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좀 길어요 읽어 보시길 작전을 잘짠 명군입니다
993년(성종 12) 겨울과 1010년(현종 원년) 11월에 고려를 침입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거란은 1018년(현종 9) 12월에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을 총책임자인 도통(都統)으로 삼아 고려를 치게 한 것이다. 이에 현종(顯宗)은 강감찬을 총지휘관인 상원수로,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았다. 현종은 이들에게 약 20만 8천 3백의 병력을 주고, 거느리고 가 거란병을 막게 했다.
고려를 침입했던 거란의 군사들이 흥화진(興化鎭)에 이르자, 강감찬은 기병 1만 2천 명을 선발하여 산중에 매복시키고 소가죽을 엮어 흥화진의 동쪽을 둘러 싼 큰 내인 삼교천(三橋川) 을 막았다. 거란병은 흥화진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는 우회하여 진격하는 쪽으로 작전을 세웠던 듯하다. 하지만 고려군은 이러한 생각을 간파하고 우회로 상에서 수공작전을 사용했다. 고려군은 상류를 막아 거란병이 강을 건너도록 유도하고 이들이 함정에 빠지자, 막았던 물을 터뜨려 거란병의 대열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병사들로 전력이 붕괴된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거란은 고려군의 전술에 패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곧바로 개경으로 향했다. 이는 삼교천 전투 이후에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의 전투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사실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아마도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면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강민첨은 소배압의 부대를 추격하여 자주의 내구산(來口山)에서 크게 격파하고, 조원(趙元)도 마탄(馬灘)에서 1만 가까이의 거란병을 살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거란이 이어지는 패배에도 물러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해 오자, 고려는 위기감을 느끼고 태조의 재궁(梓宮) 즉, 관을 지금의 삼각산으로 추정되는 부아산(負兒山) 향림사(香林寺)로 옮겨 안치하고, 개경 일대를 계엄 상태에 두었다. 강감찬은 김종현(金宗鉉)에게 병사 1만을 주어 밤낮으로 달려가 수도인 개경을 보호하게 하였으며, 동북면병마사가 3천 3백 명의 지원병을 보내왔다. 개경 방어를 위한 강화책인 셈이다.
1019년(현종 10) 정월에 소배압은 개경 백 리 거리에 위치한 신은현까지 침입을 해 왔다. 현종은 성 밖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철수하게 하고, 들판의 곡식 등을 모두 제거하는 청야작전을 펴면서 거란병을 기다렸다. 소배압은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서신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킨다고 알리는 한편, 몰래 기병 3백여 명을 보내어 황해도 강음의 금교역(金郊驛) 방면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거꾸로 밤을 틈 타 공격한 고려 군사 1백 명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개경 공격이 여의치 않게 되자, 부담을 느낀 거란은 연주(漣州)와 위주(渭州)로 방향을 바꾸었다. 강감찬은 거란병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공격하여 적병 5백 명을 살해하였다. 소배압은 고려와의 전투에서 계속 패하자, 결국 철군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2월에 거란병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귀주를 지나가야만 했다. 귀주는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 일대를 가리킨다. 귀주 일대는 4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로 되어 있고 귀주를 통과하는 도로는 좁고 험한 계곡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 적을 막기 좋은 길목이었던 것이다.
강감찬이 거느린 고려군은 귀주의 동쪽 교외에서 거란병과 대치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서로 팽팽하던 상황은 김종현이 거느린 고려의 원병이 도착하면서 고려 쪽으로 승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때마침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이 나부끼며 북쪽을 가리킨 것이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사기가 오른 고려군의 공격에 거란병들은 북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군은 거란병에 대한 총공세를 취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까지 전투가 이어지면서 거란병의 시체는 들에 널려있을 정도였으며, 고려가 생포한 거란인 포로와 얻은 말과 갑옷 그리고 투구 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병의 수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당시 거란의 참패는 『요사(遼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요사』「성종기(聖宗紀)」를 보면, “소배압 등이 고려와 더불어 다(茶)․타(陀) 두 강에서 싸웠는데, 요군이 패하여 천운(天運)․우피실(右皮室) 2군이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고 한다. 우피실군은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이 천하의 정예 병사를 선발하여 황제의 친위군으로 삼았다는 어장친군(御帳親軍) 소속이었다. 천운도 역시 막강 정예군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거란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요사』「소배압전」에도 보인다. 그 내용에 “다하․타하 두 하천을 건널 적에 적이 협공해서 활을 쏘자,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려왔던 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총책임자인 소배압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중요한 군사 물자인 갑옷과 무기 등을 버리고 도망을 쳐서 겨우 살아났을 정도로 거란의 처참한 패배였던 것이다. 반면 고려에게는 커다란 승리였다.
패전의 소식을 들은 거란 성종은 크게 노하여 전쟁의 총책임자인 소배압에게 “네가 적을 얕잡아 보고 경솔하게 적지에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낯으로 나를 대하려 하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 라는 화를 낼 정도였다. 그러니 거란이 느끼는 패배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승리에 감격한 현종은 강감찬이 전쟁에서 돌아오자 친히 영파역까지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기도 하였다. 또한 개선을 기념하여 영파역을 흥의역(興義驛)으로 개칭할 정도였다 하니, 고려의 입장에서는 매우 큰 승리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