 작품과는 다르게 관람자를 압도하는 웅장함을 느낄수 있는 데 이는 이 벽화를 제작할 때 그가 브라만테의 도움으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정화를 보았기 때문이며 덕분에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표현력과 늠름한 육체나, 극적인 군상 구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동태나 자세의 표현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식에 동화시켜서 육신과 영혼, 동작과 감정의 조화있는 균형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이 대 집회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은 각각 훌륭하고 뚜렷하게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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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때로 대개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고귀한 재능과 무한한 부를 한 사람에게 모두 부여하는 관대함을 보이기도 하는데,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 산치오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1568년 조오르지오 바사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사열전에서 이와 같은 문구로 라파엘로의 전기를 시작했다. 예술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라파엘로는 고전의 신화를 소생시키고자하는 열망이 팽배했던 시대의 상징으로 페루지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화풍을 적절하게 흡수하여 르네상스의 미술을 완성단계로 이끌었다.
출처 -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