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의 난은 역대 반란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기적으로 지속되었고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중추부 영사 윤원형 등 당대 최고의 실권자가 모여서 황해도를 휩쓰는 도적떼를 없앨 대책을 세운 것이 1559년(명종 14년) 3월 27일이었다. 이후 관군에 의해 소탕된 것이 1562년(명종 17년) 1월 초였으니 무려 3년이 넘게 관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해도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3년 이상 지속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임꺽정의 난에 대해 [명종실록] 편찬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이다. 임꺽정을 흉악범으로 기록해 놓은 [명종실록]이지만, 사관(史官)은 그 본질을 읽고 있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무렵 조선사회는 동맥경화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른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였고 이 때의 왕이 명종(明宗)이었다.
실제 명종대의 진정한 대도는 임꺽정이 아니라 실권자였던 문정왕후의 혈육 윤원형(尹元衡)이었다.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이자 문정왕후의 동기간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임꺽정은 우연하게 출연한 도적이 아닌 것이다. 사실, 임꺽정이 활약했던 황해도 지역의 지방 관리들은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친정붙이들이었다. 임꺽정 난이 기록상 보이기 시작하는 1559년 황해도 지역은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지경이었다. 가난과 전염병으로 쪼들린 농민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아 다니다가 도적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