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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녀의 미소 원문보기 글쓴이: 베스
가슴은, 강아지풀 뽀얀 솜털 올라오는 사월의 춘풍처럼, 연 보랏빛 등불로 타 올라온다.
아아 향숙이.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니 안했을까.
미스 대전 眞으로 뽑혀 호리 날렵한 몸매는 물론 흑갈색의 눈엔 초 겨울 서리가 낀듯 서늘한 눈매로 날 응시했었다.
" 숙이 눈 감아봐."
" 왜그래 오빠 "
향숙인 눈을 감는다.
그래도 내겐 반쯤 감는 것 같다.
딛고 있는 지구가 온통 향숙이로 원을 그렸을만큼 열병을 앓던 내게 그녀의 눈은 너무 크고 아름다웠다.
성악도의 꿈을 갖고 있던 난 바리톤으로 (뷰티풀 브라운 아이즈)를 불렀다.
" 노래 너무 달콤하다. 오빠 마치 비스켓처럼 부드러워!"
흰 쉬퐁 원피스에 물빛 물방울 무늬가 부채살처럼 뱅그르르 펴지며 각선미가 눈부셨다.
눈부신게 어디 그뿐이랴.그리스 조각처럼 오똑한 콧날,흩날리는 복사꽃잎사귀처럼 사르르 녹는 크림빛의 그녀 피부...이미 장년인 그즈음에 내게 처음 찾아온 사춘기였다.
사내에서의 점심시간 짜투리를 이용해 음악 써클에서 난 오직 향숙일 보기위해서 점심은 먹는둥 마는둥 거울 앞에서 삼십분은 외모 가꾸기에 열을 올려야만했다.
브이넥 조끼에 타탄 남방에 미니스커프에 강렬한 포인트의 펜던트까지...
그럴 수밖에없는것이 그녀는 미인대회 출신에다가 회사 홍보차 뽑힌, 말하자면 사내 마스코트 역할이었다.
내 외 비즈니스는 물론 사장실 비서총책으로 광빨(?)이 대단했다.나도 말론 브란도의 지적 콧날과 거친듯 비트는 반항적인 입매...어디가나 눈을 반쯤 감고 걸어도 반경 십미터안에 들어와 알른대는 청순녀들은 많았다. 그때 내가 단지 숙이의 외모때문에 끌렸을까.
나를 어지럽게 팽팽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게하는 패랭이꽃향기의 웃음?
아냐.그래선 안돼 말초감각에의한 사랑? 그건 내 자존감의 문제야.뭔가 운명적여야 해! 신의 섭리 아님 신의 계시가 있어야만 해! 이십살도 훨씬 넘은 청년기에 확실히 사춘기적 발상이었다
.짧은 점심시간 분수가 뽑혀져 올라가는 회사 정원에 우리 음악써클은 빙 둘러앉아 합창을 했다
.통키타 하나 메고...즐거웠다.
홍장미 백장미 황장미 흑장미, 그뿐 아니라 연핑크 연보라 연하늘 연연두 무지게빛 장미가 향숙이가 있음으로하여 모두 피어나 나를 황홀하게하였다.
" 으으음~ ~ ~ 마지막 한가지 못그린것은 지금도 알수없는 당신의 마으음~ ~ "
가수 임희숙이 부른 '당신의 마음'을 합창할즈음엔 난 절망했다.
장미꽃밭으로 만든 정원에서 우리는 음악이라는 매개체로 하여 써클을 만들어 하루에 한번씩 만날 수 있었다.
가시가 있어 장미가 매혹적이었을까.
일방적인 내 구애에 향숙인 매번 쓸쓸한 미소만 지을뿐 말이없다.
아직은 때가 아니예요.전 수사의 길을 가고 싶어요.
아니 수사의 길이라니, 향숙이가 뭐가 부족해서 수녀가 되겠다는거야!
정말 기막혔다.
내가 모르는 연인이라도 있담 모를까. 종교에 귀의하겠다니! 그렇담 싸워서 쟁취할수도 없는거잖아!
대상이 대상이니만큼 어쩔도리가 없잖아.향숙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한.
" 부족해서 수사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예요. 하나님은 제 모든 에너지예요.잠자고 밥먹고 웃고 울고 모든 희노애락이 그분한테서 나오니까요."
마법의 가시에 찔린양 난 숙이에게 그 선언을 듣던 밤 창호지가 물에 젖어 내릴만큼 통곡했다.
숙이의 가슴 한켠이라도 차지하고 싶었다.
하릴없이 성경공부한답시고, 성가대에 참석하기도 했고 숙이의 그림자마냥 쫓아 다녔다.
은빛 십자가 아래 나는 맹세도 하였다.
숙이가 수녀의 길로 가면 나 역시 신부가 돼야한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한 열정 같지만 그땐 내 삶의 지대한 목표였다.
어느날 나는 대전의 한밭식당에서 설렁탕을 먹으면서 씩 웃었다.
숙이는 아기 손바닥만한 이집 깍두기가 맛이 있다면서 설렁탕을 좋아했다.
분위기로 봐선 고급 경양식 분위기였지만 봉급쟁이 내 재정을 생각해주는 사려깊음까지도 가끔 나를 감동시켰다.
가지런한 이를 활짝 내놓고 또한번 씩 웃으며(가장 인간적인 뉘앙스가 보인다하여)접근 하였다.
"숙이. 이제보니 우리가 입사한지 삼년이 넘었는데 한번도 계룡산에 가보지 않았네!."
"아이참 오빠도.... 우리 둘이 산에 가면 사람들이 뭐라 그렇겠어요."
"참 꿈도 야무지지 누가 단둘이 갈까봐. 나도 겁나요! 하하핫 장가길 막힐까봐!"
" 호호홋 난 시집 길 막힐까봐.덤프 트럭이라도 끌고 가며 길 닦으면서 가야겠어요.호홋 "
그후 사내 산악회원 열 두어명과 같이 계룡산 등산에 숙이와 나도 같이 가기로 했다.
가을이건만 한낮의 햇빛은 거울을 쨍하고 깨트릴만큼 최상이었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타서 들떠있었다. 나는 청바지에 겨자색 점퍼 차림, 백 미니스카프를 열어놓은 창 바람에 나비처럼 날리고 있는 향숙을 먼 치에서 바라보았다.
" 생가악 나안다아~ 그으 오오솔기일~ 그대에 가아 마안들어 준 꾜옻반지 끼고오
~ "
당시에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가수 은희의 노래를 우리들은 목청이 터져라 불러젖혔다.
너나 할것없이 회사 생활에 얽매여서 답답했던 마음을 창공에 훌훌 털어내버리고싶었다.
전세 낸 관광버스가 비 포장도로에 들어서자 이리 비뚤 저리 비뚤 취객처럼 흐느적 거리며 유성을 지났다.
황톳 길에 먼지가 꼬리를 달고 창으로 휙휙 들어와 누군가 부르는 휘파람소리를 날려보낸다.
군용트럭이 연 달아 행진하고 있다.
가까운 장병 휴양소는 있었지만 그쪽 방향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우리가 소리쳐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었을까.
묵묵부답. 정 자세로 꽉 다문 입.
나도 거쳐왔다..
삼년동안의 군 생활. 그 뜨거운 생채기를... 나는 매일 죽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살고 싶었다.
딸만 일곱에 아들하나였던 우리집 장손이었던 내가 군에 간다했을때 특히 어머닌 펄펄 뛰었다.
동네 누구네 아들도 쌀 열가마니주고 군 입대에서 뺐는데 네가 왜 가느냐.
삼대 독자인 네가 가서는 절대 안된다.
우리가 아무네보다 돈이 없냐. 빽이 없냐. 너 하나쯤 빠져도 나라 끄떡 없다.
나 심장병 도지는 꼴 볼려고 그러느냐.
아닌게 아니라 그길로 어머니는 커단 수건을 이마에 올려놓고 끙끙 앓으셨다.
하루는 작은 누나를 짝 사랑하는 헌병장교가 나를 불렀다.
한정식 집에서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도 먹고 갔다는 유명한 음식답게 여러 음식들이시간대별로 줄줄이 차려졌다.
장교가 많은 음식중에서 탕평채에 얹혀먹는 단순한 간장을 가리켰다.
" 지석아! 이 간장 한번 맛좀 봐라. "
나는 의아했다.
갖가지 화려한 음식중에 하필 초라해보이는 간장을 맛보라니...
그것도 간장 게장이라면 몰라도....
참기름을 넣어서인지 고소한 기름 냄새뿐 별로였다.
" 형도 참! 짠 간장맛 뿐이구만! "
난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 그거야. 너는 부잣집 외 아들로 커서 잘 모를거야. 군에서 음식 중에 이 간장맛만 같은 음식이라면 밥 한그릇 뚝딱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는 군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거다.아니 군 생활 못해! 내가 장담하지! "
그 장교는 나를 군에서 빼줌으로서 작은 누나에게 점수를 딸려했는지 군 입대를 극구 만류했다
작은 누나 맘은 알지도 못한채.
한 일 협정 반대! 일본에 굴욕적 외교 반대!
삼분의 일도 못 되는 대학생활.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 흘리며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데모하느라 여기 저기 날뛰다 딱 따닥 닥달나무 곤봉으로 머릿통을 얻어 맞을 땐 허공에서 별 세네개가 부딪히면서 쓰러지며 닭장차에 실려 경찰서에 끌려갔다.
" 이눔의 자석들!! 허라는 공부는 안허고오. 늙은 부모는 뼈 빠지게 농사지어 소 팔어서 등록금대면.
공부나 착실히 해야지. 느그들 지금 모허는 짓이여! 자아. 일찍 빠져나갈라면 어서들 불엇!
데모 주동자가 누구엿! "
나는 비뜰어진 입가에 츱츱한 미소를 지으며 아래 위를 물뱀이 흘러가듯이 만져가는 형사의 눈빛에
침을 카악 뱉었다.
침은 불행히도 경찰서 잿빛 시멘트 바닥에 나뒹겨 붙었다.
" 얏! 이 개 썅노무 새끼! 어디서 침 튀겨. 죽을라꼬 쌕 쓰네. 이놈아아 네 날 째려보면 우짤낀데.
앙! 눈 꾸녁을 콱 쑤셔버릴까부다. "
갖은 모욕과 욕지거리를 바가지로 뒤집어쓰고 손가락 사이에 괴목으로 만든 도장을 끼어놓고 머리통을 딱딱 맞을땐 이를 악물고 신음을 씹어 삼켰다.
" 이노무 자식 독종 아이가!! "
한참 후에 아는 형의 신분보장을 받은 후에야 경찰서에서 풀려 날 수 있었다.
그래도 하늘은 파랬다. 그 잘난 민주 경찰복장도 파랬었다.
어찌 그제서야 알았을까.
희망과 소망과 꿈을 상징하며 그려왔던 하늘색.... 그 안에는 민주화를 위해 절규하는 청년들을
무차별로 쳐 밟았던 민주 경찰 복장의 색갈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불의를 외치며 이리 치닺고 저리 치닺고 학원내에서 거리에서 표효했을때 보다 나은 학점을 위해서. 취직 시험을 위해서. 강건너 불 보듯이 도서관에 꿈적않고 책과 씨름하는 학생 그들도 매운 최루가스땜에 줄창 쓰고 다니던 마스크- 그것도 파란색이었다.
나는 육군 현역으로 입대했다.
남들 다 가는 군대라서 입대했기보다는 국내 정세 돌아가는 형색이 가슴이 답답하고 무엇하나 속 시원히 돼가는 것이 없었다.
입대해서 월남에 자원하고 싶었다.
참전해서.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 서 있고 싶었다.
고등학교 교정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는 일행들과 같이 논산행 입영열차에 올라탔다.
그때부터 군기가 빠졌다면서 기합이 시작되었다.
험악한 분위기. 사회에서 때(?)묻은 몸과 정신을 깨끗이 청소해주겠다는 호송 대원의
쭉 찢어진 부릅뜬 눈. 우리 예비 훈련병들은 기가 땅속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나는 차라리 주위 사람들 권유대로 군 입대를 후회하고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인격적인 모욕과 치욕 그리고 더 참을 수 없는 모멸감....
전쟁을 대비한 혹독한 훈련이었다.
얼마간은 밥이 입맛에 맞지 않아 굶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드물게는 밥이 맛있어 죽겠다는 듯이 식판을 싹싹 핥아먹는 훈병도 있었다.
" 야! 비탈! (강원도 출신에게 산 비탈이 많다하여 줄여서 하는 속어) 참 많이도 맛있겠다. 너 꿀꿀이냐! "
" 옛! 집에서 먹는 감자 밥보다 맛 좋습니닷! "
강원도 출신이라고 다 그럴까마는 그때도 옥수수와 감자, 잡곡밥에 질린 훈병들은 맛있는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는듯 헐쩍(?)대며 먹는 모습이 내게는 생소했다.
특식이라도 나온 날에는 우리들은 더욱 고역이었다.
소가 장화 신고 건너갔는지 멀건 된장국에 쇠 기름이 둥둥 떠 다니고 거기에다 돈지를 듬뿍 풀었다.
그래도 고깃국은 고깃국이었다.
식판에 굳 기름이 쩔어 설거지하기만 힘들었다.
그래도 우린 힘껏 외친다.
정량 육백그람 먹었습니다.
아침 여섯시 기상! 새벽 네시 교대 보초 끝나고 한숨 막 잠들려는 참에 기상이라니!
나 혼자만의 고생이 아닌 단체생활이었지만 나는 가족사진을 끌어안고 인내심을 시험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탈영을 꿈 꿔보기도 했다.
집에 가면 땀과 체취에 찌들어 퀘퀘한 냄새나는 군복을 훨훨 벗어버리고 시원하게 샤워하고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모시옷으로 갈아입고 대청마루에 댓자로 누워 한숨 잠자는 꿈이었다.
상상만으로 위로가 돠는 꿈을 위해 제대 날자만을 하루 하루 기다렸었다.
그 당시에 시간이 가면 누구나에게 똑같이 제대일은 다가왔다.
누구나에게나 똑같이란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 규범속에 나는 특별하게 선택된 날자인양 정말로 머리가 쥐어 터질듯 제대 날짜를 하루하루 땡겨갔던것이다.
지구를 한바퀴 한바퀴 초인의 힘을 발휘하듯 내앞으로 끌어다 놓는 심정이었다.
" 그런말 말어. 우리 아들 제발 군대라도 갖다 왔슴 좋겠어. 아 장가를 갈 수가 있어야지 "
지체 장애를 가진 부모의 마음에 비하면야 사지 육신 멀쩡해갖고 남들도 다 갖다오는 군대 내가 뭣이 모자라 못 견디랴 오기로 버텨온 삼십육개월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하면 못 이룰것이없다라는 말도 있듯이 영광(?)의 제댓날은 마침내 돌아왔다.
그길로 청운의 꿈을 품고 취업에 성공.
그리고 직장에서 향숙이를 만났다.
인적 끊긴 동학사의 밤. 가을 하늘의 별은 뜨악하니 하나 둘 서먹하니 자라고 있었다.
산 계곡사이에 빨랫터같이 넓적한 바위에 나는 잠바를 벗어 옆에 향숙일 앉혔다.
다들 그렇지 않는가. 먼지 묻은 벤치위에(사실 먼지도 없을것 같은데도) 입으로 후훗 기사도라도 발휘하는 양 먼지를 불어내고 베지색 트렌치 코트를 쫘악 펼쳐 놓고 님이시여. 사뿐히 앉으소서하며... 나도 그랬다.
일행들은 방하나를 차지하고 민속놀이(?) 삼매경에 빠져 숙이와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관심조차없었다.
밤 안개가 연기처럼 피어 흘렀다.
싸리나무 잎사귀 새로 달이 멀어 보인다.
스스슷 스으스
나무마다 소리를 내어 소리를 가로막는지 갑자기 벙어리가 된듯 나는 꼼짝을 못한다.
가까이 또르르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적막을 깬다.
" 숙이 내 할말 있는데. "
향숙인 흰 부라우스위로 목을 쭉 뽑아 올린다. 마치 기린처럼.
웃는다. 거북 등짝처럼 널부러진 바위가 초가라도 된양 박꽃처럼 웃어 제친다.
" 참! 지석오빠도...세삼 무슨 할말이 있다고...오늘 달은 작지만 운치가 좋잖아요.
그냥 이렇게 앉아있어요. "
" 나는 난, 절실해. 꼭 들어줘야돼. "
입안에 작은 돌기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무수히 퍼져 가시처럼 살아나서 내 말을, 내 맘을
찌르기 시작했다.
" 숙아! 우리 결혼하자! 난 정말 견딜 수 없어. 오늘 밤 네게서 확답을 받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
" 지석 오빠. "
숙이는 달빛아래 일어났다.
큰 키의 향나무처럼 파르르르 향기가 전해왔다.
또 그녀의 원인모를 슬픔이 무엇인지, 휘청 내게 스러져 내릴 것만 같았다.
" 내가 너를 위해 노력할 것은 없다. 뭔가 있으면 말해 봐.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
혼미스러웠다. 내가 향숙일 위해 뭘 할수 있다는 말인지.아님 종교에 귀의하겠다는 그녀의
확고한 신념앞에 어떤것도 할수없다는 절망감을 표현한것인지 분명한 것인 향숙이 보다 내
자신부터 허우적 거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 나는 지석오빨 한번도 연인으로 생각해본적 없어요."
활활 불타오르면서도 애써 차디 찬 힘든 눈길로 나를 응시하며 향숙인 선언했다.
그녀도 그랬을것이다.
목에 걸린 십자가처럼 확인하고 각인 시켜주고 싶었을것이다.
나보다도 그녀 자신에게 맹세하듯이 들렸다.
" 내 맘속엔 오직 하나님만 계세요. "
" 그럼 향숙이 네게 있어 이 강 지석은 뭐야? 단지 에스콧하는 둘러리란말야! "
" 그건, 그것은 아니예요."
거봐 절대 아니라고하잖아.
거목에 붙어 수만번의 날개 짓으로도 연풍을 불러 일으킬 수 없는 벌새가 될지라도
나는 끝까지 숙이를 놓아보낼 수 없었다.
산속의 가을 밤은 이슬로 젖어가고 거기에 바람이 보태져 이미 초 겨울로 접어있었다.
검정 슬렉스에 어깨까지 내려온 생 머리가 한바탕 작은 회오리를 만들어낸다.
숙이의 목에 맨 흰 스카프가 휘리릭 멀리 날려 검푸르스런 소나무 가지에 걸쳤다.
유난히 소나무가 많은 숲인지 오존냄새가 났다.
쭈그린 달이 어느새 원을 그리며 가까이 서있었다.
" 숙이 차라리 우리 둘이 저 치마바위 아래 떨어져 죽자! "
멀찌감치 작은 산처럼 버티고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무슨 이름이라도 있을까마는 난 궁중비화를 언뜻 떠 올리며( 왕과 왕비의 연정) 치마바위라
명하며 숙이를 와락 보듬았다.
가슴에 비수를 품은것처럼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 운명이라면 둘이 부서져 산화해버리자! "
가곡 비목의 가사처럼 국가를 위해 산화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부셔버리고 싶었다.
나도 힘껏 부서져 버리고 싶었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숙이를 향한 열정 그 자체 하나로 모든 것을 대신하고 싶었다.
버들줄기처럼 휘청거리는 숙이의 허리를 팔에 감고 나는 떨며 뛰었다.
바사락 바삭 밤이슬에 짓 이겨지는 낙엽의 냄새에 취하고 먹물을 흩뿌려놓은듯
어둠 한켠에 묻어버릴 숙이와 나의 주검에 발 걸음이 둥둥 떠간다.
왠일인지 몰라.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 뭐하고 있는지.
난 내 심장이 터질것 같아서라도 이 순간은 못 참을것 같았다.
등줄기에서 땀이 났다.
얼굴에 긁히는 생나무의 생채기가 피를 흘리는지도 모르고
들 짐승처럼 포효했다.
" 잠깐! 잠깐만요! 오빠! "
생머리 채는 땅 바닥에 끝을 끌리고, 검정 자켓은 반은 팔뚝이 빠져있고, 린넨 부라우스는
앞단추가 떨어져 나갔는지 거의 반라의 몸으로 싸리나무 흔들리듯 숙이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난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저기 우리의 운명인 양, 턱 버티고 있는 치마바위로 올라가야했다.
우릴 밀어내지마 시짚스의 신화마냥 오르고 올라 정상에서 끝을 낼거야.
그때였다.
계룡산 전체를 깨우듯 숙이의 통곡소리가 들린것은.
나는 한 팔로 숙이의 허리를 안은 것이 아니라 목과 가슴을 누르고 무슨 시레기마냥 휘감아
날뛰었던것이다.
목울대를 눌린 듯 숙이는 거의 신음으로 변했다.
" 오빠아 죽느은 것은...싫어어 "
그 많은 광기는 언제였냐는 듯, 속 빈 수수깡다리처럼 그 자리에 툭 꺽이며 나는 숙이와함께 무너져내렸다.
웅덩이였다.
물기라곤 없는 나뭇잎만 소복히 채워있었다.
부딪치면서 나는 숙이의 냄새를 맡았다.
찐한 커피냄새였다.
그건 함께 웅덩이에 떨어지면서 부서져내린 나뭇잎 냄새일뿐 숙이에게선 아무 냄새가 없었다.
옷에서도 머리에서도 얼굴에서도 냄새없는 그녀.
존재를 잃어버린 그녀.
다만 승냥이가 돼 버린 비릿한 내 땀냄새.살 냄새.
나도 울고싶었다.
콕콕 찍어내려갔다.
바람되어 뭉쳐 날리는 머리칼이며,
백설같이 차디 찬 이마며,
절벽처럼 가로막는 콧날이며,
신열로 타 버린듯한 뜨거운 볼이며,
볼에는 소금 맛나는 눈물이 났고,
입술은 나무들에 찢기어 핏물이 베었고,
나는 그렇게 불에 지진 인두같이 그녀 것에 입맞춤을 해갔다.
" 이래도 날 떠날려고! 안돼! 내 사랑! "
내 첫 사랑은 마치 안개 강에 풀어져버릴 신기루같아서 가슴안에 꼭꼭 가두고싶었다.
" 껍대기라도 좋아! 그렇잖아 알맹이보다 껍질이 더 빛나는 전복처럼 난 숙이의표피만을 갖고도 행복할 수 있어! "
그것이 참다운 행복인지 따져보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바로 그 순간 놀랍게도
흰 갈퀴가 되어 내 목을 끌어안은 것은 숙이였다.
얼음같이 차디 찬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에 뭉클하게 밀착되어왔다.
그리고 두 가슴위로 잘게 부숴진 나뭇잎 가루가 뿌려졌다.
나는 클림트의 그림에서처럼 황금드레스를 입히고 황금가루를 뿌리며 부드럽게 프러포즈하고 키스하고싶었다.
" 숙! 나는 태양이 있는곳에서, 축복받으면서 고백하고싶었어. "
" 오빠. 이 계룡산의 정기와 숨 죽여 우릴 축복해주는 산새, 산벌레, 산 야생초,또 얼마든지 많아요.
그들에게 우린 맹세해야해요. "
" 그래 우리 사랑을 맹세하자."
쓰리고 아린 상처를 서로 부딪치며 우린 결합했다.
그뒤 숙이는 출근하지않았다.
회사내에서는 이렇쿵 저렇쿵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말도 많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평소에도 지석이와 향숙이 관계, 노골적이었잖아.
그런거야. 계룡산 등산에서 일이 터진거야.
아니땐 굴뚝에 연기날리 없다고.
그나 저나 향숙이 없으니 회사가 사하라사막처럼 황량하잖아. 이건 주로 남자직원들의 반응이었다.
흥 내 그럴줄 알았지. 인물만 반반하면 뭘해.
제가 미스코리아 출신이면 다야.
회사 망신은 혼자 다 시키면서말야. 이건 주로 여자직원들의 질시어린 반응이었다.
누가 무슨 말로 짓이겨서 말하든 내 귀에는 하나도 들려오지않았다.
나는 그 길로 향숙이의 하숙집은 물로 고향집 고창에도 찾아가보고, 가 있을만한 곳은 빼놓지않고
샅샅이 찾아보았다.
하늘로 치솟은 거야, 아님 땅으로 꺼진거야.
그렇게 향숙인 영영 내 앞에 나타나지않았다.
그해 시월도 끝자락으로 마지막 가을인 것 같았다.
편지 한통이 왔다. 숙이한테서였다.
" 지석오빠.
전 아파요. 마음이 깊이와 그 이랑의 굽이가 이토록 먼 길인지를
이제야 알겠어요.
그 여백의 칸칸이 통증으로 절여만 가네요.
오빠,
어려서부터 독실한 카톨릭신자 가정에 태어난 저로서는
수녀의 길은 마땅히 제 길이었지요.
전 지금도 하나님께 간구하고있어요.
제가 행한 길이 올바른 길이었는지요.
오빠가 차라리 목숨을 끊자하며 바위로 끌고 갔을때
저는 생각했어요. 내 목숨 끊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서 심판 받는 것은
두번째였어요.
하지만 죄 많은 저 하나로 하여
오빠의 순결한 영혼이 죄악의 길로 가는 것은 막아야했어요.
오빠 우린 병에 걸렸어요.
사랑해요. 그 의미는 달콤한 초콜렛같지만
제 사랑은 쓴 익모초처럼 오빠나 제게 치유의 평화를 가져다줄거예요.
저는 수녀원에 갑니다.
찾지마세요. 어디서나 몸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
늘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성호를 긋습니다. "
결별의 편지 한통을 받은 그해 겨울은 눈 밭을 맨발로 걸어다니다싶이했다.
말초신경이 마모가 됐는지 냉감을 느끼지 못했고 물론 열감도 느끼지 못했다.
백치처럼 지냈다.
숙이 없는 세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많은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초로의 환자처럼 쏘다녔다.
그런 어느 날 숙이의 절친한 친구한테서 소식이 왔다.
숙이가 결혼했다는.
나는 그 길로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얼마 있다가 독일로 유학을 갔다.
친구한테서 향숙이 대전에 왔다했을 때 한참 생각했다.
어디서 만날까.
화려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아님 시내가 한눈에 확 들어오는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그때 날 버리고 떠나 내게 깊은 상처를 준 만큼 복수하는거야.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난 흥분하였다.
네가 날 버렸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아. 똑 부러지게 잘 살고 있어.
사실 살기에 바빠 숙이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었다.
거리에서 흔히 부딪치는 중년을 지난 내겐 지방질이 이마에 적당히 흘르고. 애써 그건 콜라겐이라고 자위하고 있지만.
가슴높이보다 배꼽높이가 더 나오고.
룸살롱에서는 흐드러지게 볼이며 립스틱을 원색으로 칠하고 나온 미즈보단
막 피어난 아이리스처럼 청초해뵈는 앳띤 여자의 미니스커트에 눈길 손길이 많이가는 속물임에 틀림없었다.
난 성공했어. 사회적으로 성공했어. 능력 많은 아내도 있어. 잘 난 자식도 있어. 내 사업도 탄탄대로야.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날 제대로 인식시켜야해.
나도 모르는 사이 가슴 한켠에 애증과 함께 숨어있는 향숙이에 대한 그리움의 나무가 자라서 너무 키가 커버려 이미 내 일부가 되어있음을 난 알지못하고 있었다.
결국 난 작고 조용한 찻집을 찾아서 하루 전체를 빌려놓았다.
간판은 목판위에 먹으로 흘겨 쓴 " 별 새 " 였다.
그 밑에 작은 붓글씨로 ' 별새는 별만 생각한다 ' 고 써있었다.
한옥으로 쭈욱 줄 지어 선 마을에 작은 문풍지 창을 내놓고. 잘못하면 슬적 지나치고 말 것같은
손톱처럼 잠깐 튀어나온 찻집.
행여 놓칠까보아 청녹색 칠판을 한귀퉁이에 매달아놓았다.
' 오늘은 날씨도 춥은데 딱신한 쌍화차 한잔 어쩔레유 '
분홍색 분필로 촌스럽게 써 놓았다.
갈수록 디지털 문화로 변화하는 도시의 한쪽에 이런 아나로그식 찻집이 있다는 것이
내심 신선했다.
그래 우린 이런곳이 어울려.
이곳에서 서 향숙과 강지석의 해후가 시작되는거야.
기다려라. 이 강지석이 삼십년전 타임머신을 타고 날을테니.
무정한 사람아.
별새 찻집 문을 열면 바닥에 어디서 주워다 깔았는지 조약돌을 오솔길처럼 졸졸히 깔아놓았다.
옹기 그릇들을 투박하니 세워놓고, 뒤로 싸리 울타리를 쳐놓았다.
확독안에 물이 찰랑했고 수련 몇이 둥 떠있다.
탁자 일곱개가 띄엄하니 놓여 있었다.
조명은 한지로 덮 씌운 갓에 은은했고 이미 겨울 저녁 으스름도 섞여있었다.
작은 찻집 ' 별 새 '에 별이 떠 있었다.
향숙이 별이 되어 앉아 있었다.
울컥 복 받쳐오는 이름모를 격함이 내 전체를 강직시켜 한걸음도 옯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럼 안돼.
여전히 예쁘잖아.
난 오기로라도 입을 약간 비틀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엊그제 헤어져 오늘도 잠깐 의미없이 만나는 사람처럼 태연해야했다.
그간의 일들이 한꺼번에 스크린처럼 다가왔다.
" 그런 고난의 끝에서 성공한 오빠의 모습이 보기좋은데요."
" 참 내 얘기만 늘어 놓았구만. 숙이 차 안시켰지. 뭘로 할까? "
막상 듣고싶었던 성공이라는 단어를 숙이에게 듣자 새삼 내 속물스러움이 들킨 것 같아.얼른 차 주문을 했다.
목판 탁자위에 놓여진 두잔의 쑥차에서 쌉사름한 향이 작은 공간을 금방 채우고 우리 둘은 그 향기에 취해갔다.
" 왜 그때 숙이가 결혼을 해서 떠났는지. 지금은 말해줄 수 있겠지? "
마냥 소녀처럼 생글거리며 웃던 얼굴에 내 질문에 순간 생기가 시들어졌다.
그리고 깊은 숨을 내쉬며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 오빠 미안해요. 그때 당시엔 말할 수가 없었어요. 사실 오늘 오빠하고 만나기로 약속한것도 이 때문이었어요.언젠가는 한번 밝혀야 될것 같아서요. 그래야 짐을 벗는 기분이었을테니까요.
난 회사를 퇴사한 후 아는 수녀님의 소개로 소록도에 봉사활동에 나갔어요. 육지를 놔두고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이주해와 일궈놓은 섬... 그 파란 잔듸에 놀라고 평화롭기만 보이는 그 아름다움이 상처받은 몸과 마음, 피 땀으로 일궈논 노동의 댓가라는 사실에 격분했지요.
그곳 생활에서 오직 하나님 한분한테만 받쳐지기로 한 몸. 계룡산에서 오빠와의 밤이 혹여 한낱 내 좁은 소견만으로 마치 오빠만을 구원해주려했다는 내 자만은 없었는지 수행차원으로 봉사하며 내 자신을 깨우치고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잔듸에 누워있는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 를 해 넘어질때까지 뇌이고 또 뇌이고 문드러진 육신을 쥐어뜯고 절망만을 끌어잡고 마치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한 사내를 만났어요.
' 자매님 내겐 왜 시인과 같은 쓸쓸함에 대한 고독과 긍정과 인내심을 풀어나갈 힘이 없을까요. 지금도 오매불망 부모님은 내가 치유되어 돌아올 날을 기다리기나 할까요! 아님 이미 돌림병이라도 걸려 떠나버린 자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잊혀져버린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 사내는 깊게 잠긴 쉰 목소리로, 먼 하늘도 아닌 땅끝 잔듸를 벌처럼 쏘아보며 발로 그렇게 마치 곪은 상처라도 된양 짓 밟는거였어요.
그곳 소록도에는, 흙은 숨어 사는지 파란 잔듸만이 사람들의 상처를 싸맨 일회용 밴드처럼 바다처럼
깔려있었어요.
그 사내와 나는 결혼했어요.
행복하냐 그런 건 묻지마세요.
사랑하냐 그런 건 묻지마세요.
그러나 한 가지 오빠한테만 그때 향숙이처럼 잘 보이고싶었어요.
그것만이 오빠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눈썹도 그렸지요.
피부색도 질 좋은 화장품으로 살려냈지요.
머리도 샴푸향이 퐁퐁나는 가발이구요.
아! 뭉겨 떨어진 손가락은 빨간 레이스 장갑으로 치장했군요.
오빠 이 정도면 향숙이 좀 봐줄만은 하겠지요."
그리고 향숙인 고개를 깊게 폭 숙인다.
" 잠깐만 향숙이!
설마 이 모습이 본 모습이 아니라는말 사실이 아니겠지? "
일월의 깊어가는 겨울 찻집 별새에서 나는 한 한센병 여인과 해후를 한것이다.
" 지석 오빠. 한가지 청이 있어요.
먼저 나가세요. 나는 다음에 나갈께요. 다리도 아파 걷지못해서 ... 보이고 싶지않아요."
" 으? 으응. 그래 내가 먼저어..."
나는 바보처럼 신음했다. 그리고 밖에 나왔다.
이게 아니잖아.
아내가 챙겨준 트렌치코트 깃을 봄같은 겨울바람에 제멋대로 날리면서 늦게 생각했다.
아 정말은 숙이를 코트에 안고 나오고싶었어.
날리자 마저 풀기없이 사그라지는 눈발만이 한 사내를 힐책이라도 하는양 내 눈에 부딪쳐 녹아내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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