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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130강 (三十二. 婆珊婆演底主夜神 -- 第一歡喜地善知識)
ㅊ. 救八苦衆生
善男子야 一切衆生이 或病所纏이어나 或老所侵이어나 或苦貧窮이어나 或遭禍難이어나 或犯王法하야 臨當被刑에 無所依怙하야 生大怖畏어든 我皆救濟하야 使得安隱하고 復作是念호대 願我以法으로 普攝衆生하야 令其解脫一切煩惱와 生老病死와 憂悲苦患하며 近善知識하야 常行法施하고 勤行善業하야 速得如來淸淨法身하야 住於究竟無變易處라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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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지식은 이야기가 상당히 깁니다. 32번째인 바산바연주야신 선지식은 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구제하는 이야기를 죽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암야중생을 구제하다’라는 제목으로 캄캄한데서 헤매는 그런 중생들을 구하는 내용이었고, 그 앞에는 구부득중생, 무언가 구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얻어지지 아니할 때 그것도 인간의 큰 고통이라고 했지요.
명예를 구한다든지, 재산을 구한다든지 수명을 대개 아낀다든지, 직위를 구한다든지 아니면 남녀처첩 온갖 마음에 구하는 바가 있는데 구해지지 아니하면 그것도 큰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로 인해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그런 내용이 있었었습니다.
여기는 제목이 구팔고중생(救八苦衆生)이라고 그랬어요. 팔고(八苦), 여덟 가지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다고 그랬는데 대개 팔고는 생노병사와 저 앞에 한 번 나왔던 구부득고, 그리고 오음성고, 애별리고, 원증회고를 말합니다.
생노병사는 기본적인 고통이고 구하는데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입니다. 그래서 경전의 말씀에 유구개고(有求皆苦) 무구개락(無求皆樂)이라 그랬어요. 구하는 게 있으면 다 고통스럽게 되어 있어요. 마음의 고통은 구하는 것이 있어서 고통스럽지요.
무구개락이라, 구하는 것이 없으면 편안하다고 그랬어요. 아주 지당한 말씀이에요. 사람들은 자꾸 뭔가 더 더 구하려고 하는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많이 앓지요.
세상살이가 어디 그러냐, 남들은 다 그렇게 사는데 나 혼자만 쳐져 있어서 되겠느냐고 자기 변명도 하고 그러는데 무구(無求)는 뒤떨어진 게 아니고 사실은 앞서 가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이 다 그 길로 가더라도 그런 것을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라 생각한다면 아주 차원이 높지요.
다른 사람들보다 훌쩍 뛰어넘은 높은 이치에서 사는 그런 안목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소신이 없으니까 남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자꾸 합니다.
구하는 게 없이 편안하게 살면서 거기에 대한 자기의 확신이 서면 틀림없이 좋아요. 확신이 안 서면 그건 아직도 그 경지에 못 이른 거지만 그 경지에 이르고 확신이 선 사람이라면 제일 좋은 거예요.
팔고라고 하는 것은 생로병사, 그리고 유구개고유구개고(有求皆苦)인 구부득고(求不得苦), 그 다음 오음성고라고 해서 우리 육신이 너무 왕성한 어떤 힘을 가졌다든지 왕성한 세력이 있을 때 그게 또 일종의 고통입니다.
그 다음에 애별리고는 애착이 가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또는 자기 자식 사이라든지 형제사이라든지 서로 오랫동안 뗄 수 없는 애착이 있는 사람과 잠깐 헤어지는 고통입니다.
군에 가는 것도 그렇잖아요. 잠깐 헤어졌다가 틀림없이 더 성장해서 돌아오고, 어른이 되어서 돌아오는데도 가면 고생한다 하고 어찌 너하고 떨어져서 사느냐고 하며 온갖 걱정을 합니다. 그런 소견은 참 좁지요.
그것을 못 견뎌 하니까 그것이 또 고통이 되는 거지요.
애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있는 고통이지요.
영원히 헤어지게 되면 누군들 고통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영원히 헤어지는 것 말고도 잠깐 떨어져 있는 것도 못 참아 한다고요.
사실 가만히 보면 당연히 헤어지는 것, 그런 아픔으로 헤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든 고통이지요. 서장에 보면 도를 이룬 사람도 말하자면 자식을 잃고 나서 크게 고통스러워했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읽어 보니까 당신의 다섯째 아들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는데 참 점잖은 표현이지요. 죽었다는 표현은 잘 안 쓰지요. 병으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얼마나 슬프냐는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슬플 때는 슬퍼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더라도 제대로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정신없이 헤매거나 그러지 않고 잠깐 슬퍼하고는 툴툴 털고 일어난다는 거지요. 그게 이제 보통 중생과 다른 거지요. 보통 중생들과 그런 이치를 깨달은 사람하고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 불자들은 제대로 깨달으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자꾸 이런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 버릇하면 그게 어느 정도는 자기 살림이 돼요.
그리고 원증회고는 싫은 사람하고 같이 앉아 있는 고통이지요. 싫은 사람을 만나는 그것도 보통 고통이 아니지요. 안 만날 수 있으면 안 만나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요. 가능하면 안 만나겠지만 안 만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살다보면 또 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만나는데 만나면 또 괴로움이지요.
그래서 그 네 가지하고 생로병사하고를 합해서 여덟 가지 고통이라고 합니다.
사고(四苦)는 기본 생노병사를 뜻하는 것이고 팔고(八苦)는 사고(四苦)와 뒤에 나온 네 가지 고통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를 더해서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하지요.
그런 내용들이 이 단락에 포함되어 있는 거지요.
ㅊ. 구팔고중생(救八苦衆生)
선남자(善男子)야 일체중생(一切衆生)이 혹병소전(或病所纏)이어나 혹로소침(或老所侵)이어나 혹고빈궁(或苦貧窮)이어나 혹조화난(或遭禍難)이어나 혹범왕법(或犯王法)하야 임당피형(臨當被刑)에
선남자(善男子)야 일체중생(一切衆生)이 혹병소전(或病所纏)이어나, 선남자야 일체중생이 병으로 얽힌 바가 되었거나
혹로소침(或老所侵)이어나, 늙음이 자꾸 오거나
한 걸음 한 걸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 고 이야기 하지요. 대충 보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지만 자세히 보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거예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게 아니라 지난 시간하고 이 시간하고 또 다른 겁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이 모여서 어제 오늘이 되고, 어제 오늘이 모여서 지난 달과 이 달이 되고, 한 달 한 달이 또 모여서 작년이 되고 금년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걸 세분화 해 놓고 보면 사실은 일초 일초입니다. 일초 일초가 다르다고요. 작년보다 금년이 조금 낫다고 해도 그게 나아서 나은 게 아니라고요.
어쩌다가 잠깐 그렇게 나을 뿐이지 전체적으로는 어디가 기울어 가도 기울어 가게 되어 있는 그것이 혹로소침(或老所侵)이라, 늙음이 침범하는 바가 된다는 거지요. 늙어 가는 거, 이건 뭐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 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이 그래요.
혹고빈궁(或苦貧窮)이어나, 빈궁의 고통. 고의 빈궁이라 그랬는데 가난한 것이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리는 대개 이야기 하는데 이건 상대적인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난,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때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먹고 입고 자는 것, 셋방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것마저 안 되는 그런 절대적인 빈곤은 참으로 큰 고통입니다.
그 외에 상대적인 고통, 저 집은 50평에 사는데 나는 30평뿐이라고 하는 그런 고통은 이야기 거리가 안 돼요. 그것은 어리석어서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지요.
절대적인 빈궁이란 것은 그런 것입니다. 기본적인 의식주마저 위협받는 그런 것을 말하지요.
혹조화난(或遭禍難)이어나, 어떤 재앙을 만나거나
혹범왕법(或犯王法)하야 임당피형(臨當被刑)에, 왕법을 범하여 형을 당하는데 임함에,
국법을 왕법이라 합니다. 옛날에는 국법이라 하지 않았지요. 왕이 세운 법이니까 왕법이라 했습니다. 왕이 이래라 저래라 하면 무조건 법이 되고 왕이 좌지우지 했으니까 왕법이라고 한 거지요.
왕법을 범해서 구류를 산다든지 매를 맞는다든지 아니면 사형을 당해야 하는 그런 것들, 형을 당하는데 임함에
무소의호(無所依怙)하야 생대포외(生大怖畏)어든 아개구제(我皆救濟)하야 속득안은(使得安隱)하고 부작시념(復作是念)호대 원아이법(願我以法)으로 보섭중생(普攝衆生)하야 영기해탈일체번뇌(令其解脫一切煩惱)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환(憂悲苦患)하며
무소의호(無所依怙)하야, 의지할 바가 없어,
뭐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배경이라도 든든하면 거기에 가서 사정이라도 해보겠지만 그게 안 되니까 그런 의지할 데가 없으면 그것도 참 큰 문제이지요. 의호할 바가 없어서
생대포외(生大怖畏)어든, 큰 두려움을 내게 된다.
그럴 경우 바산바연주야신이
아개구제(我皆救濟)하야 사득안은(使得安隱)하고, 내가 그런 이들을 모두 다 구제해서 그런 이들을 편안하도록 하고
부작시념(復作是念)호대, 다시 생각을 짓되
일단 이것은 우리 불교하고는 관계없이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받는 그런 고통을 겪을 때, 그런 사람들에게 부처님이 어떻고 하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지요.
고통을 받으면 먼저 그 고통부터 해결해야지 아주 절대적인 그런 고통에는 부처님 말씀이고 뭐고 안 들어가요. 일단 그 고통을 좀 면하게 한 다음에 그때 말하자면 어떤 이치, 진리, 부처님 법을 가지고소 보섭중생(普攝衆生)이라 그랬어요.
원아이법(願我以法)으로 보섭중생(普攝衆生)하야, 원컨대 내가 이 법으로서, 부처님 가르침을 가지고서 널리 이 중생들을 포섭하여
영기해탈일체번뇌(令其解脫一切煩惱)와, 일체 번뇌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아까 말한 기본 고통인 사고(四苦)
우비고환(憂悲苦患)하며, 이것도 이제 근심스러운 것, 슬픈 것, 고통스러운 것, 또 여기에 근심 우(憂)자, 근심 환(患)자가 나오는데 끝에 환자는 환란 같은 것이지요. 그런 어떤 재앙 같은 것이 환(患)이고 앞의 우(憂)는 어떤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우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에게서 해탈케 한다는 것이지요.
법으로써 중생을 포섭해 가지고 일체 번뇌, 생로병사, 우비고환을 전부 벗어나도록 한다고 했는데 말하자면 이 구절이 중요해요.
원아이법(願我以法)으로 보섭중생(普攝衆生)하야 영기해탈일체번뇌(令其解脫一切煩惱)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환(憂悲苦患)한다.
이 불법을 가지고 우리가 부처님께 자꾸 절도 하고 기도도 하고 걸핏하면 부처님 부처님 하기도 하고, 경전을 가지고 이야기도 하지요.
편안할 때는 그저 부처님 세계 속에서 살지요. 그러면서 정작 생로병사 우비고환 일체번뇌 이런 것들이 일어날 때는 그런 믿음과 불법을 가지고는 그게 대처가 안 된다고요. 사실은 대처가 되어야 하거든요.
그것이 간단하게 대처가 쉽게 되겠습니까마는 간단하지는 않더라도 그런대로 불법으로써 대처하려고 해야 됩니다.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게 이제 불법을 공부한 사람과 공부하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점입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불법을 통해서 해결해야지요. 관세음보살을 불러서 그 고통을 잊어버리던지 아니면 반야심경이라도 한 편 읽어서 반야심경에 담겨 있는 이치를 가지고 그 이치를 깨달아서 해결을 하던지, 아니면 연기의 도리를 가지고 하던지, 아니면 어떤 자비나 이런 불교의 낱말 하나를 가지고라도 하던지, 그런 것이 다 일종의 약방문이니까 대처를 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이 필요한 겁니다.
법으로써 중생을 포섭하여 라고 했는데 우선은 내 중생이지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우선은 나부터, 내 중생부터 포섭을 해 가지고 내가 지금 앓고 있는 일체번뇌, 생노병사, 우비고환까지도 불법을 가지고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가 있는 게 불법을 가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얼핏 생각에 대개의 사람들은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한테 매달려 가지고 내가 그것을 이루어 내도록, 획득하도록 내 욕심을 채우도록 이렇게 해서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참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께 매달려서 그분들이 내 말을 들어주도록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해결하는 게 있다고요. 그것이 기도인데 그렇게 해서 되면 좋지만은 대개 보니까 되는 거 반, 안 되는 거 반, 그래요. 되는 사람 반반, 안 되는 사람 반반, 어째서 안 되고 어째서 되는지 그건 알 수는 없어요.
그런데 법으로써 이런 것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이 말은 그게 아니에요.
그 분들에게 매달려서 그 분들의 힘을 빌어서 내가 되게 한다는 것은 이건 뭐 관세음보살님이 언제까지나 계속 나만 지켜줄 수도 없는 거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면서 문제가 어디 한 두 개라야 말이지요. 작년은 작년대로 문제가 있고 금년은 금년대로 문제가 있고, 지난달에도 문제가 있고 이 달에도 문제가 있고, 어떨 때는 문제가 두 가지, 세 가지 한꺼번에 터질 때도 있지요. 병도 두세 가지 한꺼번에 앓을 때도 있다고요.
어떻게 해요, 관세음보살님이 그 일을 어떻게 다 감당하라고요. 많은 중생들의 고통을 다 들어주셔야 할 판인데요.
기도를 아주 지극히 해 가지고 정말 자기 자신의 기도하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버리면 사실 이건 뭐 간단해요, 삼매에 들 정도로 기도가 지극정성 되면 그건 벌써 관세음보살도 필요 없는 그런 경지입니다.
내가 관세음보살을 도와줘야 할 그런 경지가 되어버린다고요.
정말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삼매에 든다면 “관세음보살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된다고요.
그런 상황이 되어야 이게 기도를 제대로 하는 겁니다. 그건 이 산만한 중생에게 기대하기가 참 어려운 겁니다. 참으로 어려운 거예요.
전설상에 이야기 되고 있는 영험록 같은 것은 대개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기도를 아주 지극정성 했더니 꿈에 관세음보살이 칼을 들고 와서 골을 쪼개고 그 속에 있는 검은 걸 하나 꺼내가더라, 그래서 자고 나니 거뜬히 나았더라는 이런 영험록이 있잖아요, 그건 어떤 삼매에 이를 정도로 기도를 지극하게 한 상태입니다. 그 정도이면 그 사람은 오히려 관세음보살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여기서 ‘이 법으로’라고 하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져 있어요.
우리가 기도를 해서 잊어버린다든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힘이 생긴다든지 아니면 관세음보살이 정말 와서 도와준다든지, 아니면 이치를 알아서 벗어난다든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80세, 90세를 살다 돌아가셨다고 하면 참 호상이라고 하지요.
대만을 가니까 장례식을 이렇게 해요, 요즘은 그런 차가 드문데 조그마한 짐차, 트럭이 있어요. 거기에 마이크 장치를 해 가지고 가수가 한 사람씩 탑니다. 그런 차를 수백 대씩 동원하는 그런 장례식도 있어요. 보통은 수십 대씩 동원을 하고요.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두 대씩은 동원해서 장례식을 치러요.
쭈욱 가면서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장례를 치릅니다. 그 사람들이 뭘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렇게 장례를 치르더라고요.
또 우리가 익히 아는 장자도 자기 부인이 죽었을 때 노래 부르고 장구치고 놀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꼭 그 순간에 장구치고 놀고 싶어서 놀았겠습니까. 그런 행위를 통해서 모든 것이 세상의 이치대로 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자기 부인이 죽었는데 장구치고 춤추고 논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에요. 왜 춤을 추고 노래 부를 수밖에 없었는가. 세상의 이치대로 되었으니까요.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갔으니까요.
내 기준의 순리가 아니에요. 그건 그 사람 기준의 순리가 있다고요.
내 개인의 기준 같으면 수 만년을 살아도 한이 안 차지요. 그게 아니거든요. 절대 그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이치를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 장자 같은 사람들은 그런 어떤 행위를 보였고, 대만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지 몰라도 어쨌든 그렇게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장례 행렬을 그렇게 하더라고요.
가까운 친척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를테면 그런 이치를 알아 가지고 모든 것을 어떤 자연의 이치와 똑같이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수용할 수 있으면 그게 말하자면 원아이법(願我以法)으로, 내가 법으로써 중생을 널리 포섭을 해서 일체번뇌와 생로병사와 우비고환으로부터 해탈시켜 준다, 그렇게 하는 이치라고도 또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들이 군에 가게 되면, ‘아, 그래 군에 갈 나이가 됐고 국방의 의무니까 가서 견문도 좀 넓히고 오너라. 집에서 편안하게 살았으니까 교육도 받고 얼굴도 시커멓게 타고 근육도 좀 우락부락 생겨서 오너라, 잘 됐다.’ 얼마든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뭘 안 갈 데 가는 것처럼 어떻게 해서라도 후방으로 보내려고 한다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고생 안 시키려고 하지요. 그리고는 고생할거라 생각하고 울고불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니까 법으로써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이치입니다.
법(法)이 뭡니까? 물 수(水) 갈 거(去) 아닙니까? 물은 낮은 데로 흘러가고 트여 있는 데로 흘러가고 막힌 곳에는 멈춰 있다가 또 차게 되면 저절로 넘어 갑니다.
참 옛날 사람들은 글자 하나를 만들어도 제대로 만들었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을 때 이런 경우를 차분하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 동안 돈도 참 많이 갖다 줬는데 이렇게 믿는 불법을 가지고 이럴 때 한 번 효용의 가치를 발휘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당연히 해야 해요. 매달려서 해결을 하려면 제대로 매달려서
내가 고통을 앓고 있는 것조차도 잊고서 삼매에 들던지요.
근선지식(近善知識)하야 상행법시(常行法施)하고 근행선업(勤行善業)하야 속득여래청정법신(速得如來淸淨法身)하야 주어구경무변역처(住於究竟無變易處)라호라
근선지식(近善知識)하야 상행법시(常行法施)하고, 선지식을 가까이해서 항상 법의 보시를 행하라.
제대로 된 선지식은 항상 법을 보시하라고 하지요. 보시 중에는 법보시가 제일이라는 보현행원품의 이야기처럼 이치를 제대로 꿰뚫어 알면 기쁠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고 그래요.
근행선업(勤行善業)하야 속득여래청정법신(速得如來淸淨法身)하야, 부지런히 선업을 행해서 빨리 여래의 청정법신을 얻어서
주어구경무변역처(住於究竟無變易處)라호라, 결국에 가서는 변역이 없는 그런 곳에 머물게 한다, 이것도 사실은 아주 깊은 뜻이 있어요.
주어구경무변역처(住於究竟無變易處), 결국에 가서는 변역이 없는 그 곳에 이른다.
우리 마음이 한 시간 동안에도 수많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더라도 그 마음의 본바탕은 그대로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져도 그 본바탕은 그대로 이지요.
또 바닷가에 가서 물결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봐요, 수없이 물결이 치지만 결국은 제자리입니다. 바다는 항상 제 자리에 있다고요. 바람이 부는 데 따라 물결이 수없이 치다가도 결국은 그냥 물일뿐이라고요. 아무리 물결쳐봐야 그렇다고요.
바다의 물결은 비유이고, 우리 마음이 그렇고 우리 삶의 현상들도 그렇습니다.
온갖 희로애락과 성공과 실패와 그런 것들을 참 많이 겪고, 좋고 나쁘고, 나쁘고 좋고 이런 것을 겪는데 결국은 공으로 돌아갑니다.
끝내는 공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 공 자리가 변역이 없는 자리입니다. 변함이 없는 자리라고요. 하늘에 온갖 구름이 일고 비가 오고 폭풍이 몰아치고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해도 그런대로 항상 그 하늘이듯이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만 거기에 팔려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니고 요동을 치게 되면 그만 고통을 받는 것이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인생이라는 것은 쉼 없이 흘러가는 한 과정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별것 아닌거예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이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별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자세, 편안한 마음자세가 구경무변역처(究竟無變易處) 라고 볼 수가 있겠지요.
첫댓글 121강
130강까지 녹취 회향 올립니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카페 염화실에 감사드립니다. ()()() 
고맙습니다. () ^^_
일목요연하게 화엄의 세계를 펼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_()()()_
변함이 없는 자리 공, 희미하게나마 느껴봅니다. ()()()
근선지식(近善知識)하야 상행법시(常行法施)하고, 선지식을 가까이해서 항상 법의 보시를 행하라. _()()()_
住於究竟無變易處.... 고맙습니다. _()()()_
편안한 마음자세가 구경무변역처(究竟無變易處), 늘 멀리서만 찾는 나쁜 버릇을 고쳐야겠습니다. ()()()
婆珊婆演底主夜神
_()()()_
원아이법(願我以法)으로 보섭중생(普攝衆生)하야 영기해탈일체번뇌(令其解脫一切煩惱)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환(憂悲苦患)한다...고맙습니다._()()()_
불법이 좋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써 뭔가가 불교적으로 달라져야겠지요. 오늘 말씀도 감사히 잘 읽습니다.()()()
유구개고 무구개락,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_()_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
近善知識하야 常行法施하고....연보리 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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願我以佛法 普攝衆生 편안할 때는 그저 부처님 세계 속에서 살지요. 그러면서 정작 생로병사 우비고환 일체번뇌 이런 것들이 일어날 때는 그런 믿음과 불법을 가지고는 그게 대처가 안 된다고요. 사실은 대처가 되어야 하거든요. 그것이 간단하게 대처가 쉽게 되겠습니까마는 간단하지는 않더라도 그런대로 불법으로써 대처하려고 해야 됩니다.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생로병사 ,우비고환,일체 번뇌를 부처님법으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일체 고뇌,번뇌를 불법의 이치를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관세음 보살에게 매달리기만 할 것이 아니고.
나무 입법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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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것은 쉼 없이 흘러가는 한 과정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별것 아닌거예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이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별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자세, 편안한 마음자세가 구경무변역처(究竟無變易處) 라고 볼 수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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