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심경호 교수 저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중
<손님들이 방에 가득하지만 재주를 시험할 수 없었다니 한탄스럽다> 라는 제목의 <이광사가 지인이자 종형제에게 보낸 간찰>을 읽다니, 문득 추사 김정희(1786~1856) 생각이 난다.
김정희가 초의 선사에게 보낸 간찰은 뒤에 나온다. 그런데 어찌하여 문득 생각이 날까.
이광사(1705~1777)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0여 년 전에 다산연구소가 주관하는 다산기행 2박3일의 마지막 날에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들렀을 때였다.
절 경내를 돌다가 무량수전 앞에 섰을 때 안내자가 말하길, "저 무량수전 현판은 원래 이광사의 글씨였는데, 추사선생이 들렀다가 저 현판을 보고는 글씨가 시원찮다며 떼내라고 했습니다"라 했다.
그땐 추사 김정희는 아주 유명한 분이고 이광사란 이름은 무명이었기 때문에 이광사의 글씨는 추사의 글씨보다 한참 아래이므로 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광사는 전주이씨 정종의 둘째아들 덕천군의 후손인 왕족으로 소론명가에서 태어났으나 父 이진검과 伯父 이진유가 경종의 신하로서의 의리를 지키다가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옥사와 유배로 집안이 몰락하고, 이어서 1755년 나주 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종신유배형에 처해져서 함경도 부령과 진도를 거쳐 남해 신지도에서 23년째 유배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김정희는 경주김씨로서 증조할머니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이다. 또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경주김씨였다. 종척(왕의 종친과 외척)으로 막강한 권문세가였다. 김정희 가문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노론벽파의 핵심으로 정조 시대에도 계속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1806년 정순왕후가 죽자 세도가 꺾이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순조의 비 순원왕후 안동김씨가 정권을 잡았다.
실권한 경주김씨 김노경 등은 윤상도를 내세워 1830년 효명세자의 무능과 안동김씨 세도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형에 처해졌다. 김정희는 1840년에 김무영의 탄핵으로 10년 전의 이 사건에 엮여 8년 동안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다음으로 효명세자, 추존 익종의 비 친정인 풍양조씨의 세도정치 시대가 9년 계속 되었다. 이어서 헌종의 비 효헌왕후의 친정인 안동김씨가 고종 초까지 권력을 누렸다.
김정희의 귀양살이는 외척 간 권력투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고려의리, 단종의리, 광해의리, 소현의리, 경종의리, 장조의리, 익조의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광사는 한미한 왕족이지만 친가, 외가, 처가 모두 소론이었다. 경종의리를 지키디가 폐족이 되었다.
김정희는 노론벽파인데도 세도정치에서 패해서 귀양살이를 했다.
둘 다 현실 정치에서 패한 문중의 인물들로서 모진 귀양살이를 했다. 그런데 왜 김정희는 이광사의 글씨를 하대했을까.
대둔사 탐방 안내인이 다하지 못한 말을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8년 뒤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가다가 다시 대둔사에 들렀다. 춥고 서글픈 귀양살이 속에서 인생관이 바뀐 김정희는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찾아 걸도록 했다고 한다.
백설당 지붕 밑에는 귀양가기 전에 쓴 김정희 글씨로 무량수전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두 글씨 사진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신지도에서 귀양 살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지는 획에 구불구불한 원교 특유의 필법이 잘 드러나 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획이 기름지고 구성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추사가 왜 원교의 현판을 떼라고 했을까?
첫째로는 원교의 글씨는 추사의 필법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원교의 글씨는 구불구불하다. 하지만 골기가 들어있다. 즉 곡선미다. 그러나 추사체는 직선미, 단순미다.
원교의 학문은 정제두 앙명학을 잇는 강화학파이다. 양명학은 心을 중시하는 실행실천의 현실학문 지향이다.
추사의 학문은 송시열의 主理論을 착실히 따르는 노론답게 理를 중시하는 관념논리의 이념 지향이다.
둘째로는 소론과 노론이라는 정치 기반의 차이이다. 원교는 경종의리를 지키는 인맥이고, 추사는 영조의리를 지키는 종척 신분이다. 추사가 노론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졌지만 주류세력의 일부였다. 귀양 가는 신세일망정 영조를 반대한 소론명가에 대한 적개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셋째로는 다산과 연이 있은 초의선사와 친분이 있는 바, 초의가 주석하고 있는 대둔사에 대한 일종의 영역의식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떼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날에 이광사보다 김정희가 더 유명하다. 이광사의 글씨도 귀한 대접을 받지만 김정희의 글씨는 '추사체'라는 고유명사로 대접 받고 있으며, <歲寒圖>는 국보가 되었다.
그런데 추사 김정희가 좀 오만스럽지 않았는가?
이광사는 자기보다 81년 전 사람이다. 양반 신분으로나 가문으로나 학문으로나 글씨로나 두 세대 전 선배다. 그런 선배의 글씨를 일언지하에 떼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8년 후에 다시 달도록 했으니 잘못이 없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추사가 떼라고 말 한 때의 나이가 55세다. 현기방장한 청장년 시절이 아니라 원숙기도 한참 지나 노년기에 들었다. 그런 나이의 사람이 80년 전 선배의 글씨를 떼라 붙여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공이 덜 익었기 때운이다.
세한도도 그렇다. 온 조선의 미학가를 넘어 일본과 중국 동양삼국의 내노라하는 시인묵객들과 학자들이 찬사를 보낸다. 그리하여 드디어 국보반열에 올랐다.
얼마 전에도 세한도 속의 송백은 소나무도 있지만 柏, 잣나무가 아니라 다른 나무라는 교수의 논문이 발표될 정도로 현대의 문자와 지식이 가득찼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관심이 많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세한도가 매운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무어 그렇게 절대적 의미를 부여할 정도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나무는 굽었고 집은 창고인지 헛간인지 의아할 뿐 지조는 높으나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으로서의 느낌이 미약하다. 그보다는 수묵화 <梅窓書屋>이 더 선비의 거처 느낌이 진하다.
8년 절해고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가 추사 김정희의 내공을 늦게나마 원숙시켜준 것은 다행이다. 사람은 늘 부족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40세쯤 되면 슬슬 주관이 세워지고, 50세쯤 되면 자기세계가 본격적으로 굳어지기 시작해서 60세쯤 되면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신하며 제자들과 후학들을 많이 기르기에 집중한다. 70세쯤 되면 도통을 해서 도사라고 자부한다. 80세쯤 되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내 생각은 완전체라고 만족한다.
그래도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좀 귀한 편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유명인에게 의지하여 자기를 현시한다. 생존한 유명인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배움을 청하면서 제자가 된다. 그리고는 그에 의지하여 자기도 유명의 반열에 올랐다고 만족하며 으스댄다.
사숙이니 존경이니 탐구니 헌양이니 하면서 역사가 된 유명인에게 의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하여 누구누구사상 연구회니 누구추모회니 누구문학회니 하면서 단체를 만들어 자기 과시의 영역을 넓힌다. 그 속을 들춰보면, 순수한 뜻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감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 폐해를 우리 역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퇴계와 율곡은 얼마나 훌륭한 선현들인가. 그런데 그들의 제자들과 문도들은 어떠했는가. 스승들이 돌아가시자 말자 겉으로는 학문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벼슬자리 쟁탈전을 3백 년 동안 치열하게 벌렸지 아니한가.
오늘 날에도 그런 현상은 여전하다.
이광사를 읽다가 생각이 번졌다. 네이버 검색을 이리저리 해보니 후손들이 보였다.
이광사의 아들이 이긍익이다. 《연려실기술》을 민족사에 올렸다. 이 책이 옳은 국보가 아니겠는가, 이광사의 종형제의 후손이 강화학파 양명학자 이건창(1852~1898)이다. 민족사에 할만큼 한 가문이다.
김정희는 적실 소생이 없고 기생 출생 서자가 하나 있다. 그래서 12촌의 아들을 양자했다.
이광사, 경종의리 충신 가문.
'경종의리'라 하면 내 가슴이 싱큼하다. 충주 목항에 살던 8대조께서 궁벽한 산촌 봉화 소천으로 은둔하신 까닭은 이인좌의 난 때문이다. 패했으니 '亂'이지, 승했으면 '反正'이 아닌가.